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난 세권의 책을 써냈다. 말이 세권이지, 앞의 두권은 '책'이라는 고상한 명칭을 붙이기엔 낯이 뜨겁다. 사실상의 저서는 그러니까 작년에 냈던 책 하나 뿐이지만, 그게 앞의 책들보다 낫다는 거지, 뭐 그리 잘썼다든지 그런 건 아니다. 내용에 걸맞게 그 책은 불과 수백권이 팔렸고, 그 중 상당수를 내가 샀다. 달라는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말이다.

수준에 무관하게, 난 일년에 한번씩 책을 내고 싶었다. 책을 내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계속 내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책다운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올해 책이 나오지 않음으로써 그 계획은 둘째해에 이미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올해도 한권 책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됐다. 지금까지 영세한, 혹은 무성의한 출판사에 치인 나머지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었던 것이 이유였다. 여러 군데 메일을 보내 봤지만, 그럴 듯한 출판사들은 하나같이 내 제의를 거절했다. 내가 전업작가가 아니니 다행이지, 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었다면 정말 서러울 뻔했다. 딱 한번, 아쉬운 적이 있었다. 출판재벌이 아닌 출판사에서 결국 원고를 내기로 한 뒤, 중앙M&B라는 곳에서 답신이 왔다.
[검토해 봤는데,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내용으로. 검토하는 데 한달이 걸린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고, 계약도 안했는데 지금이라도 배신하자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싶었고, 난 날 받아준 출판사와의 의리를 지키기로 했다.

원고를 쓰는 데는 일년 가까이 걸렸다. 그 동안 늘 책만 쓴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관심이 책으로 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맨 처음 쓴 책은, 술 마실 걸 먹어 가면서 한달만에 썼다. 그 다음 책은 불과 석달이 걸렸다. 세번째 책은? 한 육개월 이상 쓴 것 같다. 기간이 수준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책은 그야말로 내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출판사의 여건이 안좋았는지, 원고를 맡기고 나서 5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난 다시금 유수 출판사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 동창 하나가 출판재벌인 시공사의 편집장이니, 거기서 내려면 어려울 것도 없었는데. 내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던 것은 인맥에 의존하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돈이 전두환의 검은돈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학생 때 시위를 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의 적이었던 그들과 타협하는 것은 왠지 싫었다. 기대와는 달리 몇달간 책이 나오지 않자 난 내가 너무 순진했음을 반성했다. "검으면 좀 어때? 돈은 다 똑같다고!" 이렇게 자신을 질책했지만, 이미 늦었다.

책 나오는 걸 포기한 12월 중순께, 출판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드디어 책 만드는 프로를 스카우트했단다. 그 프로가 요구하는대로 난 지금 열심히 책을 고치고 있는 중이다. 약속한 30일까지 원고를 주려면 별로 시간이 없는지라, 논문이고 뭐고 다른 모든 걸 전폐했다. 어제, 오늘은 점심도 걸렀다. 술만 안마시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예정대로라면 2월, 실제로는 3월경에 내 4번째 책이 나온다. 판매에 무심했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내 모든 게 담긴 이 책은 내가 최대한 사재기를 할 생각이다. 알바를 고용한 출판사의 사재기는 흔한 일이지만, 저자가 직접 사재기에 나서는 건 내가 처음이 아닐까? 그동안 그런 적이 없지만, 친구들에게도 도움을 청하련다. 내가 그리 나쁜 놈이 아니라면 한권씩만 사주라, 이렇게 말이다. 2월이 기다려진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4-07-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대통령과 기생충>이지요^^ 역시나 친구들은 거의 사주지 않더군요. 믿을 건 저밖에...
 

 

 

 

조카들에게 왁스가 부른 <엄마의 일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하자면, 그 노래는 엄마가 강한 척하고 그래도 연약한 여자라는 내용이다.

