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살지만 풀도 꽃도 나무도 잘 모른다. 그래도 시를 좋아하기에 열심히 찾고 외우고 감상하려고 하지만 부족하다. 이유 없이(?) 가려움을 겪는 어머니를 위해 이것 저것 찾다가 개구리밥이 아토피에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검색을 하다가 그것이 부평초의 다른 이름이고 천남성과의 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천남성이란 말은 조용미 시인의 시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 언젠가 김명리 시인의 시에서 원추리, 용담, 매발톱을 들은 후 오랜만에 자연에 대해 강의를 들은 기분이다. 개구리밥을 어떻게 활용할지 난감해 하던 차에 그 풀을 원료로 기능성 화장품이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검색도 나름이어서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하면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식초를 검색했더니 주식 초보라는 글이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하니 ‘개구리밥의 겨울눈’이라는 아동용 그림책이 나온다. 그나저나 개구리밥은 오염으로 점점 없어져가는데...검색을 하다가 수경 식물들이 예쁘게 정리된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이런 점은 선물 같다. “일찍 맺힌 산당화 꽃망울을 보다가/ 신호등을 놓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고 한 조은 시인처럼 나는 부레옥잠, 睡蓮 등을 파는 화원 앞을 빨리 빠져 나가지 못한다. 꽃보다 더 좋을 때가 있는 수생식물들이다.



 
 
박규식 2014-07-27 14:43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한수철이라고 합니다. 아, 지금은 비록 이름이 이렇긴 하지만요...^^

여하튼, 저.. 흔적 님 글 팬입니다. 뭐, 눈에 문제가 있어 부분적으로 읽는 편이지만요. 아닌 게 아니라, 님 글이 사실 길잖아요?ㅎ

실은 엊그제 '어느 해 나는 복숭아 나무를 심었다'였던가요, 여하튼 그 비슷하게 시작하는 조은 시인의 시를 읽기도 했거니와

기분이 오늘따라 좀 멜빵꼴라리하기도 해서

댓글을 남겨봅니다. 좋게 받아주시기를요.^^


흠흠...

흔적 2014-07-27 17:04   URL
아. 네 반갑습니다. 조은 시인의 시를 읽으셨군요. 제 글의 팬이라니 반갑고 감사합니다... 그럼요. 좋게 받아 드리다마다요... 자주 뵙기 바랍니다...
 

플라톤의 ‘국가’ 7장에 동굴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에는 동굴에 갇힌 죄수들이 나온다. 그 죄수들은 불빛을 등진 상황에서 몸이 결박된 탓에 전방만을 볼 수 있어 동굴 벽에 비친 자신들의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다. 이 장에 이런 글이 나온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례대로 동료 시민들의 거처로 내려가서 어둠에 싸인 사물들을 보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오. 만일 익숙해지면 여러분은 그것들을 그곳에 있는 사람들보다 월등히 더 잘 보게 될 것이며, 모든 영상(映像)을 그것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지 식별할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여러분은 아름다움과 정의와 선에 관하여 진리를 봤기 때문이오.”(천병희 譯 ‘국가’ 394 페이지)

 

 

