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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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을 읽고 나면 서평을 쓰기가 어렵다. 지금까지 서평을 썼던 책들이 재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읽는 동안 완전하게 매료되었던 책일수록 그저 권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길고 장황한 글로 인해 흥미를 잃게 되진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기우에 그치길 바라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차별과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해방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세상의 불합리를 느꼈던 남성이라면 정독하길 바란다. 더한 차별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당장 수직적인 성장은 불가할지 몰라도, 시각은 반드시 수평적으로 넓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자세하게 알지도, 그렇다고 마냥 극단적으로 치우친 가부장적 성향의 이와 다퉈보지도 않았지만 나는 일련의 성장과정에서 분명히 차별을 겪어보았다. 영광스럽게도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대학생의 관점에서 내가 살아왔던, 그리고 생활하고 있는 배경을 토대로 사회를 진단하고자 한다.

 

 

소는 누가 키울 거야, 소는!”

 

한 때 대한민국을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행어가 있었다. 꽤나 극단적인 모습의 남성과 여성이 부딪히며 웃음을 자아내는 개그 프로그램의 한 코너였다. 남성 패널은 일관적으로 여성이라면 집에서 남자를 떠받들며 살아야 한다고,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면 소는 누가 키울 것이냐고 눈을 홉떴다. 여성 패널은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며 역발상을 주장했다. 방청객들은 남성 패널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웃음을 터트렸고, 여성 패널이 받아치는 말에 박수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실은 남성 패널의 말은 종종 현실에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반면 여성 패널의 말은 바깥에서 이야기되었을 때 박수는커녕 야유를 받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사회 안에서 울리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리고 타자의 영역에 배제되어 있던 여성과 기타 소외층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을 타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게 청자에게 들리고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여성 해방이란 사실 케케묵은 논쟁거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야 할 만큼, 여성 해방이라는 사안이 완전하게 해결되었을까?

 

 

우월한 남성들

 

사실 제목이 다소 일반화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본문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저자 리베카 솔닛이 그런 지적을 실제로 받았다고 한다. 그자의 말로는 자신은 한 번도 여성을 비하하거나 아랫사람 마냥 대한 적이 없다면서 솔닛을 피해 의식에 젖은 패배자인양 몰아간 뒤, 화룡점정으로 더 많은 남자를 만나보았으면 좋겠다고 권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남자도 있으므로 그리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남성들은 가르치려 든다. 하물며 페미니즘마저도 가르치려 한다.

 

남자들은 아직도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그리고 내가 알고 그들은 모르는 일에 대해서 내게 잘못된 설명을 늘어 놓은 데 대해 사과한 남자는 아직까지 한명도 없었다. (21p)

 

많은 여성들은 사회에 진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본인의 목소리를 크게 내진 못하고 있다. 유명 페미니스트들이 대신해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세상의 반절이나 되는 반대 세력들로부터 폭력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가상에서 코피가 터지고, 살해 협박을 받곤 한다. 반면에 여성의 인권을 짓밟거나 경시하는 태도 혹은 언행을 저지른 이에게는 어떠한가. 별반 문제없이 활동을 하고 있다. 모 포털 사이트의 맹목적인 여성 혐오는 수면위로 떠올라, 다수의 이들이 오가는 SNS에서 서슴지 않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김치녀라는 저급한 단어로 여성을 일반화하여 폄하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방송에 나와 남성의 자신감을 짓밟는-것이라고 남성들이 주장하는- 발언을 했던 한 일반인 여성은 좀처럼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채 몇 년 째 질타를 받고 있는데, 사랑하는 이와 잠자리를 가졌었단 이유로 여성을 창녀로 몰아간 남성 방송인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한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면, 비슷한 실수를 한 다른 이도 함께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간단한 논리 같은데 다들 여기에서 얼토당토 않는 차이점을 들어가며 끝내 여성을 짓밟고 만다. 그게 아니라면서 결국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수용한 여성들은 남성 방송인의 그릇된 부분을 묵인하며 그를 포용한다. 하지만 좀처럼 납득하지 못한 채 반박하는 여성들은 아집을 부리는 극단적 페미니스트 취급을 받게 된다. 어쩌면 조금은 서글픈 사회의 모순적인 면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내에서 성폭행이 발생했으니 여학우들께서는 귀가를 서두르시길 바랍니다.”

 

솔닛이 본문에 소개한 폭력 사건들은 미국을 기준으로 하여 전 세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극악무도한 살인사건부터 성폭행을 포함한 물리적 폭행을 모두 포함한다. 이미 충격을 받았는데 그 충격에서 헤어나기도 전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암만 땅덩어리가 넓고 인구가 많다지만 6분에 한 번씩 강간 신고가 들어온다는 것은 그 횟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여기에 배우자, 혹은 옛 배우자 혹은 옛 애인으로부터 살해 협박 혹은 살해에 이르는 중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여성들 역시 매우 많은 숫자라고 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경우가 워낙 잦고 방대해 딱히 보도 될 가치마저 상실한 상황이라는 건 굉장히 슬픈 일이기도 했다. 그저 그런 사건이 되기까지, 미국인들은 여성이 피해자인 범죄 상황에 대하여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익숙해진 것이다.

