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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 베개를 베고 자는 잠
김용희 지음 / 작가세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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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
김용희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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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레인
이덕화 지음 / 푸른사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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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테러
이덕화 지음 / 푸른사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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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와 최명희 두 여성적 글쓰기
이덕화 지음 / 태학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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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박혜영 작가의 ‘비밀 정원’을 읽었다. 궁금했던 것은 혼불문학상의 정체성이란 말의 실체였다. 이덕화 교수의 ‘박경리와 최명희, 두 여성적 글쓰기’를 구입 9년만에 읽게 된 것은 그 정체성 해명과 더불어 한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효석, 김유정에 이어 강원도 문학의 힘으로 소개하기로 결정(2014년 11월 1일)된 박경리 작가편을 듣기 위한 준비 차원이다. 저자인 이덕화 교수는 ‘토지‘의 생명사상이나 ’혼불’의 혼불의식 공히 인간 존엄성과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정수(精髓)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했다.



저자는 여성문학을 생명주의 문학으로 정의한다. ‘토지’와 ‘혼불’이 여기에 속한다. 문제는 생명문학의 정의는 무엇일까?란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생명 문학이란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성, 포용성, 다양성, 열린 세계, 부드러움, 상호침투, 감각성, 자연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에 바탕하는 문학이다. 우주의 질서 또는 조화에 근거한 생명사상이 속성으로 하는 사랑이 타자에 대해서까지 발휘되는 '토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토지’가 그렇듯 ‘혼불’ 역시 역사적 구성력을 갖추었다. ‘토지’와 ‘혼불’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해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설정, 생명사상을 담은 역사소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듯 두 작가의 작가정신과 작품 전개 방식 등은 판이하다. 저자는 우주와의 교감과 인내의 미학, 서정적 문제를 ‘혼불’의 골격이 되는 주요 구성 요소로 풀이한다. 사건과 사건을 잇는 연속적인 이야기 중심의 서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최명희 작가가 ‘혼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토지’는 총체적 현실인식, ‘혼불’은 정서적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최명희 작가는 다작 작가는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작품들의 대체가 서정 소설들이었다. 서사문학에서 현실인식은 주가 되고 이상에 대한 자기인식은 배경이 되는데 비해 서정문학에서는 자기인식이 전면에 부각된다. 저자는 ‘토지’의 생명사상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구도정신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토지’가 서사 본령의 문학을 지향하기에 총체적 현실인식에서는 ‘혼불’보다 훨씬 우수하지만 문학 작품이 모두 현실의 총체적인 인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박경리 작가의 경우 초기에 낭만적 사랑을 주로 그렸다. 박경리 작가는 자신의 문학 단계를 감정적 세계, 지성적 세계, 의지적 세계로 나누었다. 박경리 작가는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까지 잃은 절망 속에서 ‘암흑시대’와 ‘불신시대’를 쓴 심리적 배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슬픔이나 고통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오직 싸움에 이기는 것은 내가 내 고통을 지근지근 밟아 문드릴 수 있는 잔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박경리의 초기 작품에서 여성 주인공이 정체성을 찾기보다 소외 극복의 한 수단으로써 사랑을 택한 것을 작가가 지닌 세계관적 한계라 설명한다. 이는 작가가 비극적 세계 인식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비극적 세계관은 낭만적 꿈꾸기의 하나로 분류된다.



소외 의식, 서서히 몰락하는 한 집안의 운명, 고립적 세계관이 그 주요 구성 요소이다. 저자는 박경리 작가의 경우 ‘토지’에 이르러 가족간의 고립적 관계가 극복되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작가의 사위인 김지하 시인을 거론한다. 즉 그가 보인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적극적 현실 대응이 박경리 작가로 하여금 극적인 민중 사랑의 정신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단층’이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토지’의 1, 2부와 3, 4, 5부 사이에 발표된 작품이다.



저자는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여성적 특징이 작품에 스며들어 영향을 끼치기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물론 박경리 작가에게도 그런 점이 있다. 즉 ‘토지’의 경우 여성적 특징에 의해 작품이 훼손되기도 하지만 재미를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여성들의 섬세한 감각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토지’는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다양하게 살려내는데 성공했으며 추상적인 여성의 감각으로 인간의 본질인 신뢰와 믿음에 바탕을 둔 연인들을 그려내는데 성공한 작품이다.(231 페이지)



저자는 ‘토지’는 강한 개성적 인물은 있을지언정 전형적인 인물이 없고 현실과의 교류가 소극적이기에 인물이 대체로 평면적이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작가의 진보적 세계관과 운명적 세계관이 합일할 수 없는 모순 관계로 엮인 것이 ‘토지’의 아쉬운 점이다. 저자는 주요 등장 인물들의 대화가 사건 묘사를 대체한 것이 ‘토지’의 한계라고 설명한다.(233 페이지) ‘비밀 정원’의 경우도 이런 지적을 받은 바 있다.



