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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피소드 둘
내가 아는 서울대 M교수님에게는 아들이 셋 있는데, 모두 서울대를 나왔다. 치대, 의대, 공대이고, M교수님 역시 경기-서울의 세칭 'KS' 출신이다. 사모님도 그당시 들어가기 힘든 이화여대를 나오셨으니 얼마나 자부심이 있겠는가.

신정 때 새해인사를 갔을 때의 일이다. 사모님이 둘째아들이 나이가 찼는데 마땅한 혼처가 없다면서 내게 좀 알아봐 달라신다. 물론 의례적인 말씀이었지만, 난 진지하게 답변을 했다.
"제가 가르치는 애들 중 미인이 많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의 얼굴이 굳어졌다. "X대는 좀... 그렇죠..."

우리 교실을 설립하신 S 교수님. 얼마 전 있었던 10주기 추모회에서 회고담을 읊으시던 권이혁 선생님의 말씀이다.
"자제분 중 서울의대 교수를 두명이나 만드신 분이 또 어디 계시겠는가?"
하나 남은 따님은 지금 이화여대에서 소아과 교수로 계신다. 이것만 해도 대단할 텐데, 며느리 하나는 건대병원, 사위는 중앙병원에서 의사를 한다. 며느리 한명만 이대 가정대를 나왔는데, 수도의대(고대의대의 전신)를 나오신 사모님은 우리 앞에서 이러신다.
"나머지 하나도 의사랑 결혼시킬 껄 그랬어요..."
보지 않아도 그 며느리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할지 알 것 같다.

2. 도올 김용옥
김용옥이라는 분이 계시다. 보성고-고려대를 나온 김용옥 씨는 어릴 적 엄청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말이다.

[나는 큰형 집에서 조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내 조카들은 머리가 탁월하게 좋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세 아들이 모두 경기중학을 들어갔으니까요...정말 그앞에서는 부끄러운 존재였습니다 ....]

다른 곳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 형제들이 소위 케이-에스 마크(경기-서울)를 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케이에스를 못단 나는 항상 머리가 나쁘다는 콤플렉스 속에서 살았다...]

그의 호가 '도올'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내 특히 '돌'을 취한 뜻은 내 어려서부터 공부가 부실하고 머리가 나빠 주위 사람들이 날 '돌대가리'라고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나중에 '동경대학'과 '하버드대학'을 질리도록 팔아먹는 이유도 바로 이런 컴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3. 결론
학벌이 많은 것을 좌우하는 한국에서 이런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모든 자식들이 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니 형은 잘하는데 넌 이게 뭐냐?"는 식으로 윽박지르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모든 사람이 김용옥처럼 그걸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공부보다는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는 도무지 말이 안되는 말이긴 하지만, 그게 말이 되는 사회가 내 살아생전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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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잡대 2011-05-21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나라는 학벌위주성향이 좀 쎈거 같긴 해요 아직까지도.
 

 

 

 

악녀가 나오는 드라마를 '팜므 파탈(Femme fatal)'이라 한다. 학생 때 '위험한 정사'에 나오는 어느 여배우의 리얼한 연기를 보면서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인상이 어찌나 강했는지 나중에 바람 같은 건 절대 피우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름을 잘 모르겠는 그 여자는 나중에 '에어포스 원'이란 영화에서 부통령으로 나왔는데, 하등 무서울 상황이 아님에도 그녀를 보고 몸을 떨었던 건 어릴 때 기억 때문이다.

음모와 배신이 지배하는 드라마에는 어김없이 악녀가 등장한다. 내가 본 악녀들의 기억을 잠시 더듬어 본다.

1. <미스터 큐>의 송윤아: 난 송윤아를 그때 처음 봤다. 도발적인 눈매에 지적인 풍모까지 갖춘 그녀, 드라마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하지만 이쁘기만 한 그녀를 누가 미워할 수 있으랴. 송윤아는 악녀가 갖추어야 할 카리스마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고, 그렇기에 드라마 전체를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언젠가 다른 프로에서 낙하산을 매고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릴 때, 안하겠다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결국 뛰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맘가짐이면 크게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확실한 브라운관의 스타다.

2. <토마토>의 김지영; 난 <전원일기>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당근 김지영도 모른다. <토마토>가 내가 그녀를 처음 본 드라마다. 그리 미모가 뛰어나지 않았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봤을 때 놀랐다.

