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도 괴롭진 않아 - 원유헌의 구례일기
원유헌 지음 / 르네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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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살아 숨쉰다. 구례에 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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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공부 - 인문학과 실용의 경계를 넘어
이상주 지음 / 다음생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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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훗날 성군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누구의 강요없이 어려서부터 스스로 공부에 관심을 갖고 전력을 다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내용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다면 [세종의 공부]에서 이야기하는 "공부"란 무엇을 의미할까?

세종에게 있어 공부는 무슨 목적을 위함이 아닌 것에서 출발한다.

단순히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공부를 잘하고자 함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시대적인 차이가 크겠지만)

보통 우리는 공부를 어떤 기술적인 스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수학공식 잘 외우고, 영어단어 많이 암기하면 "공부를 잘"한 것이 된다.

 

반면에 [세종의 공부]에서 세종이 행한 "공부"는 그것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물론 어떤 목적의식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세자의 교육, 나라의 경영 등을 위해서는 목적을 가지고 배우고 가르쳤다.

 

하지만 세종이 생각하는 공부, 세종이 공부를 대하는 자세는 요즘시대의 공부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세종에게 공부는 그것 자체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배우고, 나아가 나라를 경영하는 최고의 도구였다.

 

'여의이위범사전치 칙무불성'. 무슨 일이든 전력을 다해야 이루어진다는 것이 세종의 오롯한 신조였다.

그리고 그 전력을 다함은 어떤 수단이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러한 세종의 공부를 통해 공부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평생 공부의 시대, 이 책을 통해 스스로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한번 쯤 성찰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의미로 충분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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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 Once upon a Time in a Battlefiel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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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쌀나게 거시기 해뿔자!!!

참으로 거시기한 영화, 황산벌.
요즘 충무로 흥행공식은 70%의 재미와 30%의 감동이라고 하는군요.
그런점에서 황산벌은 흥행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재미와 감동의 어정쩡한 결합은 그동안 그저 그런 코미디물만을 양산할 뿐이었습니다.
황산벌도 이러한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진 못합니다.
그래도 황산벌의 비장미에 충분히 공감할수 있다면 황산벌은 참으로 괜찮은 영화입니다.
저는 물론 충분히 공감했구요.

영화는 아시다시피 과거 백제와 신라가 맞섰던 황산벌 전투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때도 그 지역 특유의 사투리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출발합니다.
하지만 사투리는 그저 기획영화의 한 수단일뿐, 영화는 곳곳에(특히 대사에) 묵직한 주제들을 배치해놓습니다.
한참 웃다가도 갑작스런 대사 한마디가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페이스를 잃지않고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갑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시나리오의 힘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도 항상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영화에는 반드시 훌륭한 시나리오가 있다는 영화계 법칙을 다시한번 입증한 셈입니다.

영화는 모든 전쟁은 권력자들의 자기 이익을 위한 소모전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소모전에 소모품으로 쓰이는 것은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거시기(이문식 분)를 비롯해 이름없는 민중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김유신(정진영 분)과 계백(박중훈 분)이 장기를 두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요, 말을 옮길때마다 같이 옮겨지며 처형당하는 이름없는 병사들은 그것이 실제인지 아닌지를 떠나 전쟁의 야만성을 지적하는 적확한 메타포로써 작용합니다.
또한 계백이 그의 가족들 앞에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며 그의 가족을 몰살하려 하자, 그의 부인이 "호랑이는 가죽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때문에 죽는다"며 울부짖는 대목은 전쟁이 얼마나 '허위'에 가득차 있으며 나아가 어떠한 명분으로도 개개인의 삶보다 소중한 것은 없음을 역설합니다.
그 밖에도 작금의 현실과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장면과 대사들은 이 영화가 결코 충무로의 흥행공식과 배우들의 이름에 기댄 단순한 기획영화가 아님을 증명합니다.