‘혼불’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면 아무리 현재의 삶이 고통스러워도 결국 빛을 보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작품의 문체와 형식, 인물과 사건, 환경 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앞에서 ‘혼불’을 서정적이라 했는데 저자가 인용한 M.S 까간에 의하면 서사적 양식이 객체에 대한 인식을 전면에 드러내는 양식이라면 서정적 양식은 자기 인식이나 정서적 표현을 전면에 드러내는 양식이다.(286 페이지)



저자는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평론가들이나 작가들이 까간의 말대로 문학을 가치지향적 활동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최명희 작가는 ‘혼불’이 이야기 중심, 사건 중심이라는 기존 소설의 장르 개념으로 읽히기를 원치 않았다. 저자는 최명희 작가의 ‘혼불’ 정신을 동양적 정신주의에 뿌리를 둔 고결한 삶과 연결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최명희 작가가 ‘혼불’을 통해 의도한 또 다른 주요 요소는 삶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동백보다 이끼꽃에, 부처상보다 사천왕상에, 빛보다는 어둠에, 삶보다는 죽음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작가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저자는 ‘혼불’이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려 하기보다 상징적 이미지나 회상적 분위기를 통해 작가의식을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혼불’의 총체성은 서사적 성격을 초월한 영혼의 본질적 고양(高揚)을 경험하는 서정적 체험이라는 의미를 띠는데 이는 작가의식에 의한 것이다. 저자는 최명희 작가가 세계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이성적 강자의 논리에 의해 전개된다고 생각했음을 지적한다.(265 페이지)



저자는 당대의 현실을 총체적인 시각에서 반영했느냐의 관점으로 ‘혼불’을 볼 경우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말하는 총체적 시각이란 당대의 현실을 꿰뚫어 문제의 본질을 투시(透視)해 미래의 전망을 드러내는 리얼리즘의 시각이다.(265 페이지) 저자는 ‘혼불’의 세계 인식 태도는 세계의 대결보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한다. 이는 운명적 체념과 인내의 미학으로 이어지며 혼불이라는 의미로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엘렌 식수스의 여성적 글쓰기론을 거론한다. 즉 여성의 글쓰기는 여성으로서의 자기됨의 확인으로 자신의 존재 탐색이며 존재 획득에의 욕구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존재 탐색과 존재 획득에의 욕구를 위한 글로서 대하 소설은 집중적 노고를 요하는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자아의 주관적 세계를 드러내는 서정성은 흔히 시나 단편 소설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268 페이지)



특기할 것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논의이다. 루카치는 서사형식에서의 주관성을 논하면서 서사적 형식의 완결성은 주관적인 완결성으로, 작가는 전체 삶으로부터 조각을 떼어내어 그것을 전체 삶과는 대조되는 하나의 환경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그 조각이 주관적 의지와 앎으로부터 본래적인 근원에 대한 흔적으로서 서정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루카치 역시 서사 형식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한계로 인한 서정성을 인정했음을 뜻한다.



