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시작되었다 - 박근혜-최순실, 스캔들에서 게이트까지
이진동 지음 / 개마고원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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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한발짝 더 내디딜 수 있었던 건 조선의 선행보도가 거대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2016년 9월, 한겨레신문 김의겸은 조선일보에게 이례적인 편지를 쓴다. 자신들이 애써 찾은 국정농단의 퍼즐들이 조선에서 이미 보도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정권의 반격으로 추가적인 보도를 못하는 상태였는데, 김의겸의 공개편지는 그러니까 “묵혀둔 자료를 보도하던지, 안할 거면 우리라도 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우리가 다 알고 있다. 한겨레와 경향의 참전으로 국정농단에 관한 의혹이 재점화됐고, 그 불길은 JTBC의 태블릿PC 보도로 마침표를 찍는다. 한겨레와 JTBC의 공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도 국정농단에 관심이 없던 시절,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불을 지폈던 TV조선이 아니었던들, 평창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지겹도록 봤던 최순실의 의상실 CCTV와 지하주차장의 영상도 TV조선이 이룬 집념의 산물이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바로 국정농단을 가장 먼저 취재한 TV조선 펭귄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펭귄무리가 사냥을 할 때 포식자가 무서워 바다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만, 한 마리의 용감한 펭귄이 뛰어들면 다들 뒤를 따른단다. 그러니까 TV조선은 국정농단의 퍼스트 펭귄이었다. 당시 이야기를 워낙 박진감 있게 기술해 읽는 내내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는데, 이 기획을 총괄한 이진동 기자가 국정농단에 관한 취재를 시작한 게 2014년이었다는 점이 그저 놀랍다. 

 

조중동이라는 말은 곧 적폐와 동일시된다. 실제 이들의 보도를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많은데, 이건 사주의 방침 탓일뿐, 그 밑에 있는 기자들까지 죄다 기자정신이 없는 건 아닐지 모른다. 중앙일보와 출신성분이 같은 JTBC의 성공도 이를 입증하지만, 국정농단을 취재한 TV조선 취재팀 역시 기자정신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이진동의 지시로 안종범 수석을 인터뷰한 정동권 기자의 취재노트를 보자.

갑작스런 지시였지만 놀라지도, 되묻지도 않았다....이날은 취재팀 전원 강제휴무일이었다. 3주간 단 하루도 쉬지 못해 기진맥진한 후배들을 위한 부장의 처방이었다....이제 상대는 청와대였고, 외곽이 아닌 핵심을 정조준하는 정면승부였다.” (165-166쪽)

물론 수십년간 기득권을 대변한 조선일보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국정농단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조선일보에 빚을 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저자인 이진동도 여기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고 할 때, 한겨레와 경향이 물을 99도까지 끓게 했고, JTBC가 나머지 1도를 채운 것은 맞지만, “최초로 불을 지핀 건, 제로에서 1을 창출해 낸 건 바로 TV조선 펭귄팀이었다.” (6쪽)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느끼는 건 제도권 언론의 필요성이다. 문대통령을 열심히 지지하는 분들은 기자를 ‘기레기’라고 부르며 언론 따윈 없어도 된다고 말하지만, SNS가 언론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제도권 언론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취재에 나서는 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최순실의 지하주차장 장면을 촬영한 기자의 취재노트를 인용한다.
[당시는 연일 폭염 특보가 발령됐다...지하 5층 주차장에는 바람 한줌 내주지 않았다...젊고 덩치 큰 경비원들은 삼엄한 눈빛으로 수시로 주변을 돌았다. 나와 민봉기 기자가 숨을 곳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주차장에 마련된 화장실과 창고가 전부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매일 몇 시간씩 최순실을 기다렸다. 경비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지독한 더위와 극한의 긴장감은 우리를 녹초로 만들었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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