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포기를 잘한다.
이미 끝났는데도 계속 집착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무지하게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소개팅 애프터를 나갔을 때,

상대방 여자가 20분 정도 지났음에도 오지 않는다면 난 “역시 그렇구나”라고 포기하고 만다.
“무슨 일이 생겼겠지”라면서 두시간 쯤 기다리는 긍정적인 사람도 있지만,
난 “내가 못생겼다고 싫어하는 게 틀림없어”라고 지레짐작한다는 얘기다.
그건, 상처를 덜 받으려는 자기방어의 기전이기도 하다.
언젠가 모 대학축제 앞에서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휴대폰도 없던 그때, 사람들로 미어터진 여대 정문앞에서 20여분을 기다리는데,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여겨졌다.
30분을 채우지 못한 채 집에 갔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때 그 여자분이 내가 자리를 뜬 직후에 그곳에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에도 난 여자가 조금만 예쁘면 “날 싫어하겠지”라며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곤 했다.
이건 여자 뿐 아니라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라,
결과가 조금만 안나오면 “그럼 그렇지. 나같은 게 뭘 하겠어?”라며 지레 포기해 버렸고,
내가 ‘네이처’ 같은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포기를 잘하는 성격은 스포츠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2002년 어느날, 난 집구석에서 한국과 중국의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결승전을 보고 있었다.
한국은 야오밍이라는 걸출한 센터가 있는 중국에 시종일관 뒤졌고,
30초가량 남았을 때는 7점 차로 뒤져 역전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안그래도 술약속이 있었기에 난 TV를 끄고 약속장소로 향했고,
지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서 농구 얘기를 한다.
“오늘 농구 정말 끝내줬지 않냐?”“진짜 대박이었지.”
그 장면을 보면서 난 그들이 중국 사람들이며,
한국에 온지 오래된 나머지 중국말 대신 한국말로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술에 취해 집에 온 그날,
난 한국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는 걸 알고 까무라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서 재방송을 새벽까지 봤고,
그것도 모자라서 노트에다가 일일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스포츠의 생명은 생방송으로 그 현장을 보면서 응원하는 것일진대,
결과를 알고 난 뒤 재방송으로 보는 농구는 앙꼬 없는 붕어빵 같았다.
“30초만 더 볼 걸!” (실제로는 연장전까지 했으니 15분 가량이 더 소요됐으리라).
난 포기를 잘하는 성격을 원망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늘 아침, 난 여자골프의 스타 박인비 선수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1위를 달리는 미국선수에게 한 타가 뒤졌기에
마지막 18번 홀에서 한 타를 줄여야 우승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박인비 선수가 친 볼은 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놓였고,
한타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난 TV를 끄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아, 정말 아쉽다. 박인비 2등이다.”
학교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네이버 메일을 확인하려고 컴퓨터를 켠 순간,
난 12년만의 까무라침을 경험했다.
박인비가 우승을 했다는 거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알고보니까 박인비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그 먼거리 퍼팅을 집어넣었고,
1위를 하던 미국선수는 마지막 홀에서 한 타를 잃는 바람에 동점이 됐다.
연장전은 해보나마나여서, 박인비가 여유있게 우승을 한 것.
거듭 말하지만 스포츠의 매력은 생중계여서
그 광경을 봤다면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환호성을 질렀겠지만,
뒤늦게 우승 사실을 알고나니 기쁘다기보다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얼떨떨했다.
머리숱은 그때보다 훨씬 줄어 있었지만,
난 12년 전과 똑같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포기를 잘하는 내 자신을 원망했다.
포기를 잘한 덕분에 마음의 상처를 더 이상 받지 않고 험난한 세상을 살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잃는 것도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의 스타일을 바꾸고픈 마음은 없다.
이번 사건이 12년만의 일인 것처럼,
포기를 했을 때 내 예상과 달리 결과가 잘 나올 확률은 별로 높지 않으니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하긴 한다.
내 눈이 조금만 더 컸다면 포기를 하는 대신 좀 더 끈질기게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를.
이 글의 결론. 이게 다 작은 눈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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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8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8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혈팬 2014-08-18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금슬금 웃음이 삐져나오다가 마지막에 빵! 터져주는 교수님 글은 역쉬~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다 읽게 되네요^^

마태우스 2014-08-19 13:36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합니다. 역시 님의 댓글을 봐야 하루가 즐겁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4-08-18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글의 백미는 기막힌 책 선택이죠. ㅋㅋ

마태우스 2014-08-19 13:36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열심히 할게요!

야클 2014-08-1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나이를 먹어가건만, 어찌하여 나는 갈수록 유머감각이 무뎌지고 마태우스님은 이리도 유머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건가요? 밥은 언제든지 살테니 비결 좀 알려주세요 !

마태우스 2014-08-19 13:37   좋아요 0 | URL
갑자기 무슨 그런 말을.... 유머 하면 야클이고 야클 하면 유머인데, 글구 왜 갑자기 존댓말을?? 글구 밥 산다고 해놓고선 7년째 안사고 있는데, 살때 알려주겠소.

2014-08-19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9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14-08-1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께선 오랜 시간 그 많은 여인들을 쉽게(?) 포기하셨기에 지금의 아름다운 부인님을 맞이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마지막의 결론엔 동의 못하겠어요!


마태우스 2014-08-19 13:39   좋아요 0 | URL
아 네...알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호호. ^^ 포기해야 미녀를 얻는다, 오늘의 캐치프레이즈죠

hnine 2014-08-1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기해야할 대상과 시기를 잘 선택하시는 거 아닐까요? 모든 걸 다 쉽게 포기하신건 아니잖아요.

마태우스 2014-08-21 09:54   좋아요 0 | URL
뭐 좋게 보면 그렇기도 하네요 하하.

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1분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첫만남에서 모든 게 결정된다는.. 아, 어디서 읽었더라 ?! ㅎㅎ. 그랫 한때는 여자를 만나면 잘 보일려고 내내 호감을 주려고 무지 애를 썼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그냥 1분 안에 결정이 난다하니, 나야 어쩔 수 없다... 이런 심정이 들어서요..ㅎㅎㅎㅎㅎㅎ. 첫인상은 별로 였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호감이 갔다... 요런 말은 그 심리학자에 의하면 거짓말이라고 하네요. 호감이 갔다면 첫인상에서부터 호감이 있었을 것이란 주장입니다.

마태우스 2014-08-21 09:5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제가 말 한마디 하려면 됐다고 하면서 나가버리는 여자들이 많았어요. 그땐 그녀들을 참 원망했습니다. 기회도 안주고 차버렸다고요. 근데 지금은 이해합니다^^

2014-08-28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