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문교양 출판그룹 반비입니다. ^^


사이언스북스에서 제인 구달 신간, 나의 조선미술 순례』가 출간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신간으로, 조국의 미술가들을 직접 만나 예술을 탐구하고

그에 얽힌 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자아를 찾아가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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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서경식이 만난

조국의 미술과 미술가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20년,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또 다른 미술 순례기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저자로서 기억하게 된 것은 1993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은 이제는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거의 하나의 분야로 자리 잡은 ‘미술 기행’의 거의 첫 출발에 해당하는 책이었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판매되는 몇 안 되는 미술 기행기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들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그림 읽기의 새롭고도 친근한 방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조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형들(서승, 서준식)의 옥바라지를 하는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지하실에 난 창문으로 겨우 들어오는 희박한 공기였다고, 저자는 그 책에서 기록한 바 있다. 예술이 역사와 현실과 삶과 독특하게 뒤섞이며 서로를 해석하거나 확장하는 놀라운 장면들이 그 책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에 출간되는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서 저자는 이제 60대가 되어 유럽의 미술관이 아닌 한국의 미술관들을 순례한다. 30대의 재일조선인 청년이 집착했던 주제들, 죽음, 섹슈얼리티, 가족, 민족…… 같은 것들이 여전히 60대 재일조선인 노교수의 눈과 귀와 온갖 감각들을 사로잡고 날카로운 통찰들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과 삶의 변화를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 지점들 역시 드러난다. 

가령 저자는 이제 홀로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작품과 고독하게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F와 함께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조국’의 미술관을 찾는다. 그리고 정말로 원한다면 그 작품을 만든 작가들과 직접 한국어로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조국은 더 이상 그가 70년대에 보았던 군사독재 치하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또 이제 형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조국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와 활동을 위해 찾게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상황에서 저자는 20년 전, 30년 전 그림들 앞에서 던졌던 것과 똑같은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이번에는 이 물음들에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전에는 단순히 목격자에 머물 수 있었던 독자들을 이번 순례에는 더 깊이 동참시킨다. 위의 답을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20~30년 전의 그 순례와 지금의 이 순례의 미묘한 차이들을 읽어내는 것은 작가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나 자신의 변화를 읽어내는 일이 된다.

한편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은 마치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나란히 걸린, 렘브란트의 34세 때와 63세 때의 자화상을 보는 일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삶의 질문, 궁극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갈구하는 그 빛나는 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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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평단 모집 상세 내용



하나,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평단 모집 포스팅을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 간단하고 성실하게 적어서 스크랩 링크와 함께 댓글로 올려주시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 2014년 12월 15일(월)부터 12월 21일(일)까지 입니다.


셋, 총 추첨인원 10명입니다.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인원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넷, 서평단 발표일 2014년 12월 22일 월요일입니다.

서평단에 선정되신 분은 12월 25일까지 개인정보를 비밀댓글로 적어야합니다.

12월 25일 이후까지 확인이 안되면 선정이 자동취소됩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12월 26일(금)부터 1월 9일(금)까지 15일간입니다.


마지막, 첨된 서평단 분들은 서평기간인 15일간 알라딘 개인 계정으로 서평을 작성한 후,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평단 발표 포스팅 알라딘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외부 채널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서평 및 서평완료 댓글을 작성하지 않을 시,

다음 서평단 모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앙드레 브락의 ‘물질은 어떻게 생명체가 되었을까’에 환원(還元)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세포의 기능에 반드시 필요한 분자들을 칸막이 분자 즉 막(膜) 분자, 정보 분자 즉  DNA와 RNA, 촉매 분자 즉 단백질 효소로 설명한다. 이어 저자가 꺼낸 흥미로운 이야기가 바로 환원이다. 탄소 원자가 산소 원자보다 수소 원자에 결합되어 있는 경우를 환원된 상태로 설명하며 저자는 환원 상태의 특징을 요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요리할 때 소스를 졸이려면 물을 제거하면 되듯 화학에서 분자를 환원하려면 산소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뉴턴 코리아에서 나온 ‘과학 용어 사전’에서는 환원을 어떤 물질이 산소의 일부 또는 전부를 잃거나 외부에서 수소를 흡수하는 화학 변화 즉 전자를 첨가하는 변화로 설명한다. 산소를 잃고 수소를 흡수하는(전자를 첨가하는) 변화라는 것이다. 내처 ‘과학 용어 사전’은 유전자를 설명한다.



