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살림지식총서 158
최인숙 지음 / 살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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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현 교수의 ‘칸트 비판 철학 9서 5제‘가 출간된 지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등을 비롯해 칸트의 주저들을 친절하게 설명한 책이다. 특별히 말할 것은 이 책이 ‘성(聖)’과 ‘화(和)’를 주제로 칸트의 저작들을 해명했다는 점이다. 칸트는 해설서만 해도 상당한 분량에 이르고 저자들의 개성에 따라 초점과 논의의 지향점이 조금씩 다른 철학자이다. 칸트는 추종자도 많고 공부 방법에서 단순히 흘려버릴 수 없는 에피소드들을 많이 낳은 철학자이다. 나 개인적으로 칸트는 “프랑스 사람들과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방법서설‘이나 ’순수 이성 비판‘의 원문을 어느 정도 독해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당한 훈련을 받기 전에는 몇 십 년 전의 책조차도 읽기 힘들다.”(이정우 교수 지음 ’가로지르기‘ 182 페이지)는 말로 기억되는 철학자이다. 그렇지만 “학생 시절 ’순수 이성 비판‘을 아무런 맥락도 모른 채 외우던 기억이 난다. ’순수 이성 비판‘을 공부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의 자연철학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이 근세 물리학의 형성을 배경으로 해서 쓰인 책이기 때문”(’가로지르기‘ 252, 253 페이지)이라는 이정우 교수의 다른 말이 칸트 읽기에 한 가닥의 희망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칸트를 읽는데 도움이 된다면 여러 상이한 관점의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김진 교수의 ’칸트와 불교‘나 김종욱 교수의 ’용수와 칸트‘ 등 불교와 칸트를 접목시킨 책에 기대를 건다. 같은 맥락에서 불교 철학자이기도 한 서양 철학자 한자경 교수(칸트로 박사학위 취득)의 ’칸트와 초월철학‘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한자경 교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에서 “세계는 일단 보이고 나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는 그 방식대로 보이는 것”이라는 말을 하며 ”그렇다면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 그러한 개념은 불변적 의미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가“라 묻는다. 한자경 교수는 주(註)를 통해 이는 곧 초월적 개념의 절대성 여부에 대한 물음이라 설명하며 칸트는 초월적 개념을 인간에 관한 한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했음을 언급한다. 한자경 교수는 이 문제를 유식(唯識) 불교의 문제로 연결지어 설명한다.



상술할 수 없지만 그래함 스메탐(Graham Smetham)이 ‘양자역학과 불교’에서 양자 파동함수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인식을 설명하며 그것을 유식불교의 관점에서 해명한 것은 나에게는 하나의 연결 고리이자 단서가 된다고 생각한다. 유식 불교를 관념적이고 비실제적이란 이유를 들어 꺼려온 내 입장으로서는 칸트, 양자역학, 유식 불교를 잇는 하나의 틀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살림 지식총서 158번인 최인숙 교수의 ‘칸트’는 칸트 철학을 인간존재라는 관점에서 설명한 책이다. 저자 최인숙 교수는 칸트(1724 - 1804)의 비판기를 그의 나이 45세 이후로 본다. 칸트 철학에서 인간이 중심 주제인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 즉 한계 안에서 그의 철학이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 비판기 이전 칸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이성론 철학은 유심론과 이원론이다.



칸트에게 철학적 진리란 이성의 자기 반성이었다. 이성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이성의 능력에 대해 관조하는 것이기에 종국에는 이성 자체에 대해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 철학이 비판기에 접어든 데에는 흄의 영향이 컸다. 칸트는 수학, 물리학, 형이상학을 존재의 문제로 보았다. 칸트의 이론 철학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 반드시 공간 형식, 시간 형식, 그리고 사고 형식인 범주(範疇)가 작동한다. “감성 없이는 대상이 주어지지 않고 오성(지성) 없이는 대상이 사유되지 않는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칸트는 인간을 이원적 존재로 보았다. 인간의 자연의 다른 존재들처럼 자연의 인과 법칙에 속하는 존재이면서 자연의 필연적인 인과 법칙을 초월하는 절대적 자유의 법칙에 속하는 존재이다. 칸트는 우리들이 지각할 수 있는 물체적 대상과 심리적 대상을 총체적인 자연으로 정의했다. 칸트가 말한 자연은 우리의 지각 구조에 의해 파악 가능한 대상이다.



