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 명작동화 속에 숨어 있는 반전의 세계사
박신영 지음 / 바틀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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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돌아다닐까.’

제목만 봤을 땐 동화책 속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유의 책은 여러 번 봤기에 그다지 특별할 게 없지 않을까 싶었다.

내 착각이었다.

이 책은 동화책의 진실이 아닌,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말해줌으로써

세계의 역사를 가르쳐줬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세계사에 굉장히 취약하다.

오스만 터키가 어떤 제국이었는지, 십자군 전쟁은 왜 일어났는지 등등

굵직한 사건을 알지 못하며,

블러드 메리와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떤 관계인지,

루터와 칼뱅의 차이점은 도대체 무엇인지 등등의 소소한 이야기는 더 알지 못했다.

더 심각한 것은 내 무지를 알면서도 배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인데,

무지의 심연이 너무 깊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화책과 함께 알아보는 역사 이야기인 이 책 덕분에

난 전 세계, 특히 유럽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을 어느 정도 알게 됐다.

이제 난 <왕자와 거지>가 어떤 의미인지, <삼총사>가 왜 셋이 아니라 넷인지,

로미오네 가문과 줄리엣 가문이 왜 그리 싸웠는지 안다.

이 책에서 가장 고마웠던 것은 제목에 나온, 백마 탄 왕자가 왜 돌아다녔는지를

알게 됐다는 점이었다.

사실 난 잠자는 백설공주를 지나가던 왕자가 발견해 결혼했다는 얘기를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그 시대, 그러니까 17세기 독일어권 지역에는 300여개나 되는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그 나라마다 왕자들이 몇 명씩 있었는데, 맨 맏이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바람에

둘째 왕자부터는 자기 살길을 찾기 위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살 길은 이웃나라 왕의 외동딸을 만나 결혼하는 것,

그래서 그들은 미모와 나이는 전혀 따지지 않고 돈이 된다 싶으면 무조건 청혼을 했다!

그 많은 방랑 왕자들은....일거리와 부자 처갓집을 찾고 있는 떠돌이들이었다.” (19)

그래서 그들은 잠자는 공주를 봤을 때, 게다가 그때는 성추행의 개념도 없었을 때니,

대뜸 키스부터 했던 거였다!

 

이 책은 2013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이다.

6년 전에 이렇게 훌륭한 책이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서문을 읽어보니 꼭 그런 건 아니다.

작가는 그때 초보 작가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역사에 관한 설명을 더 친절히 해줬고,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까지 삽입했다.

그 지도는, 물론 수시로 구글 지도도 찾아보긴 했지만, 세계사에 문외한인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됐다.

이런 탄식이 나온다. 중고교 때 이 책으로 세계사를 배웠다면,

지금의 내가 우리나라 역사밖에 모르는 폐쇄적인 인간이 되지 않았을 텐데~!

참고로 박신영 작가는 이 책 말고도 <제가 왜 참아야 하죠?> <삐딱해도 괜찮아> 등의

명저를 낸 바 있는데

<왜 참아야>는 어떤 분이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다라고 써놨다.

박신영 작가님, 제가 찜했습니다. 그간 내신 책들 다 읽어버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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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9-08-1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정말 좋다 싶어 사서 소장하려고 검색했더니 절판이라 정말 섭섭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개정판이 나와 반갑네요.

마태우스 2019-08-11 00:44   좋아요 0 | URL
네 개정판이 훠얼씬 더 좋을 겁니다. 개정판 덕분에 저도 보게 됐으니, 내줘서 고맙네요.
 
천년의 질문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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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조정래 선생의 <풀꽃도 꽃이다>를 읽었다.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비판하는 책인데,
책을 쓴 목적이 뚜렷하다 보니 주인공들의 특징이 너무 전형적인 게 아쉬웠다.
좋은 사람은 늘 좋고, 나쁜 사람은 늘 나쁘다.
그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책장이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선생이 새로 펴낸 <천년의 질문>은 많이 달랐다.
우리나라 정치사회를 비판하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등장인물들이 전형적인 것도 같지만,
주말 내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을만큼 재미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지를 잠시 생각해봤다.


