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최두석.나희덕 엮음 / 비(도서출판b)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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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한 시여서, 정신의 긴 투쟁 끝에 살아남은 시여서 대표시로 선정했다는 시인, 너무 복잡한 속 그림을 보여주어서, 여러 겹이어서 세상에 미안하다는 시인, 단숨에 쓴 시를 대표시로 소개하는, 좋은 시란 아주 단숨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이고 시인이란 그것을 감격으로 받아들여 백지 위에 성실하게 기록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시인, 시를 힘들여 썼기에 오랫 동안 긴 호흡의 시를 쓰지 못한 찜찜함에서 놓여나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는 시인, 딱히 대표시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시인,

 

 

대표시는 시인 자신이 선정할 수 없는, 독자의 몫이지만 궁여지책으로 데뷔작 한 편을 소개한다는 시인, 시를 쓰는 마음은 편하고 느긋한 마음이 아니라 다급한 마음이고 상처받는 길이라 말하는 시인, 대표시 선정을 계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그리워할 시간이 이 지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 말하는 시인, 문명의 원형질 같은 것을, 본받을 만한 지혜나 삶의 방식을 보고 싶어 ‘인디오의 감자‘라는 시를 써 대표작으로 소개하는 시인,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는 마지막 부분을 지닌 시를 소개하며 아직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대표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시인,

 

 

회초리가 되어 유년의 종아리를 아프게 했고 또 생의 성찰을, 회한의 정을 이끈 팽나무에 대한 시를 소개하는 시인, 현실적으로는 독립적 인간이 되고 형이상학적으로는 관념의 실체적 점검을 해볼 수 있는 일이 될까 하는 고민으로 선택한 귀향, 귀농의 삶을 보여주는 시인, 전교조 참여로 해직이 되고 감옥에도 갔었던 처지를 담쟁이로부터 위로 받고 힘을 얻은 사연이 담긴 ’담쟁이‘란 시를 대표시로 소개하는 시인, 첫 번째 시집의 첫 페이지에 실린 시를 대표시로 소개하는 시인, 짧지만 납작납작, 꼬들꼬들, 글썽글썽이란 말들이 눈길을 끄는 인상적인 시(외할머니를 그리워 하는 시로 쪼글쪼글, 바들바들, 조각조각 등의 첩어疊語가 해설에 등장하는 시)를 소개하는 시인,

 

 

앉아 있음으로 세상을 온통 환하게 하는 패랭이꽃을 노래하는 시인(이 시인은 패랭이꽃을 보랏빛 설움으로 비유하는데 이는 보라색 눈물을 뒤집어 쓴 한 그루 꽃나무를 노래한 한 시인의 시를 연상하게 한다.), 마음의 절인 통도사 겨울 독수리를 소재로 한 시를 소개하는 시인, 적막이 내는 소리를 듣고 침묵 속의 어떤 말을 읽는 것이야말로 시의 진정한 묘미일 것이라 말하며, 그리고 시의 배아(胚芽)는 갑자기 섬광과 같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대상을 물고 늘어지는 끈덕진 질문(관찰) 끝에 오기도 한다고 말하며 새만금의 적막과 침묵을 노래한 시인,

 

 

”장자를 읽지 않아도 새들은 십만리쯤 치솟는다네/ 흰뺨 검둥오리가 떠메고 가는 것이 이 늪을 포함해서/ 반쯤은 내 영혼이리라“라는 구절이 마음을 끄는 ’흰뺨 검둥오리‘를 소개하는 시인, 즈므라고 발음하면 입을 꾹 다물고 묵상에 잠겨야 할 것 같았지만 금방 쓰지는 못한 ’즈므 마을‘을 소개한 시인(이 시인은 즈므 마을을 희망과 사랑과 내일이 없는 농촌의 황량함을 노래한 ’빈들‘의 연장선상으로 소개했다. 빈들은 시집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에 수록된 시이다. 나는 이 시집을 시인이 겸직하는 기독교 목회자의 경전인 성경에서 비롯된 엄숙하고 선지자적인 시로만 이해했었다. 시인은 즈므 마을에서 본연의 마음 자리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며 그런 본연의 마음 자리를 발견할 때 거의 항상 시가 찾아오곤 했으니 자신의 시가 깃을 치는 보금자리는 어디든 즈므 마을이라 했다. 마음 자리란 말이 낯선 것은 아닌데 내가 이 시어를 읽은 것은 염명순 시인의 수국이 피는 곳’이라는 시에서였다.),

