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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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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지금까지 세상에 선보인 책들 만큼이나 긴 제목을 달고 그 ‘하루키’가 돌아왔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바로 그것이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문장을 필두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철도공사에 근무하는 서른여섯의 남성이다. 쓰쿠루는 고등학생 시절 어울리던 네명의 친구와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일방적인 절교를 당했고, 그 이후로 쓰쿠루는 죽음에 매우 가까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쓰쿠루는 스스로를 별 가치 없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쓰쿠루는 이런 호칭이 단지 이름에 색깔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쓰쿠루와 함께 다녔던 다른 네명의 친구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색을 가진 채 살고 있었다. 다만 쓰쿠루 자신은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를 찾을 수 없었다. 쓰쿠루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남달리 잘하는 것도 없었고 특출나게 잘생긴 것도 아니었다.



내가 나라는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건, 타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나로서 실재하기 위해선 다른 이의 평가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또렷한 색채를 가진 친구들 사이에서 쓰쿠루는 하얀 바탕의 역할을 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조화롭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쓰쿠루가 있었기 덕분이었다. 쓰쿠루는 옛 친구들의 말을 통해 자신의 참된 모습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리라.



지금까지 읽어온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 결여된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소설이 끝날때까지도 그 결여를 채우지 못한 채 그저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다자키 쓰쿠루는 달랐다. 쓰쿠루는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과거를 순례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과 마주했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던 사나이 쓰쿠루. 그는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책이 하루키의 전작들과 다른 점은 그 결말에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허무하고 결말이 너무나 모호하고 염세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나 역시도 그런 이야기를 예상하고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하루키 특유의 개성은 유지한 채, 염세와 허무를 덜어낸 느낌이었다. 음악과 섹스는 여전하지만 다자키 쓰쿠루는 사랑으로 귀결되는 이야기 안에서 숨쉬고 있었다. 

 

그대여, 하루키가 말하는 사랑을 알고싶은가? 그렇다면 다자키 쓰쿠루와 순례를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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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배명훈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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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시간 만큼 떨어져 있는 너와 나. 내가 한 말이 네게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7분 44초. 지구에 
있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배명훈의 신작, '청혼'.




우주 태생인 나는 우주 함대에서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나의 연인은 지구 태생의 지구에서 
거주하는 사람으로, 나는 170시간을 달려 40시간 동안 너를 만나고 다시 180시간을 거슬러 함대에 
복귀한다. '청혼'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너에게 쓰는 편지이다.






요즘 누가 편지를 부치나. 휴대폰만 집으면 단 몇 초 만에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할 수 있고 불과 
1초도 지나지 않아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가장 빠르게 대화를 해도 17분이 걸린다. 휴대폰만 있으면 단 몇 초 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17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래서 '청혼'의 내가 170시간을 달려가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에는 단지 사랑한다는 의미만 담긴 것이 아니다. 너를 보러 오는 170시간 
동안 지나쳐 온 지긋지긋한 우주공간만큼 널 사랑한다는 것이다. 

메세지를 보낸 지 10분만에 전송되는 답장과, 보낸 지 열흘이 지난 후에 받아보는 편지가 주는 
반가움이 다른 이유는 이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것들을 이들은 몇 번이나 곱씹어 
말한다. 떨어져 있는 거리 만큼의 신중함으로 쌓인 관계. 너무 빠른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신중함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빠른 세상 속에서, 나는 아직도 편지를 쓴다. 펜을 들어 글씨를 쓰는 시간과 편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답장이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의 설렘은 아무리 빠른 
메신저라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 


'청혼'의 주인공이 170시간이 걸리는 청혼을 한 이유는, 170시간 만큼의 설렘과 170시간 만큼의 
신중함을 담은 청혼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주를 묘사한 일러스트이다. 마치 책을 통해 우주로 날아간 
듯 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몽환적인 일러스트는 책이 담고 있는 분위기와 어울려 환상적인 시너지를 
낸다. 본문 사이사이 들어간 일러스트 덕분에 한층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만난 지도 참 오래 되었다. 띠지와 덧싸개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전작에서 꾸준히 만났던 배명훈의 위트가 그대로 살아있으면서도 전작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다. 
보다 하드SF의 느낌이 듦과 동시에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아련함과 
먹먹함도 느껴진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내게 다가온 것들은, 256페이지 만큼의 무게가 
담겨있었다. 


나의 연인에게 이 책을 건네며 청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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