생물학에서 유전하는 형질의 원인이 되는 인자인 유전자의 실체는 핵산(核酸)인데 DNA가 보편적이지만 일부 바이러스에서는 RNA일 때도 있다는 것이다. 이정우 교수는 ‘기술과 운명’에서 “생명의 본질은 자기복제에 있고 자기복제를 위한 프로그램이 DNA”라는 설명을 한다. DNA는 dioxyribonucleic acid의 약자이고 RNA는 ribonucleic acid의 약자이다. DNA는 핵 속에 있지만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에도 존재한다. 복제가 가능하고 특정한 단백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지시할 엄청난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분자가 DNA이다. 뉴클레오티드는 DNA의 반복되는 단위이다. DNA는 두 가닥의 사슬이 꼬여 나선(螺線)을 이루고 있어 이중 나선(double helix)으로 불린다. RNA는 한 가닥의 사슬로 된 핵산으로 핵 밖에도 존재한다. 세포 속을 “이리 저리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판스워스 교수의 생물학 강의’ 210 페이지) RNA를 이루는 뉴클레오티드는 디옥시리보스가 아닌 리보스이다.(DNA 및 RNA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뉴클레오티드는 5탄당, 인산,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 5탄당은 다섯 개의 탄소 원자를 갖는 단당류이다.)



 
 
 

 

 

이틀 후 통합진보당의 정당 해산 심판에 대한 선고가 내려진다고 한다. 이 안건을 놓고 여러 사람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통합진보당은 반드시 해산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가운데 나에게도 가끔 의견을 피력할 기회가 주어지곤 했다. 나는 우선 용어 사용의 불분명을 거론했다. 민주주의라고 하면 될 것을 자유라는 글자를 앞에 붙여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체제 하에서 살아가는 것은 왜인가, 하는 의문에 근거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는 설령 적대되는 사상이라도 수용하는 체제라 답했지만 이는 보완이 요구된다.



진보에 대해 의견을 정리해 책을 내놓은 사람들 가운데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의 의견이 눈길을 끈다. 노 전 대표는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노회찬 전 대표가 쓴 진보에 대한 책은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이다. 책을 아직 읽지 못해 단언할 수 없지만 ‘종북이 아니라 패권이 문제였다’란 제목의 글이 눈에 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이 진보의 계보, 친북, 종북 논쟁 등을 정리된 입장으로 꿰뚫어 알기는 어렵다. 아니 무엇이든 전문화되고 역사가 쌓이면 현재에 매몰되어 전체를 보지 못하는 단견(短見)이나 즉자적 견해에 빠지기 쉽다는 말을 하고 싶다.



분명한 것은 진보에 대해 기대와 애정을 보인 사람의 견해를 우선시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새누리 - 새정치 민주연합이라는 구도로 펼쳐지고 있지만 그 두 정당이 보수(保守) 정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자연스럽게 보수와 대항하는 진보 정당이 힘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에서 진보는 너무 무력하고 이념 논쟁에 빠져 있는 듯해 안타깝다. 강준만 교수는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지만 문제는 실생활에 어필하는 정책의 부재이지 싸가지 여부는 주된 사안이 아니라 생각된다.