 

 

글을 쓸수록 명확하고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불투명해지고 이해 불가능한 그 어떤 세계, 끈질기게 다가서도 결코 다가설 수 없는 그 어떤 지향점을 발견할 뿐이며 그래서 언어를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는 모든 시인들은 궁극적으로 패배자라고 말하는 시인, 시를 칭얼댐이라 말하며 ‘물맛’이란 시를 소개하는 시인(시는 자유이지만 우리가 쓰는 시는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며 영원히 도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시인의 말은 시인은 궁극적으로 패배자라는 앞 시인의 문제의식과 같은 차원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디 그런 문제의식이 일부에 한하겠는가. 시인은 갈증 끝의 물맛에서 깨달은 이의 아무 거칠 것 없는 행보를 상상해 본다고 말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시장들 중 거대한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괴물이 아닌 우리들 마음 속에 깊숙이 남는 시장을 그리는 마음으로 시리아의 한 초라한 시장을 작품화한 시인, 습작 시절에 특히 카피나 표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말을 들려주는 시인(이 시인은 ‘불멸의 표절‘이라는 시를 소개하며 시가 불멸하는 존재이고 표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시의 조건이라면 표절하는 대신 표절할 수 없는 것 즉 영원한 오리지널리티를 카피하고 남들이 쉽사리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을 표절하자는 마음으로 쓴 시가 ’불멸의 표절‘이라 밝힌다. 시인이 말하는 표절할 수 없는 것들이란 바람, 장다리꽃, 아침 냄새, 앙다문 씨앗의 침묵, 푸른 잎맥의 숨소리, 백지白紙의 당신 몸, 미래라는 단어 등이다. 그렇다면 이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텍스트를 더 치밀하고 정교하게 읽겠다는 말이리라.),

 

 

시에서의 영감은 막연한 느낌이 아닌 단어나 구절, 문장으로 온다고 말하는 시인, 무엇을 대표시라고 해야 할지 몰라 등단작을 골랐다는 시인, 모든 시작(始作)은 고유한 필연성을 지니되 그에 대한 부정과 모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시인(이 시인은 ’뿌리로부터‘라는 시를 소개했다.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이란 표현이 눈길을 끈다. 이 시인은 자신의 대표시는 끝내 쓰이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시인은 ’뿌리로부터’는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네 번째 시집이 발간되어 잊을 수 없다는 시인(시집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로 아버지께 편지를 써 무덤 속에 넣었다는 이 시인은 시를 쓰면서 사는 것이 아버지가 그렇게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동구의 작은 밭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30대’라는 시를 들고 온 시인(”...30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고 떠나도, 한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르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30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 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갈수록 자신이 쓴 시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진다는 시인, 삶의 리듬과 시의 리듬이 일치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인, 성큼 먼저 가 있어도 끌어당겨서도 안 되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시라 말하는 시인, 시는 농업에 대한 여전한 간곡한 그리움의 형식이라는 시인, 더 사랑하는 사람이 혹은 더 열정적인 사람이 더 상처받을 수 밖에 없다는 영원한 인생의 불합리와 더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더 열정적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재능이고 축복일 수 있다는 논리의 또 다른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는 시인,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 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는 시를 들려주는 시인,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일찍 일어서는 언어가 시가 된다고 말하는, 오늘날 시집은 난독(難讀)이 아니라 밀독(密讀)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시인(이 시인은 시는 이제 해석이 아니라 해독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한다.)...등 다양하고 개성적인 시인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난 것은 시가 생겨나는 이러저러한 사연이고 알게 된 것은 단숨에 쓰여졌든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쓰여졌든 모든 시는 시인의 숙성된 사상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시가 대표시인가가 아니라 모든 시에 시인의 체험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와는 다른 이해의 폭을 제공하는 산문 형식의 해설 글이 친절하게 읽힌 한편으로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길을 막는 쐐기 같은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기획이 돋보이는 책이라는 말을 답으로 돌려주고 싶다. 