칸트는 자신의 실천 철학에서 오직 행위자의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행위만을 도덕적이라 정의했다. 여기서 순수하다는 의미는 다른 어떤 목적이나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그것이 옳은 행위이기 때문에 행함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도덕적 근거를 자신의 마음에 두었다는 점이다. 칸트 철학에서 인간이 존엄한 것은 인간이 자연적 존재여서가 아니라 자유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 법칙은 현실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그것을 준수하느냐에 따라 평가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법칙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은 각자 자신의 이성에 비추어 보아 그 법칙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칸트의 근원적 도덕 법칙은 실제의 행위에도 철저히 적용 가능하며 적용되어야 하는 현실적 법칙임을 강조한다.



칸트의 반성적 의식이란 내 마음 바깥의 물질, 지위, 사람 쪽으로 저절로 기우는 마음을 되돌려 자신의 마음 안으로 향하게 하는 의식을 의미한다. 칸트의 도덕 법칙은 정언 명법(imperative)이다. 저자는 만일 우리가 절대적 존재라면 자신의 법칙을 자신에게 명령해야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라 말한다. 저자도 말했듯 인간은 보편적이며 필연적이며 객관적인 법칙으로서의 자격을 갖출 만큼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졌는가? 자유의지의 소유자로서의 인간의 문제는 불별의 영혼 및 신의 존재와 연관된 문제이다. 비판기 이후의 칸트 철학에서 불멸의 영혼은 인식 대상이 아니다. 불멸의 영혼은 우리의 시공 형식에 주어질 수 없는,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 등에서 불멸의 영혼을 인식할 수 없는 견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불멸의 영혼을 지닌 인간 개념이 요청된다고 주장했다. 칸트가 세운 불멸의 영혼을 지닌 인간이란 개념의 뿌리는 당연히 신 존재라는 개념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론 철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실천 철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유라는 두 가지 영역에 관하여 칸트는 자신의 비판적 선험철학을 정초(定礎)함으로써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우뚝 올라서게 되었다.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의 말미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의미를 “(우리가) 종종, 그리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언제나 새롭고 점점 커지는 경탄과 공경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자유)“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등을 통해 각각 진, 선, 미를 체계화했다. 칸트가 말하는 비판이란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을 다시 되돌아본다는 의미이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을 통해 체계화한 것은 미(美)로서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가졌기에 논란이 많다.



칸트는 존재론 중심의 탐구에서 인식론 중심의 탐구로 전향한 철학자이다. 칸트는 개별적인 경우를 보편 개념에 귀속시키는 규정적 판단에 대립되는 반성적 판단(어떤 개별적 사태에 대해 보편 개념을 추적해 가는 방식의 판단)을 문제삼았다. 반성적 판단은 그때 그때 개별적 경우에 대해 가능한 보편 개념을 찾아내야 하는 성격의 판단이다. 저자에 의하면 미(美) 판단은 근본적으로 논리적 판단과 성질이 다르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취미판단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취미판단은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만족감 및 기분 좋음을 동반하지만 이 기분은 도덕적 행위의 결과 느끼는 기분 좋음이나 단순한 감각적 즐거움과 구별된다.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무관심적 만족감이다. 칸트는 다른 어떤 목적이나 관심이 배제될 때 참다운 예술 창작이 가능하고 감상자 또한 일체의 주관적 관심과 욕구를 배제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의 이론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 상태는 결코 사고 능력의 개념적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개념적 사고는 단계적 절차를 거치는 간접적인 인식 활동이다. 이에 비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은 직접적 느낌(감정)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이때의 직접적 느낌에는 기분 좋은 마음이 동반한다. 칸트에 의하면 이런 동반관계는 상상력과 오성(悟性)의 자유로운 일치라는 관계에 의해 설명된다.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 선험적 인식 철학을 정립하고 ‘실천 이성 비판‘ 을 통해 선험적 도덕 철학을 정초한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통해 미학을 선험적인 학문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 법칙과 도덕적 법칙이라는 완전히 다른 법칙에 의해 분열된 인간의 미음을 하나로 통일하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작업은 아름다움과 숭고(崇高)를 느끼는 마음과 목적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 수행되었다.



