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프로 야구도 많이 선진화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트라이크 - 볼’ 카운트를 ‘볼 - 스트라이크’ 카운트로 하고, 원투 펀치, WHIP, OPS, 테이블 세터, sweep, 위닝 시리즈(궁금한 것은 위닝 시리즈의 반대어는 무엇일까?란 점이다.) 등의 용어를 쓰는 것은 그 한 예다. 물론 경기력 향상을 무엇보다 눈여겨 보아야 한다. 류현진의 뛰어난 활약이 곧바로 한국 야구의 전반적인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변과 잠재적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은 사실이다. 급격하게는 아니지만 전성기에서 내리막길을 걷는 투수가 마이너 리그(트리플 A)에 스카우트 되어 난타당하는 것은 아쉽다. 선수는 자신의 구위를 믿어야 하고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만 냉정한 평가도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의 선발 투수진이 두터운 팀으로 스카우트되었을 때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란 우려를 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입지와 실력을 냉철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미국 프로야구에도 미신적인 면이 있다. 밤비노의 저주, 염소의 저주 등 실제가 아닌, 감성에 치우친 용어들이 남발되는 것을 보면 미국이라고 꼭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야구에 나타나는 한 가지 아마추어적인 행태는 중계 아나운서와 해설가가 자질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고교야구 선수도 아닌 프로 선수들의 Hit, 타점, 득점 등이 벌어질 때 마치 고교야구를 중계하듯 목소리의 톤을 높이고 떠들썩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에 흥분해 호객하듯 반응하지 말고 차분하고 깊이 있고 간결한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야구를 보며 궁금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미국에서도 친정팀이라는 말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친정팀이라는 말은 부적절한데 거기에 친정팀에 비수(예컨대 '결승타' 이용규, 친정팀에 비수 꽂은 '3안타 맹타' 같은 기사!)라는 말을 쓰다니...



친정팀이란 말이 부적절하다는 것은 우리 나라(뿐 아니겠지만) 선수들이 100% 자유롭게(전적으로) 팀을 고를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일본식 표현인 이 단어도 식구라는 말로 써야 적절하다.) 용어로 적대 관계로 연결된 선수들간의 사례를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물론 선수들간의 적대관계가 100% 그런 것은 아니다. 선수들간의 관계는 상대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계속 운동할 수 있는 특수한 의미의 적대관계이다. 운동 선수에게 있는 것은 친정팀이 아니라 전 소속팀일 뿐이다.



예전에 야구 경기에 분사(憤死), 횡사(橫死) 등은 물론 병살(竝殺) 등 일본식의 살벌한 용어가 쓰였음을 감안하면 비수(匕首)라는 말을 쓰는 것에는 여전히, 그런 말을 쓰다니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발상지)식의 용어를 도입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일본식의 살벌한 용어를 지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해설자도 중계자도 노력하는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경기 자체보다 해설, 중계가 아니 정확하게는 그들 간의 차이가 더 흥미롭다.



공부하지 않는 풍토에 싫증이 나 ‘야구 수학 스파크’란 책을 샀다. 이 책 내용 중 ‘투수가 던진 공은 미트에 도달하지 않는다‘란 제목의 글이 있다. 투수가 야구공을 던져 야구공이 포수 미트에 도달할 때까지 우선 그 절반의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다시 남은 거리의 절반 지점을 통과해야 하고 다시 남은 거리의 절반 지점을 통과해야 하므로 공은 무한한 수의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공은 결국 미트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는 제논의 역설(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이 야구에 적용된 사례이다.



천문학자 아이작 아시모프가 이런 경우를 두고 답을 제시한 것을 보자.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앞서 있는 거리들의 무한한 합은 11과 1/9미터이다. 이 경우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린다고 가정하고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10미터 앞에서 출발한다고 전제한 것이다. 아킬레스가 원래 거북이가 있던 10미터 지점에 도달할 동안 거북이는 1미터를 더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앞서 있던 1미터 지점에 도달할 동안 거북이는 0.1미터를 더 가고...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거북이가 아킬레스를 앞서 있는 거리의 합은 10 + 1 + 1/10 + 1/100 + 1/1000..의 합이다. 이는 10 + 1 + 0.1 + 0.01 + 0.001의 합이니 11.11111이 된다. 곧 11과 1/9인 것이다. 따라서 아킬레스는 11과 1/9 미터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지나면 거북이를 따라잡는 것이다.(우주의 비밀’ 186, 187 페이지)