[모 신인배우는 촬영시간에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배역을 박탈당했다.... 한시간이 지나서 촬영장에 나타난 김지영에게는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깐 억울하면 스타 되는 수밖에!]

김지영이 스타야? 어쨌든, 미모가 약간 떨어짐에도 김지영은 뛰어난 연기력으로 악녀의 역할을 잘 수행했는데, 바로 그 떨어지는 미모 때문에 난 김지영을 마구 미워했다. 지금도 TV에 나오는 김지영을 볼 때마다 착하디 착한 김희선을 괴롭히던 그 악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3. <진실>의 박선영; 첫인상은 중요하다. 앞의 경우처럼, 박선영을 본 것도 그 드라마가 처음이었다. 그런 선입견 탓에 다른 곳에서 박선영이 나오면 난 TV를 돌려 버린다. 악녀도 악녀 나름이지, <진실>에서 그녀는 정말로 악독했다. 악독하게 느껴진 건 연기를 잘했다는 말이 되지만, 어쨌든 그 방법과 발상이 해도해도 너무했기에 난 지금도 그녀가 싫다. 나중에 손지창과 같이 자살할 때는 조금, 아주 조금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 드라마가 한창 인기일 때, 내가 꾼 악몽에 그녀가 등장한 적도 있을 정도다.

4. <명랑소녀 성공기>: 여기서도 악녀가 하나 나온다. 이름을 잘 모르겠으니 극중 이름인 '나희'라고 하자. 악녀의 조건 중 하나가 미모가 어느정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나희는 최악이다. 게다가 장혁에게 매달리는 꼴이 자존심이라곤 전혀 없어 보인다. 언젠가 기차에서 본 신문기사에는 그녀가 커다랗게 나와있다. "미움 받아야 뜨죠!"라는 제목으로.

미움은 최소한의 조건이 있어야 생기는 법이다. 미모도 그렇지만 연기력도 영 엉망인지라 그녀에게 생기는 건 증오가 아닌, 동정심이다. 그 기사에 의하면 "그녀의 몸매를 알아본 광고주들로부터 CF가 쇄도중"이라는데, 그게 정말일까? 위에서 언급한 세 드라마와는 달리 <명랑소녀 성공기>가 성공을 거둔 것은 악녀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닌, 장나라와 장혁 때문이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건, 연기자로서는 굉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행운을 명성으로 이어가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나희의 실패는 운만으로는 스타가 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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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에서 몇몇이 모여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자꾸 보채자 친구는 이렇게 협박을

한다. "너 자꾸 이러면 '니모' 안틀어 줄꺼야!" 그러자 애는 잘못했다면서, 빨리 니모를 틀어달라고

조른다. 친구가 DVD를 넣어주자 100인치는 되어 보이는 대형 TV에서 니모의 한국말 버젼이

나오기 시작했고, 친구의 아들은 TV 앞에 앉아서 넋을 잃고 영화를 본다.

내가 물었다. "얘 그 영화 안봤어?"

친구의 대답이다. "열번도 더봤을 걸"

"그런데 왜 또봐?"

내가 애들을 키우지 않아서 몰랐을 뿐, 모든 애들은 본걸 또보고 또본단다. 하루에 두세번 보는

일도 있다나. 그 이유를 친구는 이렇게 설명한다.

"얘들은 영화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되어서 영화를 보니까"

진짜로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DVD 판을 사는 게 별로 아까울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가 지루한 듯해서 친구가 다른 채널을 틀자마자 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몸을 흔들며 때를 쓰기 시작한다. 하여간 애들이란....

 

 

 

 

한때 만화랑 인연을 끊은 듯했던 디즈니가 새로운 형태의 애니메이션을 들고나온 것은

<인어공주>가 그 시초였을게다. 만화는 애들만 보는 것으로 알았던 나에게 내 또래의 사람들이

그 영화에 열광하는 현상을 난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 <라이온 킹>을 봤지만, 애들이나

좋아할 유치한 영화였다는 게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친척 집에서 DVD로 본 <미녀와 야수>

역시 지극히 단조로운 스토리를 가진 애들만의 영화였다. 비록 내 또래의 여자애들 중에는

너무 감동을 받아 두번이나 봤다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니모를 찾아서>는 그런 류의 만화와는 확연히 틀린, 한마디로 말해 차원이 다른

영화였다. TV가 좋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영화를 지배하는 색상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재미가 있건 없건간에 TV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고, 보는 내내 내게 시원함을 선사했다.

