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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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도록 술술 읽힌다. 이게 참 대단해 보이는 것이 담고 있는 게 예수와 초대 교회가 중심이 된 '신약'이라고 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따분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소재인데다 분량도 무려 700 페이지에 가까운데도 그렇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이 둘은 아무런 장애가 안된다. 그저 비탈길을 빠르게 굴러가는 둥근 돌마냥 이 뒤엔 또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라는 동력에 힘입어 끝까지 내처 읽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겐 '콧수염'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2014년 발표한 '왕국'이란 소설이다.


 '왕국'이란 제목에서부터 이 소설이 기독교에 대한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주로 바울과 루카를 다룬다. 그것도 픽션의 형식이 아니라 르포 형식에 가깝게. 자전적인 경험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인용되어 있어 어떻게 보며 에세이로도, 또 어떻게 보면 인문서로도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한 마디로 카멜레온. 그만큼 다양한 색채로 자유분방하게 진행되기에 몰입력이 강한 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본편이 되는 4부와 하나의 프롤로그 그리고 에필로그로 이뤄져 있다. 프롤로그에선 이 소설이 무엇을 주제로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바로 '믿음'이란 걸. 1부인 '위기'에선 자신이 어떻게 '믿음'이란 주제에 천착하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대상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불현듯 자신에게 찾아온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하는 슬럼프와 그것을 계기로 열심을 다하게 된 신앙 생활과 엮어 말해준다. 2부는 제목처럼 '바오로(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다. 루카의 '사도행전'을 바탕으로 그가 어떤 심정에서 바울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는지 말하고 있다. 이왕 '루카'가 나온김에 나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려 한다.




 신약에는 유명한 네 개의 복음이 있다. 모두 예수의 행적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 중 '누가복음'은 가장 이채로운 빛을 지닌다. 누가(소설에선 루카)는 생각해 보면 참 특이한 복음 작가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복음 작가들과 달리 예수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거기다 직업이 의사로 지식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누가 복음은 가장 유려하고 세련된 그리스 문체로 씌어졌다. 그는 다른 작가들처럼 예수의 그 어떤 이적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말씀도 귀로 들은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예수를 풍문과 기록으로만 접했다. 오늘날 우리들과 똑같이. 그 때만 해도 예수의 존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변방에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오늘날로 치면 뭐랄까 '구루' 같은 존재였다. 


루카는 그런 존재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표현대로 백인 엘리트가 어쩌다 동방에서 왔다는 불교를 접한 것과 같았다. 요즘 백인들이 불교에 대해 가지는 흥미 그대로 그 역시 예수라는 존재에게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현장으로 가 살펴 볼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누가복음'이었다. 이 소설이 천착하고자 하는 '믿음'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루카에겐 믿음의 근거라는 게 없었다. 그건 외부에서 주어진 게 아니었다. 오로지 스스로 구현한 것이었다. 그가 믿기로 결정했기에 형성된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결실이 지금은 네 복음서 중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세상의 다른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믿음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건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희망 혹은 절망인가?


 700 페이지를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 단 하나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실체를 지향하는 마음의 움직임인가? 아니면 외부의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전히 혼자만의 결단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확신과 의심 사이를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게 숙명으로 주어진, 오히려 인간이 가진 내적 한계를 드러낼 뿐인 걸까? '왕국'은 믿음이 가진 이러한 다차원적인 면모를 엠마뉘엘 카레르 자신이 직접 화자가 되어 하나하나 풀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자신과 가장 닮은 '루카'를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사용하면서...


 이렇게 보자면 1부에 가득 재현되고 있는 작가 자신의 경험담은 결코 본편과 유리된 게 아니다. 그 경험 모두가 실은 믿음이 가진 이러저러한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오직 '필립 K 딕'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채용한 자식의 보모 이야기가 그렇다. 그녀는 보모가 되자마자 면접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작가를 당황케 만든다. 작가는 그녀에 대한 것을 그녀의 전 고용인인 미국 외교부 직원에 대해 알아보기까지 하면서 고용했는데, 보모는 완벽하다는 그들의 말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보는 것(이적)과 들은 것(복음)과 너무 다른 실체로 집약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그대로 카레르가 신앙에 대해 가지는 불안과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이 보모에게 집약된 의혹은 그대로 소설 후반 루카의 복음(4부)으로 이어진다.


 나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한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왔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한때 그걸 믿었다는 사실이 날 궁금하게 만들고, 날 매혹시키고, 날 불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내가 더 이상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이들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두둔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쓴다.(p. 389)


 최근 나는 카레르의 이 말을 떠올리게 만든 두 개의 뉴스를 공교롭게도 같은 날 들었다. 하나는 세간에 '무안단물'로 유명한 이단인 '만민중앙교회'의 담임 목사가 여러 여신도를 성추행 하고 돈으로 입막음 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인 비무장 민간인을 저격하고 환호하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과연 믿음이란 게 무엇인가 되묻게 만들었다. 하나는 믿음(목사가 아니라 신도들을 말한다.)이 범죄를 방관하며 조장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맹신 또는 광신 그리고 확신만큼 위험한 것도 또 없다는 것을 이 두 뉴스는 잘 보여준다. 믿음은 결코 이성의 제어에서 놓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믿음이란 확신을 지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식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없다. 확신은 온전히 인식하고 판단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의심 없는 상황이 살아가는 데는 편안함을 주겠지만 역사나 주위에서 흔히 보듯 결국은 스스로 어리석게 만드는 길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카레르는 소설에서 예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상식을 전복시켰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가 들었다는 비유가 그러하다. 서로 다른 노동 시간을 한 일꾼들에게 동일한 달란트를 주는 것이나 '돌아온 탕자'(도덕적으로 살아온 99명 보다 비도덕적으로 살아온 1명의 영혼은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의 이야기는 예수의 왕국이 세상의 꼴지가 거기선 1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던 합리와 가치와 전혀 다르게 운영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전복이 믿음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왕국'의 후반부는 그것에 대해 짚고 있는 것 같다. 무턱대고 믿는 게 믿음이 아니라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 속에서 이성으로 열심히 헤아리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믿음. 그러면서도 그렇게 나온 믿음을 오로지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기고 또 다른 길이 열리면 또 언제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리로 훌쩍 나아갈 수 있는 믿음. '왕국' 전체에 오롯이 새겨진 카레르 자신의 지적 탐구는 그러한 믿음의 모습을 물씬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은 레닌과 똑같이 말로만 존재했던 것을 세계에 실재로 구현한 자였다. 왜 지젝이 레닌을, 알렝 바디우가 바울에 천착하는지 알 듯 하다. 그들의 행로는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념의 구현이 그들의 말만큼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바울과 레닌이 꿈꾸었던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바울과 레닌의 시대에서 그들 역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믿었던 세계를 만들었다. 이는 루카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믿음은 때로 기적을 만든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는 늘 물음의 상태로 남는다. 바울이 자신의 세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를 믿었던 신자들이 로마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카레르도 소설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신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없는 이들과 아낌없이 나누었고 존중과 배려가 삶의 기본 태도로 배여 있었다.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삶이 결국은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로마를 생각한다면 이건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을 믿음이 만든 것이다. 삶이 뒷받침된 믿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의 믿음은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일 때가 많다. 돈 혹은 권력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믿음.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내 찌푸린 눈쌀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때로 범죄와 학살을 태연히 저지르는 괴물까지 양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신이 인류에게 점점 장애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엠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은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떠한가를 매섭게 묻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논란에 집중하기 보다는 배후에 일관되게 흐르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작품이 가진 온전한 의미가 드러나며 당신의 대답 또한 찾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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