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백승무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의 ‘부활’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을 보면서 처음 드는 생각은 왜 제목이 부활일까였다. 책을 선정하기 위해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제목이기도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딴 것도, 『전쟁과 평화』라는 사건을 딴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비천한 신분의 아름다운 카츄샤와 매력적인 공작의 네흘류도프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과 부활은 언뜻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야기는 카츄사가 재판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 재판에서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참여하면서 그는 그녀과 다시 만나게 된다. 카츄사는 몸을 팔며 생활을 하는 중 살인 누명을 쓴 것인데 그러한 카츄사를 보면서 네흘류도프는 자신으로 인해 카츄사가 그리 된 것 같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도 그럴 것이 장교로 떠나기 전 자신의 고모집에 있던 카츄사를 능욕을 하고는 맴몰차게 떠난 것이 네흘류도프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말도 안 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재판에 환멸을 느끼고 어이없게도 중형을 받은 카추사를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 네흘류도프의 의식의 변화가 『부활 1』의 주된 내용이다.

 

소위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의 범주를 뛰어 넘은 철학서라고 소개되기도 한다.

아래는 네흘류도프가 타락하는 과정을 그린 대목이다.

  이 모든 끔찍한 변화는 그가 자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신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을 쉽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동물적 자아를 따르지 않고, 거의 모든 일을 그 반대편에 서서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타인을 신뢰하며 산다는 것은 그저 나들이 정해주는 대로 산다는 것, 자신의 정신적 자아를 거스르고 동물적 자아의 편에 선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없었으며, 자신을 신뢰하며 살 때는 항상 타인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타인을 신뢰하기 시작하니 주변사람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p. 78)

 

그리고 아래는 네흘듀도프가 어이없게 같혀 있는 한 젊은이를 보고난 뒤 세상의 부조리를 느끼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양산하는 환경을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시설을 만들어내고 있다. 각종 공장, 식당, 술집, 유곽 등이 바로 그런 곳이다. 우리는 이런 시설을 없애지는 않고, 도리어 반드시 필요한 시설로 간주하여 관리하고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이 아니라 수백만 명을 양산해놓고는, 어쩌다 한 사람을 체포하면 우리가 뭔가를 해냈고 자신을 방어했다고, 그를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로 유형을 보냈으니 더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p. 190-191)

 

비단 이런 두 단락뿐 아니라 소설의 곳곳에서는 인생과 사회에 대한 톨스토이의 깊은 통찰이 느껴져서 철학서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아직 이야기의 절반정도만 진행되어 앞으로의 이야기가 기대가 된다. 4년의 중형을 받은 카츄사의 형이 집행되고 그녀를 따라가는 네흘류도프의 여정이 이어진다고 하니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가 될지 사뭇 궁금하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선 왜 제목이 ‘부활’일지의 굼금증도 해결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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