글라우콘을 청자(聽者)로 한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플라톤에게 철학자는 동굴에서 사슬을 끊고 동굴 밖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 선(善)의 이데아라는 진정한 빛(진리)을 본 사람이다. 그런데 언덕에서 진리를 보는 일이 저절로 동굴의 어둠을 밝히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오히려 빛으로 가득찬 진리를 보았기에 동굴의 허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김만권은 플라톤이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한다.(‘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65 페이지) 근거는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말은 결국 플라톤의 말이다.)이 철학자들에게 시민들을 이끌고 동굴을 벗어나 다시 태양빛을 보기 위해 언덕을 오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동거하여 동굴을 잘 경영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논의의 여지가 충분하지만 내게는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말이 연상된다. 그는 뇌를 두개골이라는 어두운 감옥에 갇혀 바깥 세상을 직접 볼 수 없는 죄인에 비유했다.(‘내 머릿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까’ 33 페이지) 그에 의하면 뇌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눈, 귀, 코, 혀 등의 감각 센서들을 통해서만 감지하고 그에 기반해 답을 찾는 기관이다. 뇌의 그런 특성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여럿이지만 내게는 신비 현상이 먼저 생각난다. 뇌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극이 동일할 때 그것을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고 한다.(‘유니버설 랭귀지’ 422 페이지) 저자(박문호 박사)에 의하면 염불이나 주문(呪文)을 외울 때나 참선을 할 때 또는 마라톤을 할 때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동일한 자극은 공간을 사라지게 하고(공간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물아일체(物我一體)에 이르게 하고 극단이 되면 (뇌의 주인으로 하여금) 몸이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저자는 “동일한 행위를 리드미컬하게 반복하는 것, 동일한 반복이 중요해요.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면 뇌는 정보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인식해요.”(422 페이지)라고 말하며 초월로 가려면 일단 자극을 차단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단순한 동작을 리드믹하게 반복합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성적인 행위입니다.“(412 페이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깨달음은 성적 행위라는 본능적 욕구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즉 ”인지적 내용이 내려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 하나 살펴보자. 우선 뇌가 두개골이라는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기에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은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가속계와 중력장의 동등원리를 생각하게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속계와 중력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즉 뇌가 두개골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어 동일한 자극을 무자극으로 받아들이듯(동일하게 가해지는 자극을 알아차리지 못하듯)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가속계와 중력장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현상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로켓은 분사(噴射)하지 않으면 일정 속도로 날아가는데 이때 로켓 내부는 무중력 상태이다. 그런데 분사를 시작하면 위로 추진력이 발생하고 그 안의 사람은 반대인 아래쪽으로 쏠리는 힘을 느낀다. 아인슈타인은 이 아래쪽으로 쏠리는 힘은 우리가 지구상에서 가만히 있을 때 느끼는 중력과 그 성질이 완전히 같다고 보았다.“(고중숙 지음 ’내 머리로 이해하는 E=mc²‘ 229 페이지) 이 동등원리는 특수상대성 이론의 질량 에너지 동등원리와는 다른 형태의 동등원리이다.

 

 

다음 성적 행위 부분. ”프로그레시브 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록 음악의 박자적 특징인 비트를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말하며 서우석 교수는 비트를 1) 혼돈된 음향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질서로서의 시간 단위, 2) 사회적 통치체계로서의 강력한 질서를 상징하는 것, 3) 성적 격렬성의 간접적 자극 등으로 설명한다.(’물결 높던 날들의 연가‘ 232 페이지) 비트는 규칙적 박자를 의미하고 정확하게는 주파수가 미세하게 다른 두 소리 사이의 간섭을 의미한다. 서우석 교수는 일반적으로 모든 음악은 시간적 반복 패턴을 갖지만 그 패턴이 항상 표면에 나타나야 할 필요는 없다며 록 음악에서의 비트는 지칠 줄 모르는 반복으로서 폭로되어 있으며 성적 흥분을 자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서우석 교수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로 명상성과, 비트로부터의 완전 해방을 든다. 이 부분은 해명이 필요하다. 서우석 교수가 비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한 팀으로 거론한 대표적 아티스트는 King Crimson이다. Kiing Crimson은 잘 알다시피 Epitaph가 들어 있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앨범과 Easy Money나 Larks' tongues in Aspic 등이 들어 있는 'Larks' Tongues in Aspic' 앨범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전자가 classical하다면 후자는 contemporary classical(현대 음악)하다 할 수 있다. 비트로부터의 해방이란 후자에 어울린다.