이를 다른 식으로 풀 수도 있다. “아킬레스의 일단 정지와 거북이의 일단 정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앞서 지나간 위치를 따라잡는 순간 그의 에너지는 거북이의 에너지와 같지 않다. 아킬레스는 거북이가 지나간 지점에 일단 도착해서 다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운동은 초기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연속적인 운동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제논은 거북이가 지나간 지점을 아킬레스가 지나갈 때 그들의 속도 차이, 운동 차이를 똑같이 0으로 환원하고 있다. 이런 에너지 차이의 무시가 그의 패러독스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이정우 교수 지음 ’담론의 공간‘ 252 페이지) 흥미로운 사례이다. 내가 응원하는 팀 넥센의 계속될 상승세를 지켜보자...야구 경기 지켜 보기에 좋은 4월이다...

 



 
 
 
양자역학과 불교
Graham Smetham 지음 / 홍릉과학출판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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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 불교’의 원제는 ‘양자 불교, 공허에서의 춤추기(Quantum Buddhism, Dancing in Emptiness)'이다. 맥락상 그래함 스메탐(Graham Smetham)의 책에서 공(空)은 환영(幻影)을 의미하는 듯 하다. 저자는 현대 물리학과 불교 철학이 놀랄 만큼 상세하고 정확하게 상호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세상을 환영(幻影)으로 보는 양자(兩者)의 공통된 주장이 모호한 무작위적 단어들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편견처럼 보일 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주되게 의거(依據)한 불교는 중관 불교와 유식 불교이다. 저자는 우주의 작동 원리의 기원과 방식에 대해 간절히 알고 싶어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로 모순되는 부분들을 전체적인 맥락상 필수적인 부분이기에 그대로 두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의식을 물질 세계의 산물로 보는 관점을 속임수로 정의하며 양자 실험을 통해 실재가 드러나는 상식은 실험자의 의식적인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말한다.(3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고유한 실재(또는 존재)의 부재는 공(空)을 의미하며 그것은 무(無)라기보다 중도(中道)를 표방하는 대승불교의 중심 개념인 연기(緣起)를 나타낸다.(35 페이지)



저자는 의식을 실재에 내재된 근원적 힘으로 정의한다.(36 페이지) 저자는 파동 - 입자 이중성을 의식이 여러 방면에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우주를 관찰에 의해 참여하는 것으로 본 존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1911 - 2008)의 논의를 인용한다. 존 휠러는 시공간은 의식으로부터 온다는 말도 했다. 이와 맥을 같이하는 말들로 거론할 수 있는 것들은 정신이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는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 - 1961)의 말, 그리고 정신이 모든 물질의 모체라는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 - 1947)의 말이다.



저자는 보이는 것과 궁극적인 것으로 나뉘는 불교의 실재는 일상에서 고전영역과 양자영역으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고 말한다. 불교의 중관학파에서 연기는 공으로 설명되고 공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이며 그 자체 중도이다. 불교의 유식 학파의 세계관 역시 양자역학에서 밝혀진 사실들과 중요한 연결점을 지닌다.(59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중관학파의 통찰이 실재 수준에 적용되는 한편 마이크로 단위의 양자적 특성에도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이다.(60 페이지) 현상이 신기루, 환영, 거품 같다는 불교의 인식은 외양상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사실상 환영(幻影)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저자는 데이비드 봄이 기계론적 질서라 언급한 고전물리학의 관점은 불교 중관학파에서 문제시해온 자성(自性), 고유성(固有性) 등에 상당히 부합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모든 존재의 춤인 공(空)의 춤은 양극단을 맴돌며 인과율과 우주와 평행 우주들이 작용하도록 만들어준다.(111 페이지) 중요한 것은 중관학파 철학자들이 현대의 물리학자들처럼 양자(量子)의 상호 작용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우주가 그 모습을 드러낸 빈 공간 내에 존재하면서 존재의 안팎을 맴도는 정묘한 입자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저자의 인식이다.