공부하는 보수‘라는 책을 낸 이상돈 교수의 주장을 통해 알 수 있듯 공부하지 않고, 건전한 가치관을 지키려 하기보다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한 우리나라 보수의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집중 거론된 미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셀던 월린의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월린은 민주주의가 겉보기에 억압적이지 않으면서도 관리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장이 미국이라 주장했다.



월린에 의하면 미국의 관리되는 민주주의는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 또는 반대파를 강압적으로 제거하는 국가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발전, 특히 통합, 합리화, 부의 집중을 조장하는 경제 발전, 나아가 그 어떤 문제 - 의료보험에서부터 정치 위기, 심지어 신념까지 - 도 관리될 수 있다는 신념, 다시 말해 그 어떤 문제도 통제 가능하고 예측할 수 있으며 비용 효율성이라는 가치에 종속될 수 있다는 신념을 통해 등장했다.(89, 90 페이지) 이 견해를 수용하면 우리는 미국보다 얼마나 낫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2012년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라는 책을 낸 손석춘 교수의 의견도 경청할 만하다. 이 책의 부제는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에게 묻는다’이다. 손석춘 교수는 진보진영의 위기를 극복할 큰 혁신의 원칙으로 '실사구시 학습, 대안사회 토론, 국민과의 소통'을 제안했다. ‘이것이 민주주의다‘에서 김비환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유일한 민주주의 형태가 아니라 여러 민주주의 형태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합리성을 표현하고 계발할 수 있는 정치제도로 발전했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인다.



중요한 부분은 자유주의 문화가 민주주의라는 정치형태를 필요로 했고 일련의 시민혁명들에 의해 제도적으로 발전,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김비환 교수는 아렌트, 스키너, 샌델 등 많은 학자들이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실마리를 고대 그리스 아테네와 로마에서 발원한 공화주의 전통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199 페이지) 이 말을 따르면 자유민주주의는 공화주위 전통의 카운터 파트너라 할 수 있다. 김비환 교수는 사회적 민주주의를 논의하며 마르크스 - 레닌 주의자들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가한 비판을 소개한다.



마르크스 - 레닌주의자들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부르주아 계급만의 민주주의이자 소수의 유산 계급이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질서인 자유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기만하기 위한 가면으로 민주주의적 선거와 제도들을 활용한다.(’이것이 민주주의다‘ 222 페이지) 이 부분은 실재 너머의 진실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스크린을 연상하게 해 흥미롭다.



권재원 저자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대의정치로 복수의 자유로운 정당들의 경쟁에 의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권력 분립, 개방된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일상의 법치, 모든 사람들의 인권, 시민권, 시민자유, 정치적 자유의 평등한 보장 등을 기치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독재의 반대말이라고 말한다.(’학교라는 괴물‘ 394 페이지) 권재원 저자는 뉴라이트들이 국부로 내세우는 이승만의 제1 공화국 당시 헌법에 민주주의라는 말은 나오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 헌법에 처음 등장한 것은 유신 시절이다. 저자는 권위주의 시대의 군사 독재자들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를 실시하고 싶었지만 독재라는 말을 차마 쓸 수 없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을 창안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김일성이 자주적 사회주의국가로 북한을 규정하며 마르크스 - 레닌주의로부터 이탈했다면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민주주의로부터 이탈했다는 사실이다.(397 페이지)