 

 

다음 신비 현상 이야기. 수행자들이 신비 현상을 보고 하는 경우가 종종 화제가 되곤 한다. 나의 경우 위빠사나 수행을 하던 동료들이 명상 중에 몸이 사라지는 느낌을 보고하는 것을 보며 신기해하고 부러워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희종 교수는 측두엽의 오른쪽 각진 주름 부위를 전기적으로 자극하면 유체 이탈 현상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명상중인 스님이나 기도중인 수녀 등에게서 물리적 공간 내에서 신체 존재감을 알게 하는 두정엽 위쪽 부분 활동이 현저히 낮다고 한다. 또한 임상적으로 죽음을 선고받았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가거나 긴 터널을 거쳐 빛을 보고 죽은 친척과 만난 경험을 보고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평소 외부로부터 받은 신호를 해석하던 두뇌가 죽음에 이르러 산소 결핍 등의 원인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생성된 두뇌의 내부 신호를 평소의 외부 신호로 해석한 결과이다.(’생명과학과 禪‘ 54, 55 페이지)

 

 

결론은 무엇일까? 두개골이라는 감옥이라는 말로부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생각할 수 있고, 동일한 자극을 무자극으로 인지하는 뇌의 오류로부터 신비현상과 함께 성(性) 행위라는 리드미컬하고 단순한 반복 행위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력장과 가속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가 하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뇌가 외부의 자극을 눈, 코, 귀, 혀 등을 통해 불완전하게 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이 뇌라는 필터에 의해 걸러져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뜻한다.

 

 

일체유심조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즉 서원(誓願)한 대로 또는 의지대로 모든 현상이 빚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가 뇌에 의해 왜곡된 채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이다. 뇌는 세상을 결코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며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등 우리의 요구가 아닌 자신들의 요구대로 살아간다. 뇌과학은 21세기의 마지막 미개척지라고 한다.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게 해줄 마법의 상자 같은 것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사실 제럴드 에덜먼 교수의 ‘뇌는 하늘보다 넓다’ 같은 책은 흥미와 의미를 동시에 선사하는 책이다. 박문호 박사가 말한 대로 뇌과학 용어 100개를 외우고 그림을 그려가며 기능을 외우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최두석.나희덕 엮음 / 비(도서출판b)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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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한 시여서, 정신의 긴 투쟁 끝에 살아남은 시여서 대표시로 선정했다는 시인, 너무 복잡한 속 그림을 보여주어서, 여러 겹이어서 세상에 미안하다는 시인, 단숨에 쓴 시를 대표시로 소개하는, 좋은 시란 아주 단숨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이고 시인이란 그것을 감격으로 받아들여 백지 위에 성실하게 기록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시인, 시를 힘들여 썼기에 오랫 동안 긴 호흡의 시를 쓰지 못한 찜찜함에서 놓여나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는 시인, 딱히 대표시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시인,

 

 

대표시는 시인 자신이 선정할 수 없는, 독자의 몫이지만 궁여지책으로 데뷔작 한 편을 소개한다는 시인, 시를 쓰는 마음은 편하고 느긋한 마음이 아니라 다급한 마음이고 상처받는 길이라 말하는 시인, 대표시 선정을 계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그리워할 시간이 이 지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 말하는 시인, 문명의 원형질 같은 것을, 본받을 만한 지혜나 삶의 방식을 보고 싶어 ‘인디오의 감자‘라는 시를 써 대표작으로 소개하는 시인,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는 마지막 부분을 지닌 시를 소개하며 아직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대표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시인,

 

 