1) 교육현장 얘기보다 정치권과 기업, 법조계가 얽히는 얘기가 더 흥미진진하다.
2) 전형성을 가진 인물이 재미없는 이유는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에이, 이런 사람이 어딨어, 하는 생각이 소설을 비현실적으로 만드는데,
<천년>에서 늘 옳은 쪽으로 나오는 장기자는 시사인의 주진우 기자를 모델로 삼고 있다.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백건이 넘는 고소고발이 걸려 있는
이 시대의 참기자를 떠올리니,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전혀 안든다.

3) 주인공 중 재벌 사위로 나오는 김전무가 아주 매력이 있다.
초반부에 하는 걸 보니 이대로 끝나겠구나 싶었는데
그는 그냥 사위가 아니라 능력있는 사위였고, 결국 다시 성공가도로 접어든다.
물론 그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은 아닐지라도,
이상하게 그가 밉지 않았고, 심지어 응원하게 됐다.
사랑에도 성공했으면 했는데 조작가님이 결말을 지어주지 않아 조금 섭섭했다.


4) 김전무 말고도 썸을 타는 또 다른 커플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젊은 친구들이 썸을 타면, 그냥 흐뭇해진다.
다만 너무 착한 사람끼리 커플이 되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의문이 든다.
장기자의 부인이 그런 것처럼 적어도 한명은 적당히 세속적이어야
그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아닐는지?
5) 이 책에선 장기자가 남성적 매력이 넘치고,
대시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처럼 써놨다.
실제로도 주진우 기자는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은 분이다.
동의 안할 사람도 있겠지만,
주진우 기자는 얼굴만 놓고 본다면 나랑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주기자가 매력있는 인물이 된 건
나와 그분이 걸어온, 삶의 궤적의 차이일 것이다.
정의롭게 산 것만으로도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유머와 여유가 있고
그게 그를 더 매력있게 만든다.

 

 

5)번에 이어서 첨언을 하자면, 주진우처럼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나쁜 놈은 한두번만 좋은 일을 하면 찬사를 받지만,
늘 강직하게 살아온 사람은 한번이라도 유혹에 굴복해 버리면
그간의 아름다운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니까.
적당히 세속적으로 사는 나지만,
주진우처럼 사는 게 어렵다는 걸 잘 알기에,
그냥 주진우를 존경하면서 살아가련다.
우리의 현실을 비판하며 대안까지 제시해준 대작가 조정래 선생께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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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9-06-1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닮으셨습니다..^^;;

마태우스 2019-06-19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쿠키님 그죠 객관적평가 감사합니다 ㅅㅅ

자몽 2019-06-19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두분다 좋아하지만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는데..ㅋㅋㅋ

카스피 2019-06-1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진을 보니 두분 참 많이 닮으셨네요^^

마태우스 2019-06-19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몽님 언젠가 구글이미지 검색하다 주기자님보구 깜놀했어요 전줄알았다니깐요 근데 주기자님팬들은 그말에 질색하십디다 ㅋㅋ

마태우스 2019-06-1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스피님 올만이어요ㅅㅅ 닮은사람이 조은사람이라 좋습니다

stella.K 2019-06-19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주진우 기자 좋아하다가 강준만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읽고
이미지가 좀 안 좋아졌어요.
미투까지는 아니지만 어쩌자고 그런 실수를 했을까 좀 아쉽더라구요.ㅠ

마태우스 2019-06-20 21:11   좋아요 0 | URL
오옷 작가님이닷 여기서 뵈니까 반갑네요. 근데 그 책 많이 안좋은가요. 전 역사 얘기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stella.K 2019-06-21 14:59   좋아요 0 | URL
아뇨. 오히려 넘 좋아서 문제죠.ㅎㅎ
넘 좋아서 주진우 같은 사람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솔직히 좀 실수를 하긴 했더군요.
근데 그 책 좋은 책인데 왜 안 읽으셨어요?^^

마태우스 2019-06-25 01:43   좋아요 0 | URL
앗 스텔라케이님 제가 말귀를 잘못 알아들었습니다. 글구 저 오빠 허락 페미니즘 읽었습니다...

sweetmagic 2019-06-20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닮으셨네요 !