저자는 최명희 작가가 보인 여성적 글쓰기의 특징인 느낌의 복원은 사물화되고 도구화된 인간을 비롯한 자연 및 사물까지도 살아있는 생명체로 부활시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느끼기가 거세된 관념적 허구적 사실들과 논증들은 합리적 구축이라는 허울을 내세우면서 느끼기와 생명을 억압하는 닫힌 죽음의 세계라는 말로 ‘혼불’의 미덕을 전한다. 저자는 ‘혼불’을 가정 소설 계열의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288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혼불’은 가부장적 의식의 소산인 운명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세계관으로 인해 현실성이 부족하고 구조는 취약한 반면 문체는 섬세하고 시적이다. 저자는 여성문학을 이성(理性)의 시각으로 만들어낸 남성 위주의 가치관으로 읽지 말 것을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여성 문학의 대부분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존재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점은 ‘혼불’의 재미 여부를 묻는 저자의 질문에 대부분의 문학 연구자들이나 비평가들은 부정적으로, 일반 독자들은 긍정적으로 답한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부정적 대답은 서사문학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도출된 것이고, 후자의 긍정적 대답은 옛 정서를 회상하게 하고 하찮은 것에 눈 돌리게 한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불’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은 주인공인 강실이가 인생의 고비에서 쓰라린 가슴을 돌아보고 큰 고통과 상실의 아픔을 견디는 모습을 통해 독자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혼불’에 나타난 작가 정신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1)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옛것에 대한 애착, 2) 가슴으로 통하는 청명한 언어를 쓰고자 한 노력, 3) 버려진 것과 하찮은 것 등에 대한 집착 등이다.(이 세 정신이 단편 소설들에 분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여성적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의 파편화된 삶에서 오는 무형식의 글 또는 형식 파괴라 말한다.(이 점이 최명희 작가의 문학적 특성이다.) 이덕화 교수의 ‘박경리와 최명희, 두 여성적 글쓰기’는 전기한 문학 연구자들과 일반 독자들의 관점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시각이 돋보이는 책이고 서사와 서정 사이에서 균형을 지켜야 함을 일깨우는 책이다.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누린 것에 감사드린다.



 
 
2014-10-31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흔적 2014-10-31 21:31   URL
네...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나의 눈’을 읽었다. 내가 읽은 많지 않은 영성 시리즈들 중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최고라는 말은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고, 창조론과 진화론, 의식과 마음, 영성과 종교의 관계를 아는 바른 지식에 근거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나의 눈’을 읽으며 놀란 것은 내가 지금껏 읽은 다른 수많은 책들로 참고, 뒷받침, 인용을 할 여지가 많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간 내가 읽은 관계 서적들은 스타니슬라프 그로프의 ‘환각과 우연을 넘어서’, ‘코스믹 게임’,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곽내혁의 ‘내 안의 우주에 이르는 길’, 앨런 월리스의 ‘뇌의식과 과학’, 융의 ‘심리학과 종교’, 성소은의 ‘선방에서 만난 하느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비전’ 등이다.(정신과 의사 잭 도미니언이 예수를 정신분석적으로 분석한 ‘인간 예수’도 좋은 책이지만 카톨릭 신자로서 예수를 좋게 보려고만 했다는 느낌이 든다. 여러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소개한 옴니버스형의 책은 제외했고 종교와 영성 또는 신앙에 대한 관계를 재확인한 바대로 종교에 대한 책 역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캔 윌버의 ‘무경계’와 ‘티벳 사자의 서‘ 등을 읽지 못했지만 그 책들을 통해 내용이 배치되거나 상위적인 부분이 발견된다 해도 전체를 보는 통합적이고 일관된 시각을 가진 호킨스의 책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된다.(이제 첫 책인 ’의식혁명‘을 읽어야겠다.) 호킨스는 정신과 의사, 내과 의사 출신으로 정신분석학과 물리학, 정신의학, 영성 등에 두루 해박한 지식인이고 깨달은 사람이다.(2012년 타계) 호킨스의 놀라운 점은 영적 체험이 강렬했음에도 ‘의식혁명’ 발간시까지 30년 이상 그 체험 내용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침묵에 대해 호킨스는 “그것에 대해 말할 게 없었다”고 답했다. 첫 책인 ‘의식혁명’은 원제가 ‘Power vs. Force’이다. Power는 힘으로, Force는 위력으로 번역된다. 위력은 부정적이고 강제하고 일시적이고 에너지를 소모시키며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힘은 자족적이고 항구적이며 불변하며 무적(無敵)이다.



‘나의 눈’의 원제는 ‘The Eye of the I: From Which Nothing is Hidden’이다. ‘아무것도 감춰지지 않은’이라는 의미가 눈에 띈다. 이는 밀교(密敎: esoteric)가 아닌 현교(顯敎: exoteric)라는 의미로 보인다. 호킨스는 ‘나의 의식’의 실질적인 저자는 의식 자체라고 말한다. 이는 체험은 있으나 체험하는 자는 없다는 저자의 지론이 반영된 결과이다. ‘나의 눈’의 번역자인 ‘문진희는 라다 소아미 삿상(Radha Soami Satsang)에 거주하며 명상을 하는 한편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라다 소아미 삿상은 영적 공동체이다. 라다는 영혼을, 소아미는 主를 뜻한다. sat은 true를, sang은 company를 의미한다. 의례도 의식(儀式)도 위계(位階)도 의무적인 헌금도 없는 그들은 특정 문화나 종교를 버리거나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호킨스는 깨달은 자 특유의 자유로움으로 특정 종교나 인물, 사상 등에 구애됨이 없는 현교적 가르침을 펼쳤다. 돋보이는 것은 자신의 역할을 영적 앎을 촉진함으로써 인류의 고통을 구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세상에 대해 그저 참나로서 존재하고 그것을 가급적 명확히 설명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이다. 언어도단 등의 개념으로 무장한 사람들에게 경책이 될 바이다. 내게 호킨스의 수용 사례는 최근작을 통해 이전 작품들을 찾아 읽는 형식이 될 것이다.