손호철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2014년 12월 1일 경향신문)란 글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단순히 반공주의가 아님을 밝혔다. 손호철 교수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는 사상,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같은, 유엔인권조약의 ‘자유권’이 보장되는 정치체제이다. 손호철 교수는 80년대 ‘제3의 물결’이라는 범지구적인 민주화의 흐름을 정리한 세계정치학계의 권위 있는 집단연구가 특정한 이념이나 정당을 금지시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명확히 규정한 바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와 같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이름 아래 그 핵심인 사상의 자유 등 자유권을 압살해 왔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권재원 교수와 손호철 교수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상반된다. 권재원 교수는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라는 말과 함께 민주주의로부터 이탈한 우리의 역사에 비추어 적어도 우리 역사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태생이 긍정적인 것이 아님을 일깨운다. 손호철 교수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는 사상,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같은, 유엔인권조약의 ‘자유권’이 보장되는 정치체제이기에 긍정적인 개념임이 분명하다. 물론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는 단순히 반공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손호철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는 단순히 반공주의가 아니.”라 했고 권재원 저자는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독재의 반대말”이라 했으니 말이다. 사실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독재의 반대말이라는 말에 “그러면 자유라는 단어를 삭제하자”는 의견이 돌아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진보에서 진보하라’를 쓴 이종철의 주장도 거쳐야 한다. 이종철은 주사파(主思派) 출신의 논객이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1996년 연세대학교 사건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998년까지 감옥생활을 한 이종철은 주사파로서 북한 주민은 물론 대한민국에 대하여 저지른 해악을 뉘우치면서 현재 온 몸을 던져 북한 인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원하는 단 하나는 아름다운 사회라고 한다. 대한민국이 진보하려면 보수도 바뀌어야 하고 진보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종철은 자신의 책이 단순히 통진당이나 진보를 비판하는 책이 아니라 좌파 혹은 진보도 변해야 한다는 하나의 상징에 따른 결과라고 주장한다.



주목할 것은 손호철 교수의 주장이다. 손호철 교수에 의하면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기를 거부했고 북한의 핵무장을 자위권의 발로라고 옹호하는 등 친북 언행으로 ‘종북주의’ 비판을 자초했다. 저자는 통합진보당이 민주노동당을 계승했다는 이유로 해산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새누리당이 12·12와 5·18학살을 주도해 군사반란과 내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전두환 등 5공 반란세력의 민정당을 계승했기 때문에 해산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순수가정으로 통합진보당의 노선이 설사 종북주의라 해도 그 자유도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 손호철 교수의 결론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틀린 주장도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9년 나온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에서 손호철 교수는 “민주노동당은 시대착오적인 친북노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진보신당은 자신들이 “민주노동당” 및 “다른 정당들과 무엇이 다른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존재감을 찾을 수 없”으며 “사회당도 존재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이고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준비위(사노준)은 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최근 내 관심을 끄는 책은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이다. 이 책은 소련은 사회주의가 아닌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한 책이다. 클리프는 ”노동계급이 생산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한 노동자는 계급의 주체가 아니라 계획의 대상일 뿐“이라는 말로 소련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였음을 말한다. 수긍할 말이지만 나에게는 ”자본주의가 아니면 그 거대한 생산력의 사회화는 어떻게 가능했겠는가?“(’학교라는 괴물‘ 308 페이지)란 권재원 저자의 말이 더 비근하게 다가온다.



권재원 저자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거의 절반을 자본주의 예찬으로 채웠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가능한 토양을 자본주의가 만들었으며 실상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껍데기만 남겨 놓고 거의 공산주의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나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도, 보수도, 체제도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실재(the real)를 닮은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실재 개념은 불가능한 것, 상징 질서의 바깥이자 구조적 원인이라 보면 무리가 없다. 김석 교수는 ”실재는 라캉 사상에서 가장 어렵고 모호한 부분이며 오해도 많이 불러일으키는 개념“이라 소개한다.(‘에크리’ 236 페이지)



김석 교수에 의하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면서 주체를 엄습하는 유령 같은 효과로 작용하는 실재계는 라캉 이론의 최후 대안이다. 덧붙여 실재는 반복의 근원이며 상징계의 틈을 뚫고 나오는 낯선 대상의 형상이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숀 호머는 ‘라캉 읽기’에서 실재계를 사회적, 상징적 우주와 지속적인 긴장관계를 가지며 그 극한에 존재하는 미지의 것, 우리 사회현실의 기반이 되며 그 현실을 훼손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런 상황에서 결론삼아 하고 싶은 말은 너무 현실에 매몰되어 근시안적 이해득실에 치우치는 무리수를 두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란 말이다.