양자역학을 통해 파악된 물질은 입자라기보다 파동과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용어로 수식되어야 했지만 대체할 만한 것이 없었다. 중관학파의 철학자인 바바비베카(bhavaviveka: 8세기에 살았던 인도 불교 철학자)는 실재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둘 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둘 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이는 전자(電子)의 특성을 닮았는데 중요한 것은 바바비베카가 전자나 스플릿 빔 실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환영(幻影) 같은 실재의 본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설명은 일상계는 공의 영역에서 출현하고 공 안에서 완고한 환영 같은 모습으로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양자 물리학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존 그리벤(John Gribben: 1946 - )은 파동함수(양자적 실제가 어떤 특이점에 확률적으로 존재하는지를 수학적으로 묘사한 함수)를 거론하며 아무도 바라보지 않을 경우 중력으로 뭉쳐진 원자 덩어리인 달과 같은 커다란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설명한다. 달이 양자 유령처럼 출몰한다는 것인데 물론 사라진 시간은 수백년 아니 수십억년 동안 나노 초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양자물리학에서 제기되어 온 문제는 환영(幻影)과 실재(實在)에 대한 것으로 요약 가능하다고. 저자는 관찰자의 참여는 중요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물질이 창조된다고 말하며 이 지점에서 양자론과 불교의 깊은 상호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 - 1963)는 세상은 환영이지만 현재 진행되는 한에서는 실재하기에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환영이라 지적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인용하며 무명의 지각 있는 존재들이 지속적으로 안고 있는 번뇌는 세상이 진행되는 한에서는 실재가 된다고 덧붙인다. 저자는 양자 유심론에 따르면 우리를 둘러싼 대상들은 집단적인 카르마에 의해 창조되는 것으로 물리적 세상은 번뇌 인식이 낳은 수많은 행동들에 의해 억겁에 걸쳐 만들어진 카르마 매트릭스의 현현이라고 말한다.(243 페이지)



환영과 다중 세계라는 장(章)에서 저자는 파동함수의 관점에서 실재는 관찰에 의해 실재가 되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다양한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249 페이지) 측정이 이뤄지면 가능성 중 하나가 실재하고 나머지는 사라지지만 어떤 것이 구체적인 실제가 될지 우리들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바 파동함수는 단지 각각의 가능성이 지닌 확률만을 제공해 준다. 현실 선택하기란 장에서 저자는 모든 물질은 사실상 99.99999999% 비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들의 경험계에 내재한 외양들은 중관학파에서 강조한 것처럼 전도(顚倒)된 망상(妄想)에 불과한 것이라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사실은 양자물리학의 태동과 더불어 극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313 페이지)



자기를 인식하는 우주란 장에서 저자는 우주가 밖으로 펼쳐지는 과정은 파동함수의 붕괴이며 이것은 인식을 전제로 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33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이는 우주가 자기 인지와 자기 인식을 통해 자기 창조를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주가 다양한 환영의 다중세계를 만드는 것 또한 바로 이 과정을 통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원적인 경험을 힌두 철학에서는 마야(환영幻影)라 부른다. 앨런 월리스(Alan Wallace: 1950 - )는 “마야는 측정하기와 환영을 창조하기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양자물리학처럼 인도 명상가들은 측정 행동을 환영적인 외양을 드러내는 것과 연결시켰다. 측정 행동은 실재라는 한 조각의 천을 환영 같은 다세계로 나누는 것”이라 말했다.



저자에 의하면 카르마란 행동이란 뜻이며 아뢰야식에 흔적을 남겨두는 신구의(身口意)와 연관된다. 이들 공명하는 흔적이나 종자(種子)들은 차후에 성숙하면서 경험적인 실재로 활성화한다.(33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우주의 자기 인식과정은 불교 가르침에서 전하는 12연기(緣起)처럼 다양하고 의도를 지닌 순환 주기를 구현한다.(33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무명(無明)이란 자신을 고유(固有)하고 독립적인 자아라고 보는 환영에 의해 발생한다.



