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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읽기 세창명저산책 3
서정욱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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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을 개괄하기는 좋지만, 비문투성이에 번역 상태가 엉망이다. 2-3페이지에 하나씩 비문이 나오는 꼴이다. 아예 뜻이 반대가 되어버리는 번역은 치명적이다.
+) 읽다보니 갈수록 심각하다. 오탈자도 너무 많고 엉망진창이다. '목적론적 증명'이라면서 내용은 왜 '우주론적 증명'인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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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공감 - 포스트모던 칸트와 공감윤리
맹주만 지음 / 어문학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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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언부언에 비문도 수두룩하고 오탈자 검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 심지어 문장들이 잘리고 겹치고 도저히 읽을 수가 없을 정도. 내용은 정말 깊고 풍부하지만, 학술서라면 기본적으로 이따위 기본적인 결함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책을 너무 급하게 만들었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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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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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주체의 자리는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사랑에 대한 니체적 읽기?

사랑의 불가능성과 사랑의 폭력성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서, 폭력성은 불가능성이라는 문학적 수사로 쉽게 포장될 수 있다. 그것이 문제다. 사랑을 '견딜 수 없는 약자'의 처연한 몸부림은 기실 정념에 사로잡힌 노예의 폭력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문학이 범하는 윤리적 오류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 폭력의 미화다.

사랑은 주체의 자리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들린') 사람은 객체가 된다. 타인의 객체인 동시에 사랑이라는 사건의 객체가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를 약자로 만든다. 주체의 자리를 사랑에 빼앗긴 나는 주체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분투한다. 분투의 양상은 객체화다. 사랑을 객체화하거나, 타인을 객체화하거나. 그러나 사랑의 실재성은 언제나 의심스러우므로, 주체로 돌아오기 위한 분투는 쉽게 후자로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나는 사랑의 주체가 되기 위해 너를 소유해야만 한다.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의 불가능성은 대체로 폭력성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불가능성은 타인을 소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불가능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쳐야 한다. 사랑에 있어 '견딜 수 없는 약자-객체'가 되어버린 나는 또다른 누군가를 약자-객체로 만들 것이 아니라, 나의 객체성을 견뎌야만 한다. 소유할 수 없음을 소유하고자 하는 분투가 아니라, 견딜 수 없음을 견디고자 하는 분투가 사랑의 분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숭고한 분투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랑은 르상티망에 기인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우리를 숙주로 삼아 기생한다. 이 책이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사건 속에서 절대적 객체가 된다. 상처 받기 쉬운 객체의 자리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분투한다. 그러나 사랑의 분투는 타인에게 닿기 위한 '응석'처럼 드러나서는 안 된다. 약자는 응석받이가 아니라 상처받기 쉬운 자다. 사랑이 노예도덕을 요구하는 순간, 사랑은 폭력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극복하고 사랑의 '주인'이 되기 위한 분투가 아니라, 사랑의 불가능성을 소유의 불가능성으로 대체하여 사랑의 '응석받이'가 되는 모습을 그린다.

'견딜 수 없음'은 타인에 대한 폭력의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실체없는 '사랑'에 대한 자기극복을 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노예가 아니라 사랑의 주인이어야 한다. 견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견뎌내고자 하는 자가 사랑의 주인이다. 이렇게 사랑의 주인이 되는 일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사랑이라는 의심스러운 실재에게서 빼앗긴 주체의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이러한 분투가 사랑을 숭고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의 불가능성과 사랑의 폭력성 사이의 모호한 경계짓기는 결국 폭력을 미화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과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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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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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각자의 덮어둔 구멍이 있다. 우리는 그 구멍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구멍을 덮어놓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구멍은 무언가의 상실이거나 되돌릴 수 없는 상처다. 우리는 그 구렁텅이의 가장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서,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한다. (⋯) 부러 빠질 마음을 먹지는 않으나, 그것의 존재로 인해 늘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구렁"(240)이다.