주인공 격인 니모를 지느러미 하나가 짧은 장애인으로 설정한 것도 웬만한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발상이다. 그런 영화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친구라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니모>를 봤다면, <오아시스>를

보다가 마음이 불편해서 꺼버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다른 캐릭터들도 살아 숨쉬는 듯, 영화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건망증으로 시달리던 파란 물고기는

어찌나 우습던지, 중년의 체면을 반납하고 킬킬거려야 했다.

니모아빠: 혹시 배를 보지 못했나요?

파란고기: 하얀 배 말이지. 봤어. 날 따라와.

파란고기는 헤엄쳐 가고, 니모아빠는 열심히 그 뒤를 쫓는다. 한참 그러다가 갑자기,

파란고기: 바다는 넓은데 왜 내 뒤만 따라와?

니모아빠: 방금 하얀 배를 봤다고 했잖아요. 장난해?

파란고기: 아, 하얀 배. 방금 봤어. 날 따라와.

두번 더 그러자 니모아빠가 화를 낸다. "지금 누굴 놀려?" 파란 고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실은, 내가 건망증이 있어"

 

재미있지 않은가? 상어들이 나오는 장면도 재미있다.

상어1: 상어는 더이상 나쁜놈이 아니다. 물고기들의 친구다! 지난 주 어찌 지냈는지 발표해 봐라.

상어2: 난 지난 사흘간 채식만 했어.

상어1, 3: 와, 대단해!

이런 식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파란고기가 지느러미를 다쳐 피가 난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1,

"내일부터 착한 상어 되고, 지금은 물고기를 먹을거야!" 하면서 니모와 파란고기를 쫓는다.

 

친구들이 포커를 치자고 해 보다 말았는데, 사실 난 포커보다 니모를 끝까지 보고 싶었다.

다행히 패가 잘 뜨는 바람에 9만원 정도를 따서 아쉬움이 조금은 줄어들었지만, 기회가 닿으면

비디오로 나머지 부분을 볼 생각이다. 커다랗고 선명한 TV로 보다가 내방 TV로 보면 재미가

없을 것 같긴 해도 말이다. 하여간 그 영화를 보면서 헐리우드의 무서움을 다시금 느낀다.

저렇게 재미있게 만드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게 아닌가.

 

* 포커를 한번 잡은 적이 있다. 다른 친구는 9 풀하우스였는데, 내가 막판에 만원을 치자 그녀석이

2만원을 친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2만원 받고 3만원 더 쳤겠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2만원만 받고 패를 보여줬다. 그 친구는 그 이후부터 줄곧 잃기만 하더니 나중에 십만원 넘게

잃었다고 개평을 달란다. 역시 포커는 한방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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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지 정신
국민작가로 불리는 이문열은 90년대 들어 이렇다할 작품을 내지 못했다. '선택'같은 작품은 작품의 재미에 의해서가 아닌, 페미니즘 논란의 쟁점이 된 뒤에야 겨우 베스트셀러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문열의 연간 수입은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80년대와 비교했을 때 별로 줄어든 게 없다. 왜 그럴까? 바로 민음사에서 펴낸 '삼국지' 때문이다.

박종화의 삼국지에 비해 이문열의 그것은 자의적 해석이 깃들여져 읽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래서인지 이문열은 방대한 삼국지 시장의 70% 이상을 석권하고 있고, 그게 이문열이 누리는 부의 원천이 되고 있다.

삼국지 시장이 이렇게 커진 건 92년인가 대입수석을 했던 학생이 논술준비를 위해 삼국지를 읽었다는 보도가 나가고 나서부터이다. 지금도 삼국지 광고카피에는 '삼국지로 논술준비를!'이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난 삼국지를 총 5번 읽었는데, 삼국지와 논술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삼국지보다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지은 '월든'이 훨씬 논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들어 삼국지 열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문학권력'(강준만/권성우 공저)이란 책의 한대목이다.
"외국의 학생들이 조화와 협동을 배우는 동안 우리학생들은 권모와 술수,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기 바쁘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경쟁에서 이기는 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입시제도 자체가 친구를 적으로 돌리는 무한경쟁의 장인지라, 우리 청소년들이 협동이라는 덕목을 배울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2. TGI와 삼겹살
어제 친구들과 그 식솔들을 데리고 TGI에서 식사를 했다. 거길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TGI, 베니건스, 칠리스 등의 미국식 레스토랑에서는 여러 사람이 여러개의 음식을 시켜 조금씩 나누어 먹기 마련이다.
'네가 seafood를 시켰으니 나는 콤비네이션 스테이크를 시키고, 너는 치킨샐러드를 시켜라"
냉동육의 유해논쟁을 떠나서 미국 애들은 식사를 할 때도 이렇게 '조화와 협동'을 온몸으로 배운다.

