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의 어느날, 조카를 데리고 원숭이 쇼를 보러 갔다.

원숭이의 재롱에 조카는 신나했지만,

난 그 쇼를 즐기지 못했다.

저 동작들을 익히기 위해 고생했을 원숭이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렇듯 어린애는 보지 못하는 사물의 이면을 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얼마 전 설 특집으로 TV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해주기에 열심히 봤다 (절대 불법다운 받은 건 아닙니다!)

젊은 시절 비디오로 볼 땐 그 영화가 ‘노래로 뭉친 가족애’를 주장하는 영화로 보였다.

하지만 중년이 된 나이에 그 영화를 보니까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먼저 마리아. 수녀원에서 나와 트랩 대령의 집에 간 그녀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 등 거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가까운 그 집에 반한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좋겠다”고 생각한 마리아에게 나타난 트랩 대령은

미남이기까지 하다.

나이는 거의 마흔에 달했으니 (애가 일곱이니 그 정도는 됐을 듯하다)

잘해야 이십대 초중반인 마리아와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그리고 애가 일곱이나 되지만,

마리아는 트랩 대령을 잡기로 한다.

트랩 대령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보트에서 호수로 빠지고,

물에 젖은 채로 트랩 대령 앞에 나타난 것은 마리아가 선수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트랩 대령. 아이 일곱을 데리고 혼자 살아온 트랩은

미모의, 그리고 돈까지 많은 남작부인과 연애를 한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풋풋한 매력의 마리아에게 트랩은 다른 마음을 먹는다.

특히 트랩은 옆에 남작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에 빠졌다 나온 마리아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선생은 나 좀 봅시다.”

트랩의 마음은 이 말에 나타나 있다.

물론 트랩의 구실은 아이들을 나무에 매달리게 했고, 또 커튼으로 옷을 만들어 입힌 걸 꾸짖는 것이었지만,

난 봤다. 트랩의 눈이 마리아의 가슴을 향해 있음을 (아내의 말에 의하면 마리아가 가슴이 꽤 큰 편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트랩은 고민한다.

마리아를 어떻게 해볼 기회를 잡으려고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돈이 이미 많은 남자에겐 돈많은 미망인보다

풋풋한 매력으로 무장한 이십대 여자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비슷한 컨셉의 드라마 <푸른안개>에서 김미숙은 이십대의 이요원에게 말한다.

“네가 언제까지 젊을 것 같아?”

영화에서도 위기감에 빠진 남작부인은 마리아를 불러 이야기한다.

마리아 때문에 자신과 트랩대령의 사이가 위기에 처했다는 남작부인의 말에

마리아는 죄책감을 느끼고 수녀원으로 떠난다.

영화에선 남작부인이 무슨 마녀 비슷하게 그려지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이 여자는 트랩대령의 돈이 아닌, 그 자체의 트랩을 사랑한 몇 안되는 여자였다.

그럼에도 노래를 못한다고, 또 이미 다른 여자에게 사로잡힌 아이들과 불화한다고

“안되겠소.”라는 잔인한 말로 파혼을 선언한 트랩이 나쁜 놈인 거다.

 


수녀원으로 돌아간 마리아는 그대로 죽을 수 없다며 계획을 세우는데,

그녀가 구워삶아 놓은 바로 일곱 아이들이 그녀의 구세주였다.

남편이 재산만 남기고 죽은 탓에 우아하게만 살았던 남작부인은

도통 아이들과 놀아줄 줄을 모르고,

아이들은 공놀이 도중 그녀를 일부러 맞히는 등 노골적인 이지메를 가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교훈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남자도 잡을 수 있다는 것으로,

최근 드라마에 비유하자면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손여은이 남편의 전처 딸과 불화를 한 끝에 아이를 때리고,

이로 인해 남편과 시댁 전체의 불신을 산 예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마리아를 따끔하게 꾸짖어야 할 원장수녀도 마리아의 편에 선다.

하느님은 한쪽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등, 그 사랑이 그 사랑하고 별 차이가 없다는 등

감언이설로 마리아에게 트랩 대령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무슨 저런 원장수녀가 다 있담, 하고 의문을 품겠지만,

아무래도 원장수녀는 트랩 대령의 부인이 된 마리아로부터 많은 기부를 받는 미래를 상상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대목은 같이 보던 아내가 얘기했다).

 


이 영화의 진짜 위기는 트랩이 독일군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했을 때가 아니라,

트랩과 마리아가 아이 일곱과 더불어 알프스산을 넘어 도망가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생각해 보라.