불교는 단일한 하나의 가르침이 아니다. 나의 경우 불교를 수용하지만 12 연기를 진지한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아 왔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의 12연기 수용, 그리고 양자물리학과의 연관성 해명은 나에게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상술할 수 없지만 저자가 말한대로 12 연기의 관점은 양자(量子) 관점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고 하니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유식 불교의 7식(말라식), 8식(아뢰야식) 등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입장에서 저자의 논지는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저자는 진공 요동을 거론한다.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 1963 - )은 “어떤 장(場)의 가치라도 0의 언저리에서 시작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단일한 0의 모습이 될 수는 없다. 물리학 용어를 빌자면 장은 진공 요동(vacuum fluctuation)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을 했다.(374 페이지) 이에 대해 데이비드 봄(David Bohm: 1917 - 1992)은 “그것은 전체 운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운동을 넘어선 것이다. 우리들이 어떤 것에 대해 생각만 하더라도 벌써 공(空)은 물질로 가득찬 공간이 된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유식학파(유심론)의 인식은 슈뢰딩거의 관점에 상응하는 반면 중관학파(중도中道)의 인식은 하이젠베르크의 관점에 더욱 확실하게 부합한다는 것이다.(407 페이지) 하이젠베르크는 우리들이 관찰한 것은 원래 존재하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연구 방법에 노출된 자연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슈뢰딩거(파동함수)와 하이젠베르크(행렬역학)는 공히 궁극적으로는 고유한 존재가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408 페이지)



저자는 공이란 무엇인가란 장에서 불교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는 환생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자신과 타인의 영적인 수행을 위해 세세생생 환생하겠다는 서약을 한 사람도 존재하지만 순전히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환생하겠다는 욕심을 떨쳐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416 페이지) 저자는 공의 속제(俗諦)적 양상이 의식이라면 공의 진제(眞諦)적 양상은 언어와 개념을 초월한 것이라 설명하며 비물질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의식의 본성은 매우 섬세한 지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중관학파의 철학적 관점 내에서 미묘한 입장 차이로 이끈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은 모호하고 비과학적인 지성의 산물이 아니라며 양자물리학자들 특히 하이젠베르크의 결론을 소개한다. “우리들의 언어로는 원자 내에 발생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일상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 또한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원자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일상의 언어를 수정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렵다. 단어란 단지 우리들의 정신적 그림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능력조차 일상적인 경험의 결과일 뿐이다.”



인상적이게도 저자는 보편적인 붓다의 정신은 파동함수를 붕괴시키지 않는데 이런 각성된 관점으로 보면 비이원적인 영역의 궁극적인 실재가 다른 이원적이고 조건화된 현상들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말한다.(457 페이지) 파동 함수를 붕괴시키는 것은 깊은 정신 수준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인 식별활동을 말한다. 보살(菩薩: 구도자求道者)과 붓다의 정신은 파동함수의 붕괴와 반대쪽에 위치한 것이다.(471 페이지) 이와 관련해 오웬 플래나간의 ’보살의 뇌: 자연화된 불교‘(2013년 7월 8일 출간)는 흥미롭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라는 구절, 그리고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상징)이란 구절이 있는데 저자는 보신불(報身佛)과 화신불(化身佛)의 특별한 활동들은 파동함수라는 공(空) 안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양자물리학자 디터 제(H. Dieter Zeh: 1932- )는 이에 대해 태초에 파동함수가 있었다고 말한다.(478 페이지) 저자는 파동함수는 신과 함께 있었던 것, 아니 신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515 페이지)



양자 물리학자 워지시에크 쥬렉(Wojciech H. Zurek: 1951 - )은 “양자 상태는 특성상 인식과 존재론적 역할을 공유하는 에피온틱(epiontic: 인식활동이 존재를 창조한다.)한 특성을 지니고 있고 꿈의 재료가 된다. 이들 두 가지 양상은 모순되게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양자 실험은 이런 두 가지 작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487 페이지) 저자는 ’왜 신은 존재하는가‘란 책에서 어떤 증명이나 논리적 입증도 없이 신의 정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 영국 출신의 사제, 철학자인 키쓰 워드(Keith Ward: 1938 - )의 신념에 찬 비약(飛躍)이 영국의 물리학자 출신의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 - )이나 마이클 헬러(Michael Heller: 1936 - )와 같은 기독교의 물리학적 - 신학자인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고 지적한다.(507 페이지)