김승우, 신현준, 김선아, 전원주 등의 카메오들은 카메오가 다 그렇듯이 보는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박중훈은 이 영화에서 웃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빛이 나는데요, 오랫만에 자기 옷에 맞는 역할을 찾은 듯 합니다. 정진영은 전쟁은 미친짓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어차피 이겨야하는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냉철한 현실주의자 역할을 잘 소화했습니다. 특히 그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바로 작품의 주제와 연결될 만큼 의미심장합니다.
감독(이준익)은 그동안의 휴지기가 무색할만큼 괜찮은 영화 한편을 그의 필모그래피에 올려 놓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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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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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위원 이전에 소위 '지식 소매상'으로 불리며 글쟁이로 살았던 유시민이 오랜만에 책을 출간했다.

<대한민국 개조론-돌베개>. 제목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이 책은 저자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글 꽤나 쓴다는 저자여서 그런지 책은 단숨에 읽힌다.(저자도 이 책 쓰는데 단 25일만에 단숨에 써내려갔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밖으로는 세계화 시대의 선진통상국가로 나간다. 선진통상국가로 성공하기 위해 안으로는 사회투자국가를 건설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내용이다.추상적인 이 말은 책을 읽다보면 꽤 매력적이고 합리적으로 들린다. 저자의 얘기는 이렇다.

 "이미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선택(수출주도형 불균형성장전략)으로 개방화로 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좋든 싫든 차라리 긍정적인 태도로 그것을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대한민국을 크게 나쁘지 않은 통상국가에서 크게 성공한 통상국가로 밀어올리자는 것입니다. FTA는 그 연장선상에서의 전략적 선택입니다. 하지만 동시다발적 FTA가 성공을 보장하는것은 아닙니다. 선진통상국가로 국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대한민국이 경쟁력 있는 국민을 제대로 길러내는 사회투자국가가 되도록 해야합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해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둘 다를 해야합니다. 성장주의도 평등주의도 혼자서는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여기서 통상국가하면 대개 수출, 무역, 세계화, 경쟁등의 단어가 떠오르면서 어느정도 대충 알겠는데 사회투자국가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저자를 더 따라가보자. 이 책의 핵심주장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투자정책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34조 규정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기존의 시혜적 복지정책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개념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의 인지적,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능력이 더 커지고, 국민들이 서로 믿고 협력하면서 살아갈수록 대한민국의 국제경쟁력은 그만큼 더 높아집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능력을 키우고 경제사회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때, 한번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느낄 때, 사람도 발전하고 국가도 발전합니다. 이런 일에 역량을 집중하는 국가가, 제가 말하는 사회투자국가입니다." 여전히 모호한 이 말을 저자는 참여정부의 <비전 2030>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비전 2030>이 제시한 국가발전전략으로는 첫째, 선도적 세계화 둘째, 인적자원개발 셋째, 사회적 자본 확충입니다. 대한민국은 날이 갈수록 일하는 사람이 줄고 노인은 늘어나게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계속 잘 살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일해야 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인구 5,000만 명도 안 되는 좁은 국내 시장에서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앞장서서 세계무대로 나가 경쟁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성공을 거두려면 국민 개개인이 유능해야겠지요. 국민 개개인의 능력을 기르는 것이 바로 인적자원개발 투자이고, 이러한 국민 개개인의 능력이 최대한의 경제적 성과를 낳을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사회적 자본 확충을 위한 투자입니다. 사회투자국가란 인적자원개발과 사회적 자본 확충에 전력을 다하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 국가재정계획을 혁신하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경제지출 비중을 10%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복지지출 비중을 40% 수준으로 높이자는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아동발달지원계좌, 해외입양인 네트워크, 사회서비스시장 일자리 창출, 의료급여제도혁신, 국민연금개혁, 건강투자정책, 파랑새플랜, 공적개발원조 등 주로 보건, 복지분야에서의 그동안의 성과 및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는 소모적인 정쟁을 멈추고 모두에게 이익이 가는 합리적인 전략을 제시하려고 애쓴다.

