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벨리의 양자역학 이야기 <Helgoland>를 번역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출간됐다. 세어보면 국내에 번역된 그의 여섯 번째 책이니, 나름 그의 생각이 잘 알려졌다고 볼 수 있겠다. 각각의 책은 비교적 짧지만,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은 일반인들이 (그리고 물리학자들이?) 그의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 책은 그가 생각하는 양자역학 해석과 세상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양자역학은 세상의 본질이 물질과 실체가 아니라 '관계'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그는 믿는다. 불교에서 비슷한 관점을 표했던 인도의 나가르주나(龍樹, 2~3세기 인물)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을 옮겨 놓는다. 


  나가르주나 사상의 매력은 현대 물리학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고전적 철학이든 현대의 철학이든 최고의 서양 철학과 공명합니다. 흄의 급진적 회의주의와도, 잘못 제기된 질문의 가면을 벗기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도 공명합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많은 철학들이 잘못된 출발점을 가정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설득력이 없게 되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실재와 그것의 복잡성과 이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인 토대를 찾겠다는 개념적 함정에 우리가 빠지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형이상학적으로 과도하지 않으며, 냉철합니다. 그는 모든 것의 궁극적 토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그저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일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탐구의 가능성이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게 되죠. 나가르주나는 세상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도 아니고, 실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회의론자도 아닙니다. 현상의 세계는 우리가 탐구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일반적인 특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의존성과 우연성의 세계이지,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181~18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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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하다가, 언젠가 닥쳐올 피할 수 없는 일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이 영웅이다. 이런 역사의 한 장면이 어제 바둑에서 펼쳐졌다. 


한국은 제25회 농심신라면배에서 앞에 나선 4명이 1승도 거두지 못했고, 신진서 9단마저 진다면 전패로 탈락할 위기였다. 부담감이 엄청났을 텐데 그 부담감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만약 패했다고 해서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었을까.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그리고 수고했다는 말을 할 수밖에... 하지만 그는 승리했고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신진서 9단을 응원하며 박수를 보낸다. 


관련 기사: https://cyberoro.com/news/news_view.oro?num=53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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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
전갑생 외 지음 / 뉴스타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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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에서 펴낸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사진집이다(다른 시기의 사진도 일부 섞여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등 해외 각국의 기록관에서 수집한 영상과 사진 등을 토대로 했다고 한다. 


미군은 2차대전 시기 태평양 전선에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한국전쟁에서 투하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히 이에 수반한 민간인의 피해도 심했다. 특히, 개량된 소이탄이라고 할 수 있는 네이팜탄 32,357톤을 투하했다. F-51 머스탱이 이중 거의 절반인 15,221톤을 투하했다(115 페이지). 젤리 형태의 네이팜 용액을 비행기의 외부 연료탱크에 주입한 후 백린 점화기를 넣고 투하하여 네이팜탄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103~104 페이지). 


편집에 문제가 조금 있다. 20 페이지, 32 페이지의 내용이 제대로 시작하지 않고 제대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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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12-05 0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ueyonder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심 축하드립니다
저도 유시민. 신형철. 문재인. 칼세이건. 신영복선생님을 존경합니다..

blueyonder 2023-12-05 10:41   좋아요 2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와같다면 님께서 올리시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평안한 연말과 희망찬 새해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폭격의 역사 - 끝나지 않는 대량 학살
아라이 신이치 지음, 윤현명.이승혁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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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대테러전쟁까지 간략하지만 잘 정리된 폭격의 역사이다. 저자는 일본의 아라이 신이치 스루가다이 대학 명예교수로서, 2차대전 중 1945년 3월 9~10일 밤에 일어난 도쿄 대공습을 직접 겪었다고 한다. 


1903년, 라이트 형제는 최초로 동력 비행기를 이용하여 비행에 성공한다. 이후 비행기는 곧 폭격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튀르키에(당시 오스만 제국)가 지배하던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이탈리아-튀르키에 전쟁(1911~1912)], 여기서 비행기를 이용한 최초의 폭격이 일어났다고 한다. 


유도 미사일 등으로 정확성이 향상된 지금도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는 소이탄(incendiary bomb)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클러스터 폭탄(집속탄集束彈)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집속탄의 용기 안에는 자탄이 약 200개 정도가 들어 있는데, 상공 100~1,000 미터 상공에서 흩어져서 넓은 지역을 초토화한다. 자탄은 폭발 시 장갑차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지표면에 떨어진 자탄 중 상당수는 불발탄이어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민간인을 살상한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폭격을 제한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1977년에는 '국제적 무력 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 추가의정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국가들은 조약 문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민간인 밀집 지구를 폭격하고 있다. 최근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또한 무차별 폭격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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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penheimer 오펜하이머 각본집 영문판 (Paperback)
Christopher Nolan / Faber & Faber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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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집을 처음 읽어본다. 영화에서 놓친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읽었는데, 사실 멋있는 대사 몇 개 빼고는 크게 놓친 건 없는 듯 싶다. 이 각본집은 영화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아 보인다. 


영화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오펜하이머가 겪는 보안청문회, 그의 회상, 그리고 스트로스의 상원 인준청문회이다. 각본집을 읽으면서 너무 상황을 왔다갔다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따라가기 힘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 장군 사이의 대화에서 이 둘의 이름을 바꿔서 잘못 인쇄한 부분이 있다(p. 93). 


영화의 마지막 장면 부분: 

EXT. LAKESID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PRINCETON -- DAY


Einstein turns to leave. Up the hill, Strauss approaches...


OPPENHEIMER

      Albert? When I came to you with those calculations?


Einstein pauses. I watch raindrops make circles on the surface of the pond...


OPPENHEIMER

      We were worried that we'd start a chain reaction that would destroy the entire world...


EINSTEIN

      I remember it well. What of it?


OPPENHEIMER

      I believe we did.


Einstein PALES. TURNS, passing Strauss without a word... The sound of FEET STAMPING...


Close in on: my staring eyes as I visualize THE EXPANDING NUCLEAR ARSENALS OF THE WORLD... THE FEET, FASTER AND FASTER --


When I can take it no longer, I JAM my eyes closed and we --


Cut to black.


Credits.


End.


(p.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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