칸트는 자연 속의 인간은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이라는 두 개의 법칙에 의해 분열된 존재라고 보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법칙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저자는 칸트 철학에서 미학은 단지 진선미 세 가지 중 하나가 아니라 진과 선을 매개하거나 통일하는 더 높은 차원의 요소라고 말한다. 칸트의 최종 목표는 비판 철학에 토대를 둔 형이상학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칸트는 인간의 다양하고 우연적인 현상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칸트 철학에서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할 것은 감성과 감정이다. 저자에 의하면 자신이나 타인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 감정이다. 물체 지각이 외적 지각이라면 심리 지각은 내적 지각으로 이것이 바로 감정이다. 저자에 의하면 칸트 철학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 및 존엄성을 얻는 것은 감정으로서의 경향성이 이성의 법칙에 종속되도록 강제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칸트의 도덕 철학은 불멸의 영혼 및 신 존재를 전제함으로써 성립하며 아름다움 및 숭고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궁극적 합목적성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데 궁극적 목적은 신의 의도에서 비롯한다고 가정된다. 칸트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근거를 절대적 이성에서 찾는다. 칸트의 도덕 원리는 선험적 원리이다. 선험적 원리란 경험의 축적에서 익힌 원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고 능력에 기인하는 원리이다. 우리 자신의 사고 능력에 기인한다는 뜻은 우리가 바람직한 행위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필연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원리임을 의미한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모색하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당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칸트가 언급한 이성(理性) 종교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성 종교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독단적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구상의 현실 종교가 아니다. 칸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만 이성적, 도덕적 존재의 현실화는 바람직한 사회 구조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칸트는 인간 사회의 역사는 장기적으로는 이성의 방향으로 전진할 것을 확신했다. 칸트는 반사회적 사회성(이기적 개인들이 늘면 결국 사회적 규제가 필요해지는 역설)이 개별 국가를 성립시키는 데 뿐 아니라 나아가 전 세계적인 국제 연맹을 성립시키는 데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칸트는 공화제 국가를 시민 사회의 이상적 형태로 보았다. 칸트는 개별 국가의 시민사회화는 세계 시민 사회로 연결되어야 참된 이상 사회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칸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성적 존재이듯 국가도 이성적 존재여야 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우리가 지금껏 가장 커다란 전쟁으로 기억하는 세계 1, 2차 대전 같은 사태를 예견했다.



칸트는 도덕 교육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가 중시한 도덕 교육은 학문 및 예술이 포함되는 넓은 의미의 문화 교육이다. 칸트는 누구보다도 감성의 막강한 힘을 잘 이해했다. 그렇기에 인간이 감성의 막강함 내지 무도한 힘에 굴복하지 않는 길을 하나의 통일적인 이론 체계에 의해 정초하고자 했다. 나는 ”니체나 베르그손의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칸트의 위대성에 감탄하기도 했다.“(진은영 지음 ‘’순수 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284 페이지)는 말을 통해 칸트를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점은 그의 주요 비판서들을 읽고 났을 때 완전할 수 있다. 칸트는 계몽의 완성과 사회적 인간의 탄생이라는 명제로 요약 가능한 철학자이다. ”폭력적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자유에 기초한 인권의 연대를 부르짖“(’다시 쓰는 서양 근대철학사‘ 355 페이지)은 칸트! 그가 말한 목적으로서 대접받아야 할 인간은 무엇보다 정치사회적 차원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이 너무 자극적이라는 것은 새로운 통찰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다 해서 세상이 우려스럽지 않은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요즘 세상의 그런 면을 앞서 이끄는 것은 언어이다. 말을 가리기보다 정합성(整合性)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의 성찰도 없이 우선 말을 하고 본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지난 18일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대통령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고함치고 욕까지 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내 자식이 죽었다면 나는 더 했을 것”이라 말을 했다. 그런데 그는 정 모 의원의 아들이 그런 국민들이 미개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맞는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은 결국 자신은 미개하다는 소리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말공부’라는 책이 출간된 것을 보고 나는 그 책이 내 관심과 맞닿았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너무 혼탁하고 특히 말을 내키는 대로 함부로 하는 세상에 일침을 가해 교훈을 주는 책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성찰의 미덕을 이끌어내는 책이 아니라 말로써 상대를 설득하고 성과를 얻어내는 데 초점을 둔 책이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지피지기知彼知己, 이류이추以類而推(비유와 인용 활용하기), 일침견혈一針見血(한 방에 핵심 찌르기), 선행후언先行後言(실천을 먼저 하고 후에 말하기) 등의 지침을 보면 책의 지향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영 스님의 ‘계율, 꽃과 가시’란 책이 있다. 이 책 제목을 언어에 적용해 ‘언어, 꽃과 가시’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언어는 잘 사용하면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가시처럼 상대를 찔러 아프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성찰에만 초점을 두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고 촌철살인과 일침견혈 등으로 이기기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다. 아름답고 적절한 말로 이긴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노자가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을 하고 공자가 교언영색(巧言令色: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얼굴 표정을 은근하게 하는 것)을 경계했지만 진심을 담은 순박한 마음으로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요즘처럼 자극적이고 혼탁한 세상에서는 공허하고 촌철살인과 일침견혈을 지침으로 상대를 이기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세상의 공격성을 더하는 것일 수 있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을 자기 반성 없는 언어 사용은 맹목적이고 자기 반성에만 매몰되는 언어 사용은 공허하다고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억울하고 슬픈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선의(善意)를 먹칠하는 사람들을 보며 환멸감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언어 사용을 돈에 눈이 어두워 규정을 어겨가며 선박을 불법 개조하고 최소한의 직업 정신도 몰라라 하고 승객들은 안중에도 없이 살 길을 찾아 탈출한 사람들의 악행보다 덜하다고 할 수 있을까?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진심으로 슬픔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언어가 위로와 힘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그런 망언을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뻔뻔한 행동에 준해 바라보아야 함은 물론이다.