 
 
 
나의 눈 -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여는 법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문진희 옮김 / 판미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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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출신의 데이비드 호킨스는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영적 에너지를 강조하고 비이원적 눈을 갖출 것을 주문한다. 그에 의하면 신적 본질의 표현인 개개의 사물들은 진화 도상(途上)의 존재들이다. ‘나의 눈’은 그의 영적 통찰력의 결정판이다. 어려운 점과 흥미로운 점이 두루 존재하는 책이다. 그러나 의미있는 시사점을 한 바구니 가득 담을 수 있다는 설명이 그의 지론에 대한 가장 근접한 이해일 것이다. ‘나의 눈’은 차원이 다른 책이다. 우리가 난해한 철학 책을 읽을 때 일상에서 접하지 못한 단어들은 물론 익숙한 단어에서조차 파악의 어려움을 겪듯 호킨스의 책으로부터 다수의 독자들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리 통찰을 위해 치러야 하는 최소의 대가이고 내용이 진행될수록 실재에 가까이 간다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한정적이다.



관건은 깨달은 세계와 깨닫지 못한 세계는 다르다는 핵심적 요지(要旨)에 착안하면 처음부터 쉬운 읽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물론 영적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호킨스의 대의를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어려움은 실재적이다. 호킨스의 책은 반성적인 눈으로 자아를 의식하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1에서 1,000까지로 설정된 인간의 의식 수준 역시 흥미롭다. 이 수치를 보면 ‘나는 어떤 상태에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 마련이다. 저자는 지금껏 1,000 수준을 넘어선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 수준 정도의 높은 수치에 도달한 이들은 신의 창문들이자 성스러운 스승으로 인정받았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자기 파멸의 과정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 만큼 200 수준 이하의 의식 수준을 보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애초부터 생물학적으로 결함 있는 뇌와 동물적 본능을 갖춘 상태에서 출발한다.: 89 페이지. ‘심리치료에서의 지혜와 자비의 역할’에서 저자 크리스토퍼 거머는 “인간의 뇌구조는 진화생존을 위한 것으로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쉴 새 없이 과거를 되새김하고 미래를 떠올리는 것이 한 본보기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는 훈련(수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자는 뇌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301 페이지) 어떻든 200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전 세계 인구의 78 퍼센트이다. 반면 4퍼센트만이 500에 해당하며 단 2퍼센트만이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는 수준인 540에 도달했으며 비이원성과 이원성의 분수령을 넘어선 수준인 ‘깨달음의 문턱을 넘어선 60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000 만명 중 한 사람의 비율에 불과하다.(의식 수준은 로그log로 표현되기에 몇 점의 차이가 엄청난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600 수준에서는 영과 인간이 만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뒤섞이고, 아는 자와 알려진 바가 나뉘지 않고 안과 밖이, 신(神)대 개인의 구분이, 전체와 부분의 구분이 없으며 실체도 없다.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융(Carl Jung: 1875 - 1961)이다. 그는 여러 가지 진기한 체험을 했는데 어느 날 명상 중 자신이 바위와 일체가 된 경험을 했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처럼 융인 자신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지 바위인 자신이 자신 위에 앉아 있는 융이라는 사람을 바라보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저자는 융의 수준을 540으로 평가했다. 540은 전 세계 인구의 2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프로이트는 499 수준이다.(467 페이지) 나는 호킨스의 글을 접하며 여러 대목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특히 보통의 의식은 창조의 본성이 확연하지 않기에 선한 신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악한 것을 허용해 줄 수 있는가 같은 해답 없는 어려운 물음들을 지어낸다(29 페이지)는 말에서 그랬다. 지금껏 그런 질문을 많이 해온 사람이 나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변화는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런 가르침은 ‘나의 눈’의 주요 특징이다. 가령 이 세계에서 목격하는 것들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라는 말(109 페이지)을 통해서 알 수 있듯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오직 이 순간만이 우리가 경험한 유일한 현실이며 다른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추상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핵심 단어인 ‘나의 눈’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앎으로서 표현된 신성의 참나이다.(5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붓다는 참나는 생각들 사이의 빈틈에서 얼핏얼핏 보인다고 말했다고 한다.: 151 페이지) 이는 에고(자의식)를 벗어난(벗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관건은 빛비춤(Illumination)에 노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확장된 의식의 장을 환하게 밝히고 드러나게 하는 영적 상태에 노출되면 에고를 버리고 스스로를 전부로서 알고 체험하는 잠재성이 일어난다고 한다.