마태우스 2019-06-20 21:11   좋아요 0 | URL
와 이게 얼마만인가요. 신혼생활은 즐거우신지요....라고 물으려 했는데 세월이 차암 많이 지났네요. 닉넴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울컥. 반가워요
 
고 온 Go On 1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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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픽처> 이후 더글라스 케네디 (이하 더글라스)는 내가 아는 작가 중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풀어가는 작가였다.
하지만 내가 익숙해져서 그런지 그 다음 작품부터는 밤을 새면서까지 읽게 되진 않았고,
거기서 더 시간이 지나자 새 책이 나와도 안사게 됐다.
그의 신간 <고 온>을 읽은 것은 더글라스의 팬인 아내가 책을 샀기 때문,
요즘 어려운 책만 읽고 있어서 머리가 무거웠고,
마침 또 멀리 갈 일이 있기도 해서 가방에 <고 온> 1, 2를 챙겨넣었다.

‘이게 얼마만의 더글라스 케네디냐.’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만난 기분으로 책을 펼쳤지만,
진도는 쉽사리 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앨리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글라스의 소설은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데,
그 여성들의 말투가 좀 피곤한 스타일이다.
별것도 아닌 걸 물고 늘어진다고나 할까?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이 사귀는 밥이란 친구가 풋볼선수라는 게 마땅치 않아 했는데
결국 밥은 풋볼을 그만두기로 한다.
문제는 그 결정을 풋볼팀에게 먼저 얘기했다는 점이다.
앨리스는 이게 못내 서운하다.

앨: 왜 어제 얘기하지 않고 오늘까지 기다렸어?
밥: 적당한 때 얘기하려고.
앨: 내가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 같았어?
밥: 왜 그렇게 말해?
앨: 매우 중요한 결정인데 하루 반이 지나서야 나에게 얘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모두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셈이잖아.
밥:...풋볼은 내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잖아. 익숙한 세계와 결별하자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서글퍼졌어.
앨: 나 때문에 풋볼을 그만두었다는 뜻이야? (184쪽)

풋볼을 그만둔 것은 밥이 그만큼 앨리스를 사랑한다는 뜻,
그런데 앨리스는 자기보다 풋볼팀에게 먼저 그 사실을 통보한 게 기분이 나빠 밥을 잡다시피 한다.
이때뿐 아니라 앨리스는 전반적으로 이런 식의 날선 태도를 보이는데,
이거야 뭐 캐릭터라고 넘어가자.

더 큰 문제는 앨리스에게 최소한의 도덕성마저 결여됐다는 점이다.
고교 시절 앨리스는 아놀드란 친구와 깊이 사귄다.
변호사를 꿈꾸는 아놀드는 매우 똑똑한 친구로, 앨리스가 사건에 휘말렸을 때 큰 도움을 준다.
둘이 다른 대학에 진학했을 때, 난 앨리스가 아놀드 때문에 다른 남자를 안사귈 줄 알았다.
그러기는커녕 빛의 속도로 밥과 사귀고, 곧 동거를 시작한다.
아웃 어브 마인드 어쩌고 하는 격언으로 이 행위를 이해한다 쳐도,
그 다음 하는 짓들은 정말 가관이다.
자신을 가르치는 행콕 교수에게 연정을 품더니,
소설을 쓰는 던컨이란 친구와 술을 같이 마신다.
밥이 모임이 끝나자마자 합류하기로 했으니 이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다음 장면.
[던컨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았고, 나는 뿌리치거나 빼지 않았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던컨이 내 입술에 키스를 했을 때에도 밀쳐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더 적극적으로 키스했다. 이러면 안된다는 죄책감이 오히려 더욱 어두운 욕망을 부채질했다. (237쪽)]
일말의 양심이 있기에 더 진도를 나가려는 던컨을 앨리스가 만류한다.
던컨은 물러서지 않는다.
[던컨: 앨리스 나 네가 좋아. 넌 어때? 우리 감정에 솔직해지자.
앨: 난 감정에 충실해야 할 사람이 있어.
던컨: 충실? 지금은 1973년이고, 그런 의무 따윈 없어.
...잠시 뒤 나는 또 던컨을 껴안고 키스했다. 던컨이 더욱 격렬하게 반응했고, 나도 더 흥분을 느꼈다. 던컨의 손이...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몸을 더 밀착시켰다.(237-238쪽)]