회초리가 되어 유년의 종아리를 아프게 했고 또 생의 성찰을, 회한의 정을 이끈 팽나무에 대한 시를 소개하는 시인, 현실적으로는 독립적 인간이 되고 형이상학적으로는 관념의 실체적 점검을 해볼 수 있는 일이 될까 하는 고민으로 선택한 귀향, 귀농의 삶을 보여주는 시인, 전교조 참여로 해직이 되고 감옥에도 갔었던 처지를 담쟁이로부터 위로 받고 힘을 얻은 사연이 담긴 ’담쟁이‘란 시를 대표시로 소개하는 시인, 첫 번째 시집의 첫 페이지에 실린 시를 대표시로 소개하는 시인, 짧지만 납작납작, 꼬들꼬들, 글썽글썽이란 말들이 눈길을 끄는 인상적인 시(외할머니를 그리워 하는 시로 쪼글쪼글, 바들바들, 조각조각 등의 첩어疊語가 해설에 등장하는 시)를 소개하는 시인,

 

 

앉아 있음으로 세상을 온통 환하게 하는 패랭이꽃을 노래하는 시인(이 시인은 패랭이꽃을 보랏빛 설움으로 비유하는데 이는 보라색 눈물을 뒤집어 쓴 한 그루 꽃나무를 노래한 한 시인의 시를 연상하게 한다.), 마음의 절인 통도사 겨울 독수리를 소재로 한 시를 소개하는 시인, 적막이 내는 소리를 듣고 침묵 속의 어떤 말을 읽는 것이야말로 시의 진정한 묘미일 것이라 말하며, 그리고 시의 배아(胚芽)는 갑자기 섬광과 같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대상을 물고 늘어지는 끈덕진 질문(관찰) 끝에 오기도 한다고 말하며 새만금의 적막과 침묵을 노래한 시인,

 

 

”장자를 읽지 않아도 새들은 십만리쯤 치솟는다네/ 흰뺨 검둥오리가 떠메고 가는 것이 이 늪을 포함해서/ 반쯤은 내 영혼이리라“라는 구절이 마음을 끄는 ’흰뺨 검둥오리‘를 소개하는 시인, 즈므라고 발음하면 입을 꾹 다물고 묵상에 잠겨야 할 것 같았지만 금방 쓰지는 못한 ’즈므 마을‘을 소개한 시인(이 시인은 즈므 마을을 희망과 사랑과 내일이 없는 농촌의 황량함을 노래한 ’빈들‘의 연장선상으로 소개했다. 빈들은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에 수록된 시이다. 나는 이 시집을 시인이 겸직하는 기독교 목회자의 경전인 성경에서 비롯된 엄숙하고 선지자적인 시로만 이해했었다. 시인은 즈므 마을에서 본연의 마음 자리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며 그런 본연의 마음 자리를 발견할 때 거의 항상 시가 찾아오곤 했으니 자신의 시가 깃을 치는 보금자리는 어디든 즈므 마을이라 했다. 마음 자리란 말이 낯선 것은 아닌데 내가 이 시어를 읽은 것은 염명순 시인의 수국이 피는 곳’이라는 시에서였다.),

 

 

글을 쓸수록 명확하고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불투명해지고 이해 불가능한 그 어떤 세계, 끈질기게 다가서도 결코 다가설 수 없는 그 어떤 지향점을 발견할 뿐이며 그래서 언어를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는 모든 시인들은 궁극적으로 패배자라고 말하는 시인, 시를 칭얼댐이라 말하며 ‘물맛’이란 시를 소개하는 시인(시는 자유이지만 우리가 쓰는 시는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며 영원히 도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시인의 말은 시인은 궁극적으로 패배자라는 앞 시인의 문제의식과 같은 차원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디 그런 문제의식이 일부에 한하겠는가. 시인은 갈증 끝의 물맛에서 깨달은 이의 아무 거칠 것 없는 행보를 상상해 본다고 말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시장들 중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괴물이 아닌 우리들 마음 속에 깊숙이 남는 시장을 그리는 마음으로 시리아의 한 초라한 시장을 작품화한 시인, 습작 시절에 특히 카피나 표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말을 들려주는 시인(이 시인은 ‘불멸의 표절‘이라는 시를 소개하며 시가 불멸하는 존재이고 표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시의 조건이라면 표절하는 대신 표절할 수 없는 것 즉 영원한 오리지널리티를 카피하고 남들이 쉽사리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을 표절하자는 마음으로 쓴 시가 ’불멸의 표절‘이라 밝힌다. 시인이 말하는 표절할 수 없는 것들이란 바람, 장다리꽃, 아침 냄새, 앙다문 씨앗의 침묵, 푸른 잎맥의 숨소리, 백지白紙의 당신 몸, 미래라는 단어 등이다. 그렇다면 이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텍스트를 더 치밀하고 정교하게 읽겠다는 말이리라.),