저자는 저절로 깨닫는 경우와 노력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말한다. 후자의 경우 에고 극복이 관건이다. 에고는 자아를 참나에 맡길 때 극복된다. 나는 ‘나의 눈’을 통해 관심을 끌던 많은 부분에 대해 시사점을 얻었다. 종교와 영성의 차이가 대표적이다.(종교는 당파적이고 갈등하는 집단이며 분열적이다. 영적 집단은 그와 정반대이다. 이는 내 지론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 ‘세 종교 이야기’를 읽고 종교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재확인했다.) 저자는 종교는 기본적으로 이원적인 영역을 다루고 깨달음은 비이원적인 영역을 다루었다고 가르친다,(407 페이지) 저자는 신의 현존을 체험하려면 평화와 사랑 이외의 모든 것을 신에게 내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자아, 현실 세계, 지각의 뒤틀린 감각과 그것이 빚어낸 것, 지금이 아닌 것 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영적이라는 말 대신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저자는 인간의 행위를 가설적인 이상에 견주어 비판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라 말한다.(저자는 인간은 프로그램화된 허구적 신념 체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하드웨어이고 그들의 행위나 믿음은 소프트웨어와 같기 때문에 그들은 본래 순진무구하다.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은 진화중이라는 점이다.: 41 페이지) 앞에서 ‘나의 눈’을 통해 관심을 끌던 많은 부분에 대해 시사점을 얻었다는 말을 했는데 그 가운데가 하나가 구약과 신약, 과학과 무신론에 대한 수치화이다. 저자에 의하면 구약은 190이고 부분적으로 창세기가 660이고 시편은 650, 잠언은 350이며 이들은 제외하면 전체적으로는 125에 불과하다. 반면 신약은 640이다. 놀라운 것은 요한계시록이 70이라는 점인데 이 부분을 제외할 경우 신약은 790에 이른다. 반면 과학은 뉴턴식의 선형적 패러다임으로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490에 머물게 했다.



한편 물리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데 꽤 유용한 지적인 추구의 의식 수준은 400대로 측정되지만 깨달음에는 큰 한계이자 장애로 작용한다.(169 페이지)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신이 이교도들을 죽이는 것을 찬양하고 동물의 피를 흘리고 처녀를 죽여야 기뻐했다는 발상은 에고의 어두운 부분으로의 투영의 결과라는 사실이다.(120 페이지. 물론 저자가 말했듯 신은 그 누구의 악행에 의해서도 훼손당하지 않는다.: 228 페이지) 구약의 낮은 수치와 신약의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는 萬軍의 하나님, 살육을 정당화하는 하나님觀과 신약의 평화적인 하나님觀의 차이와 연관된 바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구약의 그런 가르침이 신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조작이 아니라 투영(投映) 또는 투사(投射)의 결과이리라.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희사(喜捨), 긍정, 관용, 사랑 등이다. 저자에 의하면 체험은 있으나 체험하는 자는 없다. 이 부분에서 이중표 불교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부처의 입장은 업보(業報)는 있되 작자(作者)는 없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불교의 이해와 실천’ 참고) 중요한 것은 브라만이나 힌두교는 모두 존재를 전제로 하는 데 비해 부처는 존재는 허구이며 무아이며 공(空)이라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이는 600 수준에서는 전체와 부분의 구분이 없으며 실체도 없다는 데이비드 호킨스의 주장과도 상통한다.(어떤 의도에서인지 모르지만 저자가 불교를 원래의 수준을 비교적 잘 유지해온 종교라 말한 것이 연상된다.: 93 페이지) 에고를 자만심과 두려움에 의해 지탱되는 위치성들이 모여 엮인 것이라 말하는 저자는 우리는 신에 대해 갖는 두려움 때문에 에고가 완강하고 집요한 것이기도 하다고 가르친다.(저자에 의하면 위치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그것이 그 전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불행의 원천이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65 페이지)



