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같은 것들, 시나 음악 같은, 그런 새로운 광채가 그 이후로 이 세상에 들어왔거든! 어떤 사람들 안에서는 부드러운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그걸 우리는 키워야 해! 그리고 매달려서 우리의 깃발로 삼고 지켜야 해!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것을 향한 이 어두운 행진에서. 짐승들과 함께 뒤처져선 안 돼!

그렇게나 늦었나? 뉴올리언스의 비 오는 오후를 좋아하지 않나요? 한 시간이 그냥 한 시간이 아니라 마치 영원의 작은 조각이 손에 쥐어진 것 같고, 그리고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모르잖아요. (블랑시가 젊은이의 어깨를 만진다.) 비에 젖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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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는데, 그런 일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 그 동네에도 아카시아나무가 많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타시아가 단 한 그루도 없는 동네에 살게 되더라도 나는 별 불편없이 잘 적응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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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찾은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 김연수 소설 중 내 책장에 세번째로 꽂힌 소설.






완전한 망각이란, 사랑 안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보존. 그러니 이 완전한 망각 속에서, 아름다워라, 그 시절들.

세희를 사랑하니?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사랑해. 내가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자, 이제까지 내게 없었던 마음 하나가 생겨났다. 그제야 나 역시 그때까지 뭔가가 결여된 채로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는 죽고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하는 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 그 모든 사랑이 내게는 공평하고 소중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 끝까지 남아 그 사랑들에 대해서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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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똑같았다. 빵틀에서 똑같은 빵이 찍혀나오듯이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었다. 그리고 네가 따라오고 있었다. 매일 따라오는 네가.

갑자기 너는 신기한 물건을 본 것처럼 네 손가락으로 내 턱을 쳐들었다. 네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자연스러워서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안받고 싶어하던 내게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느꺼졌다.

"미안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모두 네 차지였다.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서 도는 행성과 같았다. 너는 슬픔에 잠겨 네 마음대로 했고 나는 시름에 겨워 내 마음대로 했다.

너를 보는 게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 건 왜였을까. 네 얼굴을 비추는 노란 햇빛은 내가 가게 될 다른 좋은 세상에서 오는 것 같았다. 해를 등지고 있는 내 몸에서 뻗은 그림자는 짧고 짙었다.
"한번 안아보자."
"그래."
나는 처음으로 너의 부탁을 받아주었다. 너는 나를 안았다가 안았던 팔을 풀고 외투 단추를 급하게 풀면서 말했다.
"너, 다시는 안 오겠구나."
"그래."
너는 외투를 벌렸다. 나는 네 품안에 들어갔다.
"사랑한다."
너는 나를 깊이 안았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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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단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 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 집을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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