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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평점 :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집단적 동일성을 전제로 '나'와 '당신'이라는 개체를 집단적 주체성 안에 포섭해버린다. '나들'이라는 이 기묘한 호명 방식은, '나'와 '당신'이라는 개별성들이 '공명'하고 '공감'하는 '시적' 인칭이다. (...) '나들'은 '내'가 온 존재를 기울여 함께하는 '나-너'가 공존하는 시적 주체의 이름이다." (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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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갖는 연민, 특히 '우리'가 '너'에게 갖는 연민은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 될 위험이 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연민을 품은 우리는 상처받은 누군가를 동시에 밀어내고 있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되어 보지 못했으므로, 그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이 뭘 아냐'는 비아냥을 뱉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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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은 그렇기에 '나들'이라는 호명 방식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폭력성이 지워버린 '너'와 '나'의 개별성이 온전히 살아있으면서도 각각 스스로인 채 공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이들에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이처럼 모든 '당신'을 '나들'로 여기거나, 어설픈 연민 따위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두를 완벽하게 해낼 수가 없다. 인간이란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임과 동시에, 불가피한 '공감력'을 기본값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해야 할 윤리적 자세는 끊임 없이 스스로 상처를 짊어지는 능동적이고 대속적인 자세일 수밖에 없다. 그 상처는 모든 것들을 '나들'로 여기는 데에 실패하거나, 상처받은 이에게 모진 비아냥을 듣는 데에서 온다. 그렇게 상처를 통해서 우리는 상처받은 '나들'의 공동체라는 윤리적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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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들'의 공동체는 '목적의 왕국' 만큼이나 불가능한 이상에 가깝다. 내가 아닌 것들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우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생명, 모든 자연물들과 교감하며, '나들'의 눈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려 한다. 어쩌면 이상적인 윤리는 인간이 아닌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죽이고 먹고 훼손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이 아닌 것들은 죽여도 된다고 외치는 인간들을 유일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비인간'이 더욱 '윤리적'이라는 아이러니. 김선우 시인은 그렇기에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만물 속에 우주 먼지처럼 스며 소통한다. 심지어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마저 허물어, 영속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계는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이 모두 혼융되어 있는 세계다. 따라서 김선우 시인에게 모든 시는 '녹턴', 진혼곡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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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나들'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김선우 시인의 자세는 모든 것들을 '당신'으로 호명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당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당신이 언젠가 "강가 모래 속 반짝이는 점비늘"이 되어 있음을 알아챌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우주 만물 어디에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별없는 '당신'의 세계에서 '나'는 '나들'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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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묻는다. 죽어버린 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난 뒤의 세계에선 누구에게 그 죄가 있는 것인가. 어딘가에서 신음하고 있을 수많은 '나들'을 아프게 하는 그 죄는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응답하지 않는 신 아래에서 "그해 봄"의 죄는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설픈 연민으로 누군가를 밀어내어선 안된다. 우리는 '나들'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상처는 '나'의 상처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나들'의 아픔을 가져와 아파해야 한다. 그들은 연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플 뿐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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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묻겠다. 그들의 아픔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그들을 아프게 하는 죄는 누구의 책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