"느껴요~~ 하지만 당신도~ 마음약한 여자라는걸"

내가 부연설명을 했다.

나: 그러니까, 우리 누나가 너희들 야단치고 소리지르고 그래도, 방에 가서는 혼자 울고 그런단

말야

조카: 안그러던데?

나: 너희들 안볼 때 운단 말야.

조카: 아냐, 절대 안울어. 난 포기했어.

나: 그래도 마음아파하긴 한단 말야.

조카: 기범이(동생 이름이다) 목 보면 그런말 못할걸? 목에 할퀸 자국 좀 봐. 꼭 호랑이랑

싸운 거 같아.

 

하기사,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누나의 성격으로 볼 때 혼낸 걸 마음아파할 것 같지는 않다.

언젠가 야단을 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조카의 말이다. "우리엄만 너무 강해서 탈이야!"

조카들이 귀여운 건, 이런 솔직성 때문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책에 난 벤지 사진을 보고 쓴 소설입니다. 전적으로 허구이며, 벤지는 지금 제 곁에서 자고 있지요. 물론 건강합니다.

----------------------------------------------------------

여의도 공원의 호수가에 앉아 있는 내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공원에서 여름의 정취를 느끼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날 쳐다보았다. 그 중 한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연 당했나봐"
"그러게"
여기 올 때마다 벤지는 호수에 뛰어들 것같이 폼을 잡곤 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봐서 그런 거였을까. 원래 말을 못하는 녀석이었지만, 이젠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다. 벤지는 죽었다. 난 병에서 벤지의 유골을 호수에 던졌다. 몸무게 5킬로그램, 당당한 체격을 가진 벤지는 한줌도 못되는 유골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이뻤던 벤지와 하얀 분필가루와도 같은 유골 사이에서 난 어떤 연관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심보가 고약한 여자가 사장인 우리집 앞 맥주집은 여전히 파리만 날렸고, 맞은편의 '옛시골집'은 몰려드는 손님들로 북적댔다. 좁은 골목길은 숨쉴 틈이 없이 차들이 지나다녔다. 벤지만 없을 뿐이었다.

현관 문을 열고 습관처럼 소파로 눈을 돌렸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언제나 소파에 누워 잠을 자던 벤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현실을 인정하자. 벤지는 이제 없다. 새벽 한시가 지난 시각이었지만, 난 잠이 오지 않았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더 맑아진다. 내 옆에 벌렁 누워 잠을 자던 벤지가 없어서일까. 허전함을 잊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밤을 더 보내야 할까.

십오년의 세월은 집안 곳곳에 흔적을 남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벤지가 가끔 실례를 하던 마루는 이미 썩어 있었고, 벤지가 주로 소변을 보던 화장실에는 특유의 찌린내가 베었다. 벤지가 쓰던 밥그릇 4개와 물그릇들, 우유를 먹던 접시는 이젠 더이상 필요가 없었지만, 난 그걸 버리려는 엄마를 말렸다. "제가 보관할께요"
그게 부질없는 집착이란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당장이라도 벤지가 저 방에서 나와 꼬리를 흔들것만 같은데 어떻게 밥그릇을 버린단 말인가. 벤지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물건을 볼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벤지는 맨 바닥보단 방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우리 벤지는 양반이라서 그래"라고 대견해했던 기억도 난다.

벤지가 짐으로 느껴진 적도 여러번 있었다. 이따금씩 벤지가 없는 삶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지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실성한 사람처럼 혼잣말로 "벤지야" 하고 불러본 것도 여러번, 하지만 그 대답을 들어줄 이는 이미 없었다.

사흘이 지나자 난 서서히 제정신을 차렸다. "그래, 현실을 인정하자. 벤지는 죽었어"
난 다시금 직장에 출근했고, 예전처럼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밤늦게 집에 와서는 밀려오는 공허감에 눈물을 훔쳤지만, 날이 갈수록 그 강도는 약해졌다. 벤지는 그렇게 내게서 잊혀져 갔다.