 

 

시에서의 영감은 막연한 느낌이 아닌 단어나 구절, 문장으로 온다고 말하는 시인, 무엇을 대표시라고 해야 할지 몰라 등단작을 골랐다는 시인, 모든 시작(始作)은 고유한 필연성을 지니되 그에 대한 부정과 모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시인(이 시인은 ’뿌리로부터‘라는 시를 소개했다.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이란 표현이 눈길을 끈다. 이 시인은 자신의 대표시는 끝내 쓰이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시인은 ’뿌리로부터’는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네 번째 시집이 발간되어 잊을 수 없다는 시인(시집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로 아버지께 편지를 써 무덤 속에 넣었다는 이 시인은 시를 쓰면서 사는 것이 아버지가 그렇게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동구의 작은 밭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30대’라는 시를 들고 온 시인(”...30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고 떠나도, 한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르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30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 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갈수록 자신이 쓴 시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진다는 시인, 삶의 리듬과 시의 리듬이 일치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인, 성큼 먼저 가 있어도 끌어당겨서도 안 되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시라 말하는 시인, 시는 농업에 대한 여전한 간곡한 그리움의 형식이라는 시인, 더 사랑하는 사람이 혹은 더 열정적인 사람이 더 상처받을 수 밖에 없다는 영원한 인생의 불합리와 더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더 열정적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재능이고 축복일 수 있다는 논리의 또 다른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는 시인,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 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는 시를 들려주는 시인,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일찍 일어서는 언어가 시가 된다고 말하는, 오늘날 시집은 난독(難讀)이 아니라 밀독(密讀)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시인(이 시인은 시는 이제 해석이 아니라 해독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한다.)...등 다양하고 개성적인 시인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난 것은 시가 생겨나는 이러저러한 사연이고 알게 된 것은 단숨에 쓰여졌든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쓰여졌든 모든 시는 시인의 숙성된 사상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시가 대표시인가가 아니라 모든 시에 시인의 체험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와는 다른 이해의 폭을 제공하는 산문 형식의 해설 글이 친절하게 읽힌 한편으로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길을 막는 쐐기 같은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기획이 돋보이는 책이라는 말을 답으로 돌려주고 싶다. 



 
 
 

야구 중계를 즐겨 보는데 캐스터나 해설자들의 언어 습관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타격감이 좋다는 것‘이라 하지 않고 ’타격감이 좋다라는 것’이라 하는 사람들(거창하다), 진루하면이라고 하지 않고 루상에 나가면이라 말하는 사람들(루상이라는 말이 있다면 루하라는 말도 있어야 하니 어색하다. 같은 차원에서 사람들은 루상의 주자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주자들이라 하면 된다.) 상대 타자들을 쉽게 요리한다고 하는 사람들(투수가 상대 타자들을 요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팀 이름을 넣어 어느 팀 타자들을 쉽게 요리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

 

 

선발로서 여섯 번 선발 등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여섯 번 선발 등판이라고 하면 된다.), ‘허용하고 있는‘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허용한이라고 하면 좋다.), 방금 홈런을 치고 들어온 선수에 대해 홈런 쳤던 누구 누구를 환영하는 동료들이라 말하는 사람들(홈런 친이라고 말하면 좋다. 사람들은 쳤던이라고 해야 과거 시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친’이라고 해도 과거형을 표현하는 데 무리가 없다. 아니 더 간결하고 좋다.) 3루 베이스 코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동어반복이다. 3루 코치라고 하거나 꼭 베이스라는 말을 넣고 싶다면 third 베이스라고 하면 된다.)