저자는 프로이트는 거짓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반면 참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신이 인격화되는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인간적인 결함들이 신에게 투영되었음을 밝혔다. 두려움이 그 하나이다. 원죄(原罪)와 그로 인한 죄책감 역시 그런 투영물들 중 하나일 것이다. 들뢰즈는 원죄 개념이 마음에 가책을 심어주었듯 오이디푸스는 욕망에 죄의식을 심어주었음을 밝혔다.(정신분석학 비판이자 종교 비판!) 프로이트가 흥미로운 부분이 여기이다. 종교가 인간의 죄의식으로 인한 것이라 비판한 그가 오이디푸스적 무의식이라는 죄책감에 기반해 이론을 펼쳤기 때문이다.(저자는 모든 사람의 에고는 위치성 때문에 죄의식, 수치심, 탐욕, 자부심, 분노, 분개. 시기심, 질투심, 증오 등을 갖는다고 말한다.: 17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죄의식은 신을 거대한 징벌자로 잘못 해석하는 데서 비롯된다: 218 페이지)



저자는 “그 누구도 섬기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자신의 참된 구루(Guru: 스승)는 참나(불성)라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179 페이지) 또한 진화와 창조는 상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83, 184 페이지) 그에 의하면 창조는 진화의 근원이자 본질이며 진화는 창조가 나타나는 과정이다. 저자는 영적인 노력들 중 가장 절실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관상(contemplation)을 든다. '예수 - 깨달음의 이야기‘에서 명상(冥想: meditation)을 동양이 선호하는 수행법으로, 관상(觀想: contemplation)을 서양이 선호하는 수행법으로 분류한 디팩 초프라가 생각난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글을 읽으면 그가 명상과 관상의 차이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명상을 자아의 초월적인 앎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보았음이 드러난다.(206 페이지)



저자는 직접적인 체험에 의해 신을 아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 말한다.(225 페이지) 저자는 신을 비이원적이고 총체적이고 완전한 全部임이자 하나임으로 정의한다.(23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신과 인간 사이에는 영적 에너지 수준들과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힘의 장(場)들의 위계(位階)가 존재한다.(234 페이지) 신은 자유이고 기쁨이며 본향이고 근원이며 온전히 자유롭다. 저자는 카르마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질문에 물리적인 생을 대신하는 비물리적인 생이 존재할 것이라 가르치는 종교의 주지(主旨)를 혼란으로 정의한다.(25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저승에서의 생을 비물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생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지금 나의 체험은 근본적으로 환상이다. 저자는 더 높게 측정되는 에너지 장은 낮은 것보다 더 낫지 않고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261 페이지) 위치성(을 의식하는 것 또는 실체화하는 것)이 오류임을 생각하자.



저자는 실상에서는 어떤 것의 원인이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며 그것은 뉴턴의 선형적(線形的: linear) 인과율의 패러다임과 다르다고 말한다. 선형적이란 직선적이란 의미이다. 원인과 결과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경우이다. 비선형(nonlinear)은 투입과 산출이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비선형 방정식의 한 특징이 카오스(chaos)이다. 카오스는 피드백(feed back)의 성질을 갖는 대상에서 발생한다. 피드백은 하나의 방정식에서 나온 결과가 계속 반복적으로 같은 식에 대입되는 성질을 갖는다. 간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피드백이 되풀이되면 상황이 매우 복잡해진다. 식(式)은 하나이지만 그것으로부터 나온 결과는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예측이 어려운 것이다. 저자가 선형적인 뉴턴 역학을 말한 반면 비선형적인 양자역학(量子力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다소 실망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 앞서 말한 융의 사례는 동시성으로 해명할 수 있는 한 경우이다.)을 논하며 동시성은 인과 관계가 아니라 양자(量子: quantum) 상태라 말했다.(468 페이지)



동시성이란 둘 또는 그 이상의 사건이 연결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에 대해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 1917  - 1992)의 논의를 살펴볼 만하다. 봄에 의하면 숨겨진 질서의 관점에서 우주는 질서와 통일을 이루고 있으며 우주의 각 부분은 전체를 구성할 만한 충분한 정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런 우주의 질서에서 보면 공간은 비국지적(nonlocality) 상호 연관성을 맺고 있어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변화가 발생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해도 경감됨이 없이 그대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곽내혁 지음 ’내 안의 우주에 이르는 길‘ 참고) 봄은 우주 전체를 하나의 홀로그램으로 정의했다. 3차원으로 만들어진 입체인 사진이나 영상 등을 말하는 홀로그램(Hologram)은 ‘완전한’을 뜻하는 ‘holo-’와 ‘정보, 메시지’ 등을 뜻하는 ‘-gram’의 합성어로 영국의 물리학자 데니스 가버(Dennis Gabor: 1900 - 1979)에 의해 발견되었다.



