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도미니언의 인간 예수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인상적인 단어들 가운데 하나는 능력이다. 죄의식을 경험하는 능력(62 페이지), 우울 국면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71 페이지), 슬픔을 느낄 수 있는 능력(71 페이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71 페이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능력(84 페이지) 등등. 거기에 레브리(reverie)까지. 레브리는 상상과 상징의 능력이 작용하는 정신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餘談이지만 reverie는 가브리엘 포레의 reve 꿈을 꾼 후에에 나오는 꿈(reve)을 연상하게 한다. 주목할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나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은 긍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여지지만 죄의식을 경험하는 능력이나 우울 국면에 도달하는 능력 등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결론을 말하면 도미니언이 말하는 죄의식을 경험하는 능력은 신성을 지닌 것으로만 알려진 예수가 인간적 능력까지 갖추었음을 증거하는 의미를 지녔다. 이는 이 세상에 성육신해 왔다는 신은 실제로는 가상(假想)이나 환영(幻影)이라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 오류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제 남는 것은 우울 국면에 도달하는 능력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우울 국면에 도달하는 능력은 아동 정신분석의 대가인 멜라니 클라인에게서 유래했다. 클라인은 유아는 자신의 사랑과 증오가 모두 동일한 대상인 엄마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나서 그 상반되는 감정을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증오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고 자신이 증오로 엄마에게 끼쳤다고 상상되는 손해를 복구하려는 염려에 이를 때 우울 국면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우울, 슬픔, 분노 등은 건강한 감정이다.

 

 

레오나르도 콜레티의 명화로 보는 32 가지 물리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 능력이란 단어가 지닌 특별한 분위기를 느꼈다. 물리학자 콜레티는 물리학의 역사에서 실제로 모든 물리학자들이 막스 플랑크처럼 개종(改宗)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의 이론을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양자역학이 바로 이 플랑크의 흑체 복사 이론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감안하면 그의 포기 능력은 혁신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01214일 플랑크는 흑체 복사 이론을 발표했다. 흑체는 표면이 검은 물체가 아니라 외부의 빛을 모두 흡수해서 반사되는 빛이 거의 없는 물체를 말한다. 흑체는 열을 가하면 빛을 방출한다. 흥미로운 것은 흑체의 에너지 복사(輻射) 패턴(빛의 파장과 세기)이 오직 온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폭과만 관계되는 고전 역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진폭이 크면 에너지도 크고 작으면 에너지도 작다.)

 

 

문제는 파장이 짧으면 무한히 많은 에너지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플랑크는 이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흑체에 투입한 에너지가 유한하기에 무한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고전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포리아라는 의미이다. 플랑크는 대담한 가정을 했다. 즉 빛이 짧은 파장에서 정상파를 만들기 위해 높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면 그만큼 짧은 파장에서는 정상파가 형성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빛의 진동수가 클수록 에너지가 크다는 의미이고 빛의 에너지는 진동수가 주어지면 진동수에 플랑크 상수를 곱한 만큼의 에너지를 최소 단위로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빛이 입자처럼 덩어리 형태의 에너지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플랑크가 자신의 가설에 내포된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몇 년이 걸렸다. 그가 에너지의 최소 단위라고 부르는 데 그친 빛의 알갱이에 빛의 양자(量子)라는 이름을 붙여 양자역학의 시대를 연 것은 아인슈타인이다

 

 

잭 도미니언은 인간 예수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사역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그를 양육해야 할 임무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였다는 사실과 별도로 그녀가 이 일의 정확한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았는지의 여부와는 또 다른 문제였다고 말한다. 도미니언은 마리아가 예수의 실제적 현시(顯示)들 속에서 계속 경이감을 맛보았을 것이라 말한다.(120 페이지) 마리아의 경이감과 이해는 플랑크의 놀라움과 이해의 질을 연상하게 한다.

 

 

레오나르도 콜레티가 플랑크의 포기를 언급한 것은 카라바조(Caravaggio)바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aint Paul 또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회심을 뜻하는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를 설명하는 장에서였다. 잘 알다시피 바울의 회심으로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카라바조는 말에서 떨어진 바울에게서 빛이 발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이 빛은 바울을 말에서 떨어지게 한 빛과 어떤 관계일까? 그림에서 빛은 말에서도 발산된다. 그림은 빛만이 아니라 그 빛으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사람, 심지어는 당사자를 태운 말까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까? 플랑크의 빛, 바울을 말에서 떨어지게 한 빛, 그리고 바울과 말에서 반사되는 빛.. 빛의 천지 속에서 내가 갖는 궁금증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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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신간평가단은 자신의 의사가 반영된 책을 읽을 수 있어 매력적이다. 물론 선정되어야 한다. 이번 14기는 지난 기에 이어 연속으로 파트장을 맡았다. 내 의사와 무관한 것이지만 책임감 있게 선정하고 보고하고 평가했다. 벌써 끝이라니 당혹스럽고 아쉽다. 아쉬운 것은 제공되는 책을 더 읽을 수 없어서이고 당혹스러운 것은 세월의 빠름 때문이다. 늘 갖는 생각이지만 신간평가단은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다시 평가에 대해 말하자면 안배 때문에 손해를 본 분들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분들도 이해하시리라 생각한다.