 

 

만루에서 ’만루 홈런 치기를 바라는 누구 누구의 팬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만루에서 홈런을 치면 당연히 만루 홈런이다. 그냥 ‘홈런 치기를 바라는 누구 누구의 팬들’이라 하면 된다. 야구는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 있다. 선두 타자이거나 투아웃 상황일 경우 아무리 병살타를 치고 싶어도 칠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주자 없는 경우에 2점이나 3점, 4점 홈런을 치고 싶어도 칠 수 없다. 주자 상황에 맞는 홈런을 칠 수 있을 뿐이다.), 홈에서 홈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홈 플레이트에서 세이프라면 홈인은 너무 당연한 말이다. 홈에서 아웃, 세이프라고 하면 좋다.)

 

 

출루되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출루하면서라고 하면 좋다. 마찬가지 차원에서 ‘잘 맞고 있는’이라는 말은 ‘잘 치고 있는’이라고 고쳐야 한다.) 자신의 시즌 몇 호 홈런을 치는 누구 누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누구든 남의 홈런을 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홈런을 치므로 자신의라는 말은 필요 없다. 그리고 자신의라는 말은 뒤에 누구 누구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는 더욱 필요 없다.) 피홈런 허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동어반복이다.),

 

 

친 타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동어반복이다. 그리고 던진 타구나 투구한 타구는 없다.) 넥센, 광주에서 기아와대결 예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광주는 기아의 홈이니 광주라는 말이 나오면 기아와 대결하는 것은 당연하다. 광주에서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기아와 대결하는 것이 밝혀지니 맥이 빠진다. 기아의 홈에서 또는 기아와 원정에서라고 하면 좋다.) 혼자서 몇 타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타점은 혼자서 올린다. 이 경우 팀 타점의 전부를 또는 팀 타점의 대부분을 올린 것을 말하려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혼자서라는 말은 너무 비전문적인 말이다. 보도 중에 또는 마지막 부분에 팀 스코어를 말하니 ‘몇 타점을 올린 누구 누구’라고 말하면 자연히 그 선수가 팀 타점을 전부 또는 대부분 올린 사실이 밝혀진다. )

 

 

이는 조급함의 방증이기도 하다. 결승전에 오르면 당연히 우승이거나 준우승 또는 금메달이나 은메달인데 준우승 확보 또는 은메달 확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리고 확보라는 말은 퇴행하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있음을 의미하기에 무리한 표현이다. 그리고 아직도 원 스트라이크 스리 볼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 주자가 타구에 맞지 않기 위해 멈추자 ‘멈춰주는 센스’라고 말하는 사람들(무엇을 준다는 말인가. 다 자신이 아웃되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인데...) 그라운드 볼은 땅볼이라고 하고 플라이볼은 뜬 공이라고 하는 것에 흥미 또는 의문을 갖지 않는 사람들,

 

 

슬라이더라고 하지 않고 스라이더라고 말하는 사람들, 9 이닝당 볼넷 안 주기로 유명한 누구 누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볼넷 안 주기로 유명한 누구 누구라고 하고 9 이닝당 몇 개를 내준다는 식으로 말하면 좋다.)....어떤 때는 타격이 외야로 포물선을 그리고 어떤 때는 그라운드 볼이 되는지 등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같은 코스의 같은 볼을 맞이하더라도 미묘한 스윙 메커니즘의 차이에 의해 포물선 타구가 되기도 하고 그라운드 볼이 되기도 하는 이유를 밝히면 좋겠는데...이런 사람들은 예전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해설하기만 할 뿐이다.)