그러던 중 밥이 인생의 위기에 처한다.
밥의 행위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둘은 연인 아닌가.
위로해 줄 수도 있을텐데 앨리스는 정말 냉정했고, 결국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도 끝이야.”
앨리스가 밥에게 요구하는 그 엄격한 도덕성을 자신에게 한번 되돌렸다면 어땠을까?
밥이 없어지니 이젠 거리낄 게 없어진 앨리스,
그녀는 그 뒤 마음껏 썸을 타는데, 좀 너무하다 싶었고, 짜증도 났다.

물론 그 뒤 큰 사건이 닥치는지라 계속 책을 읽게 됐지만,
그 큰 사건도 더글라스의 책을 몇 권만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줄거리를 재미있게 쓰는 능력, 존경한다.
하지만 난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에게 동화되려고 노력하는지라
주인공이 최소한의 윤리는 지키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 책이 내 마지막 더글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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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6-1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 순간부터 더글라스 작품에 손이 가지 않더라구요.
너무 뻔한 느낌이랄까
매력적이지 않다고 해야할까
암튼 그렇더라구요.

마태우스 2019-06-11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어요 그간안녕하셨어요 노통브 알랭드보통 베르베르 다들 확조아하다 절연한 작가들이죠 유일하게 오래가는 작가는 미미여사뿐

미운오리새끼 2019-06-13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뵙게 될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면 이 북플에서 멀어져 있지 말걸...하는 후회를 잠시 해본 하루였습니다. 오늘 낮에 해운대 어느 학교 계단에서 짧은 인사라도 드릴 수 있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마태우스님 덕에 다시 리뷰를 공유하는 용기를 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3년이 지났네요. 물 속에서 혼자 버티고 있었던 시간들이...그냥 마태우스님의 등장만으로도 잠시 소통의 욕구가 생긴 하루였습니다. 감사해요.

마태우스 2019-06-19 11:56   좋아요 0 | URL
알라딘 어느 분이신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물속에서 혼자 버티고 계셨군요. 물속은 너무 차갑습니다. 그래도 부대끼는 세상이 더 좋지요. 앞으론 여기 계십시오.
 

어제 강아지 산책을 다녀오다 기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날 또 산책을 갈 텐데, 그러자면 기름을 넣어 두는 게 편했다.

저녁거리를 사러 나간 김에 근처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었다.

요즘 대세가 다 그렇듯, 주유는 셀프였다.

신용카드로 계산을 한 뒤 카드와 영수증을 챙겼다.


오늘 아침, 산책을 가려다보니 주유 투입구가 열려 있다.

게다가 주유구 캡-뚜껑이라고 해야 하나-도 사라진 채였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누군가가 기름을 훔쳐가는 일은 없을 터,

필경 내가 주유 투입구를 열어놓은 채로 주유소를 떠났고

주유소에서든 집에 오는 길에서든 뚜껑이 떨어졌을 터였다.

속상했다.

오늘은 서비스센터가 놀 테니 내일 가서 뚜껑을 사야 할텐데,

내일 스케줄이 빡빡해 그럴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물론 뚜껑이 없다고 해서 기름이 새거나 그러진 않겠지만,

괜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해보면 그런 식으로 주유구를 닫지 않고 주유소를 나온 게 처음은 아니다.

한번은 기적적으로 뚜껑이 주유구에 매달려 있었던 적도 있고,

이건 아에 믿기지 않는 얘기인데, 차 지붕에 뚜껑을 놔뒀는데

집까지 오는 동안 그게 떨어지지 않았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된다).