저자는 그러나 그 어떤 정신도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덧붙일 말은 양자역학과 불교, 양자역학과 기독교 사이의 접점을 모색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전자는 파동함수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실체를 공(空)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 수렴되는 반면 후자는 이렇게 절묘하고 놀랍도록 신비한 세상이 저절로 생겨날 리 없으니 창조주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논의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존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1911 - 2008)가 우주가 타려(他勵)진동이 아니라 자려(自勵) 진동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한다.(513 페이지)



폴 데이비스(Paul Davis: 1946 - )는 이에 목적 없는 목적을 이야기했다. 데이비스가 우주는 의미와 목적으로 가득하다는 말을 한 것을 감안하면 목적 없는 목적이란 그 자체로 생에 대한 가장 크고 놀라운 긍정이라 할 수 있다. 불교는 자기 인식적인 우주란 개념 외에 가지 초월적인 우주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원적인 영역 안에서 자기에 대해 지각하는 과정은 자기라고 하는 환영적 본성에 대해 깨닫고 초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521 페이지)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인 프랑크 윌첵(Frank Wilczek: 1951 - )은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란 질문에 무(無)란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523 페이지) ’양자역학과 불교‘를 존 폴킹혼의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와 맞비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양자역학과 불교‘는 수려하고 깊이 있고 인상적이라고 말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양자 물리학이 철학과 문학 이상으로 존재와 신, 시원(始原) 등에 대해 성찰하고 답을 제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앞선 위치에 있는 것이 ’양자역학과 불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도 뇌과학 책을 몇 권 읽었고 읽지 못한 몇 권을 가지고 있고 몇 권을 주문하려 하고 있다. 제프리 새티노버의 ‘퀀텀 브레인’은 어렵다. 박문호 박사의 ‘뇌, 생각의 출현’은 가끔 펴보며 리뷰를 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고가(58,000원)이지만 박문호 박사의 신간(2013년 4월 출간)인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을 살 날을 기다리고 있다. 승현준 박사의 ‘커넥톰, 뇌의 지도’(원제는 ‘Connectome: How the Brain's Wiring Makes Us Who We Are‘이다.)가 신간 소식에 올라왔다. ‘퀀텀 브레인’은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양자역학과 뇌과학을 통합한 책이다. 정확하게는 양자역학이라는 주제를 두뇌의 메커니즘과 연결시켜 풀이해낸 책이다. 그런 까닭에 ‘퀀텀 브레인’은 양자역학과 뇌과학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책이다. ‘퀀텀 브레인’의 역자는 양자역학에 친숙해질 수 있는 책으로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양자역학적 세계성’을 추천했다. 라마무르티 상카의 ‘Principles of Quantum Mechanics’와 폰 노이만의 ‘Mathematical Foundations of Quantum Mechanics’, 아서 바이저의 ‘Perspectives of Modern Physics’ , 파인만의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 강의’ 등도 함께 거론되었다.



‘커넥톰, 뇌의 지도’에 나오는 커넥톰(Connectome)이란 신경 연결망의 포괄적인 지도, 배선(配線) 도해(圖解) 정도의 말이다. 뇌 자체에 대한 관심 말고 나에게 ‘커넥톰, 뇌의 지도’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커넥톰 안에 치매, 뇌졸중, 파킨슨병,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의 해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뇌가 면역기능을 조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서유헌 교수의 ‘뇌의 비밀’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커넥톰은 유전자와 달리 재연결(Reconnection), 재가중(Reweighting), 재배선(Rewiring), 재생성(Regeneration) 등의 과정을 통해 평생에 걸쳐 변화한다고 한다. 연구에 의하면 뇌는 성장할 뿐 아니라 손상된 기능을 스스로 복원하기도 하고 개체 내부로부터의 요구나 환경에 적응해 간다. 이와 함께 브리태니커 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뇌의 발견’도 읽을 만하다. 잠들기 전 다음 날 읽을 책을 가방에 넣어 둔다. 어제 밤 나는 ‘양자역학과 불교’, 오길영 교수의 ‘이론과 이론 기계’를 골랐는데 아침에 ena님 블로그에서 ‘커넥톰, 뇌의 지도’에 대한 글을 읽고 ‘퀀텀 브레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의 역사 - 언젠가 어디선가 당신과 마주친 사랑
남미영 지음 / 김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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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들이 사랑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는 지적에 공감한다. 사랑이 가르침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여겨져 온 것은 性이 그런 것과 사정을 같이하는 듯 하다. 그래도 요즘 들어 성 교육이 실시돠는 것을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양상이 대체로 기능 위주로 흐르고 있음을 고려하면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사랑에 대한 것이든 성에 대한 것이든 기본은 심리 이해,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 등이어야 할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마음을 헤아리고 감지하는 데 서툴기 때문이고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기 쉽다.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오인하거나 사랑인 것을 사랑이 아니라 여기는 것이다.



