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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났을 때는 사위에 눈이 그쳐 있었고, 세상은 안으로 조금씩 더 젖어가고 있었다. 창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다, 책 속의 명화들을 바라보다… 그럭저럭 행복한 휴일이었다]

카이레님이 쓰신, 최영미의 <화가의 우연한 시선>에 대한 마이리뷰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멋진 시작에, 리뷰 제목도 쿨하게 "그림, 생으로부터 발신되어온 모티브"다. 이것만 그런 게 아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서평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설을 덮고 난 후 읊조리었다, 그렇지, 유쾌한 패배로다, 우리의 인생은!"

<나쁜 남자, 착한 여자>의 서평 첫머리, "이만교의 미덕은 재밌게 쓸 줄 안다는 것이다. 이런 미덕은 김영하도, 은희경도 지닌 것이다. 이 세 작가의 특징은 현실을 문학적 분위기로 치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과 일상, 인간 내면과 인간 관계 같은 것들을 싸그리싹싹 그 밑바닥까지 훑어내버린다"

 

카이레님의 글을 보면서, 난 서평이 쓰기 싫어져 버렸다. 왜? 1단계: 그래, 서평은 저렇게 써야돼! 2단계: 그럼 내 서평은 서평도 아니네? 3단계: (문천식 버젼으로) 나 안해! 나 안해!

해도 안될 때 사람은 포기하게 되는 법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서평쓰기를 중단하지 않는 이유는 10편당 한장씩 지급되는 상품권 때문이다. 어쩌면 70위권을 달리고 있는 내 서재 점수의 상승을 바라서일 수도 있다. 못쓰는 서평이지만 열심히 쓰다보면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한 적도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기대는 접은 상태다.

 

사실 난 서평을 어찌 써야 하는지 모른다. 배운 적도 없다. 어려서 내야 하는 독후감은 죄다 책 뒤에 붙은 해설을 베껴서 냈고, 그나마 책은 읽지도 않았다. 그러니 내가 서평을 잘쓰면 그게 이상한 거다. 서평을 쓸 때는 줄거리를 쓰면 안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그게 다다. 도대체 뭘 써야 할지, 책을 읽고 나면 쓸말이 없어 고민이다. 남들은 2천자가 적다면서 두편으로 나누어 서평을 게시하기도 하는 모양이던데.... 그래서 난 나 나름의 방식으로 서평을 쓰고 있다. 예컨대 내가 얼마전에 쓴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서평을 보자. 난 이 책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이 책은 '미남 주변에는 이쁜 여자가 꼬인다. 하지만 이쁜 여자를 너무 밝히면 망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냉정하기 짝이 없는 알라디너 여러분들은 이렇게 내 서평을 응징했다.

"4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

 

이 책은 원래 어떤 내용인지 알기위해 다른 분의 서평 두개를 인용한다.

-'내 삶이 내 것이기도, 내 것이 아니기도 하다면..그럼 기왕이면..'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우리는 친밀했던 이들의 존재를 그들과 관련된 '기억'으로서 확인받고,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의 존재는 그들에 관련된 '기록'들로 확인받는다...환상의 책>에는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이의 어깨를 조용히 다독거리는 듯한 따뜻함이 배어있다.

 

보라. 미남, 이쁜 여자 하는 얘기는 언급되지도 않고, 다들 존재가 어떠니 하는 얘기뿐이다. 사실 나도 그런 말을 하고 싶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표현이 안되는데. 나도 좋아서 저런 서평을 쓴 건 아니란 말이다.

역시 최근에 쓴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의 시작 부분을 보자.

