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상대는 추첨으로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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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상대는 추첨으로>

제목이 곧 내용이라는 말에 이렇게 적합한 소설이 있는가 싶다.

결혼 상대를 추첨으로 정하는 법이 통과된 일본.

이혼 경력 및 전과가 없는 25세에서 35세까지의 미혼들은 난리가 났다.

당장 내일부터 강제 맞선 돌입이라니! 결혼 못하면 군입대라니!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야??!!

좋아서 난리 싫어서 난리 사방팔방으로 난리 불똥이 튀는 미혼들의 뼈아픈 연애사정.

사회파 소설은 무거워서 싫다고만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넘 재미나다>_<

평생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초식남 미야사카 다쓰히코.

자신감은 부족해도 변태도 아니고 직장도 있고 원만한 가정에서 큰 착실한 남자인데 인기가 없다.

앞으로도 여자 만날 일은 없겠거니 했는데 나라에서 맞선을 보란다.

뭐 이런 꿈 같은 일이 다 있담?

이상형의 여자를 만나 결혼할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마마걸 스즈카케 요시미.

술주정뱅이 폭력남편에 학대 당한 불쌍한 엄마를 위해 이날 이때껏 살아왔다.

엄마의 남편이자 애인이자 친구로 통제받는 삶이 이제는 너무나 버겁다.

아무라도 좋으니 누가 엄마에게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제발 결혼 좀 부탁드립니다!


연예인 뺨 치게 잘생긴 남자 긴바야시 란보.

시인 랭보의 이름을 따서 부친이 이름을 지었을 때 아들의 잘생김도 한 몫 했을까?

부유한 집안, 훤칠한 외모, 반듯한 직장, 원만한 성격, 좋다는 여자들이 줄을 서는 이 남자.

부족한 것 하나없는 사람이 어째서 추첨맞선자리에 나왔을까?

이거이거 의심스러운 걸?


철은 없지만 귀여운 공주님 후유무라 나나.

예쁘지 돈 많지 집안 빵빵하지 한 때는 나 좋다는 남자들이 줄을 섰었다규!

대체 왜 내가 이런 추첨 맞선에 나와야 하는 거야? 왜?!

엉망진창인 맞선남들에게 채이기 위한 나나의 노력이 눈물겹다.

군대에 갈지언정 절대로 꽝은 고르지 않을 거야! 절대!!

산아제한을 법제화한 중국 옆에 살면서도 국가주도강제맞선만큼은 상상도 못했던 나.

판타지에 버금가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웃프고 엄청난 가독성에 엄지엄지 척척.

거기다 작가 소개란을 보니 이거 보통이 아니다.

<70세, 사망법안 가결>, <뉴타운은 끝났다>,

<육아는 이제 졸업합니다>,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인구절벽을 소재로 한 <결혼 상대는 추첨으로>까지.

가키야 미우 작품만 읽어도 한일 양국의 사회문제에는 빠삭해지겠는데??

다음엔 또 어떤 발칙유쾌한 이슈로 돌아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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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꽃다발 에놀라 홈즈 시리즈 3
낸시 스프링어 지음, 김진희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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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놀라 홈즈 시리즈는 애들은 금방금방 크느구나를 실감하게 하는 책입니다. 실종된 왓슨 박사를 찾아 복잡한 영국 뒷골목을 뛰어다니다 못해 긴 치마자락을 저주하며 지붕을 오르고 구르고 유리온실로 떨어져내리는 에놀라의 행보에서 한층 성숙해진 소녀의 독립심, 용맹, 기지, 영리함을 느끼게 되거든요. 자전거를 타고 겨우겨우 가출하던 첫날과 비교하면 기묘한 꽃다발은 완전히 인디아나 존슨급. 인디아나 존슨은 아버지 해리 박사를 찾아 최후의 성전을 찾는 모험을 성공시켰는데 에놀라도 과연 엄마를 만날 수 있었을까요? 