 
 
Agalma 2014-12-17 22:41   댓글달기 | URL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체제였다는 말에 동감. 몰락의 주요원인이기도 하고요. 실제 이곳도 그 체제와 다름없는 것 같은데 몰락의 기미가 안보이니 오랜 독재에 길들여져 있는 대중탓일까요. 찌라시라 공표해놓고 비밀문서 공개죄를 적용하는 이 어의없는 행태에 정보가 없어서 바라보는 것만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보수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진보도 소통부재가 제일 큰 문제같습니다

흔적 2014-12-18 06:33   URL
네... 동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보, 보수 모두 이성과 정상성에 기바놘 행보를 보여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술과 운명 -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
이정우 지음 / 한길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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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영화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영화가 인간보다 훨씬 중요한 사유의 원천이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뇌는 스크린’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영화의 스크린이 세상의 모든 이미지들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고 걸러서 또는 빼서(공제控除해서; deduction) 받아들이듯 인간의 뇌 역시 그렇다는 의미이다. 흥미로운 것은 스크린이란 단어이다. 영화의 스크린과 차폐물(遮蔽物) 등을 의미하는 스크린은 라캉의 의미에서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를 가리고 은폐하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걸러내는 것 다시 말해 일정한 시점을 선택한다는 데에 있다. 영화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초월하고 뇌를 확장시킨다. 이는 영화가 인간보다 훨씬 중요한 사유의 원천이자 대상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뇌/ 영화가 세상의 모든 이미지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걸러서 받아들인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관건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영화가 우리의 감각기관을 초월하고 뇌를 확장시킨다는 말은 영화의 시점(카메라)이 신체에 구속되고 묶여 있는 인간의 지각보다 우월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서두가 길었다. 이정우 교수의 ‘기술과 운명’을 앞에 두고서.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기술과 운명‘은 사이버펑크 영화에서 출발해 형이상학으로 나아간 책이다. ’미술은 철학의 눈‘이란 명제를 따라 사이버펑크 영화는 철학의 눈이라는 말이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이 다룬 영화들은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200년을 산 사나이’, ‘매트릭스’ 등이다. 출간 연도를 보아 이미 상당히 늦은 감이 있지만 영화를 철학 이해에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늦고 이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필립 딕(Philip K. Dick)의 원작을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블레이드 러너’는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제로 한 작품으로 인간과 기계의 구별이 모호해진 가상 세계에서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대립하는 어둡고 음울한 시대상(2019년)을 그렸다. 안드로이드는 생명공학을 통해 태어난 인조인간이다. 저자는 말한다. “영화사상 이 영화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시각적으로 사로잡는 작품도 드물 것“이라고.



이 영화에는 레플리컨트(replicant)라는 생체 인조인간이 나온다. 레플리컨트를 죽이려는 블레이드 러너, 자신의 기억이 이식된 것임을 알고 절망하는 인조인간, 인간과 기계의 구분선을 무화시키는 금지된 사랑 등 묵직한 주제들이 사유를 자극한다.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攻殼機動隊, Kokaku Kidotai)‘는 마사무네 시로우의 만화를 요시이 마모루가 영화화한 작품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세계는 어떤 것도 머물지 못하는 카오스도, 모든 것이 동일성을 유지하는 죽은 세계도 아니“라는 말로 시작한다. 2029년이 배경인 ’공각기동대’가 담아낸 사회상은 모든 정보가 마음/ 뇌로부터 외화(外化)되었을 때에만 타인에 의해 인지될 수 있는 대전제가 무너진 사회이다.