 

사건에 대한 분석은 대체로 남성을 위주로 한다. 정신 이상자였거나, 알콜 중독으로 인한 판단 기능 저하의 상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분노 조절 장애 등 남성이 가지는 문제는 다양하게 조명된다. 결국 남성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범죄가 일어나지 못할 환경을 조성하기보다 피해자를 없애 가해자까지 함께 증발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무식한 사건 해결 방법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사건이 숱하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포괄하거나 관통하는 그 원인을 규명하기보다, 개별 사건으로 둔 채 판단한다. 숲이 무너져가고 있는데 나무 하나하나마다 전염병이 다르게 걸렸다고 진단하는 것과 다른 게 무엇인지 도통 모를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125p)

 

이것은 비단 미국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전 세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를 보아도 음주 상태였기에, 혹은 초범이기에 가벼운 징계를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때문에 개별 대상에게 전자 발찌를 씌워 감시하거나 개인이 깊게 반성하고 있을 경우 피해자도 아닌 법원에서 선처를 해주는 경우까지 있다. 여성 인권이 낮은 나라일수록 성범죄나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려 든다. 이래도 여전히 여성 해방의 문제가 고리타분한 사안이라 생각한다면 이제 그만 서평을 읽어도 좋다.

 

 

세상의 반이 남자, 세상의 반이 여자

 

이별한 이를 위로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말 그대로 세상을 이루고 있는 반이 이성인데, 한 이성에게 상처받았다고 하여 주눅 들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뜻을 도출해보자. 우리는 다른 성별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주에서 먼지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인데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동안 1분에 몇 km를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걸 자각하지 못하는 한낱 미물에 불과 한다. 단순히 지성을 가지고 있단 이유만으로 우열을 가리고, 생긴 것이 다른 이를 차별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굳이 우주적 차원에서 조감하지 않아도,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이후로 함께 등장한 페미니즘은 아직 성숙한 모습을 갖추기에 이르다. 학자들이 개념을 단단히 숙지하고 있어야 만 ‘-ism’이라 불리는 학문이 자리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대중들까지도 그것을 포용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가부장제가 완전하게 사라지기엔, 그 폐해가 만연하다. 몰아내는 것은 모두의 노력이 기반 될 때이지, 페미니스트들이 목소리를 키운다고 하여 몇 백 년을 송두리째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이 페미니즘의 힘을 믿고 있음을 방증한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던 삶의 양식을 그들이 흔들고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균열이 보이며 다른 모습의 사회상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하게 그 사회가 도래하기엔 먼 일이다. 변혁의 움직임이 조금 보인다고 하여 세상이 순식간에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굉장히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작은 움직임이 무너뜨려버릴 만큼 자신들이 믿는 가치관이 어느 정도 오류를 품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군데군데 이정표가 있기는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제 나름의 속도로 걷는데다가 어떤 사람들은 뒤늦게 합류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진하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려고 하고, 심지어 소수의 사람들은 역방향으로 행진하거나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한다. (206p)

 

페미니즘은 단순히 불합리함을 깨뜨리자고 나타난 사상이 아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켜 모두가 공평한 위치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평등주의의 한 단면이다. 동시에 여성성을 구현하여 약자나 소외된 타자를 포용하기 위함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다. 비록 극단적인 모습으로 역차별을 야기하거나, 여성중심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 그 동안의 설움을 갚자는 움직임도 보여주고 있으나 그들이야 말로 이미 당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짓누를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공평하게 살자고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무너뜨릴 셈인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은 모든 글을 통틀어 말한다. 여성도 목소리가 있고, 여성도 남성과 같은 사람이며 단지 생식기의 모습이 다르고 조금은 사고방식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는 하나의 생명체이라는 것. 지성은 가랑이 사이에 있지 않다. 생식기가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고 해서 지성까지도 돌출시킬 필요는 없다. 고로 무작정 가르치거나 짓밟으려 하는 몰상식한 행동은 이제 그만 두라는 것을 말이다. 신랄하게 남성들과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을 비판하던 글은 중반부에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리베카 솔닛은 단지 남성을 비난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인공들을 해방시킴으로써 주제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성별과 인종, 모든 차별적인 개체에서 벗어나고자 이야기했던 작품들을 소개한다. 해방에 대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결국 해방을 이야기했던 모두가 담은 메시지는 공존이었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자. 얼마나 인간적인 제안인가. 더 많은 분들이 책을 통해 배워보길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남자는 욕망과 그 욕망이 퇴짜 맞을지도 모른다는 노여운 전망을 함께 품고서 여자에게 접근한다. 분노와 욕망은 늘 함께 존재하며, 두가지가 마구 뒤엉켜 한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는 언제든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사랑이 죽음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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