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지내다보면, 가끔 성 역할이 바뀐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난 집에 오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아내에게 1-2시간에 걸쳐서 얘기하는 게 큰 기쁨인데,
아내는 내가 하는 말을 그리 잘 들어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최소한의 리액션이건만,
아내는 좀 듣는 척하다 이런 말을 해버린다.
“저녁 뭐 먹을래?”
그래도 말을 중단하지 않자 아내는 극약처방을 한다.
“여보, 말 들어주는 것도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여보는, 기본적으로 말이 많은 사람이야.”
아내에게 얘기했다.
스무살이 될 때까지 친구가 없어서 하루에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지냈다고.
그래서 아내가 생기면 하루종일 얼굴 맞대고 얘기하는 게 꿈이라고.
아내는 말했다.
“니가 이십년간 당한 걸 왜 나한테 푸는데?”
그 아내를 보면서 생각한다.
보통은 아내가 말하자고 하고, 남편이 회피하지 않나?
다음주면 8번째 결혼기념일이 돌아온다.
결혼이 적성에 안맞는다고 생각했던 내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 아내에게
그날만큼은 정말 잘해주고 싶다.
아내에게 다음주 월요일이 결혼기념일이라고 했더니 아내가 놀란다.
“아 맞다. 그런데 벌써 8년이나 됐나?”
그날 뭐 하고 싶냐고 물었다.
“글세. 뭐 별로 하고픈 게 없는데.”
근사한 곳에서 저녁이라도 먹자고 했더니 아내가 이런다.
“글세. 뭐 별로 먹고 싶은 게 없는데.”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천안은 기본적으로 차가 안밀려, 외식하기에 딱 좋다.
그러다보니 외식을 참 많이 했다.
나랑 달리 아내는 아무리 맛있는 것도 한두번 먹고나면 쉽게 질리는 스타일,
이사온 지 3년이 됐는데 더 이상 새로운 식당이 남아 있겠는가?
그래도 아내에게 떼를 썼다.
“아이,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 어디 좋은 곳에 가서 밥 먹자, 응?”
이 말을 하고 나서 나도 모르게 방귀를 뿡 뀌고 말았다.
아내가 눈을 부릅뜨고 말한다.
“거봐. 내가 이래서 여보랑 나가서 밥 먹기가 싫은 거야.”
보통은 아내가 기념일을 챙기고, 뭔가 받고 싶다고 떼쓰고, 이러지 않던가?
남편이 뭐 안해준다고 토라지는 아내들처럼
나도 좀 토라지는 척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