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고교에 강의를 갔다.

외부강사가 왔을 때 수강자를 모집하는 데는 다음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가신청자만 듣게 하는 방법, 두번째가 모든 학생이 듣게 하는 것.


내가 선호하는 건 당연히 1번으로,


원하는 사람만 들으면 아무래도 열심히 듣게 마련이기 때문.


오늘은 아쉽게도 2번이었다.


2학년 전체가 체육관에 모여 강의를 들었는데


더 안좋았던 건 그 학교가 남학교라는 것. 

여학생들은 강사에 대한 배려심이 넘쳐나서

대개 열심히 들어주고, 조금만 웃겨도 웃어주는 등 리액션이 좋은 반면

남학생들은 조금만 아니다 싶으면 그냥 자버린다. 


체육관을 가득 메운 남학생들을 보니까 덜컥 겁이 났고,

안되겠다 싶어 유머 위주로 강의를 시작했다.

애들이 재미있어하자 그 여세를 몰아 하려던 얘기를 했더니

십분도 채 안지나서 애들은 자기 시작했고

조금 있으니까 4분의 3 정도가 잔다.

자는 애들이 너무 많으니까 의욕이 저하돼 마지막엔 주마간산으로 끝내버렸다. 

역시 남고는 좀 무리고, 최소한 남녀공학이라도 돼야 가야겠다 싶었다. 


나중에 담당선생에게서 문자가 왔다.

"시간이 10여분 남아서 애들하고 강연 얘기를 했어요. 

여지껏 들은 것 중 제일 재미있었다고 하네요.... 

눈높이 맞춰주신 샘 강의가 넘 좋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답을 드렸다. 

애들 재워서 면목이 없었다고. 

아직 강사로서 갈 길이 먼 것 같다고.

다시 답이 왔다.

"진짜 아닙니다. 애들이 한시간은 깨어 있었다는 건 기적같은 일입니다."

당연한 거지만 이 문자를 보내준 담당선생님은 여자선생님이다.

내가 만나본 남자선생님들 중엔 이런 배려심을 보여준 분은 극히 드물다.


내가 이래서 여자를 좋아하는 건데, 

얘기를 하다보니 갑자기 모 신문사에 기고하는 칼럼이 생각난다.

내가 쓰는 칼럼이 내 마음에 든 적은 30%도 채 안되고,

부끄럽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냥 이걸로 보낸다는 칼럼이 주를 이룬다. 

칼럼을 보낼 떄마다 메일에 이렇게 쓴다.


"글이 너무 후져서 죽고 싶습니다.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너무 수준낮은 글을 보내네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잘쓰겠습니다."


"정말 잘쓰려고 했는데 면목없습니다. 저 말고 좋은 사람 있으면 언제든 잘라주십시오."


뭐 대충 이런 식의 메일을 보내는데,


이렇게 징징거리는 이유가 "아닙니다. 글 좋습니다"처럼 위로받고 싶다는 거 아니겠는가?


놀랍게도 내 글을 담당하는 분은 아직까지 한 번의 답장도 해주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언젠가 그분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 구절이 근거가 있느냐"는 게 전화건 이유였는데,

그때 난 그 사람이 왜 한번도 답을 안해줬는지 알게 됐다.

그가 남자였던 것. 

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칼럼을 썼고

좀 쉬다가 올해 1월부터 다시 칼럼을 쓰고 있다.

앞의 것을 1기, 뒤의 것을 2기라고 한다면

1기 때 날 담당했던 분은 여자분이었고,

그래서 배려가 무지 많았다.

칼럼의 반응을 알려주기도 했고, 내가 글이 안돼 괴로워할 때마다

따뜻한 위로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좋은 음악을 보내준 적도 있었다.

이래서 내가 여자를 좋아하고, 앞으로 여자가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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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11-17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이에요 ^^

마태우스 2015-11-18 06:16   좋아요 0 | URL
동감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blanca 2015-11-17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남고 반응 너무 재미있네요. 한 시간 깨어 있는 게 기적이라는 말에 혼자 미친듯이 웃었어요.

마태우스 2015-11-18 06:17   좋아요 0 | URL
호호 블랑카님을 웃게 하다니, 기쁩니다. 담번엔 좀 더 큰 기적을 일으켜 보려고요^^

건조기후 2015-11-17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날씨도 꾸물꾸물하고 세상은 더 꾸물꾸물한데 아침부터 웃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태우스님 ㅎㅎㅎㅎㅎ

마태우스 2015-11-18 06:18   좋아요 0 | URL
역시 절 환영해주는 곳은 알라딘인 듯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11-1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격하게 공감합니다.

마태우스 2015-11-18 06:18   좋아요 0 | URL
앗 안녕하셨어요 남자분인데도 엄청난 배려와 내공을 지닌 곰발님...!!

푸른희망 2015-11-1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시간의 기적!!!ㅎㅎㅎㅎ

마태우스 2015-11-18 06:1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애들 자니까 힘이 쭉 빠졌답니다ㅠㅠ 기적을 일으키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건가요...ㅠ

BRINY 2015-11-1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적 맞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저희 학교애들이 특강 때 깨어 있던건 투스타 선배님과 가수 선배님 오셨을 때 뿐입니다

마태우스 2015-11-18 06:20   좋아요 0 | URL
안녕하셨어요 브리니님 투스타는 불가능하고 가수는 음치라서 안되는데, 깨어있게 하긴 어렵겠네요..ㅠ

메이리야 2015-11-19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이 씁쓸한 현실 맞습니다요... ㅎㅎㅎ

교수님 `서민적 글쓰기`너무나 재밌게 봤습니다! 놓고있던 일기쓰기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요^^

앞으로도 쭈욱 좋은 책 많이 써주세요^^

마태우스 2015-11-24 10:38   좋아요 0 | URL
와앗 제 책을 재밌게 봐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지금 그 결심 최소 3년은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님도 멋진 책을 쓰시길!

나비종 2015-11-24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적을 부러워하며~~ㅎㅎ
<비희망자 중딩 대상 강의 레벨>
난이도 1 : 여학생 소그룹
난이도 2 : 남녀 소그룹
난이도 3 : 남학생 소그룹
난이도 4 : 여학생 단체
난이도 5 : 남녀 단체
※ 측정 불가 : 남학생 단체. .
고딩은 4분의 3만 조용히 잠을 자지만,
중딩은 4분의 2는 자고, 4분의 1은 옆자리 인간과 대화를 나누며, 나머지 4분의 1은 자거나 대화 나누는 인간들을 구경합니다. .

마태우스 2015-11-24 10:39   좋아요 0 | URL
남학생 소그룹보다 여학생 단체가 더 어렵다고요. 흠흠,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어요. 확실히 소그룹은 좀 듣고자 하는 열망이 있더라고요. 자발적으로 듣고자 하는 거라서요. 암튼 난이도 정리, 감사드려요. 여기 맞춰서 강의를 조절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