한재훈 박사가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에서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서당’은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과거의 유산이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교육시스템에 비추어 보면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제가 굳이 그것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일종의 애례존양(愛禮存羊)의 마음에서라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허망한 욕심을 따라 맹목적인 발걸음을 재촉하는, 질주하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참된 자기성찰이다. 제한적이고 일면적이겠지만 서당을 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내 지향은 자본만이 ‘자유’를 얻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암울한 미래를 헤쳐 나갈 방도를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찾는 조한혜정 교수의 ‘다시, 마을이다’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최소의 모색마저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해법의 길을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임을 명심하자...



 
 
 

 

재작년 여름 목 근육 이상으로 한의원에도 갔었고 교정원에도 갔었다. 하지만 내 목이 일자목 상태라는 말을 들었을 뿐 뚜렷한 성과도 악화도 없이 지금까지 지내왔다. 그랬기에 만성 피로, 간헐적 현기증 등 고질적 증세들과 목 근육 이상을 연결지어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스웨덴 사람들은 왜 피곤하지 않을까' 같은 책이 나온 것을 보며 내 피로와 현기증이 생활 습관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오늘에서야 새삼 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다만 구체적 계기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라 해야 옳다. 물론 내 증세와 관련된 생활습관이란 몸에 나쁜 음식을 즐기는 것이라거나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거나 운동을 하지 않는다거나 등이 아니라 자세가 바르지 못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컴퓨터를 하고 책을 읽을 때 목을 앞으로 쭉 빼는 자세를 취한 탓에 일자목 형태의 목을 다시 드러나게 한 것이고 그 때문에 현기증과 약간의 찌릿한 증세 등이 생긴 것이다. 일전에 몇 차례 머리를 가볍게 부딪힌 것도 증세를 심하게 했다.



재작년 문제가 생겼을 때 바쁘게 들춰 본 김철 선생의 ’디스크는 없다‘에 실린 문제의 글을 다시 펴보았다. “스트레스는 면역계 및 내분비 계통이나 신경계 등의 몸 내부에도 흔적을 남기지만 외형적으로는 등뼈를 구부리고 어깨를 처지게 하는 자세의 변형을 초래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자율신경계를 압박하게 된다. 이는 몸 내부 장기의 기능을 떨어뜨리고 재차 몸의 자연 치유력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144 페이지) 김철 선생이 깨닫게 하는 것은 우리 몸은 관계적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정교한 유기체라는 점이다. CST(cranial - sacral therapy: 두개頭蓋 천골薦骨 요법)의 권위자인 김선애 선생은 스트레스를 단순히 정신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 것을 가르친다. 그에 의하면 스트레스는 인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물리적인 질병이다. 김선애 선생은 육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스트레스는 결국 두개골의 뼈들이 받는 스트레스라고 말한다.(’기적의 힐링 브레인‘ 17, 18 페이지)