"이 글의 작가는 외과 레지던트다. 우리나라의 레지던트들은 박봉에 무지하게 바쁜 일상을 영위하느라 책을 쓸 여력이 전혀 없을 테지만, 미국의 레지던트는 좀 다른가보다"

작가의 직업을 말하고, 봉급이 어떻고.... 카이레님이 쓴 "사위에 눈이 그쳐 있었고"와 그야말로 천양지차 아닌가. 이런 서평을 계속 써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이페이퍼만 쓰면 이상하니까, 가끔 리뷰도 써야지. 내가 쓴 리뷰를 읽는 분도 괴롭겠지만, 쓰는 나는 더 괴롭다. 나도 서평을 잘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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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2-13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안해! 나 안해!..ㅋㅋ

ps 라플라니스꽃님의 서평도 감동의 물결~

진/우맘 2004-02-13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이레님의 서평도 좋지만, 마태우스님의 글도 좋습니다.
환상의 책 리뷰를 응징한 분들은, 마태우스님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발한 분인지 몰라서 그런 걸거예요. (아마 단순히 폴오스터의 안티세력...쯤으로 이해한 거 아닐까요?)
제가 님에게 처음 반한 문장이, 페이책 글 중 <왜? 안 이쁘니까!> 였는걸요!

그리고...<알라딘 리뷰 중 제일 추천을 못 받은 리뷰>같은 기록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면, 그거 기분 나쁠까요? ^^;;;;;

chaire 2004-02-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 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칭찬해주신 걸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전 마태우스 님의 리뷰가 훨씬훨씬 좋습니다. 아무래도 괜히 제 글 인용하면서, 역시나 유쾌한 글쓰기를 보이시는 마태우스 님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 같은데요?^^. 하룻만에 접속했다가 이상한 얘기가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암튼 전 마태우스 님의 '환상의 책' 리뷰 읽고는 그 명쾌한 독후감에 혀를 내두르며 뒤집어졌답니다. 지금처럼 독특한 개성이 번뜩이는 리뷰... 지속적으로 올리지 않으시면... 저를 두 번 죽이는 겁니다(아이고 썰렁해라^^)

도서관여행자 2004-02-1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하자면, 어제 리뷰를 쓸 때, 너무 귀찮아서 쓰기 싫어졌는데, 마태우스님의 유쾌하고 정력적인 리뷰와 페이퍼 들을 떠올리며 꿋꿋이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답니다. ^^ 마태우스님은 좋은 스승이고 벗입니다.

.... 저도 옛날에 학교에서 검사받을 일기 대충 채울려고 책 뒤에 해설을 베끼곤 했죠! ㅋㅋㅋ

Arch 2004-02-13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훅~ 마태우스님의 리뷰를 많이 읽진 않았지만, 인간 본성이야 어찌됐든 글은 참 순진하게 쓰는듯 싶어요. 그리고~ 그러함이 살랑 꼬리를 쳐서 여성 알라디너에게 어필하는게 아닐까요. 물론 의도하시는건 아니겠지만. 흡.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해요~ 이왕이면 상품권 5만원에 도전하는건 어떠실지.

만월의꿈 2004-02-1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는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죠ㅠ-ㅠ; 나도 동참할까요? 나 안해~ 나 안해~!!
마태우스님 스스로는 못 느끼시겠지만, 마태우스님 역시 저에게는 우상이십니다..

digitalwave 2004-02-13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알라딘 리뷰어 분들이야... 정말 대단하죠... 덕분에 알라딘 리뷰 쓸 적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나 안해~ 나 안해~"라고 절규하고 그냥 책소개만 줄창 해버린 편집팀 직원도 있답니다. ㅠ.ㅠ

마태우스 2004-02-1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맞아요. 라스꼴리니꽃님의 서평도 대단하지요.
진우맘님/이런 글을 쓰면 한분 정도는 추천을 해주실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7분 중 한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로 나오는군요. 한분은 해주셨지만, 흐흐흑...

마태우스 2004-02-14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 스스로도 썰렁하다고 하셨지만, 유머 면에서는 제가 카이레님보다 조금 나은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하나라도 나은 점이 있어서요^^
ExLibris님/부끄럽습니다. 스승보다는 '벗'을 택하렵니다.

