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이커스

기생충학 실습이 있는 날.

내가 학생 때, 선생님은 슬라이드를 주고 학생들에게 이거저거를 찾으라고 했다.

학생들은 잘 찾지 못했고,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교수가 된 뒤 난 원하는 부위를 미리 찾아서 현미경을 고정해 놨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제가 다 찾아 놨으니까 학생들은 그냥 투어 하듯이 정해진 순서로 현미경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미리 품을 팔아야 하지만,

학생들은 무지 좋아했고-시간이 덜 걸렸으니까-봐야 할 것을 못본 학생은 이제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국 시험을 보면 우리 학교가 다른 과목은 좀 후진데

기생충은 성적을 잘 받는다.


그런데 지난번 실습 때, 일이 터졌다.

워낙 완벽하게 준비한 탓에 학생들이 질문조차 하지 않아-안보여요 같은 질문-

스마트폰으로 NBA 농구 레이커스 경기를 켰고, 슬쩍슬쩍 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작전타임 때 치어걸들이 나와서 춤을 췄다는 것.

그들의 복장은 당연히, 헐벗은 상태였다.

난 치어걸에 그다지 조애가 없는지라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뭐 보시는 건가요?"

한 여학생이 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난 무지 당황했고, 그때부터 변명을 시작했다.

"그, 그게요, 원래는 농구를 보고 있었는데 이건 작전타임이고 어쩌고..."

여학생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색만 보이기에 전 또 씨름 보시는 줄 알았어요."

그녀의 태도로 보건데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소문이 날 수도 있을 텐데, 난 진짜 억울하다!!


2. 사재기

결혼식 때문에 영등포에 갔다.

다음 약속까지 시간이 남아서 근처 타임스퀘어에서 평소 벼르던 미스백을 보기로 했다.

다행히 미스백은 시간대가 맞았지만, 그래도 40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극장 아래층에 교보문고가 있기에 거길 들렀고,

새로 나온 내 책이 잘 전시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내 자식같은 책이 외면받고 있는 게 안타까워 책을 한 권 사려는데,

갑자기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아니세요?"

놀라서 보니 교보 직원이었다.

"늘 책으로만 만나다가 직접 뵈니 반가워요!"

난 특유의 어색한 표정으로 '오기로 낸다' '될 때까지 쓸 거다' 같은 소리를 지껄이다 그와 헤어졌다.

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날 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내가 내 책을 사면 뭐가 되겠는가?

외로움에 지친 내 책을 하나도 구해주지 못한 채 교보문고를 나섰다.


3. 비탄의 문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기 잘 한 것이, 책을 자주 내는데다 내는 책마다 재미가 쏠쏠하다.

신작인 <비탄의 문>은 초반에는 이게 뭔가 싶게 진도가 느렸지만,

곧 탄력이 붙어버렸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고

심지어 걸어다닐 때도 책에서 눈을 뗴지 않았는데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내가 읽은 대목은 전혀 관계없이 살던 A와 B가 같은 사건을 조사하다가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나는 장면까지다.

A는 수상쩍은 건물 옥상에 잠복해 있고 그걸 모르는 B는 1층부터 올라가며 수색을 한다.

하지만 B는 옥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천안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 뒤 그 둘이 만나서 어떻게 될지 읽으려는데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내가 좋아하는, 울 학교 교수가 날 발견한 것.

천안까지 가는 동안 그와 이야기를 하느라 책을 읽지 못했고,

그래서 난 여전히 A와 B가 어떻게 만나는지 모른다.

이 글을 올리고 나면 바로 책을 펴들어야지.

미야베 미유키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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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8-11-04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저도 야구 시즌 이후 농구로 적적함을 달래는데 ‘살색‘에 웃습니다^^ 미국 치어리딩은 그냥 씩씩한 운동 느낌이던데 당황하지 않으셔도^^
학생 때 현미경 수업이 너무 어려웠는데(도대체 그렇게 생긴 게 어디 있단 말인가ㅠㅠ) 서민 교수님 같은 분께 배우지 못 해서 그랬던 거군요!(라고 합리화-_-)

2.알라딘 서재분들만 해도 마태우스님 새 책은 외로울 틈이 없을 듯. 저도 오늘 주문 예정임을 살며시 밝힙니다.

