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리아의 씨앗 - 열대 의학의 거장 로버트 데소비츠가 들려주는 인간과 기생충 이야기 크로마뇽 시리즈 2
로버트 데소비츠 지음, 정준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기생충은 탄압받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전 국민이 기생충 몇십마리를 갖고 있던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생충은 사람들의 벗이었다.
사람들은 기생충을 몸에 지닌 채 열심히 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하늘을 보면서 시를 지었다.
“저 푸른 하늘 너머에도/기생충이 있을까/있다면 가고/없다면 여기 남으리” (작자 미상)

 

정부가 에볼라바이러스, 독감, 식중독 등 많은 병을 놔두고
기생충을 망국병이라고 선언하면서 사람과 기생충의 우정에는 금이 갔다.
기생충을 징그러운 것으로만 묘사하는 언론 매체의 선동에 사람들은 쉽게 넘어갔다.
억울하기 그지 없었지만, 기생충으로서는 달리 항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들을 대변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던 2005년, 칼 짐머가 쓴 <기생충제국>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기생충이 얼마나 훌륭한 생명체인가를 새삼 깨달았고,
그간 기생충을 미워했던 자기 자신을 반성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아쉬워했다.
그 책을 쓴 칼 짐머가 외국인이었으니까.
“우리나라에도 50명 가까운 기생충학자가 있다는데, 그들은 다 뭐하는 거야?”

물론 그분들은 연구를 열심히 하고,
각 학교에서 논문 많이 쓰는 교수 톱3에는 꼭 기생충 학자가 끼어 있지만,
그런 실상을 일반인이 알 수는 없었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준 이가 바로 정준호였다.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는 기생충과 사람 사이의 오래된 우정을 상기시키며
“다시 몸안에 기생충을 기르자”까진 아니지만,
기생충에 대해 좀 관대해질 것을 부르짖었다.
그 책은 이내 기생충시장을 평정했고,
기생충에 대한 지식에 목말랐던 사람들은 사막의 낙타처럼 그 책을 샀다.


그 이전 어줍잖은 책으로 기생충시장을 노크하다 매번 실패했던 서민은
정준호로 인해 팽창된 기생충시장에 욕심을 냈고,
결국 <기생충열전>이란 책으로 떼돈을 번다.
정준호와 서민, 둘간의 싸움에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자
둘은 2014년 초반, 긴급회동을 한다.
“안그래도 시장이 작아 죽겠는데, 잠시 하와이에 좀 가 있거라.”
“네가 가라, 하와이.”
하지만 이들은 같이 동석했던 사람들의 만류로 극적으로 화해하며,
<기생>이라는 책을 공동집필하기에 이른다.




 

“뭐? 정준호가 또 책을 냈다고? 그것도 번역책을?”

잠정 휴전 상태에서 나온 <말라리아의 씨앗>은 기생충 시장에선 갈등의 씨앗이었다.
기생충계에서 ‘현장 연구자’로 이름이 높은 로버트 데소비츠의 책을 정준호가 번역해 버린 것.


서민은 연구실 의자를 엎으며 진노했다.
“아니, 데소비츠 책을 들여와 버리면 이제 기생충 책시장은 평정돼 버리는 거잖아? 무슨 나당 연합군도 아니고,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야?”
서민이 화를 낼만도 했다.
칼라 아자르에 걸려 치료를 받으려는 인도여자 수쉴라의 얘기부터 시작해서
말라리아의 정체를 밝히려는 라베랑과 로널드 로스의 이야기까지,
온갖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돼 있으니 말이다.
서민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구내식당 밥만 먹던 사람들에게 고급 치킨과 고급 맥주를 놓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건,
엄연한 불공정거래입니다. 안그래도 내년에 기생충열전2를 내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죠.”
더 안좋은 것은 이론과 현장 모두에 능통한 정준호의 번역이 한 치의 오류도 없었던 것.
어디 한 군데 이상한 표현이 있으면 “이게 이 책의 한계다”라고 우길 판이었는데,
3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오타나 비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고 받습니다 017-760-xxxx)

그랬거나 말거나, 기생충들은 행복하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담은 책이 단 한권도 없었는데,
이제 네 권이나 생겼으니까.
그들한테 그 네 권 중에서 뭘 선택할 거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86% 정도가 <말라리아의 씨앗>을 고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기생충과의 싸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후진국은 왜 아직도 기생충이 만연하는지를
이 책만큼 잘 보여주는 책은 당분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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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6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4-11-26 18:10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호호호.