열흘이 지났을 무렵, 출근을 하던 난 우리집 앞 맥주집에 개 한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마르치스, 벤지와 같은 종이었다. 벤지 생각이 나서 손을 흔드니 꼬리를 친다.
"벤지랑 참 닮았구나" 난 쓸쓸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 개가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신문을 줏으러 밖에 나갔을 때, 그 개가 여전히 거기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주인이 없니?" 난 녀석에게 다가가 별 생각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난 온몸이 굳어졌다. 녀석의 눈 주위에 사마귀가 나 있었다. 벤지의 눈에도 사마귀가 있었다. 두번이나 수술을 해줬지만 자꾸 재발해 방치해 두지 않았던가. 자연스럽게 내 눈은 녀석의 등으로 향했다. 등에 있는 딱지를 발견했을 때, 난 공포에 질렸다. 슬픈 듯한 녀석의 눈은 내겐 악마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문을 잠그고 두시간 동안이나 떨고 있었던 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난 출근을 하지 못했다. 꼭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있었음에도. 

다음날 아침, 난 옥상에 올라가 우리집 앞을 살폈다. 동아일보를 배달하는 아줌마가 눈에 띄었지만, 벤지는 없었다.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출근을 했다. 하지만 난 그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난 우리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술이나 한잔 하겠어?"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지만 그는 역시나 날 믿지 않았다.
"벤지가 보고 싶으니까 헛것이 보였겠지"
"아냐, 정말이라니까. 내가 손으로 만지기까지 했어"
"마르치스가 어디 벤지 뿐이냐.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응?"
친구의 집은 우리집에서 좀더 걸어야 했기에, 난 그와 함께 우리집 쪽으로 향했다.

"저, 저기..."
벤지는 맥주집 앞에 앉아있었다. 특유의 그 슬픈 눈을 하고선. 살아있는 동안, 내가 출근할 때마다 벤지는 슬픈 눈동자를 내게 보였었다. 자기가 심심하니 빨리 들어오라는 암시라도 하듯이.
"어디? 난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저기 있잖아! 안보여?"
난 공포에 질려 달아나려 했지만, 친구는 내 손을 꽉 잡았다.
"민아, 제발 정신 좀 차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 말에 의하면 내가 실신해 버렸고, 그가 날 들쳐업고 우리집까지 왔다고 한다.

엄마의 권유에 따라 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했다. 의사는 별 말없이 내 말을 듣고 있다가 약을 하나 지어줬다. "괜찮을까요" 어머니의 질문에 의사는 퉁명스럽게 그렇다고 했다.

사람들은 날보고 돌았다고 했다. 나 역시 내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만 했다. 다음날부터 난 맥주집 쪽을 아예 외면한 채 출근을 했다. 그러길 열흘. 이제는 없겠지,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난 하얀 개 한 마리가 슬픈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가! 제발 내앞에 나타나지 마!"
내 말에 벤지는 힘없이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친구 집에서 밤새 술을 마셨다.
"왜 벤지가 니 앞에 나타난다고 생각해?"
"사실은..."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그 친구에게라도 사실을 말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 것 같았다.
"벤지가 늙어죽은 게 아니야"
"그럼?"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내, 내가...."

그 며칠간 벤지는 많이 아파 보였다. 소파 위에서 자는 건 여전했지만, 내가 불러도 겨우 고개만 돌렸을 뿐,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방안에다 대변을 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깨끗한 걸 좋아하는 녀석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짐작이 갔다. 난 벤지를 들쳐업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주사를 한 대 맞고, 항생제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커다란 주사기에 약을 담을 때, 나도 모르게 이 말을 하고 말았다.
"그냥...안락사 시켜주면 안되요?"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십만원만 내면 그렇게 해주마고 했다. 의사는 다른 주사기를 꺼내 약을 담았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한걸까. 병원에 갈 때만 해도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벤지를 짐스럽게 생각했던 내 무의식이 방어막을 뚫고 밖으로 표출된 걸까. 