이 영화에는 전뇌화(電腦化) 시스템이 주요 용어로 등장한다. 이는 기계와 뇌가 회로로 직접 연결됨으로써 뇌 속 정보가 컴퓨터로 흘러나오고 컴퓨터의 정보가 머릿 속으로 입력되는 시스템이다. 공각기동대(攻殼機動隊)란 별명이 있는 ‘수상 직속의 특수 실행 부대’인 공안 9課가 전뇌 네트(net)나 공안 관계의 테러 대책 등 공적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의 감사나 해결을 임무를 맡는다. 이들은 감시하고 있던 공안 6課는 외무성 조약 심의부(外務省條約審議部)의 별칭으로 외교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 국제범죄, 테러 등과 관련한 정보수집과 감사를 행하는 정보기관이다.



공안 9課의 사이버네틱 인간인 모토코 쿠사나기(Motoko Kusanagi)는 자신을 하나의 기계로서 공식화하고 있는 조건들 속에 매몰되지 않으려 몸부림친다.(65 페이지) 그녀는 정보 체계로서의 고스트(ghost)와 마음으로서의 혼(魂)을 구분하면서 고스트는 전뇌의 파생물이고 혼은 결국 고스트의 파생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75 페이지) ”‘공각기동대가 함축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충분히 간파한 사람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한참 지나서까지도 착잡한 사념에 사로잡혀 망연히 앉아 있게 된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블레이드 러너‘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작품“이라 말한다.(91 페이지)



’200년을 산 사나이(Bicentennial Man)‘는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 - 1992)의 원작을 크리스 콜럼버스(Chris Columbus: 1958 - )가 영화화한 SF 작품이다. 이 영화가 다룬 주제들은 휴머니즘, 노예, 편견, 성숙, 지적 자유, 순응, 성(性), 사랑, 불멸성 등이다. 저자에 의하면 ’200년을 산 사나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 - 자리에 눈떠가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한 타자(他者)의 이야기이다.(100 페이지)



저자는 인간은 달리기 선수들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출발해 자신의 이름 -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사회는 이미 일정하게 구조화되어 있고 누구나 그 구조 한가운데에 내던져진다고 설명한다. 동일자와 타자의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영화에도 로빈 읠리엄스가 맡은 앤드류라는 안드로이드가 나온다. 한 로봇 회사에서 만든 가정부 로봇이 '마틴'이라는 주인의 집으로 배달이 되는데 '마틴'은 그것을 사물로 대하지 않고 가족처럼 대한다. 자신의 성(姓)을 따라 이름을 '앤드류 마틴'이라고 지어주게 되는데....



문제는 앤드류가 신경계 이상으로 인간 고유의 창작의 즐거움을 느끼고 급기야 인간의 감정까지 이해하게 된다. 앤드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인다....앤드류는 판결을 들으며 행복하게 죽음을 맞는다. 안드로이드(android)는 인간을 닮은 것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합성 유기체의 일종인 로봇으로 첨단의 전자 두뇌와 인공 피부를 가졌다. 안드로이드는 사유 능력과 신체(피, 살)를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과의 경계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앤드류가 원한 것은 세속적 인정이 아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진실에 대한 열망이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200살이라는 나이는 인간의 나이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고 기계로서는 너무 짧은 것이다. 영화에서 앤드류가 누린 시간은 2005년에서 2205년에 걸친 200년이다. 앤디 워쇼스키, 래리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한 ’매트릭스‘는 진실과 저항이라는 주제로 분석되었다.(1편 ’블레이드 러너‘는 제작된 인간의 운명, 2편 ’공각기동대‘는 자아의 해체와 새로운 인간의 탄생, 3편 ’200년을 산 사나이’는 기계로서 살기보다 인간으로서 죽으리라로 설정)



저자는 진리와 진실을 구분한다. 진리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할 때 성립하고 진실은 볼 수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이게 할 때 성립한다.(14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매트릭스’는 진리가 아닌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형이상학적 진실은 일반이 보고 싶어도 쉽게 볼 수 없기에 진리에 수렴한다고 설명한다.(14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매트릭스’는 사전 지식이 없어야 진정한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영화이다.(145 페이지)