빛의 간섭효과를 이용해 만드는 이것은 3차원의 영상이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마이클 탤보트에 의하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 사물의 환영(幻影)을 만들어놓은 것이야말로 홀로그램의 중요한 성질이다. 홀로그램은 공간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손을 휘저으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홀로그램은 허상이다.(‘홀로그램 우주’ 46 페이지) ‘홀로그램 우주’의 역자(譯者)인 이균형은 홀로그램에서 발견되는 심오한 역설은 일상절인 물질우주와 반대로 입자상(粒子象)이라 할 홀로그램 이미지는 만져지지 않는 그림자일 뿐이지만 파동상(波動象)이라 할 홀로그램은 만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쪽이 더 본질적인 실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차원의 신비체험이 물질 차원의 현실보다 훨씬 더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는 체험자들의 보고와도 일치한다고 한다.



저자는 모호하거나 혼란스러운 것이 꽤 많은 듯 하다는 질문에 모호하다는 것 자체가 허구라고 말한다.(279 페이지) 저자는 사회개혁자가 되는 것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길이라 말한다.(298 페이지) 저자는 당연히 영적 성장에 의미를 둔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서 인정(認定)이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역할이 영적 앎을 촉진함으로써 인류의 고통을 구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세상에 대해 그저 참나로서 존재하고 그것을 가급적 명확히 설명하는 것으로 설명한다.(303 페이지) 저자는 영적인 정화를 이루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랑을 꼽으며 그것이 신에게 이르는 왕도라고 말한다.(33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감정의 일종이 아닌: 378 페이지) 일종의 앎이자 태도,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맥락이다.(341 페이지) 이와 관련해 저자는 앎이 증대되는 것 말고는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법은 없다고 말한다.(383 페이지)



저자는 자아와 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가장 어려운 영역 중 하나는 감각들의 기능이라 말한다.(34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감각적인 체험이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는 물리적인 몸을 작동시켜 주는 내적 에너지 체(體)의 보이지 않는 영역 속에 있다. 물리적인 몸 그 자체는 본래 어떤 것도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문제는 몸이 아닌 마음에 있기에 몸을 정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347 페이지) 저자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참나가 구루라고 말한다.(359 페이지) 흥미로운 것들 가운데 하나는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고,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는 말이다.(395 페이지) 저자는 기독교 근본주의 계통의 분파에서 붓다를 악마에게 홀린 자로 보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407 페이지. 그러나 붓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식 수준이 최대치인 1000 수준에 이른 존재이다.)



붓다를 악마에게 홀린 자로 보는 세력들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비가 또는 신비주의자들을 이단 취급한 세력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저자의 가르침에서 의식이 아닌 몸과 인성을 닦는 일은 강조의 오류에 빠지는 일이다.(408 페이지) 저자는 신(神)은 위력(force)이 아니라 힘(power)이라 말한다.(417 페이지) 위력은 부정적이고 강제하고 힘은 그렇지 않다. 위력은 일시적이고 에너지를 소모시키며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힘은 자족적이고 항구적이며 불변하며 무적(無敵)이다.(53 페이지) 저자는 과학의 방향에 대한 질문에 타우 뉴트리노(물질의 표준 입자 17 개 중 하나)가 발견되면서 큰 전진을 이루었다고 말한다.(451 페이지)



up, down, charm, strange, top, bottom 등 쿼크 6 개, 전자, 전자 뉴트리노, 타우, 타우 뉴트리노, 뮤온, 뮤우 뉴트리노 등 렙톤 6 개, 광자, w 보손, z 보손, 힉스 입자 등 5개를 더한 17개가 물질의 표준 입자이다. 타우 뉴트리노가 발견된 것은 1977년경이다. 저자는 2012년 애리조나 세도나의 자택에서 숨졌다. 2013년 힉스 입자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힉스 입자는 물질이 질량을 갖는 메커니즘을 해명하게 해줄 입자이다. 저자에 의하면 과학은 인식론쪽으로 관심을 돌릴 것이고 과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의식 자체를 연구해야 한다.(451 페이지)