 

 

이번 기에서는 반란의 도시, 투명사회,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다산 정약용 평전, 히틀러의 철학자들, 철학자와 하녀, 피파마피아, 독신의 오후, 뉴스의 시대, 대한민국 치킨전, 세 종교 이야기, 문학의 아토포스 등을 만났다. 내가 추천한 책으로 반란의 도시, 다산 정약용 평전, 문학의 아토포스 등이 선정되었다. 나쁘지 않은 결과이다. 아니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신간평가단이고 추천 도서이고 선정되는 도서이다. 나로서는 내가 원하지 않은 도서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았고 어느 면 책을 강제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신간평가단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다섯 권을 고르자면 1. 힘내라 브론토 사우루스, 2. 철학자와 하녀, 3. 세 종교 이야기, 4. 문학의 아토포스, 5. 반란의 도시 등이다. 다음 기 신간평가단 역시 뿌리칠 수 없는 매력으로 여겨진다. 어떨지 모르지만(신청한다고 선정되는 것이 아니니 김칫국물부터 마시는 것이 아니지 모르지만) 다음 기는 에세이 분야를 지원하고 싶다. 한번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문학 평론 부분이 따로 생기든지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등에 포함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없다고 보인다. 문학 평론 자체가 활발하게 나오는 분야의 책이 아니고 독자들의 지지를 그렇게 받지도 못한다.

 

 

굳이 따지자면 아니 어려운 부분이라 할 것은 문학의 아토포스의 경우 문학비평 또는 철학 에세이, 교양 철학 등으로 두루 걸쳐 분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내용이 좋은 책이기도 하지만 다른 관련 책들을 찾아보게 하는 책일 수 있고 의문을 많이 갖게 하는 책이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문학의 아토포스를 고른다. 이 책은 나에게 숭고(崇高)와 주이상스(jouissance)를 비교하게 하고 랑시에르의 책들을 찾아 읽게 한다. 그리고 다른 시인들은 물론 저자 자신의 시를 찾아 읽게 한다.

 

 

자주 갖는 생각이지만 리뷰의 목적은 무엇일까? 란 생각이 드는 것은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한 리뷰를 잘 쓰시는 분들의 경우 이제 리뷰보다 다른 목적 있는 글들을 쓰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리뷰를 900여편 이상을 쓰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든다. 내 리뷰는 풀 코스에 해당한다. 다른 말로 너무 길다는 것이다. 내 입장보다 저자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기세가 역력하다. 초기에 그랬다가 어느 정도 축적이 된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항상 갖는 고민이지만 너무 자주 쓴다는 낭패감이 만만치 않다. 글을 천천히 써 한 달에 몇 편 올리지 않는 분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소수 정예의 전형인 셈이다.

 

 

최근 의외의 거액을 주는 한 칼럼 사이트에 내 글이 게시(통과)된 이후 리뷰도 지금도 정성을 기울이지만 더 많이 더 깊은 정성을 기울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을 대하지는 못했지만 인연(因緣)이란 말을 떠올린다. 모두 건강하고 좋은 글들 많이 쓰셨으면 좋겠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시대에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며 책을 읽고 더욱 리뷰에까지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고통스런 쾌락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문학의 아토포스를 읽으며 한 생각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주이상스가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치열한 시대에 인문 관련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행복하다... 



 
 
 
인간 예수 - 심리학과 정신분석이 바라본 눈 영성치유 시리즈 3
잭 도미니언 지음, 염동철 옮김 / NUN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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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분류하기 어려운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이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잔혹한 내용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SF물로 분류된 것과 같은 혼란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묻는 광기의 역사의 어려운 문제제기 방식과 관계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분류와 합류라는 책에서 철학자 김상환, 박영선 교수가 말했듯 모든 분리를 넘어선 만남과 대화의 가능성일 수 있지만 학문들 사이에 분리를 가져오는 필연적 이유일 수 있다고 한 섬(정현종 시인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과 같은 의미가 내재된 것은 더욱 아니다.