마태우스 2004-02-1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개속 토끼님/앗!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성 알라디너에게 어필'하는 게 사실입니까? 호호호,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김미연 버전으로) 앞으로도 계속 순진한 척 해야지~~~
만월의 꿈님/ 우상이라니, 부끄럽게 무슨 그런 말씀을! 알라딘에 대단한 분이 많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digitalwave님/호호, 그런 일도 있었군요. 알라딘 리뷰가 없어진 게 그래서였네요.

digitalwave 2004-02-1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리뷰를 잘 안 썼다는 거지, 알라딘 리뷰가 없어지진 않았습니다. 메인 첫 화면에 보이던 걸 추천도서 코너로 위치를 옮긴 겁니다. 거기로 가보시면 아직 그대로 있답니다. ^^

마태우스 2004-02-14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 그렇군요. 부끄럽습니다...

가을산 2004-02-1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제 리뷰가 딸랑 두 개인 이유.
첫번째 리뷰: 서재가 열리기 전에 어려서 읽었던 '끝없는 이야기' 재출간이 반가워서 씀. (아무도 안보는건 줄 알고)
두번째 리뷰: 서재가 열렸는데, 첫 화면에 동화책 리뷰가 뜨는거다. 첫번째 리뷰를 가리기 위해 하나 더 씀.
그 이후로는 부끄러워서 더이상 못 씀.
 

 

 

 

 

 

영화 <스토커>는 로빈 윌리암스가 자신이 동경하던 가족의 구성원을 괴롭히는 내용이다. 앞부분을 못봐서 왜 괴롭히는지 모르겠는데, 네이버를 찾아보니 이렇게 되어있다. "...욜킨 가족에 얽힌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한다. 극도로 분노한 그는 직접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짜고 윌을 추적하는데..."

영화 뒷부분으로 추측컨대 그가 충격을 받은 건 아마도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해서가 아닐까 싶다. 칼을 들고 밀회현장에 찾아간 로빈이 둘의 성행위 장면을 열심히 카메라로 찍는 걸 봐도 그렇다. 로빈이 경찰에게 모든 걸 고백할 때, 갑자기 방에서 나오신 우리 어머니가 말을 시키는 바람에 사건의 동기를 듣는 데는 실패했는데, 좌우지간 경찰은 그에게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내 추측이 맞다고 하자. 홀로 외롭게 살아가며 "사진 속에서 더없이 행복한 표정의 그들을 보며 자신이 단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행복을 공유하고 싶어"했던 로빈으로서는 남편의 배신에 "있는 놈이 더하다"는 생각을 했던게다.

스토커가 무서운 것은 이런 거다. "..밖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고, 그때마다 그가 자신은 물론 남편 윌과 아들의 사소한 일상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점차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다. 누군가가 내 히프에 반점이 있는 걸 알고 있다면-사실은 없다-얼마나 무섭겠는가? 경찰이 로빈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이게 보통 사건이 아닌 걸 파악하게 된다. 벽면을 가득 메운 수백장의 사진들은 모두 욜킨 가족들을 찍은 거였고, 그 중 남편의 얼굴은 하나같이 칼로 긁혀 있었으니까. 그 증오심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불러일으킨다.

이거야 같은 남자끼리니까 좀 낫지만, 문제는 애정을 빙자한 스토커다. 진정한 사랑과 스토킹의 경계가 애매한 것도 사실이지만, 싫다는 여자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근댄다면 그건 스토킹이 아닐까? 여자의 거절은 "예스"라는 사회통념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걸 부추기는 데 있다. [...<졸업>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스토킹이 숭고한 사랑으로 포장되고, 결국 그는 캐서린 로스를 얻는다....반면 여자가 그렇게 하면 그녀는 미친 여자거나 살인자다. <위험한 정사>, <어둠 속의 벨이 울릴 때>, <위험한 독신녀> 등등...(범죄신호, 284쪽)]