 보수파는 선진통상국가를 좋아하고 진보파는 사회투자국가를 좋아하니, 각자 좋은 것 하나씩 가지면서 소통하고 대화해서 합리적인 정책과 대안을 만들자고 말한다. 모든것 다 가지려 하지말고 하나씩 양보하고 불만이 있으면 토론하자고 한다. 이건 왕인 국민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다.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에 대한 어이없음, 진보정당에 대한 책임성 요구, 민주적 리더십,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하는 선거제도 변경 등은 보너스다.

 정치인이  쓴 책들이 대부분 자화자찬하는 자서전류가 많은데 이 책은 적어도 그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몇몇 대목은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우리 국민은 이미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자주 병원에 다니는 국민입니다. 더 자주 병원에 가서 좋을 게 없습니다. 국가의 보건정책이 지향하는 목표는 국민이 자주 병원에 가도록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건강해서 병원에 자주 갈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착각합니다."

 "건강이 인간의 기본권에 속하며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동시에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의료접근성보다는 생활행태와 환경개선이 중요한 사업임을 강조해왔습니다."

 "정말 국민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들께도 말씀드립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왕(국민)이 왕 노릇을 못하고 누군가의 수렴청정을 받게 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와 지도자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의 수준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의 수준은 곧 국민의 수준이라는 말씀입니다. 남명 조식 선생처럼, 저도 정치적 사망을 각오하고 이 말씀을 드립니다."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도는 정부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도보다 별로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별로 믿지도 않는 언론이 누군가를 욕하면 그건 또 잘 믿습니다."

 저자도 밝혔듯이 보건과 복지를 제외한 다른 분야는 총론 수준에서만 다루어진 점은 아쉽지만 기대를 품게한다. 

 문제는 이 책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대한민국 개조론>이라는 국가발전전략을 관철시킬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이 책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거 아닌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도 있으니, 무언가 통할 방법을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려 200여 개 시민단체로부터 '최악의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지목당했던 그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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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 제러미 벤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4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 책세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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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혹은(실제로는 아니지만) 감시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겠는가? 기분은 더럽고 행동은 막가파식으로? 그래 세상 좋아져서 그럴 수 있다. 근데 과연 그럴까? 정말 세상이 변했을까?

 이제 감시관은 당신에게 말한다. "감시에 의한 행동의 억제를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나아가 이것이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며 결국에는 사회적 이익을 창출한다." 좋지 아니한가? 과연?

 우리에게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개념으로 잘 알려진 공리주의자 벤담. 위의 감시관은 다름 아닌 벤담 그 자신이다.(실제로 그는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시설을 고안하면서 감옥이 건설되면 자신을 간수로 임명해 줄 것을 프랑스의회에 정식 요청했다.)

 그는 왜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시설을 고안해냈으며 스스로를 간수로까지 임명해 달라고 했을까? 그보다 먼저 파놉티콘은 과연 뭘까? 간단히 말해 원형건물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가운데 원형건물이 있으며 그 건물을 또 다른 건물이 둘러싸는 형태. 즉 한 건물안에 또 다른 건물을 살짝 집어넣은 형태 말이다.

"이 건물은 중앙의 한 점에서 각 수용실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된 하나의 벌집과 같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관은 마치 유령처럼 군림한다. 이 유령은 필요할 때는 곧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다. 이 감옥의 본질적인 장점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파놉티콘이라고 부를 것이다."(23쪽)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벤담은 공리주의자다. 그는 사회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에 적합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다. 또한 그는 법률학자로서 사회적 이익을 추구하는 가치 안에서 법이 집행되기를 바랐으며, 자유방임 자본주의자로서는 이익이 모든 가치 중 으뜸이 되는 사회를 꿈꿨다.(7쪽) 이것이 벤담으로 하여금 파놉티콘을 구상하게 한 직접적인 계기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이렇게까지 얘기한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계획은 발명자인 제가 처음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15쪽)