   

왓슨 박사의 실종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아침. 레이디 세실리의 사건 후 무기력증에 빠졌있던 에놀라는 흥분으로 튀어오르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라고스틴 박사의 비서로 분장한 아이비 메쉴리의 6개월을 오빠 셜록이 파악한 것은 아닐까?평소 왓슨 박사를 흠모했던 에놀라의 마음을 간파한 셜록의 함정은 아닐까?두려움에 떨면서도 에놀라는 제 눈으로 사건을 직접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왓슨 박사가 정말 실종된 게 맞다면 그를 찾는 것이 바로 퍼디토리언 에놀라의 임무니까요. 이제와는 전혀 다른 분장으로 한껏 아름답게 치장한 에놀라는 왓슨 박사의 집에서 특이한 물건을 발견합니다. 왓슨 부인은 그저 기묘한 것으로, 오빠 셜록은 무관심으로 일관한 꽃다발들. 위로를 전하는 많은 꽃다발들 사이에서 에놀라만은 진득한 악의를 가진 세 가지 꽃을 포착해요. 하얀색 양귀비, 빨간색 산사나무, 무엇보다 꽃다발로 쓰이기에는 알맞지 않은 품종 아스파라거스. 엄마의 꽃말 암호를 공부했던 에놀라로서는 그 꽃들의 의미를 짚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잠을 의미하는 흰 양귀비, 재앙을 상징하는 붉은 산사나무, 아스파라거스만은 뜻을 알 수 없었지만 대신에 이들이 온실 속에서 성장한 화초라는 점만은 분명하게 짚어내죠. 이 꽃다발을 끝으로 왓슨 박사를 우롱하는 범인의 행보는 끝일까요?이다지도 섬세한 꽃다발을 만든 범인이 과연 남자일까요?셜록보다 몇 걸음이나 앞선 에놀라의 추적은 왓슨 박사의 앞 집에 하숙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답니다.


관자놀이에 점 찍고 돌아온 에놀라, 농담이 아니에요, 에놀라 홈즈의 새 분장에 점은 필수거든요. 빅토리아 시대의 화려하기만 할 것 같은 도시생활 속 배설물을 청소하는 급수마차와 그 급수마차를 몰며 다시 똥을 싸는 말의 얘기가 우스워서 혼났어요. 착취 당하며 빈곤에 시달리는, 그리하여 영혼까지 상실해가는 노동계층의 안타까운 사연도 여지없이 등장해 마음을 아프게 하구요. 새롭게 도착한 엄마의 암호로 느끼는 에놀라의 혼란은 한층 혼탁합니다. 외로워서요. 셜록이 엄마의 암호를 캐치한 이상 신문광고에 실린 암호의 출처를 반드시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인데 그러기가 싫대요. 그냥 엄마였으면 좋겠대요. 에놀라가 엄마를 찾을 때만은 딱 그 나이대의 어린 여자애라 너무 안타깝고 속이 상했습니다. 이 기특한 친구가 부디 내일은 덜 외로웠으면 좋겠어요. 큰오빠 마이크로프트와 작은 오빠 셜록, 에놀라가 함께 하며 우애를 키워갈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요? 그때를 응원하며 4권을 기다립니다. 얼른 나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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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밥보다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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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새해에도 이러저러하게 계획을 세웠거든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일기쓰기. 서포터즈로 활동 중인 서해문집에서 빨간 다이어리를 보내주셔서 '그래, 나도 일기쓰는 여자가 되어보는 거야!!' 하고 과감하게 목표를 잡았는데 오늘 펼쳐보니 1월 4회, 2월 0회, 3월 0회를 썼습니다. 69일 중에 꼴랑 4일 쓰는데 이 다이어리가 낭비되었다고 생각하니 "나무야 미안해!", 죄책감이 하늘을 찌르네요. 그래서 비가 오나??ㅠㅠㅠㅠ


직장인 A: 밥 먹으러 가죠.

직장인 B: 먼저 가세요. 전 일기 써야 해요.

직장인 A: 아니 어쩌다가 일기를 안 쓰셨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ㅡ 저자 서문 중


<밥보다 일기>는 19년 일기쓰기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읽은 책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는데서 저의 실패는 확정 도장까지 땅땅 박은 상태. 서문에 실린 대화 속 교수님의 포부 "독자로 하여금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거야! 밥 먹는 것보단 일기쓰기지!" 에도 저란 인간은 도무지 감화되질 않더군요. 교수님, 기생충보다 못한 현대 독자의 게으름을 너무 얕보신 것 같아요.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컴퓨터 모니터 옆으로 꽂힌 저의 다이어리까지 걸어가려니 거리가 화성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단 말예요. (실은 한발자국도 안됨. 방이 매우 작음;;;) 일기써야 하는데 생각하며 소록소록 꿀잠행ㅠㅠㅠㅠ 그래도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 일기를 씀으로 해서 얻게 되는 효과들에는 완전히 공감을 했습니다. 자기객관화, 추억캡쳐, 다른 영역에서의 글솜씨 발휘, 원대하게는 내 인생이 바뀌는 경험까지도 할 수 있음. 하게 될 거임!! 공감이 실행으로 옮겨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른 독자분들께는 이른 도움이 되길 바라며 아래 작게나마 내용을 요약해 봅니다.