벤지가 청산가리가 든 주사를 맞는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에,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돌리자 유리문을 통해 벤지가 보였다. 흰 털과 슬픈 듯한 눈이. 병원에 갈 때마다 몸을 떨며 무서워하던 벤지지만, 그날만큼은 누운 채 움직임이 없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아니면 모든 걸 체념해서일까. 벤지와 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난 내가 정말 바보같은 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벤지는 죽었다....
내 요청에 따라 의사는 개 전문 장의사를 불러줬다. 난 그에게 십만원을 줬고, 벤지의 유골이 담긴 조그만 병을 받았다.

"그러니까 넌 벤지가 복수를 하기 위해서 니앞에 나타난다는 거니?"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다.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너 벤지한테 굉장히 잘해 줬잖아?"
그래서 더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잖아. 난 속으로 외쳤다.
"혹시 영매를 찾아가 보는 건 어때?"
영매? <사랑과 영혼>이란 영화에서 영매로 나온 우피 골드버그가 아카데미상을 탔지. 물론 난 영매를 믿지 않았다. 사람이 신과 소통을 한다는 걸 날더러 믿으라고? 하지만 난 진심으로 날 걱정해 주는 친구의 집요함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리고 영매를 통해서 내가 안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영매가 진짜건 가짜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영매의 집으로 향했다. 이준영이라는 영매의 집으로.

네이버 검색을 보면 이준영에 대해 이렇게 나와있다.
[이준영씨(34)는 장충체육관 등지에서 29층 높이로 쌓아올린 작두를 사다리 타듯 맨발로 올라가 멋대로 춤을 추며 방언을 해대 지켜보는 이들을 경악으로 몰아넣어온 영매다.그는 자신이 모시는 신을 ‘할아버지’할머니’라고 칭한다.초등학생 때부터 병약했던 그는 청년이 됐지만 몸무게가 40㎏을 밑돌았다.신의 접근을 감지할 무렵 그는 서울 천호동 동서울시장 내 자택에서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얻어맞았다.그를 때린‘사람'은 김유신 장군이었다.‘빨리 나가거라.’

눈을 뜨니 집 안으로 불길이 들이닥치고 있었다.벌떡 일어나 한 걸음을 떼어놓았다고 느낀 순간 몸은 이미 10m쯤 날아가고 있었다.가스폭발로 시장 안 70여 점포가 전소된 상황에서 그는 그렇게 살아났다.귀신이 먼저 그에게 접근한 셈이다.귀신에게는 역시 공짜가 없었다.‘내가 너를 구했으니 너는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네 병을 고쳐주겠노라.’ 귀신의 첫번째 요구는 ‘작두를 탈 것’이었다.거부했다.“싫다.발바닥을 베이면 어떡하나.안 타련다.” 그러자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장군 귀신들이 그를 에워쌌다.이어 몽둥이 찜질이 가해졌다.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 그는 엉덩이에 시퍼런 멍이 든 것을 보고 무릎을 꿇었다.“원하는 대로 하겠다.”

그가 언제나 작두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때’가 오면 귀신들이 몰려들어 그의 눈 앞에서 작두날을 시퍼렇게 간다.종이가 잘릴 만큼 날이 서 있다.무서워서 뭉툭한 작두를 골라 타려 들면 당장 귀신들의 불호령이 떨어진다.그래서 눈 딱 감고 파리한 작두날 위에 체중을 실을 수밖에 없다.그리고 다음 일은 기억 못한다.“그 순간부터는 100% 할아버지들의 기운이 나를 제어하기 때문이다.” 귀신들이 자신의 양 겨드랑이를 부축한다는 것이다]