철학은 뇌에 대한 과학자들의 황당한 결론을 막는 안전장치라는 뉴욕 주립대 네드 블록(Ned Block: 1942 - ) 철학 교수가 생각난다.(2014년 10월 29일 중앙일보 참고) 그러나 철학 이상으로 그런 안전 장치를 맡아야 하는 것은 영성과 의식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물론 영성과 의식(에 대한 추구)은 직접적으로 과학에 영향을 주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뇌 등의 과학적 연구가 늘어나고 성취를 보인다면 의미 있게 기록될 것이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나의 눈’은 역작이다. 애매하고 불확실한 영성, 종교 책들을 정리하고 영성은 물론 과학, 인식론 등을 아우른 저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한층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일관성을 얻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시를 좋아하고 시론(詩論)을 즐겨 읽는다. 최근 박지영 시인의 ‘귀갑문 유리컵’, 신미나 시인의 ‘싱고, 라고 불렀다’, 박미란 시인의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등을 읽고 리뷰를 썼고 리뷰를 쓰지는 못했지만 인상적인 시론집으로 기억하는 책이 몇 권 있다. 김수이 교수의 ‘환각의 칼날’, 오문석 교수의 ‘현대시의 운명, 원치 않았던’ 등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김병호 시인의 ‘과학 인문학’을 통해 시와 과학의 접점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과학 인문학’은 과학과 문학, 평론, 정신분석 등을 두루 읽으려는 나에게 상징적인 책이다. 상징적이라 했지만 이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예술과 사회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에 따른 분류이다.



하이젠베르크가 생각난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고 불확정성 원리를 고안해낸 하이젠베르크는 “나는 플라톤이 물론 시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쓴 것 속에는 시가 들어 있다.”는 말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포에지 즉 착상에 의한 창작의 대표적 경우로 기억되어야 한다. 포이에마(poiema)가 의미하는 것이 만드신 바, 하나님의 예술 작품 등인데 포에지(poesie)는 시, 문학 등을 의미하니 양자는 통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레오나르도 콜레티의 ‘명화로 보는 32 가지 이야기’를 인상 싶게 읽었다. 물리학자가 고흐, 마네, 카라바조, 마티스, 모네, 마그리트, 쇠라, 보초니, 르누아르 등 유명 화가들의 32 편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물리학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림과 물리학의 접점이다. 시, 자연과학과의 접점과 관계된 시론집이 있다. 조재룡 교수의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이다. 저자는 책의 제목으로 쓰인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남긴 “神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란 말에서 가져온 것이라 말한다.



불확정성 원리는 소립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확정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원리이다. 잘 알려졌듯 하이젠베르크에게 불확정성 원리를 영감으로 떠올리게 한 것은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라는 조물주가 파라데이그마라는 설계도를 보고 물질 공간인 코라를 빚어 세상을 만드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설계도대로 완벽하게 빚어지지 않는 미세한 오차로 인한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언어활동, 특히 가장 주관적인 언어활동이라 할 수 있는 시를 마주할 때, 의미 자체의 무한성에 주목하여 개성적인 길을 찾기보다는 그것을 그저 우연의 산물로 치부하는 경향에 크고 작은 불만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내가 보는 것은 자연과학과 시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자연과학에서는 미시 세계에 한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맞는 반면 조재룡 교수가 말한 바는 시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이니 말이다. 두 대상이 비교되는 것은 유사한 면이 있기 때문이지만 다른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문장의 원인과 결과, 텍스트를 움직이는 리듬이나 통사의 구성과 그 메커니즘을 헤아려 찾아낼 의미의 흔적들에 특수성의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비평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시론집은 내가 읽고 리뷰를 쓴 박지영 시인의 ‘욕망의 꼬리는 길다’, 이혜원 평론가의 ‘자유를 향한 자유의 시학’ 등에 이어 세 번째 리뷰로 남을 시 평론집이다. 주체에서 주체로 이행하는 목소리의 여행자들 ─ 이접(移接)하는 2000년대의 시, 2010년대의 시, 말하는 주체, 시적 주체, 주체화는 물론 이수명론, 김이듬론, 김록론 등 다양한 시인론이 흥미와 함께 의미를 줄 책이라 생각한다. 물론 시론집은 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시를 비판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