TIG가 미국 외식문화의 상징이라면, 우리 음식의 대표는 당근 삼겹살이다 (불고기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TGI와는 달리 삼겹살은 무한경쟁의 장이다. 내가 익혀놓은 고기를 남이 먹고, 남이 찍은 고기를 내가 가로챈다.
"왜 나만 뒤집냐?"는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고, "숨좀 쉬면서 먹어라"는 핀잔이 오간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더많은 고기를 먹기 위해 채 익지도 않은 벌건 고기를 씹지도 않고 그냥 삼킨다. 조화와 협동이 발을 붙일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허기진 배를 움켜쥔, 경쟁에서 진 사람의 "고기 더 할까?"라는 물음은 배불리 포식한 승리자에 의해 거부되고, 서로간에 남은 건 앙금 뿐이다. 그걸 해소하기 위해 2차를 가고, 3차를 간다. TGI서 나온 외국인들이 곧장 집에 가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장면이다. 우리의 삼겹살 문화에도 삼국지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셈이다 (공교롭게도 둘다 '삼'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요즘들어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난 패미리 레스토랑은 우리에게 조화와 협동의 정신을 심어줄 것인가? 아직은 그런 효과가 나타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삼국지정신으로 무장한 채 TGI에 간다면 삼겹살을 먹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얼마전 베니건스에서 일어난 집단 패싸움은 우리가 아직도 60년대의 허기진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레 실망할 일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조화와 협동이 성공적으로 착근하기 위한 진통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깐.

우리의 외식시장을 송두리째 외국계 업체에 빼앗긴다는 국수주의적 접근을 버리고, 그들의 문화로부터 좋은 점을 취하는 자세가 필요한 대목이다. TGI처럼 '조화와 협동'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우리 음식이 만들어진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겠지만.

* 베니건스 패싸움 사건은 글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가공된 사건임을 밝힙니다.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지만 번번히 그런 유혹에 굴복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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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인사동에 있는 '학교종이 땡땡땡'이란 술집(전유성 씨가 주인이다)처럼 어린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런 술집인데, 옛날 우리가 쓰던 책상들이며, 그시절 노트로 만든 메뉴판 등이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벽쪽에는 낡은 초등학교 교과서들이 놓여있다. 그당시 우리가 뭘 배웠을까 하면서 6학년 도덕책을 폈다. 그중 날 씁쓸하게 만든 한 대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눈이 많이 오는 날, 집배원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눈도 오고 날도 추우니 오늘은 우리집서 자고가시죠" 집배원은 두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돌릴 편지가 많이 남았습니다".....다음날 아침, 길을 가다보니 그 집배원이 손에 편지를 쥐고 죽어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배원은 자기 할일을 하다 죽어간 거란다"]

이 시점에서 난 이게 '도덕책'이 맞는지 다시한번 표지를 봐야 했다. 1984년도 꺼던데, 지금부터 불과 20년 전에는 이런 게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휘어잡았나보다.

'자기희생'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하지만 그걸 사회구성원들에게 암암리에 강요하는 건 국가의 폭력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가치는 아무것도 없다. 집배원의 편지를 하루 늦게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큰일 날 껀 없다. 큰일이 난다해도 자기 목숨까지 버리며 편지를 배달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 그 아버지라는 인간은 "할일을 다하다 죽었다"며 그를 칭송한다.

이 책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2차대전 당시의 '가미가제 특공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땅에 태어난 게 아니라, 진중권 씨의 말처럼 "그냥 우연히" 태어났다. 국가의 이익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인은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조작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죽은 이승복은 맹목적인 반공교육이 낳은 희생자다. 그 어린 아이가 공산당이 뭔지 알고 그렇게 말했을까? 그런 걸 말리기는커녕 동상을 세우고 교과서에 수록함으로써 그를 찬양하는 것 역시 '가미가제' 이데올로기에 다름아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만을 받아 왔기에 우리는 아직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자각과 성숙이 덜된 게 아닐까? 국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개인의 행복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1984년으로부터 18년이 지났다. 군사독재는 종식되었고 민간정부가 들어섰으며, 사회 각 부분에서 더디긴 하지만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다. 지금의 도덕교과서는 그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요즘의 6학년 도덕교과서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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