"개귀신이 붙었군!"이라고 하는 대신, 이준영은 내게 왜왔냐고 천연덕스럽게 물어와 내 친구를 실망시켰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 영매는 날더러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거봐. 돌팔이잖아!"
한참이 지나자 영매는 날 다시 불렀다. 아까와는 목소리가 바뀌어 있었지만, 그런 트릭에 속을 내가 아니었다. 목소리 변조는 웬만한 사람이면 다 하는 거 아닌가.
"오늘밤 그 개를 만나면 한번 안아 줘"
나보다 나이도 어린 놈이 왜 반말이야. 영매면 다냐.
"네?"
"녀석이 죽을 때 작별인사를 못해서 니 앞에 나타나는 거야"
"그, 그래요?"
"복수하러 온 게 아니니 그렇게 알아"
영매의 집을 나서며 난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집앞 맥주집에는 과연 벤지가 앉아 있었다. 영매를 만난 뒤라서 그런지, 녀석이 예전처럼 공포스럽지 않았다. 난 벤지에게 다가갔다. 벤지가 꼬리를 쳤다.
"벤지야"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손을 뻗어 벤지를 품에 안았다. 벤지의 몸이 차가웠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벤지야. 보고싶었어"
벤지가 내 손등을 핥았다.
"녀석, 핥는 버릇은 여전하네"

얼마나 벤지를 안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벤지가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난 벤지를 땅에다 내려놓았다. 벤지는 날 한번 보더니, 어두운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발짝을 걷던 벤지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그전처럼 슬픈 눈은 아니었다. 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벤지는 다시 골목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벤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난 골목 안으로 달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벤지를 볼 수 없을 것 같았기에.

하지만 벤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벤지야!"
난 몇 번이고 벤지를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콩나물 국밥을 파는 아주머니가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공중에 하얀 물체가 있는 게 보였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잡은 것은 하얀 털 몇가닥이었다. 그게 벤지의 털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어떤가. 내가 그렇게 믿으면 되는거지.
'벤지가 하늘나라로 가면서 흘린 털'-그 털은 이런 글귀와 함께 내 책상에 보관되어 있다.

그 후로 난 벤지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집에 올 때마다 맥주집 근처를 살폈고, 벤지가 사라진 골목길을 바라봤지만, 벤지는 없었다. 이따금씩 벤지 생각이 났지만, 그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벤지는 하늘나라에 무사히 갔을까. 나와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을까.

엊그제, 동창회가 있었다. 2차를 갈 때 여자애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민아, 너 벤지 데리고 촛불시위 간 적 있지?"
영문을 몰라하는 내게 그녀가 설명을 했다. 자기가 모시는 교수가 있는데 그 교수가 개를 주제로 한 화보집을 냈다, 그런데 그 화보집에 내가 벤지를 안고 촛불을 든 모습이 있어서 굉장히 놀랐다는 것. 작년 12월, 여중생 죽음과 관련된 미군들이 무죄가 되자 거기 항의하는
촛불시위가 있었는데, 난 벤지를 안고 광화문에 간 적이 있다. "정의로운 벤지의 성격으로 볼 때,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 역시 촛불을 들고 이 자리에 섰을 거야"
이게 내가 벤지를 데려간 이유였다.
난 그녀로부터 그 교수의 이름을 알아냈고, 다음날 교보에 들러 그 책을 샀다. 최미경 지음, <추백이와 따굴이가 함께 사는 세상>. 책 중간쯤에 벤지를 안은 내 사진이 있었다. 한손에 촛불을 든 채로. 사진 속의 벤지는 여전히 귀여웠지만, 내 눈에서 오래도록 눈물이 흘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4-07-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심정이 좀 슬프다보니-벤지가 아팠거든요-소설이 슬퍼졌습니다. 님의 개소설을 기대하겠습니다.
 

 

 

 

난 내가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특별히 잘하는 게 없다. 강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교수라면 반드시 해야 할 연구 면에서도 난 자타가 공인하는 바닥이다.