숙제로 하던 일기쓰기 이후 단 한번도 일기를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일기 한쪽을 채우는데 길게는 두 시간까지도 걸릴 수 있습니다. 요리를 생각하시면 감이 잡힐 거에요. 요리 잘하는 사람한텐 떡볶이 까짓 이십분이면 충분하지만 처음 하는 사람은 양배추 씻고 어묵 써는데만도 벌써 삼십분 이상이 소요되잖아요. 설마 저만 그런가요??? 퇴근하고 피곤에 쩔은 몸에 안그래도 시간 없어 죽겠는데 뭐라? 일기 한장 쓰는데 두 시간을 쓰라고라? 당장에 불만이 솟겠지만 요령이 있습니다. 좀 부지런해야 하는 요령이에요. 1. 매일쓰기. 쓰는 일도 기술이라 우선은 매일매일 써서 익숙해져야 해요. 정말로 요리랑 똑같습니다. 2. 주제와 맥락을 정한 후 책상에 앉기. 일기 써야지 하고 앉아서 그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하면 두 시간은 날로 날리는거 껌입니다. 잘하는 사람은 냉장고 야채칸만 봐도 이거 만들고 저거 만들고가 딱딱 계획이 서지만 못하는 사람은 냉장고가 미어터져도 벙쪄요. 가급적이면 수첩 등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날의 인상적인 경험 한두가지쯤 미리 메모해두는 게 좋아요. 어떤 걸 쓸지만 정해져도 시간은 대폭 줄어듭니다. 3. 아무 거나 써라.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고 주눅 들지 말고 뭐든 쓰라고 하면서 예시로 들어주는 게 난중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계신 날이 있는 줄은 알았어도 공무를 봤다, 잤다, 몸이 불편하다, 라는 일기를 이렇게 많이 쓰신 줄은 몰랐어요. 존경합니다 장군님. 4. 가급적이면 노트에 써라. 웬일이니? 19세기야?? 싶으시겠지만 내 의지가 박약할 수록 노트에 쓰는 게 좋습니다. 컴퓨터나 폰으로 뭘 하면 딴짓하기 일쑤. 저도 이 리뷰 하나 쓰면서 카페 들어가 댓글을 몇 개나 달고 나왔는지 몰라요ㅠㅠㅠㅠ 5. 소설책 읽기. 실은 다양한 책을 읽으라고 하고 싶지만 책을 안읽던 사람이 당장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완독하려 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어렵기도 하고 마냥 재미로 읽는 책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꼭 어려운 책에서만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 생각의 기준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교수님이 예시로 들어주는 책은 이사카 코타로 작가의 <화이트 래빗>인데요. 일가족 납치범이 오리온이라는 남자와 인질을 교환하자고 경찰에게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독자는 경찰과 오리온의 입장에 공감하며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요. 굳이 인문사회철학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경찰의 선택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며 우리 안의 가치를 넓히거나 공고히 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어떤 책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느냐로 글쓰기의 힘을 더욱 단단하게 끌러올릴 수 있다는 얘기, 모두 공감하시죠? 참고로 <화이트래빗> 이 책 무척 재미납니다. 교수님께서도 적극 추천하시니 괜히 흐뭇한 거 있죠? ㅎㅎㅎ