 
 
 

야구 중계를 즐겨 보는데 캐스터나 해설자들의 언어 습관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타격감이 좋다는 것‘이라 하지 않고 ’타격감이 좋다라는 것’이라 하는 사람들(거창하다), 진루하면이라고 하지 않고 루상에 나가면이라 말하는 사람들(루상이라는 말이 있다면 루하라는 말도 있어야 하니 어색하다. 같은 차원에서 사람들은 루상의 주자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주자들이라 하면 된다.) 상대 타자들을 쉽게 요리한다고 하는 사람들(투수가 상대 타자들을 요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팀 이름을 넣어 어느 팀 타자들을 쉽게 요리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

 

 

선발로서 여섯 번 선발 등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여섯 번 선발 등판이라고 하면 된다.), ‘허용하고 있는‘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허용한이라고 하면 좋다.), 방금 홈런을 치고 들어온 선수에 대해 홈런 쳤던 누구 누구를 환영하는 동료들이라 말하는 사람들(홈런 친이라고 말하면 좋다. 사람들은 쳤던이라고 해야 과거 시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친’이라고 해도 과거형을 표현하는 데 무리가 없다. 아니 더 간결하고 좋다.) 3루 베이스 코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동어반복이다. 3루 코치라고 하거나 꼭 베이스라는 말을 넣고 싶다면 third 베이스라고 하면 된다.)

 

 

만루에서 ’만루 홈런 치기를 바라는 누구 누구의 팬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만루에서 홈런을 치면 당연히 만루 홈런이다. 그냥 ‘홈런 치기를 바라는 누구 누구의 팬들’이라 하면 된다. 야구는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 있다. 선두 타자이거나 투아웃 상황일 경우 아무리 병살타를 치고 싶어도 칠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주자 없는 경우에 2점이나 3점, 4점 홈런을 치고 싶어도 칠 수 없다. 주자 상황에 맞는 홈런을 칠 수 있을 뿐이다.), 홈에서 홈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홈 플레이트에서 세이프라면 홈인은 너무 당연한 말이다. 홈에서 아웃, 세이프라고 하면 좋다.)

 

 

출루되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출루하면서라고 하면 좋다. 마찬가지 차원에서 ‘잘 맞고 있는’이라는 말은 ‘잘 치고 있는’이라고 고쳐야 한다.) 자신의 시즌 몇 호 홈런을 치는 누구 누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누구든 남의 홈런을 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홈런을 치므로 자신의라는 말은 필요 없다. 그리고 자신의라는 말은 뒤에 누구 누구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는 더욱 필요 없다.) 피홈런 허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동어반복이다.),

 

 

친 타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동어반복이다. 그리고 던진 타구나 투구한 타구는 없다.) 넥센, 광주에서 기아와대결 예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광주는 기아의 홈이니 광주라는 말이 나오면 기아와 대결하는 것은 당연하다. 광주에서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기아와 대결하는 것이 밝혀지니 맥이 빠진다. 기아의 홈에서 또는 기아와 원정에서라고 하면 좋다.) 혼자서 몇 타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타점은 혼자서 올린다. 이 경우 팀 타점의 전부를 또는 팀 타점의 대부분을 올린 것을 말하려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혼자서라는 말은 너무 비전문적인 말이다. 보도 중에 또는 마지막 부분에 팀 스코어를 말하니 ‘몇 타점을 올린 누구 누구’라고 말하면 자연히 그 선수가 팀 타점을 전부 또는 대부분 올린 사실이 밝혀진다. )

 

 

이는 조급함의 방증이기도 하다. 결승전에 오르면 당연히 우승이거나 준우승 또는 금메달이나 은메달인데 준우승 확보 또는 은메달 확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리고 확보라는 말은 퇴행하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있음을 의미하기에 무리한 표현이다. 그리고 아직도 원 스트라이크 스리 볼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 주자가 타구에 맞지 않기 위해 멈추자 ‘멈춰주는 센스’라고 말하는 사람들(무엇을 준다는 말인가. 다 자신이 아웃되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인데...) 그라운드 볼은 땅볼이라고 하고 플라이볼은 뜬 공이라고 하는 것에 흥미 또는 의문을 갖지 않는 사람들,

 