 

 

내가 왜 희생 플라이는 타율은 그대로인데 출루율은 떨어지고, 희생 번트는 타율이나 출루율이 모두 그대로 유지되는지 나름대로 추리를 해 답한 적이 있는데 어떤 시청자가 희생 플라이는 왜 타수에서 제외되고 득점이 될 경우 그라운드 볼은 타수에서 제외되지 않는지를 물었다. 유명 해설자가 그 사실을 전하며 별 뚜렷한 답을 하지 못했다. 설득력 있는 가설은 그라운드 볼은 병살의 위험이 있어서가 아닐까이다. 그러나 이 경우 만일 병살 처리되면 득점이 되어도 타자에게 타점 가산이 되지 않는 등 타자에게 불이익이 가해지기에 이중의 페널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병살 위험이 없는 투 아웃에서도 타수에서 제외되지 않으니 무리한 발상이다.

 

 

좀 더 전문적인 해설을 들었으면 좋겠다. 단 선수 출신이 심리나 상황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도움이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백승영 교수의 니체 관련 글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힘에의 의지를 설명하는 자리에서인데 힘에의 의지는 의지작용 즉 행위이자 작용일 뿐이라는 설명을 하며 예로 든 번개의 사례가 그것이다. 설명인 즉 번개는 구름, 먼지, 습기, 염분 등이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여 응축된 대기 중의 방전 현상인 번쩍이는 현상일 뿐인데 우리가 일상의 언어 습관에 의해 번개가 번쩍인다고 하는 것은 주어 - 술어 문법에서 연유된 의미론적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주어 - 술어 언어 습관은 늘 술어의 주체 역할을 하는 주어를 필요로 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 없을 경우에는 it이나 독일어로는 es 등의 가주어라도 만든다는 것이다.(‘처음 읽는 독일 현대 철학‘ 중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시한 미래 철학의 서곡, 관계론 참고)

 

 

이런 언어 습관에서 기인하는 오류는 김영민 교수가 지적한 내용을 통해 발견 가능하다. ’산책과 자본주의‘가 문제(?)의 책인데 이 책에서 說해진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원시인과 유아에게 특유한 술어적 사고이다. 그에 의하면 이는 술어 사이의 유사성을 주어 사이의 유사성으로 오인하는 인지 구조를 가리킨다. 가령 영적 신앙의 양심을 지킨다는 보수(保守)와 정치적 기득권을 지킨다는 보수는 둘 다 지킨다는 술어를 공유하지만 그 주어적 가치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김영민 교수는 보수가 이론의 부재를 채우는 정서적, 기득권적 고집으로 머물 경우 그 태도는 보수해야 할 주어적 가치를 혼동한다고 말한다.(’산책과 자본주의‘ 136 페이지)

 

 

백승영 교수가 말한 내용은 있지도 않은 실체를 상정하는 오류에 대한 논의라면 김영민 교수가 말한 내용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무조건 보수(保守)하려고 드는 오류에 대한 논의이다. 백승영 교수의 지적은 죽음을 극복하는 모범적 사례로 응용될 가치가 있고 김영민 교수의 지적은 기독교의 정치적 보수화에 대한 질타 차원에서 나온 것이지만 충분히 시사적(示唆的)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김영민 교수의 말이 정치권의 보수적 성향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국민적 관심사가 걸린 懸案 처리의 場에서 보이는 맹목적 감춤이라는 보수적 몸부림이 연출되는 것이 나는 늘 안타깝기도 하고 궁금했다. 즉 그들이 김영민 교수가 인용한 프로이트의 사례에서처럼 맹목적이어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가, 아니면 사악해서 즉 정말 감추고 덮어야 할 긴박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가 사이에서 답을 찾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애초에 특별법을 제정할 의도가 없는 사람들이 반대를 작정하고 나온 것이 아닌가,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든 전자라면 바보들의 행진이고 후자라면 삿된 망령의 행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어느 경우든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란 구절(누가복음 23장 34절)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바보들이라면 탈색의 수고는 필요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