곰곰생각하는발 2014-11-2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습니다, 좋아요 ! ㅎㅎㅎㅎ 기생충 제국은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꽤 흥미롭더군요...

마태우스 2014-11-26 18:10   좋아요 0 | URL
왓 곰발님이닷!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사정이 어려워 형님 서재에 찾아뵙지도 못하고. 그래서 요즘 제가 배움이 부족하단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기생충제국, 정말 좋은 책이죠. 그 책 때문에 제가 받은 충격이 어마어마합니다.

바람돌이 2014-11-2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밌게 잘 읽었어요. 특히 저 엎어진 의자가 감동적!!! 잘 지내시죠?
말라리아의 씨앗이란 책은 정말 관심없던 책인데 급관심이니 마태님의 이 글은 낚시에 성공한걸까요? 실패한걸까요? ㅎㅎ

마태우스 2014-11-27 00:31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안녕하셨어요. 낚시에 성공했죠 좋아요가 8개나 되니깐요^^

oren 2014-11-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 님께서 쓰신 글들이 워낙 재미있어서 가끔씩 몰래 읽고 혼자 킥킥거린 적도 있었는데, 이번 글은 `자빠진 의자`만 빼고는 자못 진지한 듯합니다. ㅎㅎ

저는 서민 교수님께서 정준호 님과 <기생>이라는 책을 공동집필하기에 이른다는 얘기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잠깐 살펴봤더니 진짜로 그런 책이 나와 있군요. 암튼 기생충을 둘러싼 흥미로운 얘기를 당대의 최고 전문가께서 이렇게 직접 친절히 소개해 주시니 너무 좋습니다~

마태우스 2014-11-27 00:32   좋아요 0 | URL
글고보니 기생이란 책 그림이 빠졌네요 후다닥 쓰고 튀려고 하다보니 이런 오류가...ㅠㅠ 근데 정말 재미있더군요. 현장 전문가가 왜 중요한지 알겠어요. 전 죽었다 깨나도 저런 책을 못쓰는데 말입니다 미생 한석률씨 표현대로 ˝역시 현장이지 말입니다˝

아무개 2014-11-27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소리나게 웃었습니다.
우하하하하!!!

웃고, 관심 가져달라! 가 글쓰신 취지이시라면
100% 달성하신듯합니다^^

마태우스 2014-11-27 22:13   좋아요 0 | URL
앗 그래요? 격려 감사합니다 호호호.

다락방 2014-11-2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빠진 의자의 분노가 생생히 전해져 옵니다, 마태우스님. ㅋㅋㅋㅋㅋ

저도 이 책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사게 되면 땡투해서 땡투로도 떼돈 벌게 해드리겠습니다!! 불끈!!

마태우스 2014-11-27 22:13   좋아요 0 | URL
아 그렇죠 요새 안그래도 땡스투 적립금이 느무느무 안들어와서 책을 못사고 있답니다. 다락님 최고

비로그인 2014-11-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글이 더 재미있습니다. ㅎㅎㅎ

마태우스 2014-11-27 22:14   좋아요 0 | URL
아...엄청난 칭찬인데요,감사드립니다. 책 읽어보심 책이 훠얼씬 더 재밌다는 거 아실 걸요^^

레와 2014-11-27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단 [기생충열전2]를 기대해보겠습니돠! ㅎㅎㅎ

마태우스 2014-11-27 22:14   좋아요 0 | URL
아 네...호호. 근데 기생충시장이 너무 좁은데 기생충책들이 우글우글대는 듯...^^

sayonara 2014-11-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고 있는데.. 눈물이 나는 이 상콤한 애잔함이란....^^

마태우스 2014-11-30 11:09   좋아요 0 | URL
호호 그렇다면 제 전략이 성공한 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