 

슬라이더라고 하지 않고 스라이더라고 말하는 사람들, 9 이닝당 볼넷 안 주기로 유명한 누구 누구라고 말하는 사람들(볼넷 안 주기로 유명한 누구 누구라고 하고 9 이닝당 몇 개를 내준다는 식으로 말하면 좋다.)....어떤 때는 타격이 외야로 포물선을 그리고 어떤 때는 그라운드 볼이 되는지 등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같은 코스의 같은 볼을 맞이하더라도 미묘한 스윙 메커니즘의 차이에 의해 포물선 타구가 되기도 하고 그라운드 볼이 되기도 하는 이유를 밝히면 좋겠는데...이런 사람들은 예전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해설하기만 할 뿐이다.)

 

 

내가 왜 희생 플라이는 타율은 그대로인데 출루율은 떨어지고, 희생 번트는 타율이나 출루율이 모두 그대로 유지되는지 나름대로 추리를 해 답한 적이 있는데 어떤 시청자가 희생 플라이는 왜 타수에서 제외되고 득점이 될 경우 그라운드 볼은 타수에서 제외되지 않는지를 물었다. 유명 해설자가 그 사실을 전하며 별 뚜렷한 답을 하지 못했다. 설득력 있는 가설은 그라운드 볼은 병살의 위험이 있어서가 아닐까이다. 그러나 이 경우 만일 병살 처리되면 득점이 되어도 타자에게 타점 가산이 되지 않는 등 타자에게 불이익이 가해지기에 이중의 페널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병살 위험이 없는 투 아웃에서도 타수에서 제외되지 않으니 무리한 발상이다.

 

 

좀 더 전문적인 해설을 들었으면 좋겠다. 단 선수 출신이 심리나 상황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도움이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백승영 교수의 니체 관련 글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힘에의 의지를 설명하는 자리에서인데 힘에의 의지는 의지작용 즉 행위이자 작용일 뿐이라는 설명을 하며 예로 든 번개의 사례가 그것이다. 설명인 즉 번개는 구름, 먼지, 습기, 염분 등이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여 응축된 대기 중의 방전 현상인 번쩍이는 현상일 뿐인데 우리가 일상의 언어 습관에 의해 번개가 번쩍인다고 하는 것은 주어 - 술어 문법에서 연유된 의미론적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주어 - 술어 언어 습관은 늘 술어의 주체 역할을 하는 주어를 필요로 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 없을 경우에는 it이나 독일어로는 es 등의 가주어라도 만든다는 것이다.(‘처음 읽는 독일 현대 철학‘ 중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시한 미래 철학의 서곡, 관계론 참고)

 

 

이런 언어 습관에서 기인하는 오류는 김영민 교수가 지적한 내용을 통해 발견 가능하다. ’산책과 자본주의‘가 문제(?)의 책인데 이 책에서 說해진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원시인과 유아에게 특유한 술어적 사고이다. 그에 의하면 이는 술어 사이의 유사성을 주어 사이의 유사성으로 오인하는 인지 구조를 가리킨다. 가령 영적 신앙의 양심을 지킨다는 보수(保守)와 정치적 기득권을 지킨다는 보수는 둘 다 지킨다는 술어를 공유하지만 그 주어적 가치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김영민 교수는 보수가 이론의 부재를 채우는 정서적, 기득권적 고집으로 머물 경우 그 태도는 보수해야 할 주어적 가치를 혼동한다고 말한다.(’산책과 자본주의‘ 136 페이지)

 

 