하여간 가빈 드 베커의 명저 <범죄신호>에 따르면 스토킹시 최선의 방책은 아예 상대를 안하는 거란다. 다음 말을 기억하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남자들은 거절할 줄 모르는 여자들을 선택한다(291쪽)" 그러니까 애매하게 거절할 게 아니라, 단호하게 거절한 뒤 상대를 안해버리는 게 좋단다. 이렇게 말이다. "난 당신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확신해요!" 이 말 이외의 어떤 말도 스토커에게 관계를 계속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뭐든지 지 맘대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을 하며, 끈질김과 집요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경찰은 전혀 도움이 안되며,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스토킹을 당한 적이 몇번 있다. 니가? 그것도 몇번이나? 하고 놀라겠지만 진짜다. 외롭게 혼자 살던 남자가 있었구, 나머진 여자다(한번은 96년인데...). 기간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그땐 정말 괴로웠다. 남자인 나도 그런데 여자는 더욱더 괴로울게다. 당시엔 <범죄신호>를 읽지 않았었지만, 난 나도 모르게 책에 나온대로 행동을 했던 것 같다. 그/그녀에게서 걸려온 전화/삐삐는 아예 무시했고, "제발 그러지 말라"는 말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을 외면하니 그들은 더이상 날 괴롭히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떠나가니 좋았다. 금방 그만둔 걸로 보아 그다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지금 어디서 뭘하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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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1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직접 스토킹을 당하셨다니...무섭지 않으셨나요?? 여자분은 애정공세라고 하면...외로운 남자분은 무슨 이유로...^^; 이 글을 보니, 유명인들을 쫓아다니는 거미여인이 생각나네요. 첨엔 웃으면서 봤는데, 나중에 무슨 취재한걸 보니 왠지 오싹하던데...

마태우스 2004-02-1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처음에는 짜증이 나다가, 나중에는 얘가 날 죽이러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111 2011-05-1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금방 그만둔걸로 보아 그리 나쁜사람들이 아니...라니요?ㅋㅋㅋㅋㅋㅋ 정말 착하시네요 그게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스토커라면 "난 당신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어요" 이런 소리 씨알도 안먹힘ㅋㅋㅋ 전 당해본적은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네요
 

 

 

 

 

 

앤티크님이라는 분이 계시다. 뿔달린 사슴(순록?)이 그분의 마스코트인데, 앤티크님이 쓰신 코멘트를 보다가 이런 답글을 달았다.
"어머님께 노경이나 해드리고 싶네요"
앤티크님: 노경이 뭐죠?
나: 노경을 모르시다니...저희 집만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사슴뿔을 노경이라고 하지요. 사슴뿔이 보약이잖습니까???
앤티크님: 헛...사슴뿔을 노경이라고 합니까!! 사슴뿔을 썰어논 약재를 녹용이라고 하는건 알지만...^^;; 혹시 노경=녹용일까요?? ㅎㅎ

그랬다. 사슴뿔은 '녹용'이었다. '노경'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날 비웃었을까 생각하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노경을 모르시다니"라고 잘난 체만 안했으면 조금 나았을텐데. '노경'뿐만이 아니다. '배게'인지 '베개'인지, '육계장'인지 '육개장'인지, '목욕재계'가 맞는지, 헷갈리는 단어들이 너무 많다. 언젠가는 "여관에 묶다"라고 썼다가 지탄을 받은 적도 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맞춤법을 틀리는 어른들을 맘 속으로 비웃곤 했었는데, 이젠 내가 그 꼴이 된 거다. 글을 쓸 때 오자에 민감한 나지만, 무지에서 비롯된 오자는 고칠 수도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가지 이유는 고교를 졸업한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거다. 졸업 당시만 해도 맞춤법을 대충 다 알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고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줄어들면서 정확한 철자에 점점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인터넷은 교정 기능이 전혀 없어서, 말도 안되는 단어를 써도 글 등록이 된다. 한글만 해도 틀린 글자를 치면 자기가 알아서 고쳐 버리거나 빨간 줄을 긋는데 말이다. 또하나. 맞춤법이 자꾸 바뀌고 있는 것도 바른 철자를 쓰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했읍니다"가 맞았고, "아름다와(이게 모음조화인가 그랬다)"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했습니다"고, "아름다워"다. 쓰기 편하게 한다고 바꾸는 맞춤법 표기안이지만, 나처럼 재교육을 받을 길이 없는 사람에겐 그게 더 불편하다.