돈 때문에 트랩과 결혼한 마리아인데, 이제 재산도 못챙기고 스위스로 간 트랩이

대체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대충 예상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는 아이들과 합창단을 만들어 길거리에서 노래를 하며 돈을 벌고,

별로 할 일이 없는 트랩은 그 돈으로 술을 마시며 맨날 성질만 부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신사가 나타나더니 그들 앞에 있는 상자에 백 달러짜리 지폐를 (보이게끔) 넣는다.

그 액수에 놀란 마리아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가씨는 노래 부를 때가 정말 아름답군요.”

그 남자는 매일 같은 시각에 나타나 백 달러짜리 지폐를 넣는다.

결국 남자는 마리아에게 차나 한잔 마시자고 하고....

뭐 이렇게 진행되는 게 실제의 삶이 아닐까 싶다.

젊을 때 봤으면 아름다운 영화라며 넋을 잃고 봤을 것을,

오래 살면서 이것저것 다 겪으니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좀 슬프다.

더 신기한 것은 지금부터 11년 전, 이 블로그에다 트랩 대령에 대해 악담을 퍼부었다는 것.

http://blog.aladin.co.kr/747250153/597287

그 글을 읽으면서 느낀 건, 그래도 그때는 조금 순수함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마리아가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비난은 안했으니까.

 

* 둘이서 잘 되고 난 뒤 트랩은 마리아를 사랑하게 된 게 솔방울 위에 앉을 때부터였다고 하고, 마리아는 “당신이 그 우스꽝스러운 호루라기를 불 때부터예요”라고 하는데, 마리아는 그럴 수 있겠지만 트랩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 이전까지 마리아를 볼 때와 호수에 빠지고 난 뒤의 마리아를 볼 때의 눈이 완전히 다르며, 그때가 진짜로 마리아에게 빠진 순간이다.

 

** 이 영화의 히로인이었던 줄리 앤드루스는 그 이후 별다른 작품이 없다.

아내가 <메리 포핀스> 있잖아,라고 하기에 찾아보니까 그 영화는

<사운드 오브 뮤직>보다 1년 전에 만들어졌다.

줄리 앤드루스가 노출을 한 <텐>을 비롯해서 그 후에 찍은 영화들은 정말 별볼일이 없는데,

아주 나이든 다음에 오히려 더 잘나가는 것 같다.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비롯해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이 비로소 나타난다.

 


*** 반면 트랩 대령은 그 잘생긴 외모답게 그 후에도 계속 영화를 찍었고,

필모그래피를 보니까 82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최근까지도 계속 영화를 찍은 그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못받은 오스카상을

2012년에 받았다고 한다.

1929년생이니 무려.... 83세, 최고령 아카데미 수상 기록을 세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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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o12 2015-02-22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 앤드류스는 꾸준한 뮤지컬 배우였지요. 성대 수술한 후에 카메론 매킨토시의 생일 축하 공연-이것이 생일 파티의 끝이다을 보여주지요-에서 노래도 안하고 마이 페어 레이디 대사 하나 읊어주는대 눈물이 나게하는 그녀를 보고. 아. 진정한 꿀성대의 끝판왕이구나 했습니다. ^.^. 한때 사운드 오브뮤직은 어린이날. 설날 크리스마스 점령 영화였는대.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군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마태우스 2015-02-22 19:37   좋아요 0 | URL
소요님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서툴렀던 것이, 영화 찍던 사람이 갑자기 안보이면 인생이 실패했다고 단정짓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루크 스카이워커로 나왔던 이도 위키백과를 보니까 영화 안찍는 동안 많은 일을 했더라고요. 그럼에도 그가 영화를 못찍어서 실패다,라고 단정을 짓는 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줄리 앤드류스가 뮤지컬로 활동했군요. 흠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moonnight 2015-02-2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이들어서 영화를 다시 보니 남작부인이 너무 슬펐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 트랩대령은 어리고 상큼한 여인에게 혹했던 거겠지요. ㅠㅠ 첨에 오드리햅번에게 의뢰된 역할이었는데 노래땜에 부담을 느껴서 고사하는 바람에 줄리 앤드루스가 맡게 되었다는 얘기 들었어요. 오드리 햅번이 마리아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해요. 첨 보자마자 트랩대령이 홀딱 반하게 되지 않을까요. ㅎㅎ

마태우스 2015-02-22 19:38   좋아요 0 | URL
달밤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드리헵번이 나왔다면...ㅎㅎ 남작부인을 호수에 던져버렸겠죠. 원래 이영화의 컨셉이 노래에 이끌려 좋은 여인을 찬다, 이런 거일텐데 오드리 헵번이면...호호호. 좋은 정보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