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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에게 고한다 ㅣ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0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사는 천안에서 가장 가기 힘든 곳은 인천이다.
거리로 따지면 더 먼 곳도 많지만,
부산과 울산, 여수 등 웬만한 곳은 다 기차로 갈 수 있는 반면
인천은 오직 버스로 가는 수밖에 없다 (터미널까지만 1시간 반이 걸린다).
버스는 기차보다 몇 배 더 피곤한 느낌을 주는지라
체감상 울산보다 인천이 더 멀게 느껴진다.
어제, 그 인천을 갔다 왔다.
전날 경북대병원 모친상에 다녀온 것까지 겹쳐,
몸살이 나버렸다.
몸이 안좋을 때는 되도록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끙끙 앓는 와중에 전날 읽었던 책 생각을 하며 버티는 중이다.
<범인에게 고한다>라는 책으로,
저자인 시즈쿠이 슈스케는 내가 처음 접하는 작가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어떻게 범인을 잡느냐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 소설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재미를 준다.
제목에 나온 것처럼 TV를 통해 범인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나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내부정보를 흘리는 경찰 내부의 스파이와의 싸움이 더 재미있었다.
그 스파이가 정보를 유출하는 이유는 그걸로 좋아하는 여자를 사로잡으려는 욕망인데,
그런다고 해서 여자가 넘어올 리도 없지만,
이 가느다란 끈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게 남자들의 일면인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점들.
1) 청문회 때 시종일관 ‘모른다’로 일관하는 정치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 대기업 총수가 고위직 공무원이 해명 기자회견에 임하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왜 저런 추태를 보이나 하고 의아했는데, 지금 자신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마음은 이미 자취를 감췄고 이제는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돌변한 뒤틀린 심사밖에 남지 않았다.“ (128쪽)
2) 내가 그렇게까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326쪽을 읽다보니 갑자기 주인공 형사가 이렇게 묻는다.
“아리가는 어떻지?”
질문을 받은 형사가 대답한다.
“최근에는 밖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리가’가 도대체 누구였지? 그새 까먹다니 난 바보야, 바보!
마구 자책을 하다가 할 수 없이 그전 페이지를 다 뒤져가며 ‘아리가’를 찾으려 했다.
다행히도 ‘아리가’는 326쪽에 이르러서야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었고,
그 인물에 대한 정보는 책 맨 마지막에 나왔다.
3) ‘청출어람’의 의미에 대해 새삼 알게 됐다.
주인공이 묻는다.
“남색 (쪽빛)과 청색 (파란색) 중 어느 게 더 진한 색일까?”
이 질문에 부하 형사가 대답한다.
“남색 말씀이시죠? 청출어람이라고, 쪽은 푸른 물감보다 더 푸르다, 라는 말이 있으니 파란색보다 진한 색이겠네요.” (394쪽)
이 구절을 읽고 난 그게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주인공은 나와 부하 형사의 무지를 깨우쳐 준다.
‘청출어람’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이청어람(而靑於藍)’이고,
이걸 종합하면 이런 뜻이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
즉 남색보다 더 진한 건 청색이다.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기시감이 들 수도 있지만,
범인과의 싸움 말고도 공을 가로채기 위해 경찰끼리 다투고,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사랑을 위해 배신을 일삼는 등 인간사의 온갖 면들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소설이니,
장거리 여행을 떠날 분들이 챙겨가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