구렁의 가장자리에서, 구렁을 덮어놓고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토록 담담하고 처연하다. 그것들은 대개 삶이 채 무르익지 않은 어리거나 젊은 날의 기억이다. 그래서 더욱 섬세하고 여리며 맑다. 하지만 들춘 구멍을 다시 덮은 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지금의 그들을 상상하는 일은 꽤나 아픈 일이다. 그들은 여전히 덮어놓은 구멍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구멍 속에는 각자의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 그러한 구멍을 덮어놓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구멍을 덮어놓을 수 있을 만큼의 빛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249) 살아갈 것이다. 이토록 우리는 맑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어둠 바깥의 '빛과 물질'에 기대어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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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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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데올로기는 집단적 동일성을 전제로 '나'와 '당신'이라는 개체를 집단적 주체성 안에 포섭해버린다. '나들'이라는 이 기묘한 호명 방식은, '나'와 '당신'이라는 개별성들이 '공명'하고 '공감'하는 '시적' 인칭이다. (...) '나들'은 '내'가 온 존재를 기울여 함께하는 '나-너'가 공존하는 시적 주체의 이름이다."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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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갖는 연민, 특히 '우리'가 '너'에게 갖는 연민은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 될 위험이 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연민을 품은 우리는 상처받은 누군가를 동시에 밀어내고 있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되어 보지 못했으므로, 그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이 뭘 아냐'는 비아냥을 뱉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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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은 그렇기에 '나들'이라는 호명 방식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폭력성이 지워버린 '너'와 '나'의 개별성이 온전히 살아있으면서도 각각 스스로인 채 공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이들에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이처럼 모든 '당신'을 '나들'로 여기거나, 어설픈 연민 따위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두를 완벽하게 해낼 수가 없다. 인간이란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임과 동시에, 불가피한 '공감력'을 기본값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해야 할 윤리적 자세는 끊임 없이 스스로 상처를 짊어지는 능동적이고 대속적인 자세일 수밖에 없다. 그 상처는 모든 것들을 '나들'로 여기는 데에 실패하거나, 상처받은 이에게 모진 비아냥을 듣는 데에서 온다. 그렇게 상처를 통해서 우리는 상처받은 '나들'의 공동체라는 윤리적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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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들'의 공동체는 '목적의 왕국' 만큼이나 불가능한 이상에 가깝다. 내가 아닌 것들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우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생명, 모든 자연물들과 교감하며, '나들'의 눈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한다. 어쩌면 이상적인 윤리는 인간이 아닌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죽이고 먹고 훼손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이 아닌 것들은 죽여도 된다고 외치는 인간들을 유일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비인간'이 더욱 '윤리적'이라는 아이러니. 김선우 시인은 그렇기에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만물 속에 우주 먼지처럼 스며 소통한다. 심지어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마저 허물어, 영속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계는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이 모두 혼융되어 있는 세계다. 따라서 김선우 시인에게 모든 시는 '녹턴', 진혼곡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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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나들'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김선우 시인의 자세는 모든 것들을 '당신'으로 호명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당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당신이 언젠가 "강가 모래 속 반짝이는 점비늘"이 되어 있음을 알아챌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우주 만물 어디에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별없는 '당신'의 세계에서 '나'는 '나들'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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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묻는다. 죽어버린 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난 뒤의 세계에선 누구에게 그 죄가 있는 것인가. 어딘가에서 신음하고 있을 수많은 '나들'을 아프게 하는 그 죄는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응답하지 않는 신 아래에서 "그해 봄"의 죄는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설픈 연민으로 누군가를 밀어내어선 안된다. 우리는 '나들'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상처는 '나'의 상처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나들'의 아픔을 가져와 아파해야 한다. 그들은 연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플 뿐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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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묻겠다. 그들의 아픔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그들을 아프게 하는 죄는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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