몸은 오묘하다. 그것은 관계적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흥미로운 것은 ’입으로 숨쉬지 마라‘의 논지이다. 이 책의,두 저자인 오카자미 요시히데(치과 의사)와 이마이 가즈아키(내과 의사)는 아기는 3개월 무렵에 간신히 목을 가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아기가 목을 가누는 것은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모유를 빠는 습관을 통해 발달한 혀 근육이 목 근육 발달을 촉진한 결과이다.(99 페이지) 목이 골격계와 내부 장기 등에 영향을 미치듯 혀 근육도 목에 영향을 주는 것이니 상호 관계성이란 말은 이럴 때 해야 할 것이다. 치과에서 턱관절 치료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턱 관절이 잘못(부정 교합 등) 되면 두통, 현기증, 후비루, 우울증, 만성 소화불량, 지속적 변비 또는 설사. 뒷목의 뻣뻣함, 어깨 통증, 허리통증 등 여러 질병이 부수(附隨)한다고 한다. 물론 턱 관절 이상과 무관한 증세들은 분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문가의 몫이다.



턱 관절의 문제를 판별하는 것 가운데 양 손의 새끼 손가락을 귀에 넣고 입을 크게 벌리거나 다물 때 손가락에 조임 증세가 있거나 손가락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있는 것이 있다. 이는 나에게 해당하는 사항이다. 요 며칠 어지러움 때문에 ’긍정의 뇌‘를 구입했고 ’기적의 힐링 브레인‘ 을 구입했다. 전자는 신경해부학을 전공한 뇌과학자가 37세의 이른 나이에 겪은 뇌졸중 및 그 극복 사례를 담은 책이고, 후자는 두개천골 요법 전문가가 작성한 두개골에서 천골에 이르는 메커니즘을 밝힌 로드맵이라 할 수 있다. ’긍정의 뇌‘의 경우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지만 극복의 의지를 더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허리가 바로 서고 가슴이 펴지면 우리 몸은 건강”(김철 지음 ’몸의 혁명‘ 130 페이지)해진다는 희망적인 말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고무적이기까지 하다. 그 지식은 인체 속에 동물계의 모든 생물들과의 연결 고리가 들어 있다는 지식에 비하면 하찮을 수 있지만 실제적이라는 점에서는 비교가 안 된다. 고생물학자 닐 슈빈은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은 해파리를 닮았고 어떤 부분은 벌레, 어떤 부분은 물고기를 닮았다고 말한다. 슈빈은 인간은 혀, 후두, 목구멍 뒤쪽의 운동을 통제해 목소리를 낸다고 말한다. 슈빈에 의하면 아가미궁 연골에서 생겨난 후두를 가진 인간은 말하는 능력을 얻는 과정에서 수면 무호흡증이나 질식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내 안의 물고기‘ 참고)... 목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컴퓨터 모니터 위치를 눈 높이에 맞추고 낮은 베개를 베는 등 부랴부랴 소동을 부렸지만 관건은 바른 자세를 얼마나 오래 유지하느냐에 있음을 명심해야겠다. 독서 시간을 20 - 30 분 단위로 하라는 한 노안(老眼) 치료 전문의의 말을 나에게 바꿔 적용해 20 - 30 분 단위로 스트레칭을 해야 하겠다. 뇌졸중 극복만 의미 있고 위대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 리 스몰린이 들려주는 물리학 혁명의 최전선 사이언스 마스터스 13
리 스몰린 지음, 김낙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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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중력 이론은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양자역학과 중력 이론(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의 통일을 모색한 이론이다. 특별히 그 중에서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인 리 스몰린(Lee Smolin 1955 - )은 통일을 모색한 결과 도출된 양자 중력 이론과 끈이론을 통합하는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론들이 달라지는 매우 근본적인 이유 두 가지를 설명한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관측자와 관측 대상인 계의 연관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양자 이론이 관측자와 관측되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뉴턴과 근본적으로 다른 가정을 하는 반면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뉴턴의 오래된 답변을 수정 없이 받아들인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는 정확히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은 근본적으로 바뀐 반면 관측자와 관측되는 것 사이에 대해서는 뉴턴의 관점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이 시간과 공간의 구조의 발현임을 가르쳐준다.