3. 미미여사 신작 재미있나봐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이별을 고하게 되었어요ㅠㅠ;;;

마태우스 2018-11-04 19:45   좋아요 0 | URL
1. 제겐 야구가 너무 소중해서요. 농구는 그냥 후식 같은 겁니다^^ 근데 단순한 후식이라기엔 르브론 제임스를 너무 좋아해서, 플레이오프 땐 야구를 접어두고 농구를 보기도 한다는... 살색이란 게 좋은 표현은 좋은 게 아닌데요, 그냥 그 학생의 육성을 살렸습니다. 글구 제 수업이 효율성은 좋지만 애들한테 스스로 찾는 능력을 기르는 게 사실은 더 좋은 수업입니다. 따라서 달밤님은 좋은 교육을 받은 거 맞습니다
2. 아유, 그러지 마세요 부끄럽게...ㅠㅠ
3. 아니 미미여사와 이별하셨다니, 그럴 수도 있군요! 전 미미여사 광팬이라 이별은 상상도 못해봤어요. 물론 레드삭스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근 미미여사와의 이별을 택하겠지만, 그런 선택에 놓이는 일은 없잖아요..-.- 암튼 나중에 다시 화해하심 좋겠네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2018-11-04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8-11-05 17: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격려해주셔서 사실 저도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책이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내고 있어요 물론 저에게도 의미가 있어야겠지요 님의 책도 기다립니다 책 쓰실 자격이 차고넘치시자나요 홧팅하시길

감은빛 2018-11-0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터 후배에게 일을 시켜놓고 잠시 SNS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참 후에 후배가 뭔가 질문이 있어서 내 자리로 왔고 나는 의자를 돌려 질문에 답을 해줬는데, 후배 시선이 자꾸 내 모니터를 향하길래 봤더니 하필 뭔가 살짝 야한 장면이 포함된 게임 광고가 돌아가고 있더라구요. 뭐야! 난 저런 걸 보고 있던 게 아니라구. 비록 SNS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업무 관련 정보 수집을 하고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이미 후배는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ㅠㅠ

2.
마태우스님 신간 저도 구매해보겠습니다. ^^

3.
미미여사 천재 인정!

마태우스 2018-11-15 00:03   좋아요 0 | URL
올만입니다 답이 늦어서 죄송해요ㅠㅠ
1. 감은빛님도 그런 적이 있었군요!@ 반갑습니다. 평소에 잘하는 게 중요한 듯요. 저는 잘 된 것 같습니다 ^^ 저 이상한 놈이란 소문이 떠돌지 않는 걸 보면요
2. 아유 어쩌나...ㅠㅠ 부끄럽습니다
3. 그죠 정말 천재라니까요.

이동국 2018-11-1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서민적 글쓰기를 읽고 이렇게 서재를 찾아뵙게 된 고3 학생입니다. 저도 책읽기와 글쓰기를 쓰는 것이 참 즐겁습니다. 책읽기는 마치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하는 이유처럼 빠지게 되고, 글쓰기는 현학적인 문체로, 아는 척 하기에 너무나 유용한 도구입니다. 친구들은 책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의 현학적인 요소만 가미된 제 글에, 잘 썼다, 너 정말 글을 잘 쓴다. 라고 말하더군요. 사실은 사족이 모여서 길어진 문장, 글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 서재에 와서도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기생충학에 있어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꿈꾸는 의과대학의 교수. 이런 유혹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작가님의 서재임에도 찾아뵙는 분들은 마치 옆집의 이웃처럼 고정적인 분들만 가득하다는 것 말입니다. ㅠㅠ 대한민국엔 과연 언젠가 책의 문화가 팽배해질 수 있을까요. 책이 있어야 토론을 할 수 있고,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대도 말입니다.
대학 입시를 거의 마치고 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은 찾아보았습니다. 그나마 볼 수 있는 것은 작가와의 만남일 뿐이지, 취미로서 책을 소통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비슷한 연령층의 친구들과 말이죠. 제 생각으론 비주류가 되어가는 책에 대한 너무나 아쉬움이 담긴 댓글을 작가님께 쏟아내고 갑니다ㅋㅋ...

마태우스 2018-11-15 00:0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일단 이동국님 수능 잘 보십시오! 글구 님의 말씀에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이곳은 책에 관해 토론하는 곳이 아니라, 책을 빌미로 사람들이 우정을 나누는 곳이어요. 마을공동체 비슷한 곳이랄까요. 그래서 옆집 이웃님들이 주로 오시죠. 그러다 가끔 파이어가 나서 댓글이 많아지기도 하고 그러는데요, 님께 말씀을 드리자면 독서클럽이 인터넷엔 많이 있어요. 거기 가보면 사람들이 책 많이 읽는구나, 라고 생각하실걸요. 거기서 활발한 소통도 이루어지고요. 21세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책을 가지고 소통하는 사람은 계속 있을 거예요. 그러니 미리 좌절하지 마세요. 님 주위 사람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참고로 알라딘 공간도 좋은 곳입니다. 서재 만들어서 글 쓰시면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