그런데 꼭 그렇게 슬퍼할 것만은 아닌 것이, 요즘 젊은 아이들의 맞춤법은 더 엉망인 것 같아서다. 그들은 난이도가 높은 글자를 틀리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의 철자를 틀린다. "안냐세요"처럼 인터넷 용어로 정립된 거야 이해할 수 있어도, 정말로 몰라서 틀린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다. 모 신문 독자마당에 오른 글의 일부다.
[정~말 실타 시러~  총선 투푯날 몇달 남지두 안았는데 고새를 못 참고..]
'실타시러'는 인터넷 용어로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안았는데"와 "투푯날"도 일부러 그리 쓴걸까? 이건 그래도 양호한 편이고, 진짜 젊은 아이들은 온갖 이모티콘과 기호를 조합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로 글을 쓴다. 일부에서 제기되는 '한글파괴' 주장에 동조할 마음은 없지만, 사소한 오자도 부끄러워하는 나와 달리 그들 세대는 맞춤법이 틀리는 걸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처음엔 장난이라도, 자꾸 하면 나중에는 못고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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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1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카이레님의 서재에서 <언문세설>이라는 책의 리뷰를 발견하고는 제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무릎을 쳤더랬죠. 얼른 사서 얼른 읽고 마태우스님에게도 적합한 처방전 같으면 얼른 권해드리겠습니다. 물론...그 얼른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요.^^
그런데...나도 나지만, 마태우스님도 심하게 서재에 붙어계시는군요.ㅋㅋ 밥은 드셨는지.

비로그인 2004-02-1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제이름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답니다. 근데 정말루...노경=녹용이었군요?? 전 사실 '노경이라는 것을 모르다니...너무 무지한 것일까'라고 진지하게 고민했더랬는데...^^ 저두 예전엔 맞춤법 꽤나 정확하고 했었는데, 지금은 뭐가 맞는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인터넷을 하게 되면서, 쉽게 글을 쓰고, 발음나는 대로 적고, 이런 것들이 너무 습관이 되서 그런가봐요.

mannerist 2004-02-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 선생의 언문세설... 맞춤법과는 좀 거리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냥 그분의 글 속에서 두어 시간 허우적댄 기억밖에 안 남네요. ㅋㅋㅋ

진/우맘 2004-02-1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어제 주문했는데TT
뭐, 꼭 맞춤법을 기대한 것만은 아니지만요.

chaire 2004-02-1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맞춤법하고는 거리가 좀 있어요... 어쩌죠? 괜실히 죄송... 그래두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저 고종석의 산문 읽는 기분으로 읽었거든요...

마태우스 2004-02-14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 책을 읽어야 할지 혼란스럽네요. 찬성쪽이 진우맘님, 카이레님, 반대쪽이 매너리스트님, 2: 1이니 읽어야 쓰겄네요 (매너리스트님께 죄송)
 

 

 

 

 

 

 

 

* 이 글까지 올리면 제가 뭐하는 놈인지 다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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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인터넷에 쓴 고백수기의 일부다.
[초등학교 때 기생충에 걸렸었다....똑똑 끊어져 대변에 섞여 나오기도 하고 수업 중에도 항문을 간지럽히며 나오기도 하였다. 회충약 아무리 먹어도 소용없었다. 어느날 아버지의 강요로 석유를 반컵정도 먹었다. 속이 뒤틀려 죽는줄 알았고 몇분 후에 엄청난 설사가 나오면서 그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항문에 걸려있는 그놈을 보고 질려버렸다. 몇미터가 넘는놈이 나왔는데도 아직 또 남았다니...정신을 차린 후 휴지를 대고 한참을 잡아뺐다. 기분나쁜 느낌을 억누르며 몇미터를 더 빼낸 후에 그놈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 기생충은 광절열두조충이라는 기생충으로, 몇미터에 달할 정도로 길다란 몸을 가지고 있는데, 매일같이 끝조각을 외계로 내보냄으로써 자손을 전파시킨다. 이것은 조충(촌충)에 속하므로 회충약을 백날 먹어야 소용이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아버지가 그 조각을 들고 병원이나 인근 대학의 기생충학교실을 찾았다면 약 한알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아들은 석유를 마셔야 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마음이 아프다.