저자는 새로운 이론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실험을 수행할 때까지는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끈이론과 고리 양자 중력 이론은 이름은 비슷해도 전혀 다르다. 시간과 공간을 기술하기 위해 양자 중력이 필요해지는 규모를 플랑크 규모라고 한다. 끈이론과 고리 양자 중력 이론은 모두 시간과 공간이 그 작은 규모에서 어떻게 되는가를 설명한 이론들이다.



저자는 우주론의 제1 원리를 우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주에 실재하는 것과 무관한 공간은 의미가 없다. 저자의 정의에 의하면 공간을 어떤 관계들과도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뉴턴의 절대적 관점은 부적절하다. 우주가 입자로만 이루어졌다는 관점과 반대되는 관점이 우주가 장(場)으로 이루어졌다는 관점이다. 장이란 공간 전체에 걸쳐 연속적으로 변하는 양(量)들이다. 저자는 시간 또한 공간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 정의하며 변화 없이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상태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알면 양자 이론의 거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의 불연속 구조가 명백해지는 시간과 공간의 규모를 플랑크 규모라 한다. 우리가 플랑크 규모로 내려가면 양자 이론과 상대성이론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이는 중력의 양자 이론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저자에 의하면 블랙홀은 양자 중력 이론 연구자들에게는 중요한 대상이다. 저자는 빛이 우리에게 오기 위해 중력장의 우물을 기어오를 때 빛의 파장이 늘어나기 때문에 블랙홀의 지평선 근처에서는 매우 작은 규모의 것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만일 블랙홀의 지평선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나오는 빛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공간 자체의 양자 구조를 볼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입자에서 에너지를 완전히 없애더라도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어떤 고유의 무작위적인 운동 즉 영점 운동(zero point movement)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며 저자는 마찬가지 현상이 전기장과 자기장처럼 퍼져 있는 장에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즉 어떤 영역에서 전기장과 자기장을 모두 측정할 경우 둘 다 0일 수는 없기에 공간의 한 영역을 0도까지 냉각시켜 에너지는 갖지 않게 해도 여전히 무작위적으로 요동치는 전기자와 자기장이 존재한다. 이를 진공의 양자 요동(量子 搖動)이라 한다. 이 양자 요동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정지해 있는 통상적인 에너지 검출기로는 측정할 수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가속하는 검출기에서는 검출할 수 있다. 가속이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블랙홀의 양자적 토대를 이루는 두 가지 법칙을 소개한다. 운루 법칙(Bilk Unruh의 이름에서 유래한)과 베켄슈타인 법칙(Jacob Bekenstein의 이름에서 유래한)이다. 전자는 가속하는 관측자는 그 가속도에 비례하는 온도에 있는 뜨거운 광자 기체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관측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관측자와 그의 숨겨진 영역을 분리하는 경계를 이루는 모든 지평선은 그 뒤에 숨겨진 정보의 양을 측정하는 엔트로피와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이 엔트로피는 항상 지평선의 넓이에 비례한다.



저자는 공간의 가장 작은 단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관계들이 공간을 정의한다는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세계가 불연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물론 지금까지 아무도 공간의 원자(가장 작은 단위)를 관찰한 적은 없으며 공간이 불연속적이라고 예측하는 이론의 예측들 중 어느 것도 실험적으로 증명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많은 물리학자들이 공간이 불연속적이라 믿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중요하다. 고리 양자 중력 이론과 끈이론은 모두 공간에 원자적 구조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세계가 연속적이라면 공간의 모든 부피는 무한한 양의 정보를 포함할 것이라 말한다. 연속적인 세계에서는 전자 하나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에 무한한 양의 정보가 필요하다.