한때 “사랑을 책으로 배웠습니다“란 문구가 유행했었다. 이는 실전(?)에 서툰 사람들을 희화화하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랑을 하려면 동서양의 고전들이나 명작들을 통해 사랑의 참 의미를, 기법이 아닌 정신을 배워야 함은 물론이다. 필요한 것은 사랑의 두 당사자가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지. 개인적으로는 지난 해 읽은 한 융 학파의 심리학자의 책으로부터 사랑 뿐 아니라 인간의 심리, 그리고 사회관계와 남녀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사점을 얻은 기억이 새롭다. 이 저자는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에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칠고 무자비한 인물로 나오는 히스클리프를, 여자들을 정신적 성숙으로 이끄는 아니무스의 화신으로 해석했다. 물론 이는 결과적인 해석이다. 히스클리프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남미영 박사. 문학과 독서학을 전공한 저자는 모든 책은 저자의 프리즘을 통해 읽어낸 세상이고 독서는 독자의 프리즘을 통해 책을 읽어내는 활동이라고 정의하며 나이가 드는 것은 저절로 되지만 아름답게 나이드는 것은 배워야 하듯 사랑의 열정은 저절로 생기지만 아름답게 사랑하는 법은 배워야 한다고 운(韻)을 뗀다. 고전 또는 명작은 사랑에 대한 각자 다른 규정 속에 설득력 있는 자신만의 안목과 사유의 결과를 담아 답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들이다. 남미영 박사의 ‘사랑의 역사’는 동서양의 서른 네 편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석이고 연주이다.



사랑에 특별하게 초점을 두지 않는 나도 가끔은 멋진 사랑 이야기를 읽고 싶은 때가 있다. 여기서 멋진 이야기라는 뜻은 인생과 사랑의 진실성을, 때로 비극성을, 그리고 페이소스를 공감하게 하는 책을 의미한다. ‘사랑의 역사’의 구성은 여섯 부로 나뉜다. 첫 사랑, 사랑과 열정, 사랑과 성장, 사랑과 이별, 사랑과 도덕, 사랑과 결혼 등.. 첫 사랑(part 1)에서 주목할 작품은 황순원의 ‘소나기‘,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 등이다. 사랑과 열정(part 2)에서 주목할 작품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등이고 사랑과 성장(part 3)에서는 뒤라스의 ’연인‘,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이 그렇다. 그리고 사랑과 이별(part 4)에서는 안나 가발다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가 그렇고 사랑과 도덕(part 5)에서는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등이 그렇다. 사랑과 결혼(part 6)에서는 보바르의 ’위기의 여자‘가 그렇다.



누군가는 첫 사랑의 연인이 잘 살면 배가 아프고 못 살면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한다. 이는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 이후 겪는 복잡한 심리를 잘 드러내는 말이다. 저자는 우리는 모두 그렇게 첫 사랑이라는 배를 타고 어른의 나라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같은 악보를 보고도 연주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향기의 음악이 흘러나오듯 독서도 읽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도 않고 그 흔한 키스신도 나오지 않는, 매우 정치적인 의도의 작품인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에서 사랑을 읽었다고 말한다.