아참. 교수님교수님 하면서 누가 썼는지 말씀을 안드렸네요. 기생충학 박사 서민 교수님! 저한테는 신석기인 외치가 심장수술을 받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던 여행기 <의학 세계사로>로 더욱 친숙하신 분인데 알고 보니 작가님이 쓰신 책이 열 권 가까이 된다나봐요. 그 중 절반은 쫄딱 망해서 서점에서 구경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요. 첫 책을 출간한 후 수치심이 너무 커 글솜씨를 늘릴 방편의 하나로 쓰기 시작한 일기가 또 이렇게 일기를 권하는 책 한 권이 되어 나왔으니 말씀처럼 글쓰기의 힘이 대단하지요? 교수님이 십년도 더 전에 실제 쓰신 옛날 일기와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물 같은 일기, 인터넷에서 발견한 초딩들의 다채로운 일기들과 다양한 참고 도서들로 하여 풍부한 재미를 선사하는 책입니다. 이미 일기를 쓰고 계신 분께는 자부심과 뿌듯함을, 일기를 안쓰는 분께는 소박하게나마 동기부여를 해줄 거에요. 물론 안쓰는 사람들은 거의 다 저처럼 이유가 있어서 책을 읽어도 잘 바뀌진 않겠지만요. 아유, 게으른 종자들, 안봐도 빤하죠 뭐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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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소리만 들으면서
이가라시 미키오 지음, 이범선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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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의 원작자 이가라시 미키오의 에세이입니다. 원작 만화가 아니라 김신회 작가의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만 읽어서 실은 원작자님 성함도 잘 몰랐어요. 호감도 비호감도 없는 거의 좀 무관심한 상태였는데 이 책을 선택한 건 어디까지나 표지 때문이었죠. 불꽃이 빵빵 터지는 도시의 저녁 풍경에 매료되었달까요. 그 아래 주저 앉아 있는 보노보노와 보노보노 아빠도 넘 귀엽잖아요. 표지가 다한 책이라도 상관없어 라는 생각으로 펼쳐들었는데 작가님의 생각이 소소하게 재미납니다. 다시 한번 덧붙이지만 '소소하게'가 뽀인트에요.

모든 것은 기분 탓이라는 신조 1번. 에필로그까지 십여 페이지도 안남았는데 결말을 확인 안하고 덮어버리는 독서 습관. 작가이면서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운 세계를 염원하는 태도. 좀 독특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요 사이에는 소설책은 아예 구매를 안하신다는데요. 그 이유가 너무 재미있는 책이 많아서래요. 너무 많은 이야기에 질려버려서 실은 이십 년도 전부터 소설 외의 책도 잘 안읽는다구요. 맛있는 음식도 눈 앞에 지나치게 포진해 있으면 물리는 것처럼 소설도 그러하시다구. 뭔가 알 것 같으면서 잘 모르겠는 설명되시겠습니다. 취미가 서점 가기, 영화관 가기인데 난청이 있으셔서 영화관이 괜찮으실까 했던 걱정도 잠깐. 영화관만 가면 주문신답니다. 코 골면서 자다가 맞은 적도 있대요;; 언니들이 나이 드니까 암만 재밌어도 순간순간 졸게 되더라, 나는 영화관만 가면 필름이 끊긴다, 영화관도 젊어서 많이 가라 해서 웃었는데 말예요. 영화관에서 딥슬립 하는 분이 여기 또 한 명 있을 줄이야. 갖가지 자랑, 이를테면 상을 타거나 영화를 개봉하거나 출판을 하거나 사인회를 열었던 에피소드도 애교처럼 등장하구요. 젊은 사람들이 연애를 안하거나 아이를 안낳는 문제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 같다, 재미있는 것도 좋지만 모두가 편한 쪽이 낫지 않나, 어쩌면 이것도 진화의 방향인지 모른다 하셔서 공감했어요. 지구가 선택한 진화의 방향으로 내가 무의식 중에 쫓아가는 상황, 나의 비혼은 지구의 선택이다!! 라고 생각하니 간밤 엄마의 전화 잔소리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쑥이 통통해서 이만큼 캤다로 시작한 얘기가 어떻게 결혼으로 이어지는지 이것만은 아직 미스테리지만요.