저자는 빈 공간은 색전하(色電荷)에 관한 초전도체라는 가설, 그리고 끈과 장(場)이 같은 것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법이라 여기는 이중성의 가설(양자 이론에서 말하는 파동 입자 이중성과 다르다. 하지만 양자 이론의 파동 입자 이중성은 물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만큼 중요하다.)을 언급한다. 저자는 양자 중력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자살 행위로 여겨지던 시대에 연구에 참여했음을 언급한다. 저자는 양자 중력 이론은 새로운 개념이나 아이디어와 계산 만큼 새로운 수학도 필요한 일이며 끈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까지도 끈이론이란 게 진정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끈이론이 있다. 하나는 모순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순이 없는 것이다. 저자는 어떤 과학이론이 궁극적으로는 거짓이라고 해도 그 이론의 실용적 가치를 알아보는 것은 유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끈이론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 배경에서 운동한다. 흥미로운 것은 끈이론은 공간이 9차원일 경우 가장 간단하다는 것이다. 끈이론은 우주의 대부분의 차원과 대칭성이 감춰져 있다고 말하는 이론이다. 저자는 블랙홀의 열역학, 고리 양자 중력 이론, 끈이론 등 양자 중력 이론의 세 가지 접근 방법에 대해 논하며 홀로그래피 원리가 세 가지 이론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지침이 될 것이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주가 홀로그램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홀로그래피 원리는 우주가 관계의 네트워크라는 아이디어의 완성판이다. 홀로그래피 원리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이지만 양자 중력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완전히 터무니 없는 것 같지만 어떻게 해도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갖게 되었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양자 중력 문제의 일부분에 대한 해(解)를 전체의 해라고 혼동해왔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리 양자 중력 이론과 끈이론이 한 이론의 두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주의 양상 중 가장 참말 같지 않고 가장 영문 모를 것은 바로 우주라는 존재 자체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불가사의함을 좇아 우주를 둘러본다면 가장 큰 불가사의 중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둘러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 만큼 멀리까지 볼 수 있다는 사실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중력의 양자 이론이 가져올 최고의 개가는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일일 것으로 그렇지 못하다면 하느님은 우리 주위에 어디나 계신다고 말한 신비주의자의 말이 옳았던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전문지식은 부족해도 배우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에 큰 비중을 둔다. 저자에 의하면 자신들의 임무는 모든 증거를 제시하고 독자가 스스로 사고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과학의 역설이라 말하며 과학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얻게 되는 결론을 스스로 생각해내고 토론하며 논증하는 과정을 돕도록 고안된 조직과 의식화된 공동체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합리(合離)의 사유란 것이 있습니다. 이는 이(理)란 유교의 형이상학이 불교의 공(空)에 대항해 제시한 개념이라고 설명한 한 철학자의 표현으로 라이프니츠의 사유를 분리해서 보면.. 합해서 보면의 구도로 해명한 결과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한 생각 돌리면.. 고정관념의 뿌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의 사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고해라는 것도 맞고 세상이 행복한 곳이라는 말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한 생각 돌린 사람에게 세상은 고통의 바다가 아닐 것이고 그러지 못한 사람에게는 고통의 바다일 것이란 말씀입니다. 문제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런 깨달음을 얻었는가, 일 것입니다. 저는 불교가 인간의 지혜를 문혜(聞慧), 수혜(修慧), 사혜(思慧)의 세 가지로 나누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람(猥濫)되지만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크나큰 사태를 계기로, 그것을 비근하게 비유하고 설명하셔서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가르치시려는 배려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스님께서 이제서야 새삼 세상이 고통스런 곳이라 아셨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보아 왔습니다. 세상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에 제 생각을 맞추려고 한 결과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저는 그러기에 너무 거리가 먼, 비불교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세상 살아보면 고통스럽고, 아무리 생각해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생각해온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얻은 지혜가 세 가지 지혜에 해당하지 않으니 제외하자면 제가 얻은 생각은 문혜이거나 사혜에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 한 뇌과학자도 기억을 절차 기억, 신념 기억, 학습 기억 등의 세 가지로 나누면서 학습 기억이 많을수록 자신의 아집을 되돌아보고 버리고 성찰하지만 신념 기억과 절차 기억은 부정적인 것으로 분류하셨지요. 그 뇌과학자가 말한 절차 기억이나 신념 기억은 굳이 나누면 문혜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래도 스님이 이제야 세상이 고통의 바다라고 하시는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세상 사람들이 너무 안타까우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방황하고 착오에 묶이고 불안해 하고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당연시하지 못하는 아픈 존재들을 보면 菩薩의 道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집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저에게도 해당할 것입니다. 돌아보고 돌아보겠습니다. 저야 불교도가 아니기에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한 것은 아니라고 하신 성철 스님의 말씀에서 자유롭게 에센스를 취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묻지 않으셨기에 제가 자유롭게 불교 밖에서 모색하고 窮究하다가 돌아올 것이란 말씀은 굳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