 

 

최근 서른 두 편의 名畵들로부터 단서를 얻어 물리학 이야기를 펼쳐나간 한 물리학자의 책을 미술 책이 아닌 물리학 책으로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 비평의 관점으로 시인과 시들을 분석한 책에 대해서는 분류와 관련한 딜레마 같은 상황을 느낀 바 있다. 그렇다면 한 정신분석가가 예수의 생애를 성숙과 사랑의 관점으로 일관되게 해명한 책은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책의 제목은 인간 예수이고 지은이는 잭 도미니언이라는 정신과 의사이다. 제목만 보면 저자가 의도한 것이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키고 신적 요소를 외면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정신분석적 의미의 통합을 염두에 둔 책이다.

 

 

물론 분명한 것은 내가 교회가 이야기하는 예수의 공적 의미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역으로 정신분석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는 기존 신앙의 언어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신분석에 대한 신뢰에 의거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선택했다는 의미로 정신분석적 시각에 끌려 신앙 서적을 읽게 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정신분석에 대한 내 입장은 신뢰보다 배움에 더 비중이 두어져 있고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나는 정신분석의 이론으로 예수를 분석했을 뿐 기존의 정통 신앙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은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순리대로 이야기하자면 내가 정신분석의 이론과 그 적용 사례를 배웠다는 뜻이지만 이는 예수를 수용하는 한 새로운 사례를 경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정신분석을 신뢰하고 있지만 그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보내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았는지 저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실제적이건 아니건 무시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사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 개념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기독교를 닮은 데가 있다. 즉 기독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한 인간의 사례에서 비롯되어 전 인류의 면모를 수식하는 기제가 되었듯 죄에 물든 인류를 예수라는 단 한 존재의 성육신에 근거한 십자가 사건 및 부활로 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 예수’, 이 책은 제도적 교회를 지양(止揚)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指向)할 것을 주장하는 책이다. 저자는 7년에 걸쳐 정신분석을 받은 경력이 있는 정신과 의사로 예수의 내면을 신앙의 그리스도, 세상의 구세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 역사적 유대인이라는 배경에서 해석하는 데 공을 들인 유대인 출신의 카톨릭 모태 신앙자이다.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멜라니 클라인, 도날드 위니캇, 존 보울비, 에릭 에릭슨 등 정신분석 진영의 거장들의 이론에 의거해 예수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냈다는 데 있다.

 

 

정신분석 평론가 박지영 시인이 이야기 했듯 정신분석은 타자를 이해하는 학문이다. 상처를 드러내고 곤란하게 하는 분야가 아니라 그를 공감하고 이해함으로써 구원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학문인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지향점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면 결론이 난 것이라 하겠지만 의미 있는 것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고 많은 부분 결론보다는 바로 이 과정에서 배우고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정신분석 일반의 관점이지만 저자는 어린 시절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는 가장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분, 신성과 사랑을 합친 존재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후 2차 성징 이전에 잠복기가 오는데 어머니(여아의 경우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외부로 돌리면 방어기제들을 초래하게 된다고 정신분석은 말한다. 무의식적 억압, 부인(否認), 동일시의 반대인 투사(投射), 대체, 반동형성, 합리화, 승화 등이 그것들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특징은 인격을 유동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데 있다. 예수 역시 인격의 유동적인 면에 민감했다.(이런 식의 진술 즉 누구 누구는 무엇을 강조했다는 문장에 이어 예수 역시 그랬다는 내용이 시종한다고 보면 맞다.)

 

 

저자는 사랑은 충족되어야 할 갈망과 식욕을 채우려는 갈망으로 인식된다며 그것을 예수의 빈번한 식사(52어의 기적, 만찬, 떡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마지막 만찬 등)와 연결한다. 클라인은 사랑과 미움이 아기와 젖가슴 사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제때 젖을 먹지 못해 배고픔에 처하면 공격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예수가 사랑과 미움의 양태들에 동참했는데 그런 건강한 반응은 예수의 초기 육신의 부모와 나눈 경험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도날드 위니캇에 의거한 설명 부분에서 알 수 있듯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의 놀라운 감성은 아기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홀딩(holding: 신체적인 안아주기를 포함해 엄마가 유아에게 행하는 정서적, 신체적 돌봄)과 공감이 탁월하고 완벽했을 것이라 추측하게 한다.

 

 

위니캇은 엄마의 역할을 매우 중시했는데 여기에는 프로이트가 말한 삼각관계라는 성적(性的) 드라마 외에 아동의 심리적, 물리적 욕구가 엄마에 의해 충족되고 엄마는 다시 아버지에 의해 지지되는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진 측면이 있다. 물론 충분한 음식 섭취(클라인이 강조)와 유아의 성 및 신체 다루기(위니캇이 강조)가 전부는 아니다. 존 보울비가 강조했듯 양자와 다른 유대행동에 속하는 애착 행위가 있다. 에릭 에릭슨은 아기의 각각의 발전 단계가 인간의 기본적 제도와 특별한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심리학을 사회와 연결시켰다.

