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알마 인코그니타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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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라는, 참으로 시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대만 작가 우밍이가 썼습니다. 우리나라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대만에선 꽤 유명한 작가로 2018년엔 '자전거 도둑'으로 맨부머상 인터내셔널 후보에도 올랐다고 합니다. '중화상창'이라는, 30년간 타이뻬이의 랜드마크로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상가를 중심으로 10개의 단편을 옴니버스로 엮은 소설입니다. 단편들 모두 중화상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주인공인데, 그들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육교와 거기서 마술을 벌이던 마술사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이죠. 회상의 색채가 많이 가미되었기에, 읽다보면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느낌이 많이 납니다. 아니, 정말로 '대만판 응답하라 1988'로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드라마만큼 밝지도, 사람들 사이의 정겨움은 없지만 이제 사라져 버린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이 이 소설엔 어린 시절 골목에 가득 퍼지던 김치 찌개나 된장 찌개 내음만큼이나 흠뻑 배여들어 있으니까요. 이야기는 결코 쉽지 않고, 마술사가 나오는만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듭니다만 그래도 자신합니다. 한 번 잡게 되면 몰입해 읽을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이야기란 것을.





 소설은 예전에 내 세계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이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 그것이 마음에 남긴 여파 같은 것을 뒤쫓고 있습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중화상창'이 소설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나타내고 있죠. 등장인물들에게 과거란,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저 너머의 땅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는 그 곳으로 갈 수 없는데 해까지 저물고 있어 이제 볼 수도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 곳은 한 때 자기 삶의 중심을 차지했던 곳. 흐르는 시간처럼 쉽게 망각 속에 던져줄 수 없습니다. 그건 곧 거기에 속했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러므로 그들을 거기에 가 닿고자 합니다. 마치 중화상창의 상가 양쪽을 이어주던 육교처럼. 건널 수 없는 곳을 건너게 해 준 그 육교처럼 말이죠. 소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육교엔 바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과거로의 회귀를 마술처럼 가능케 하는 것. 그래서 마술사가 모든 단편마다 등장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기억이란 때로 마술 같죠. 늘 잊고 살았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언제 잊고 있었냐는 듯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 때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게 하니까요. 마술이 일상을 장악하는 현실의 중력을 없애버리듯이, 기억은 망각에 붙들린 과거를 자유롭게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묻습니다. 오늘의 내가 고통스러운 건, 과거의 나에게서 무엇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하고.


 그런 질문 또는 파문을 조용히 만드는 소설입니다. 그것도 조용히. 마치 천에 스며드는 염료와 같은 속도로.


 '새'의 단편엔 1979년이란 시간이 명시되는데, 그래서 이 소설을 대만의 역사와 연계시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9년은 대만이 중국 때문에 미국과의 수교가 끊어진 때이거든요. 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꺾이고 새장에 갇히는 시기인 것이죠. 소설 역시 새를 사랑해 계속 키웠으나 그 어떤 새도 오래 기를 수 없었던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단편마다 다른 마술을 보여주는 마술사는 그 단편에선 죽은 새를 살리는 마술을 보여주는데, 마술이 성공하기 위해선 누가 새에게 절대 손을 내밀어선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죠. 단편의 주인공도 마술사를 믿어 죽은 새를 되살리는 마술을 하는데, 오빠가 결정적인 순간 손을 내밀어 실패하고 맙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손이 강조되는가? 그건 수교를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오죠. 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서로 손을 내밀어 하는 악수니까요.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내민 손이 그대로 새의 죽음과 연결되는 것에서 수교 단절말고 달리 뭘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대만 역사를 알고 있으면 여기에 실린 단편들이 하나의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돌사자와 같은 소재도, 자살이나 방화 혹은 죽음으로 이르는 연애 같은 이야기도 과거 대만 역사가 남긴 것을 슬쩍 암시하거나 드러내고 있거든요. 일일이 다 밝히면 글도 너무 길어지고 직접 소설을 읽을 때 얻게 되는 재미가 반감되기에 '새'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유감이네요. 그러니까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비록 우리가 대만인도 아니고 중화상창에 대한 아무런 추억이 없더라도 이 소설을 재밌에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랬습니다. 꽤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밍이란 이름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둘만큼.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네요. 소설의 주인공이 중화상창의 마술사에게서 잘 떠나지 못했듯, 저 역시 한동안 우밍이가 만나게 해 준 세계의 여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 왠지 이 노래가 많이 생각나더군요. 가사에 흐르는 정조가 소설과 비슷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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