그런 행운이 겹치면서 꽤 오랫동안 주유구 뚜껑을 지켜왔는데

드디어 잃어버린 것이다.

요즘 나오는 차는 뚜껑에 끈이 달려 분실할 우려가 없지만,

내 차는 구식이라 끈이 없기에 덜컥 잃어버린 것이다.

분실 자체도 속상하지만 차가 오래된 거라 부품이 있긴 할지 걱정도 됐다.


한숨을 늘어지게 쉬면서 차를 모는데

아내가 도로변에 있는 서비스센터가 문을 연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 전화를 걸었고, 부품 구매는 다른 곳, 그래도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그 부품점은 오늘도 영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점심을 먹자마자 그곳으로 출발했다.

주차장엔 차가 꽉 차 있었고, 나처럼 부품을 구하는 사람이 꽤 많이 대기하고 있었다.

"2000년식 EF소나타인데요 주유구 뚜껑 좀 사려고요."

가격은, 놀랍게도 3600원밖에 안했다.

혹시 또 잃어버릴지 몰라서 넉넉하게 두개를 샀다.

집으로 오는 동안, 난 너무 행복했다.

따지고 보면 부품을 잃어버려 다시 산것이니 내게 손해인 셈인데

그게 어쩌면 그렇게 큰 기쁨을 주는지,

사람이란 참 신기한 존재구나 싶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준 아내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 것은 물론이다.

아내는 늘 그렇듯이 "내가 뭘 했다고" "당연히 해야지" 같은 말 대신

"그러니까 앞으로 잘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행복에 겹다보니 그 으름장도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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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9-05-06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뻥튀기를 살 때 그렇게 행복하더라구요. 아파트 장터에서 가끔 날 좋은 날 파는데 커다란 한 봉지가 3천원이거든요. 부피는 커다란데 무게는 가뿐하니 품에 안고 오면 행복을 한아름 품고 오는 기분이 든답니다.~^^*

마태우스 2019-05-06 20:58   좋아요 1 | URL
나비종님 안녕하세요 뻥튀기 가격이 주유구 캡과 가격이 비슷하군요^^ 뻥튀기가 님한테 행복을 준다니, 뻥튀기는 좋은 녀석이 확실합니다.

moonnight 2019-05-06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차 오래 타셨네요. 저는 2010년식이라 나름 오래 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졌어용^^;;;저도 마태우스님 만큼 오래 타야겠다 결심해 봅니다. (제 차 주유캡은 사랑스럽게도 연결되어 있어요 ㅎㅎ) 아내분 말씀 앞으로도 잘 들으셔야겠어요. 행운의 아이콘^^

마태우스 2019-05-06 20:59   좋아요 0 | URL
달밤님 안녕하세요 사실 연식은 좀 오래됐지만 킬로수는 15만밖에 안됩니다. 어머니가 쓰시던 거라 주로 주차장에서 세월을 보냈답니다. 이제 제 주유캡도 연결된 걸로 바뀌었으니, 셀프주유도 문제없습니다!! 아내한테 잘 하겠습니다. 꾸벅
 

 

 

 

 

 

 

 

 

 

 

 

 

 

 

엄마가 오늘 입원을 하신다.

화요일 수술을 할 예정인데, 속상하게도 병명은 췌장암이다.

췌장암이란 건 알지만, 도대체 몇 기나 되는지 사이즈는 어느 정도인지 가족 중에서 아는 사람이 없다.

담당 의사가 당췌 말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산병원에 근무하는 매제는 알고 있을 테지만,

그조차도 이런저런 정보를 통 전해주지 않는다.

stage가 1기나 2기 정도라면 말해줄텐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3기 이상이 아닐까.

수술을 바로 하는 대신 항암으로 사이즈를 줄여서 한다는 것도 수상하지만,

아내에 따르면 요즘엔 그렇게들 많이 한다고 하니,

그게 기수가 진행됐다는 증거는 아니리라 믿는다.