이 아버지가 병원을 찾지 않은 이유는 뭘까? 회충약을 먹인 것으로 보아 기생충은 약에 잘 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맞다. 기생충은 대부분 약에 잘 듣는다. 하지만 아무리 먹여도 낫지 않는다면, 석유를 먹이는 대신 병원에 데리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닐까?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기생충을 부끄러운 병으로 생각했을 테고, 병원에 가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했을게다. 이 아버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을 자신과의 싸움으로 생각한다. 이 기생충에 걸린 또다른 사람은 "좋다! 한번 싸워보자!"며 석달 동안 별 짓을 다 했단다. 온갖 요법을 다 썼지만 기생충은 몸 안에 그대로 있었는데, 그는 결국 내가 준 프라지콴텔 한알을 먹고서 벌레를 퇴치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이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부끄럽고 해서.. 제가 이것 때문에 그동안 잠을 못잤어요"
이해한다. 길다란 벌레가 몸 안에 있는데 잠이 오겠는가. 문제는 왜 그런 걸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는가다. 그건 아마도 기생충이 더러운 것이며, 못사는 사람의 질병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일선 학교에서 채변검사를 의무적으로 했던 어린 시절, 기생충에 걸린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영화 <클래식>에서도 누군가가 산속에 싸놓은 대변을 제출한 주인공이 온갖 기생충에 다 걸렸다며 담임으로부터 놀림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경험들이 머리 속에 각인되어 기생충에 걸리는 걸 죄악시해온 게 아닐까? 감기에 걸린 게 부끄러운 게 아니듯, 기생충에 감염된 자체가 지탄받아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생충이 성병보다 더 말하기 곤란한 질병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기생충이 못사는 사람들의 질병이라는 건 이미 옛날 일이고, 지금 유행하는 기생충들은 생선회나 육회같이 비싼 음식들을 통해 전파된다. 그러니 기생충에 걸렸다는 건 자신이 인텔리임을 입증하는 증거일 터, 부끄러워하지 말고 전문가와 상담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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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1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충에 대한 올바른 대처방법인 것 같은데, 제시된 예는...아찔하구만요...ㅎㅎ

가을산 2004-02-1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TV 프로에서 돼지의 X을 받아 다가, 그것도 친구 몇이 '의리'를 팔며 나누어달라고 해서 나누어 냈다가 '콜레라'에 걸렸다며 격리되어서 혼났다는 독자 체험이 연상되는군요. ^^


마태우스 2004-02-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석유라니 좀 엽기적이죠?
가을산님/그런 일도 있었나요? 호호호.
 

 

 

 

 

 

지난 일요일, <천국의 계단> 마지막회를 재방송으로 봄으로써 20회에 달하는 긴 여정이 끝이 났다. 인터넷으로 본 게 15회고, TV로 본 건 다섯번이다. 뭐가 하나 끝나면 아쉬움 같은 게 남아있을 법도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말이 안되도 너무 안되는 게 많은지라 짜증이 팍팍 났는데, 한번 본 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이상한 성격 때문에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건 다 16부작인데, 이건 왜 20회나 한담?"이라며 불평도 해가면서. 원래 일년에 하나꼴로 드라마를 보는 나지만, 이번 드라마를 너무 힘들게 봐서 그런지 당분간 드라마는 안하려고 한다. 악평도 있지만 호평이 더 많은 <발리에서 생긴 일>을 안보려는 건, 이미 늦기도 했지만 <천국>의 후유증 탓이 더 크다. "어쩌면 그가 나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덜 사랑했다는 건 아니다..." 피아노 치는 권상우는 멋지지만,  끝까지 이런 말장난을 하다니!

