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있는 명륜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고등학교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게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는 일,

교장선생님 중 일부는 나를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며 반가워하시고,

일부는 나를 잘 모르지만 먼 곳까지 와줬다고 고마워하신다.

명륜고 교장은 전자였는데,

그분은 심지어 내가 쓴 책을 꺼내며 사인을 해달라고 하신다.

근데 그 책 표지에는 바코드와 함께 ‘심각섭’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표지에 붙어 있었다.

평소처럼 책 안쪽에다 편충을 그렸고,

몸통에 내 이름을 적은 후 선생님께 여쭤봤다.


나: 받으시는 분은 누구로 할까요?
교장: 제 이름으로 해주십시오.
나: 이거 도서관 책 같은데요?
교장: 제 책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주신 명함을 봤더니 존함이 정말 ‘심각섭’이다.
알고 보니 교장선생님은 수천권의 장서를 보유한 독서가셨고,
책을 보다 효율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쓰는 것처럼 바코드 스티커를 붙여놓으셨단다.
그 바코드 때문에, 그리고 ‘심각섭’이란 존함 때문에 난 그 책이 도서관 책인 줄 알았던 것이다.


민망함은 강의 후에도 이어졌다.
학생들과 더불어 내 강의를 경청하신 선생님이 두어 분 계셨는데,
그 중 한 분이 강의 후 내게 다가와 가지고 있던 책을 펼친다.
사인을 해달라는 줄 알았는데 그 책에는 이미 사인이 돼 있고,
거기 적힌 이름이 낯이 익다.

 

 

 최.승.범.
내가 아는 최승범은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의 저자다.
그 책에 대해 리뷰를 난 이렇게 적었다.
[최승범이 쓴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최근 읽은 페미니즘 책 중 가장 빛나는 책이었는데,
....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은 여자 편에 서서 일방적으로 남자를 욕하기보단
‘나도 남자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느냐’며 차분하게 남자들을 설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으로,
이 정도로 잘 쓴 페미니즘 책이라면 여혐에 찌든 남성들에게도 충분히 먹힐 수 있을 것 같다.]

그 최승범 선생님이 내 눈앞에 있었다.
당시 글쓰기 책을 냈던 터라 그 분야 강의를 했었는데,
그때 내가 사인을 해드렸단다.
최승범은 말했다.
“선생님의 격려 덕분에 제가 2년 뒤 책을 쓸 수 있었어요.”
아니다.
이런 책을 쓸 분이라면 이미 글쓰기 고수였을 테고,
게다가 최승범은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분이다.
그런 분한테 내가 글쓰기 강의를 했다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다는 건 이런 경우를 지칭하는 말이다.
난 선생님한테 죄송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는데,
그 죄송함은 ‘민망함’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고수가 있구나. 겸허히 사는 게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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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9-01-03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고향 상주공공도서관에서 강연을 한 적 있는데, 수다스러운(?)아주머니 네댓명이 저를 엄청 반겨주시고 강연도 열심히 들으셔서 강연마치고 커피를 한 잔 했어요. 알고보니 모두 등단 시인들이고 출간한 시집을 읽어주시는데 현자타임이 오더라구요..ㅠ

마태우스 2019-01-03 13: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박균호 선생님 저도 언젠가 기생충 강의를 들어야겠어요 복수 차원에서요 ^^

cyrus 2019-01-03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태우스님. 최근에 마태우스님의 신작 <밥보다 일기>를 읽었어요. 책 머리말에 <소설 마태우스>에 사인 받았던 제가 언급되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글을 보고 나서 오랜만에 마태우스님과 처음 만났던 날을 일기 형식으로 썼던 제 글도 다시 보게 됐어요. 마태우스님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지만, 저는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올해 대구에 강연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

마태우스 2019-01-03 13:3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cyrus님 허락도 없이 일화를 썼는데, 좋아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리고...중략.

카스피 2019-01-04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마태우스 2019-01-07 21:21   좋아요 0 | URL
답이 늦었습니다 카스피님도 새해복 마아아니 받으세요

비연 2019-01-04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끔씩 이렇게 글 올려주시니 넘 반갑습니다~

마태우스 2019-01-07 21:21   좋아요 1 | URL
비연님,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좀 더 자주 올려서 서재달인도 돼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ㅠㅠ 올해는 목표가 서재달인입니다.

스프링 2019-01-2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태우스님 안녕하세요? 몇 년 전 교수님 알라딘 서재를 우연히 알게 돼 즐겨찾기 해놓고 가끔 들어와서 글 읽고 있답니다. ^^
위에 글을 읽다가 저도 생각나는 일이... 2016년 11월 저희 아이 중1때 아이 학교로 강연하러 오신다고 해서 아이가 읽은 책 두 권을 ( 집 나간 책, 기생충 콘서트 ) 가져가서 사인을 받아왔더랬죠.
교수님이 저희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셔서 의사도 되고 싶고 로봇공학자도 되고 싶다고 했더니 한 권에는 [책을 많이 읽는걸로 보아 훌륭한 사람이 될듯!] 다른 한 권에는 [의사 로봇을 만들어 보세요!] 라고 적어주셨더라고요 ^^

그때 교수님께 사인 받고 신나했던 저희 아들은 그 후로 공부 열심히 해서 올해 서울과학고에 입학하게 되었답니다. 정말 의사 로봇을 만들게 되면 다시 덧글 달겠습니다 ㅎㅎ

마태우스 2019-01-30 22: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스프링님, 아드님이 제 강의를 들었다니, 역시 강의만큼 보람있는 것도 없는 듯합니다. 아드님이 의사로봇의 꿈 꼭 이루길 빌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