어머니가 하시는 수술은 휘플Whipple 수술이라고,

췌장과 더불어 십이지장, 담도 등을 떼어내는 수술이다.

학생 때는 무심코 외웠지만, 어머니라고 생각하니 그런 장기가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을지 걱정이 된다.

작년 말 쯤 진단을 받고 나서 어머니는 8차에 걸친 항암을 받았다.

처음엔 좀 힘들어하셨지만 그래도 잘 적응하셔서,

3일간 항암---> 2주반 집에서 쉬고---> 다시 3일간 항암---> 휴식

이런 스케쥴을 그런대로 잘 소화하셨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니집에서 잔 적도 몇 번 있는데

다음날 밥을 차려주시는 모습이 전혀 환자같지 않아서,

수술을 안하고 이대로 계속 사시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참고로 어머니는 아들 밥 차려주는 걸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기에,

원래 아침을 안먹는데도 억지로 먹곤 했다).

처음 진단받을 때는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좌절감에 괴로워한 것을 떠올리면,

지난 몇 달간은 꿈같은 평범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평범함을 사무치게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큰 수술을 하고나면 어머니는 당분간 예전의 어머니가 아닌 채

살아야 하니 말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가 좀 힘이 돼드려야 할텐데,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내 걱정은 마라'며 오히려 날 걱정하시겠지.

어머니란 원래 그런 존재니까.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수술당일 수술실에 들어가는 어머니를 배웅하면서 울지 않는 것이다.

내가 울 때마다 어머니는, 당신이 편찮으셔서 우는 것인데도, 나보다 더 마음아파하셨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우는 모습 대신 밝은 표정을 지어야 할텐데,

원래도 눈물이 많던 놈이고, 최근 몇달간 밖으로 배출시킨 적도 없는지라,

안울 자신은 없다.

수술 뒷일보다, 당장 그게 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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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7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9-04-07 19:14   좋아요 0 | URL
네 따스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ㅠㅠ 사실 저도 무서워요.ㅠㅠ 어머니는 얼마나 무서울까 싶습니다. 안그래도 겁이 많으신 분인데.

박균호 2019-04-0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계시는동안 선생님이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자주 확인시켜드리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어머니를 잃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내세요.

마태우스 2019-04-07 19:14   좋아요 0 | URL
아 네...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내일 가서 어머니 옆에서 용기를 북돋아 드리겠습니다

2019-04-07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9-04-07 19:15   좋아요 0 | URL
네 응원 감사드립니다. 님도 빌어주시는데, 어머님 회복되셔야죠. 은근히 강한 분이시니 잘견디실 겁니다

나비종 2019-04-0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로 댓글을 적을 지 한참을 고민하다 저의 마음을 시에 담아보았습니다. 제 공간의 마음 그대로의 마음-제목은 <어머니>입니다. 이 시가 마태우스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토닥거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우스 2019-05-06 14:53   좋아요 0 | URL
나비종님, 그 시가 제게 큰 위로를 줬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9-04-08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9-05-06 14:52   좋아요 0 | URL
답이 너무 늦었네요ㅜㅜ 이렇게 큰 위로를 받다니, 제가 인생을 잘 살았나봅니다. 감사드립니다.

2019-04-08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9-05-06 14:52   좋아요 1 | URL
네....그런 경험이 있으시군요 ㅠㅠ 일단 수술은 잘 됐다니, 앞으로 항암 잘 견뎌내시도록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쾌유를 빌어드릴 어머니가 계시고, 또 이런 저를 격려해주시는 님들이 계시니, 이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해야겠네요. 감사드립니다

소화제 2019-04-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힘내셔요.

마태우스 2019-05-06 14:50   좋아요 0 | URL
소화제님, 제가 답은 못드렸지만 님 댓글 읽고 큰 힘이 됐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9-04-14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9-05-06 14:50   좋아요 0 | URL
뒤늦게 답을 드립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어머니 수술 잘 되셨고요, 제일 좋은 게 췌장 기능이 일부 살아서, 인슐린을 따로 맞지 않아도 된답니다. 다 여러분들이 응원해주신 덕분이어요.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