의사면허는 있지만 환자를 볼 능력도 없는데다, 지인들이 가끔씩 자문을 구할 때도 헛소리만

남발한다 (그래도 의학적 자문이 끊이지 않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러니, 내가 학교에서

잘리기라도 한다면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내 생각에 난,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교수가 되었고, 교수라는 직위를 이용해 허구헌날 술만 퍼마시는 인간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잘하는 게 딱 하나 있다. 연속해서 술마시기!).



나같은 사람이 다 그렇듯, 남들은 다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며칠 전, 내 친구가 애를 낳았다. 어렵게 생긴 첫번째 아이인지라

친구 부부는 나름대로 신경을 썼는데, 친구가 다니는 산부인과에서는 그 아이가 '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9개월쯤 지났을 때, 병원에서는 난데없이 "딸이에요"라고 하는거다.

"아니 어떻게 그런 걸 틀리지? 애기 옷도 다 사놨는데.."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5주면 다 아는데..."

그런데 막상 애를 낳았을 때, 친구는 더더욱 놀랐다. 애는...아들이었다! 애기옷은 건졌지만,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친구의 황당함과는 별개로, 내게는 그런 실력으로 산부인과를 하고,

돈도 제법 번 의사의 존재가 위안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사람이 한둘은 아닐 거다. 남들 보기엔 어엿한 회사에 다니고 그러지만,

회사에는 그다지 기여를 하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이. 사실 출중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뭐 그리

많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던 끝에, 난 새해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보기로 했다.

남들은 없는 능력을 짜가면서 열심히 사는데, 난 능력이 없다고 나자빠져서 허구헌 날

술만 마시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연구, 새해에는 연구를 하자. 논문도 많이 쓰고 그래서

2년 후 있을 재임용도 통과해 버리자. 그러면 5년은 더 버틸 수 있고, 그런 식으로 계속

가다보면 55세 정도까지 버티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학교에 부임한지도 벌써 5년,

그간 놀만큼 놀았잖니?



때마침 학교에서는 갑자기 돈이 많아졌는지 기계 살 게 있으면 사라고 돈을 나눠준다.

얼마 전에도 돈을 주더니만, 두달도 안되서 무슨 일이람? 열심히 일하는 남들은 살건 많은데

돈이 적네 하지만, 연구와 담을 쌓고 줄곧 놀아온 난 그 돈으로 무슨 기계를 사야하나

심난하다. 어찌되었건 이것저것 사다보면 냉기만 감도는 내 실험실도 제법 그럴듯한

곳으로 변하겠지.



어제, 내가 군대 때 몸담았던, 아니 적만 두고 출근은 안했던 보건원에 다녀왔다. 새해부터

일을 같이 좀 해보자고. 그쪽에서는 늘 바라던 거였다고, 내가 놀기만 하는 게 안타까웠다면서

적극 환영한다. 그 얘기를 하면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9시도 되기 전에 필름이 끊긴 게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뭔가를 해보련다. 이게 다 그 의사 덕이다.



* 택시 아저씨가 날 깨운다. 택시비를 달라고. 아까 준 것 같아서 "줬잖아요"라니까, 안줬다고

달란다. 그 아저씨의 말, "경남예식장에서 타셔서 홍대앞 가자고 했잖아요!" 잉? 이럴수가.

미터기를 보니 1600원이 찍혀있다. 그러니까 난 집앞까지 잘 가고선 다시 택시를 타고

엉뚱한 곳으로 온 거다. 집까지 걸어가는 십분이 술에 취한 사람에겐 무척이나 길고 멀었다.