총 30개의 챕터로 목차가 구성되어 있는데 제일 인상적인 곳은 마지막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입니다. 십여 페이지를 남기고 책을 덮는 작가님의 버릇대로라면 아마 이 바닥은 못읽었겠죠? 우리는 흔히 사람을 책에 비유하잖아요. 작가님의 책의 비유는 좀 운명론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로 책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요. 이미 기록되어 있는 나라는 책이 주어져있고 그 페이지대로 매일을 읽으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구요. 우리는 우리가 작가인 줄 알지만 알고 보면 독자더라 하는 그런 거. 다음 페이지가 궁금하든 궁금하지 않든 재미있든 지루하든 고통스럽든 아프든 행복하든 남아있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밖에 없는 77억 1,457만 6,923개의 책들이 세상이라는 책장에 꽂혀있는거라 생각하니까 어쩐지 심오해지는 기분입니다. 왜 출간됐는지 모르겠는 책을 봐도 앞으론 분노하지 않으려구요. '내가 책이면 나 빼곤 읽고 싶어하거나 궁금해하는 독자는 아예 없을거야. 아니야 엄마라면..' 이라고 생각하니 엄마 잔소리도 용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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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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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속 복장을 보면 남자가 우주인 헬맷을 쓰고 어울리지 않게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잖아요. 주인공 이진후가 평범한 직장인이라서 그래요. 생물학자고 연구원이니만큼 고학력 전문직으로써의 거리감 같은 게 느껴질 거라 생각했는데 직장생활은 어디를 가나 다 똑같은가 봅니다. 성실하게, 때로는 손해까지 감수해가며 열심히 서포트 하고 연구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줄 타고 굴러들어온 놈이 팀장되고 연구 결과 돌려치고 고과에 영향이 갈만한 평가에 입김을 작용하고 멀쩡한 사람 하나 바보 만들고 말예요.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으로 가는 첫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날 이진우는 구조조정 명단에도 똑같이 이름을 올립니다. 넌 우주인 될 거니까, 이름도 날렸고,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해 줄 수 있지 않니. 그렇지만 우주인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좋은 날 이런 소식은 넘 하지 않습니까? 퇴직한 아내에 어린 두 딸, 연세 지긋하신 부모님을 두고 우주인에 도전하는 과정만으로도 벅찬데 우주인 시험에서 실패하더라도 보루가 되리라 믿은 직장마저 돌아서니 이진우는 앞이 캄캄합니다. 실장놈이 사람 자르면서 준비한 매생이 굴국에 흑미밥을 말아먹으며 앞으로 매생이는 쳐다도 안보련다 할 때는 어찌나 서글프던지요.


단순히 우주인을 꿈꾸는데서 그치지 않고 도전까지 했다는데서 이진우는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만요. 그래도 남들 살듯이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애 낳고 돈 벌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가장이 무슨 용기로 우주인에 지원했는지가 궁금하더라구요. 땅에 발 딛는 이곳을 벗어나 우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무얼 보고 듣고 느낄지도 알고 싶구요. 물론 그전에 최종 선발을 거쳐야 하겠지만요. 사실 초반만 해도 이게 핵심이라고 생각했지요. 근데 결과에 앞서서 이진우에게 닥친 시련은 매번 엄청난 것이더군요. 육체적으로 그를 몰고가는 여러 훈련들은 차라리 덜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후보 네 명 중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우주선에 탑승할 기회. 이 기회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세 사람 김태우와 정우성, 김유진과의 관계가 어마어마한 피로감과 번민을 불러일으켜요. 읽는 저까지도 감정이입이 되서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뻗칠만큼요. 맏형으로 믿음직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미소가 아름다운 정우성. 후보 중 유일한 여자, 성을 떠나 우주인으로의 정체성을 안고 싶은 김유진. 자신의 욕망에 너무너무 투철해서 미워지는 김태우. 이진우의 시선을 중심으로 두고 기록작가의 일지 속 다른 세 명의 편지와 대화가 곁들어진 긴 긴 이야기 속 중력을 벗어나고 이끌리고 다시 멀어졌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진심으로 아름답고 흥미진진했습니다. 무중력 훈련의 첫날 경험한 온갖 시름이 사라지는 것만 같은 쾌감, 경쟁자가 아닌 동료들로 인식하며 들떴던 오솔길 위에서의 부푼 마음, 1등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2등으로 낙인 찍히고 싶지 않다는 욕망, 손 쉬운 승리를 가져다줄 사다리 앞에서의 번뇌, 여러 좋은 사람들, 또 여러 나쁜 사람들. 책을 다 읽고 나면요. 이진우가 말하는 우주의 마음이 들리는 것만 같아요. 이제는 무대 밖의 배역을 꿈꾸는 김태우를, 그토록 얄밉게 느꼈던 남자의 욕망도 응원할 수 있을 것 같구요. 날개를 달고 떠난 줄만 알았던 희망이 어느 날 갑자기 힘차게 돌아올거라는 정우성의 말도 믿고 싶어만 집니다. 작게 오므라드는 사람의 등을 위로하는 삶을 향해 김유진과 함께 손도 뻗어요, 쓰담쓰담.


한국 작가의 책으로는 그 소재부터가 매우 색달랐던 책 중력.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력이 없는 듯이 밀쳐내고 기피하고 홀로 가려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누군가를 끌어당기고 함께 가고 책임지는 이진우가 더욱 특별해서 좋았어요. 그를 닮아 저도 중력의 힘을 가득 발휘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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