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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
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알라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6년간 내가 구입한 책은 1658권이다.
1년에 100권 가량으로, 한 달에 열권도 채 읽지 못한다는 얘기다.
산 책을 모두 읽은 게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내 독서량은 더 떨어지는데,
가장 슬픈 얘기는 내가 80까지 살아도 5천2백권을 더 만나볼 수 있단다.
눈이 밝고 체력이 좋을 때 한 권이라도 더 읽자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본다.
또한 이 통계는 내가 제일 즐겨 읽는 분야가 한국소설이고, 2위가 추리/미스터리소설이라는 걸 알려 줬는데,
이 정보를 접하기 전까지 난 추리/미스터리가 내가 제일 선호하는 분야인 줄 알았다.
엊그제 부산에 갈 때 집어든 책도 스릴러에 속하는 <차단>이었다.
이 책은 제바스티안 피체크가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의 자문을 얻어 쓴 스릴러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 놓고도 오랫동안 책장에서 방치돼 있었다.
하지만 책을 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난 이 책에 흠뻑 빠졌고,
그날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을 왕복하는 4시간여 동안 한 순간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 남친이자 변태인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20대 여자가 있고,
자기 딸이 납치된 40대 남성 법의학자가 있다.
딸을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죽은 시체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시체가 하필이면 20대 여성이 피신해 있는 섬에 있다.
그래서 법의학자는 우연히 연락이 닿은 그 여성에게 부검을 의뢰한다.
생전 안해본 부검과 스토커 양쪽을 상대해야 하는 여성 쪽이나,
온갖 어려움을 헤쳐가며 그 섬에 가야 하는 남성이나 어느 쪽이 더 어려운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지경.
책은 마지막까지 스릴이 넘쳤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목이었다.
‘차단’보다는 ‘처단’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책에 나온 의미있는 대목들을 짚어보자.
1) 저자 피체크는 사귀는 남자가 스토커인지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웨이터의 의미 없는 겉치레 인사에 화를 낸다거나, 문자메시지에 더 빨리 대답하지 않는다고 질책할 때에도, 그녀는 그의 사소한 질투심을 단순히 웃고 즐기며 흘려보냈다.” (25쪽)
내가 아는 분 중에도 이런 분이 있었다.
데이트 도중 아는 선배를 만나 잠시 얘기를 했더니 남자가 주저앉아 울더란다.
어떻게 다른 남자와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그 결과 그녀는 매우 힘든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런 단서가 나오면 잘 달래서 헤어지자.
2) “그 늙은 마녀가 그놈에게 3년 반을 선고했어.”(179쪽)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중심에는
십대 여자애를 성폭행한 뒤 죽음으로 몬 파렴치범이 3년 반 징역형을 받은 데 있다.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는데 독일도 마찬가지라는 게 놀라운데,
혹시나 안믿을까봐 피체크는 책 맨 뒤에 실제 판결 사례들을 적어놨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동 성폭행범은 재범을 저지를 확률이 무지 높기 때문이다.
“일산 어린이 납치 미수사건은 여자 어린이 3명을 성추행해 10년을 징역살이하고 출소한 지 2년인 전과자의 소행이다. 지난 2006년 용산의 10세 여자 어린이 성폭행 살해 범인도 50대 성추행 전과자였다. 그는 ‘초범’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5개월 만에 사건을 저질렀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아동상대 성폭행범의 재범률이 일반 범죄보다 10% 포인트 높은 50%나 된다.”(2008. 4. 2. 매일신문 사설)
혜진. 예슬이가 죽고 난 뒤 여기에 대한 대책을 만든다고 난리를 피웠지만,
막상 이루어진 건 별 게 없었고,
그 뒤 조두순이란 범죄자는 술을 마셨다는 게 정상참작돼 12년의 형량을 받았다 (5년 뒤 출소다!)
사회를 정상적인 곳으로 만들려면 비정상적인 놈들은 영원히 격리하는 게 답이 아닐까?
3) 사건의 주인공 법의학자는 조수를 자청한 재벌에게 이런 말을 한다.
법의학자: 자네에게 누가 이런 말 한 적 있나? 자네 지나치게 목을 꼿꼿이 세우고 상대와 이야기한다고 말일세.
재벌: 그럼 교수님께도 누가 이런 말을 드린 적이 있나요? 사춘기 소녀들처럼 아주 유치한 수준의 유머감각을 가지고 계신다고요. (196-197쪽)
재벌의 말도 근거가 있는 것이겠지만, 이 상황에서는 부적절하다.
너무 거만하다고 했으면 거기에 대해 반박을 해야지,
“너도 유머감각이 유치하다”라고 물타기를 시도하다니!
내가 물타기에 민감한 건, 메르스 대처를 잘 못했다고 대통령을 욕했을 때
연평해전 어쩌고 하면서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에 질린 탓이다.
책 뒷날개를 펴보니 피체크의 소설이 2권이나 더 나와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란다.
피체크의 책들은 내가 앞으로 만날 5천여권 중 일부가 될 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