날씨는 또 얼마나 춥던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싸이런스 2006-07-14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경남예식장에서 타셔서 홍대앞 가자고 했잖아요!"
"난 능력이 없다고 나자빠져서 허구헌 날 술만 마시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연구, 새해에는 연구를 하자. 논문도 많이 쓰고 그래서 2년 후 있을 재임용도 통과해 버리자." 다행히도 바람대로 됐네요^^

나를욕해달라 2011-05-2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종종 실수도 하고 서툰 사람들이 완벽주의자보다 더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물론 허구헌날 실수만 하면 개호구가 되지만요ㅠㅠ(그게 저임)
 

 

 

 

평소 9시 뉴스를 잘 안보는데, 병원에 있으니 할수없이 봤다. 한나라당이 차떼기 수법을 동원해서 돈을 받은 것에 시민들이 흥분했나보다.
"분노를 금할 수가 없고..."
"지금 서민들은 몇만원이 없어 죽어가는데..."
"그 돈이면 남극 대원들에게 쇄빙기를 사줄 수 있다"

그들의 분노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난 어째 뒷북을 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법정선거자금은 국회의원이 8천만원, 대통령선거는 350억원, 별로 현실성이 없는 액수다. 227명을 뽑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인당 수십억의 돈을 뿌리는 게 예사인데, 대통령 선거가 겨우 350억원? 그래서인지 국민들은 각 정당들이 법정선거자금 이하로 돈을 썼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 (민노당은 제외하고). 한나라당이 대기업 몇곳에서 받은 돈만 해도 500억이 넘지 않는가?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국회의원 월급이 800만원이 고작인데다 제정신이라면 자기 집을 저당잡혀 돈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럼 그 돈은 당연히 기업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기업에게 뜯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누이좋고 매부 좋은 수법이다. 그렇게 해서 줄어든 세금은 결국 국민들의 삥을 뜯어 충당을 하지만, 당장 자기 돈이 나가는 게 아니니 크게 분노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게 지금까지의 정치 풍토였다.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대부분의 정치자금을 기업이 낸다. 미국의 대선 레이스는 사실 누가 더 많은 후원금을 모으느냐에 좌우된다. 우리보다 나은 점은 당당하게 실명으로 돈을 내고, 나중에 결과가 틀어져도 보복을 당하는 일이 없다는 점일게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이 돈을 받은 것에 크게 놀랄 필요가 없다. 액수야 차이가 있을지언정, 당시 민주당도 기업들의 주리를 틀어 돈을 뜯어낸 것은 똑같을 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놀라 까무라친다. "어머나 세상에!" "그럴 수가! 돈을 받다니"
난 의아하다. 이 사람들이 지금 피지에서 왔나? (참고로 피지는 인구가 적어서 돈도 덜들 것으로 생각되는, 나만의 엘도라도다). 피차 다 아는 처지에 왜들 이러시나. "알고보니 돈을 안받았더라"고 하면 놀라야 되는 게 아닌가? 난 처음에 그들이 차떼기라는, 지극히 농촌적인 수법에 놀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게 아니다. 돈을 받은 사실이 놀랍고, 액수가 크다는 것에 분노하는 거다. 참나, 뒷북은.

한나라당이 돈을 받은 사실에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 대신 차떼기라는 수법에 감탄했을 뿐이다. 배추를 팔고사는 데 쓰이는 수법을 돈받는 데 쓰는 그 치밀함. 사과상자 수십개로 그 돈을 전달한다고 해봐라. 일일이 나르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런 일이 하두 많아서인지 사과상자를 보는 눈도 곱지 않은데 말이다. 채권으로 돈을 주는 것 역시 세련된 수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삼성이라니까!" <-- 전혀 비아냥이 아님.

우리, 좀더 솔직해지면 좋겠다. 차떼기라는 수법에 감탄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는 "돈을 받다니 뻔뻔하다"고 분노하는 척하지 말자. 피지에서 온 티를 내지 말고, 이런 풍토가 우리 현실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돈이 많이 드는 우리의 정치문화를 개선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자. 평소에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거품 물고 개탄하다가, 무슨 일만 나면 그런 건 전혀 몰랐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이제 지겹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