사랑과 열정의 한 편인 제인 에어의 ’오만과 편견‘을 해설하는 자리에서 저자는 말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걸어가서 소식을 전하던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전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인륜지대사라는 결혼 시장의 변화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해설에서 저자는 과학자들은 사랑을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작용으로,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손 번식을 위한 욕망의 산물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결핍을 메워줄 반쪽을 찾는 과정으로 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실 이 서로 다른 해석들 모두 옳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해석들에는 나름의 일리가 있는 듯 하다. 사랑이 논리로 해명되는 것이 아니듯 그들의 해석 역시 논리 이상의 또는 논리 이전의 무엇을 찾는 시도의 산물일 것이다.



요즘 나는 ‘남녀관계의 사랑과 공격성’이란 책에 관심이 간다. 정신분석 이론으로 해명한 사랑론이 주의를 끌기 때문이다. 사랑은 광기의 일종이 아닐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드가 모랭이 인간을 광기의 존재라는 뜻의 호모 데멘스로 정의한 것에 자극을 받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랭은 인간을 울고, 웃고, 떠들고, 격정적이고, 불안정하고, 불안해 하고. 고뇌하고, 향락에 빠지고, 도취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분노하고, 사랑하는 존재, 상상 속에 몰입하는 존재, 죽음을 알면서도 당연시하지 못하는 존재, 신화와 주술을 만들어내는 존재, 영혼과 각종 신들을 빙자하는 존재, 환상과 공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착오와 방황에 묶인 존재,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광기의 존재로 보았다.



나의 이런 생각에 제동을 걸기라도 하는 듯 저자는 시와 사랑은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작가 정연희는 자신의 작품이 선생님의 이야기인가 허구인가란 물음에 ”내 이야기도 다 못 쓰는 판에 남의 이야기까지 어떻게 써요?“(본문 127 페이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소설은 자전적일 수 밖에 없음을 유추하게 한다. 저자는 정연희 작가의 사례가 뒤라스의 ‘연인’에 전형적으로 해당한다고 언급한다. 작가의 경험은 작가와 독자를 성장시키는 영양소임이 분명하다는 저자의 말 역시 체험과 자전적 요소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나는 쿤데라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의 ‘웃음과 망각의 책’, 불멸‘ 등의 소설, 그리고 ’소설의 기술’ 등의 작품론은 읽었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아직 읽지 못했다. 저자는 쿤데라를 존재에 대해 가치 있음 또는 없음의 관점이 아닌 무게로 접근한 작가로 정의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외과의사인 토마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그에게 데레사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데레사는 암담한 환경 속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며 늘 책을 끼고 다니는 여자이다. 데레사에게 책은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유일한 상징물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사랑보다 데레사에게 책이 가진 의미를 실감했다. 저자는 쿤데라가 비정상적 사랑, 저속한 세계의 흉측하기까지 한 사랑 속에서 더 없이 아름다운 사랑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랑을 하면 몸만 오는(만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민족, 지역, 기후, 정체성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로 시작해서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마는 사업도 없지만 사람들은 수시로 사랑에 빠진다. 쳇 베이커의 ‘I Fall In Love Too Easily'라는 곡처럼. 서머싯 모음의 ’인생의 베일‘ 해설을 통해 독자들은 비로소 두 가지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욕망의 명령에 따르는 생물학적인 사랑(보자마자 눈에서 불꽃이 튀고 육체의 환희에 탐닉하는 욕망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의 기쁨이 만들어주는 인격적 사랑(자존감의 기쁨을 알게 하는 사랑)이다.