 

 

저자는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은 신학적으로는 신성(神性)의 표지, 인간적으로는 완전함의 표시임을 강조한다. 예수는 평화로웠고 민감한 공감 능력을 지녔다. 자비로운 정의 역시 지녔는데 이 모두가 어린 시절 부모(의 바람직한 양육 및 유대)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결론이라 할 부분은 예수의 생애는 그와 하늘 아버지의 관계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고 이 관계는 사랑의 삶에서 경험되었고 궁극적으로 그의 고난과 죽음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는 말이다.

 

 

예수가 강조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자신에게 하듯 하는 이웃 사랑이다. 저자는 사랑의 핵심에는 자신을 소유하는 과정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진정한 자신을 앞세우며 책임을 지는 태도를 말한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성장(成長)이고 예수의 전 생애는 사랑의 성장이며 그 나라는 그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는 성욕에 무지하지 않았고 성욕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척하지 않았지만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예수에게 나타난 것은 성욕의 성화(聖化) 즉 승화(昇華)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인간성을 충분히 드러낸 명백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예수의 고통 이래 우리의 고통을 예수의 고통과 연결시킬 수 있고 그래서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정신분석적 예수관은 전통적 구원 섭리적 시각, 민중신학적 관점, 포스트모던적 논의 등에 이어 굳이 나누자면 네 번째로 접한 시각이다. 이는 정통 신학의 관점에 어린 시절과 그로부터 이어지고 연결된 성인기 즉 전생애를 정신분석적으로 해명하는 시각을 덧붙인 것임을 알게 한다. ’인간 예수는 정신적으로 불행하고 폭력에 노출된 어린 시절로 인해 문제에 휩싸인 사람이 아닌 완벽하게 충만한 영적, 인간적 존재를 정신분석한 책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 완벽한 예를 우리는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이 묻게 하는 것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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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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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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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오정희 소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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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의 네 기사
복도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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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작가의 중편 워싱톤 광장평범하고 전망 없는 한 2류 악단의 연주자인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입니다. 혼잡한 지하도에서 낯익은 한 걸인 여자를 보게 된 주인공은 어떤 이중창에 의해 머릿속이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 이중창이란 워싱톤 광장(Washington Square)’이란 곡입니다. 주인공은 그녀가 어린 시절 자신과 함께 워싱톤 광장(Washington Square)’을 부르던 소녀라 생각하지만 기억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그녀와 부르던 이중창은 감히 행복했지만 그것은 아주 불안정한 행복, 정확하지 않은 환상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기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주인공은 야산에 천막을 치고 사는 그녀의 집에 들어가 무언가를 얻어 먹기까지 하는데 병색이 완연한 퀭한 눈으로 누워 있던 그녀의 아버지와 실성했다는 그녀의 엄마, 그리고 그녀와 함께 가본 거리에 대해 동네 아이들에게 목청 높여 말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에게서 멀리 도망하고 맙니다. 어린 그는 그녀가 다시는 교실에 나타나지 않기를 기구(祈求)하는 마음으로 여덟 살 생일 선물로 받은 하모니카를 선물합니다. 그 악기는 워싱톤 광장을 연습할 때 쓰던 하모니카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식구들을 따라 마을을 떠납니다.

 

 

그녀가 떠난 뒤 그 퇴락한 천막집의 낡은 판자 더미에서 하모니카를 발견한 주인공은 그녀에게 그것을 되돌려 주려 하지만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워싱톤 광장어디론가 다시 가야 하는데, 저 바쁘고 확신에 찬 귀가객들의 발걸음에 뒤섞여, 나도 서둘러 아무 노선의 기찻간 안으로 늦기 전에 뛰어 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점점 그들에게서 멀어지고만 있었다.“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주인공은 과연 그녀를 만나 어린 시절의 오해와 꿈에 대해 해명할 수 있고 슬프고 각질화된 그녀의 얼굴에 웃음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기약 없는 베케트의 고도처럼. ”언젠가 옛 친구가 보내준 약도에 그려진대로, Y시 근처, 그녀와 그녀 친구들이 빌렸다는 시골집을 향해 차를 몰 날이 올 것인가. 다음 주 혹은 다음 달쯤? 그러나, 어쩌면 이제는 그런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중편인 물방울 음악처럼 말입니다.(소설 앞 부분에 나오는 저 넓은 광장 한구석에/ 쓸쓸히 서 있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만나보고 싶네란 구절은 instrumental인 원곡에 작가가 붙인 임의의 가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