옛날만 해도 난 드라마 보는 걸 끔찍히 싫어했다. 남자 친구들이 드라마 얘기를 하면 "인간이냐"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내 눈이 워낙 작아서 뜻이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랑이 뭐길래>같은 장안의 화제작에도 난 초연했다. 그러던 내게 드라마가 볼만한 거라는 걸 가르쳐 준 건 바로 <미스터 큐>였다. 허영만의 원작만화를 읽었던 터라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봤는데, 정말 재미있게 봤다. 송윤아의 악녀 연기가 일품이었던 기억도 나는데, 그건 내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 중 역대 4위에 올라있다.


3위는 <진실>. 최지우와 지금은 뭐하는지 모르겠는 유시원이 나오고, 박선영의 악녀연기가 압권이었던 드라마다. 박선영이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난 지금도 그녀가 싫고, 볼 때마다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거 때문에 월요일, 화요일이면 술약속을 안잡으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2위는 <명랑소녀 성공기>. 가수 장나라가 나오긴 했지만, 난 사실 장혁 때문에 그 드라마를 봤다. 권위적이기 짝이없던 그가 가끔씩 양순이(장나라)에게 보여주는 친절이 너무도 따뜻해 보였고, 귀공자풍의 그가 쫄딱 망하니까 몇배는 더 불쌍해 보였다. 조형기 등 조연들의 열연도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드는 이유였는데, 끝에 가서 갑자기 장나라가 군대를 가느니 하는 바람에 김이 새기도 했다.


영예의 1위는....<위풍당당 그녀>! <굳세어라 금순아> <봄날의 곰을...>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 등 배두나가 나오기만 하면 몽땅 망하는 영화와는 달리, 그 드라마는 최고의 시청률을 보여주며 날 흠뻑 빠지게 했다. 탄탄한 줄거리와 배두나, 신성우의 멋진 연기가 돋보이는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가 끝났을 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그럼 <천국>은 5위냐, 절대 그렇지 않다. 위에 열거한 드라마들은 그래도 줄거리가 말이 되는 편이었고, 결말도 그럴 듯했다. 그런데 <천국>은 그게 아니잖는가. 신현준은 막판을 빼놓고 시종 짜증만 났고, 최지우는 맨날 울고있고, 권상우는....폼만 잡는다. 뻑하면 뛰고, 안뛸 때는 울어댔다. 이런 드라마가 40%의 시청률을 기록한 건 매우 수상쩍은 일이다. 순위고 뭐고, 내가 고른 드라마가 늘 성공만 하는 게 아니라는 쓰라린 경험을 내게 안겨준 드라마로 기억할 거다. 영화에선 <낭만자객>, 드라마에선 <천국>. 그래도 한가지 느낀 건 있다. 권상우가 폼잡을 때 하는 것처럼, 뒤에 애들을 거느리고 걷는 게 참으로 멋있다는 것. 여섯명 정도가 모였을 때 한번 해봐야겠다. 내가 가운데 서고, 애들을 뒤에 서게 하고... 그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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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12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 검은 양복 빼입은 사람들이 뒤에 서고 중앙에서 바바리 코트 자락 휘날리는...그런 모드 같은데...
바바리 코트 자락이 멋지게 휘날리려면 최소한 175cm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정쩡한 친구들 모아놓고 그런 행동을 하면...ㅋㅋㅋ 마태우스님이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봐 저도 가슴이 뜁니다.

chaire 2004-02-1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로 '악녀'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좋아하시는군요... ^^ ... 위풍당당 그녀!는 정말 멋진 드라마였어요!

마태우스 2004-02-1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제가 선악구도를 좋아합니다^^ 한번만 봐도 내용파악을 다 할수가 있잖아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앞집여자>를 빼먹었더군요. 그거 5윕니다.
진우맘님/저 키 176cm어요. 집에 바바리도 있구요. 그러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mannerist 2004-02-1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제 드라마 베스트 5... 를 꼽아보니 쉽지 않네요. 잡히지도 않고. 제대로 본 드라마가 드문 탓에. 하여간 대번에 생각나는 건, 노희경 작가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드라마 보다 울 뻔한 건 이거 뿐), 거짓말. 두개가 생각나네요. 아직까지 우.정.사 만한 드라마 못 봤습니다. 지금도 꽃보다 아름다워를 즐겁게 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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