저자는 스무 살 무렵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읽었을 때와 마흔 살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 다르게 다가온 느낌에 대해 말한다. 안나가 가정에 충실한 남편과 어린 자식을 두고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나 집을 나간 부도덕한 이야기에 부끄러웠지만 다시 읽었을 때는 안나가 불쌍해서 가슴이 아팠다고 말한다. 물론 안나와 브론스키의 목숨 걸고 한 베르테르식 사랑은 그들의 사랑을 단순한 불륜 이상의 의미로 회고하게 한다. 저자는 사랑이나 행복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의 기술이라 말한다. 나는 결혼을 사랑의 결실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저자는 모든 결혼은 성격과 욕망과 환경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정의한다. 이는 사랑을 하면 몸만이 아니라 국가, 민족, 지역, 기후, 정체성 등이 따라온다는 말과 차원이 같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러셀은 지적이나 정서적으로 서로 동지의식을 느끼며 취향으로 소통하는 우애 결혼이 이상적이라는 말을 했다. 모든 결혼은 성격과 욕망과 환경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한 편의 드라마라는 말과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는 ”기저 공간이 아니라 두 공간의 접점만이 존재하는 세계 안에서의 만남“을 다룬 ‘빠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란 영화이다.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정사(情事)가 자극적이면서 시사적인 ‘빠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순수하게 개인 공간만도, 완전히 공적 공간만도 아닌, 관계 속의 자신을 가능하게 하는 기저 공간에서의 만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그것은 애착과 광기의 그 무엇을 그려낸 영화가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는 애착의 형태로 상대에게 쏟는 모든 에너지의 총칭인 커섹시스(cathexis)를 이야기 했다. 저자는 커섹시스를 넘어서지 못한 감정은 사랑 이전 단계라고 설명한다. 자신을 성장시키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사랑이 아니라 애착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사랑을 질(質)이 아닌 양(量) 위주로 파악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사랑에 대해 진지하고 겸허하게 배우는 것이 아닐지? 그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스리는 것을 배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언제까지 계속될 사랑,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인생의 단면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우리 모두 때가 되면 사랑 이야기를 써보는 것이 어떨지?



 
 
 

 

요즘 나는 뇌과학과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 가운데서 뇌과학에 소홀하고 상대성 이론에는 다소 지루함을 느끼고 양자역학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적어도 과학 분야에서 언급한 세 분야는 내가 최종 의거(依據) 또는 (거창한지 모르겠지만) 귀의(歸依)해야 할 곳이다. 임계치를 넘어서면 양(量)은 질(質)로 바뀐다며 박문호 박사가 ‘뇌, 생각의 출현’에서 귀띔한 이야기에 집요(執拗)하게 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자연과학에 7, 인문과학에 3의 비중을 둔 채. 최근 나는 양자역학에 많은 관심과 지향을 보이고 있다. 오늘 ‘양자중력의 세 가지 길’을 주문했다.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면?’과 저울질 한 끝에 고른 책이다. ‘아인슈타인이 틀렸다면?’에서 눈에 띄는 목차는 ‘중력이 물리력이 아니라면’, ‘초대칭성이 존재한다면’, ‘반물질이 반중력을 느낀다면’, ‘힉스 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자를 볼 수 있다면’, ‘암흑 물질이 없다면’, ‘절대영도보다 낮은 온도가 가능하다면’ 등이다. 내가 책 구입을 하며 저울질을 하는 것은 워낙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분야도 다양하기 때문에 고르게 안배하지 않으면 낭패를 겪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난경(難境) 가운데에서도 균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주문한, 야구 속에 피타고라스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미분과 적분은 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해명한 김준효 변호사의 ‘야구 수학 스파크’가 도착도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내 구입이 기분에 좌우된다고도 할 수 있다. ‘실체에 이르는 길’의 저자인 로제 펜로즈의 ‘마음의 그림자’가 나왔다. 이 책의 목차 가운데에서는 ‘마음은 고전물리학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인가?’, ‘양자론과 두뇌’ 등이 눈에 띈다. 로쟈의 서재의 로쟈 이현우 교수는 이 책 출간 소식을 전하며 “욕심이 나는 책이긴 하지만, 동시에 욕심을 버려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고급 수준의 수학과 양자이론을 동원하고 있는지라 매우 '하드'한 책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달았다. ‘양자중력의 세 가지 길’에서는 ‘우주는 사물이 아니라 과정들이다’, ‘ 공간을 세는 방법’, ‘매듭,연결과 꼬임’, ‘공간의 소리는 끈이다’ 등의 목차가 관심을 끈다. 목차들만으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난이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이현우 교수의 말이 어려운 자연과학 책 읽기의 욕구를 자극한다. 고급 수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박석재 박사의 ‘우주를 즐기는 지름길’을 읽다가 난해한 수식의 홍수 탓에 접어둔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현우 교수의 말을 이해할 것이고 내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의 기이함과 난해함을 아는 사람 역시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