 그런데 벤담이 구상한 파놉티콘은 감금 시설에 대한 계획이다. 그는 왜 감금시설을 구상했을까? 도대체 감금 시설과 공리주의자로서의 벤담이 주창한 산업화(사회적 이익 창출)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당시의 사회상을 잠깐 살펴보자. 근대 이전의 감옥은 처벌을 하기 위한 수감 시설이 아니었다. 단지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거나 형벌을 받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기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감금 시설에 수용하는 처벌이 생겨났다. 즉 새로 등장한 감옥은 과거의 것과는 달리 구호시설과 관계된다. 이러한 구호시설에 들어온 자들은 이제 올바른 정신을 갖도록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어 점차 그들(수감자)에게 자본주의의 질서를 교육하는 장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고립된 곳에서 그들이 근대적 삶을 익히고 특히 노동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당시 사회가 바라던 것-그리하여 결국에는 수감자들이 수감생활을 끝내고 사회로 돌아가 자본주의체제하의 사회적 이익 창출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으로 벤담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해 새로운 사회 모델로 감옥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놉티콘은 당연히 감옥 계획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벤담에게 파놉티콘은 사회의 모든 곳에 적용되어야 할 모델이라는 것이다.

 벤담은 파놉티콘을 통해서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71쪽) 하지만 파놉티콘은 실현되지 못했다. 몇몇의 사소한 문제로 인해 벤담의 파놉티콘은 실패했지만 문제는 파놉티콘 그 자체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통찰은 옳다. 그에게는 파놉티콘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연구의 대상이다. 이것은 푸코만의 독창적인 역사접근 방식('사건'중심)에 기인하는데, 중단된 상태의 "프로그램은 실제로 실행된 것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며 합리적 형태에 속한다."(121쪽) 즉 실현된 프로그램은 그 과정중에 수많은 수정과 첨가, 이해관계로 인해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지만 중단된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본질과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다시 세상에 드러난 파놉티콘. 푸코에게 파놉티콘은 근대 '권력'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장치다. 

 파놉티콘 내에서 드러나는 푸코의 권력의 개념은 다음의 두 가지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권력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한다. 두 번째로 권력은 '억압'하는 것이라 '생산'하는 것이다.(123쪽) 다시 한 번 파놉티콘을 상기하자. 누가 감시하는지 모르지만 항상 감시되고 있는 상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파놉티콘이다. 수감자는 항상 자신이 감시받는다고 느끼고 스스로를 감시하며 자기 통제를 내면화한다.(91쪽)

 푸코는 파놉티콘에서 바로 이 점을 간파한다. 근대 권력의 핵심은 과거의 권력체계처럼 권력을 권력자가 '소유'하여 직접 행사(공개처형과 같은 보여주기식 권력의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규율의 내면화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여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권력망에 있도록 스스로를 '작용'시킨다. 또한 신체를 '억압'하여 권력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감으로써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생산'하는 것이다. 

 작은 사회 그러나 서로 감시하는 사회, 이 사이에서 벤담이 기대했던 위안이나 우정이 가능할까? 이익의 만유인력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일상의 세부까지 파악하려는 파놉티콘 원리가 장악한 사회, 즉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노동과 이익을 위한 유용성이 중심이 되는 '완전한 통제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진정 행복할 수 있는가?(118~119쪽)

 지나칠 정도로 유용성을 강조한 벤담에게 파놉티콘은 하나의 유토피아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그의 이러한 관점은 식민지 정책을 옹오하는데서 명백히 드러난다) 공리주의적 한계는 결국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낭만적 개념이 역사적으로 '(권력의 연장을 통한) 그들만의(지배권력) 행복'이라는 주장의 다름 아니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더 서글픈 것은 이러한 권력의 작용이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 위의 군대, 공장, 학교 그리고 직장에서 지금도 방식을 달리하며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러한 삶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진정 그들은 승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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