기계에 의해 인간이 양육되는 22세기 말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매트릭스’는 매트릭스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허상을 산다는 사실, 허깨비 같은 생을 산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일부가 그 사실을 안다. ‘매트릭스’는 결국 그 허상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사는 사람들과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를 현혹시킨다는 점에서 매트릭스를 불교의 삼사라(윤회)에 비유하는 논자도 있다.(불교 평론 2004년 3월 10일 이은비) 이 논자는 큰 흐름으로 자리잡은 기독교와 ‘매트릭스’의 연관성 대신 불교와 ‘매트릭스’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저자는 ”혹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자체가 매트릭스(가상, 空)이 아닐까?” 묻는다. 나아가 “우리 마음 자체가 하나의 매트릭스가 아닌가? 무수한 선입관, 주입받은 지식들, 거미줄처럼 처져 있는 편견의 격자들, 환상들과 허깨비들. 그래서 이 영화는 가상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서보다는 차라리 현실 세계에 대한 통렬한 알레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182 페이지)



보론(補論)에서 저자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를 다루며 ’영겁회귀하는 우주와 인간의 고독‘을 설명으로 제시한다.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 1917 - 2008) 원작,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1928 - 1999) 감독의 영화인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기술과 인식이 가져온 역운(逆運)의 파토스를 빼어난 미학적, 기술적 성취를 통해 보여준 걸작”이다.(207 페이지) 저자는 사람들은 기술을 이용해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한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계속하는데 그 여정의 끝에서 이제 인간은 차갑고 적막한 우주 한가운데에 고독하게 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였다고 결론짓는다.



이 부분은 어느 면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의 마지막 부분을 연상시킨다. 마지막에 어울리는 대단원의 여운을 주는 차갑고 어두운 결론이 인상적이다. ‘기술과 운명’은 영화보다 철학에 관심을 두고 집어든 책이다. 들뢰즈의 말을 따르자면 어쩌면 ‘영화와 철학‘이 관건일 것이다. 다만 ’미술이 철학의 눈‘이라는 말을 따라 ’영화‘가, ’미술‘이, ’음악‘이, ’문학 작품’ 등이 철학의 눈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덧붙일 수 있겠다.

 



 
 
 

 

육신통이 열린 것과 성불(한 것)은 같은 차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다면 ‘육신통이 열린 사람에게 굳이 성불을 하라고 할 필요가 있는가요?‘란 말이 가능해집니다. 만일 육신통이 열린 사람에게 성불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동어반복 아니면 중언부언, 그도 아니라면 필요 없는 것을 하라고 이르는 췌언(贅言)이라 해야겠네요. 육신통이 열리지 않았기에 성불하라고 즉 열리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최근 백창우 법사가 ’이것이 깨달음이다‘를 냈고 캐나다인 라마 글렌 멀린이 자신은 한국인 가운데 3명이 깨달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했지만 깨달음을 다른 차원으로 볼 필요는 충분해 보입니다. 탐욕, 성냄, 무지를 극복한 상태를 깨달은 상태라 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요?



최근 ‘깨달음, 궁극인가 과정인가’란 책 출판 연찬회(2014년 11월 29일)에서 “깨달음은 언제나 다가와, 자비행이 곧 깨달음”이란 말이 나온 것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을 일상의 의식 상태와 구분되는 비일상적 체험이나 변형 의식 상태로 본 성해영 교수는 깨달음이 이웃사랑 및 대승의 보살 정신과 맞닿아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깨달음을 ‘끝없는 자기개발’로 정의했습니다. 깨달음의 본 모습은 계속 정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동료와 함량 미달의 대화를 하곤 했습니다. 붓다가 깨달은 내용을 결국 여러 사람에게 전한 것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홀로 그 내용을 간직하지 않고 남에게 전하는 자체가 깨달음이 사회적 차원의 나눔, 자비, 보살 정신이라는 의미가 아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