백승영 교수가 말한 내용은 있지도 않은 실체를 상정하는 오류에 대한 논의라면 김영민 교수가 말한 내용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무조건 보수(保守)하려고 드는 오류에 대한 논의이다. 백승영 교수의 지적은 죽음을 극복하는 모범적 사례로 응용될 가치가 있고 김영민 교수의 지적은 기독교의 정치적 보수화에 대한 질타 차원에서 나온 것이지만 충분히 시사적(示唆的)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김영민 교수의 말이 정치권의 보수적 성향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국민적 관심사가 걸린 懸案 처리의 場에서 보이는 맹목적 감춤이라는 보수적 몸부림이 연출되는 것이 나는 늘 안타깝기도 하고 궁금했다. 즉 그들이 김영민 교수가 인용한 프로이트의 사례에서처럼 맹목적이어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가, 아니면 사악해서 즉 정말 감추고 덮어야 할 긴박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가 사이에서 답을 찾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애초에 특별법을 제정할 의도가 없는 사람들이 반대를 작정하고 나온 것이 아닌가,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든 전자라면 바보들의 행진이고 후자라면 삿된 망령의 행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어느 경우든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란 구절(누가복음 23장 34절)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바보들이라면 탈색의 수고는 필요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영민 교수의 저서(‘당신들의 기독교’)를 통해 알게 된 차정식 교수의 ‘시인들이 만난 하나님’이 나왔다. 이 책은 지난 2008년 나온 이레서원 刊 ‘한국 현대시와 신학의 풍경‘의 새 버전이다. 목차가 그대로인데 내용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이 책에 수록된 시인들은 백석, 김종삼, 김수영, 마종기, 김지하, 오규원, 남진우, 김정란, 최승호, 이성복, 권혁진, 황지우, 류시화, 고정희, 임동확, 정호승, 고진하, 배문성, 김기택, 기형도, 윤동주, 나희덕, 이문재, 황인숙, 박형준, 박성우, 송찬호, 문태준, 박남준, 장석남, 안도현 등이다. 현역 목회자이기도 한 고진하 시인, 기독교적 세계관과 어울리는 윤동주 시인 등이 눈에 띄는데 특별히 시적 감수성을 간직하기 위해 시 외의 다른 책들을 읽지 않는다는 문태준 시인의 시도 만나보고 싶다. 문태준 시인은 송찬호, 박남준 시인과 함께 가난과 적막, 그 신학적 미학이라는 제목하에 배치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시적 감수성 외의 다른 분야에 눈 돌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신(瀆神)의 신학적 역설이라는 제목하에 배치된 이성복, 권혁진 시인들도 흥미롭다. 요즘 나에게 시는 유배의 한을 시로 치유하고 승화시킨 다산 정약용 선생의 치유 시와 함께 떠오르는 개념이다. 다산은 지인들을 만나면 시를 짓게 했고 그들을 시인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했다고 한다. 나희덕 시인을 수식한 나무를 만나는 세 가지 방식이라는 제목은 ’어두워진다는 것‘에 실린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이란 시로 인한 제명(題名)이 아닐까 싶다. 이 시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나온다. 형틀로 쓰이던 회화나무,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워주는 느티나무... 백석 시인, 하면 갈매나무가 생각나듯 나희덕 시인, 하면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생각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를 통해 간직하게 된 목련의 이미지도 오롯하다. ’시인들이 만난 하나님‘은 나에게 낯설기만 한 존재에 대한 간접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한 방법을 배우는 자리가 될 것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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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부터 호네트까지 우리 눈으로 그린 철학 지도. 이 제목은 ‘처음 읽는 독일 현대 철학’의 부제이다. 이 책이 다룬 열 두 명의 철학자들은 오늘날 우리 현실과의 관계를 고려해 선정된 사상가들이다.

 

 

노동의 존재론과 칼 맑스의 혁명 사상이란 글에서 조정환은 이미지 게임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맑스가 누구였는가를 묻는 일은 지금 우리의 긴급한 과제라고 말한다. 맑스는 본원적 생명활동인 노동이 어떻게 자신에게 낯선(소외된) 노동으로 전화되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맑스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 생산자의 분리라는 상황은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을 폭력적으로 분리시켰던 투쟁의 역사를 거쳐 역사적으로 발생한 사태임을 밝혔다.

 

 

맑스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주목했다. 맑스에 의하면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다. 맑스는 계급투쟁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을 밝혔다. 잉여가치, 불변자본, 이윤율 하락 등이 주기적 공황을 낳는다는 것이 맑스의 생각이다. 맑스는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역사적 투쟁들을 패배와 실패의 연속으로 보았다. 조정환은 완전 고용, 총 고용 주장이 노동을 삶에 온갖 형식을 부여하는 존재론적 불로 보면서도 그것이 취하는 자본주의적 형태에 대해 날카롭고 근본적인 비판을 가한 맑스의 문제의식이 실종되도록 만들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무의식 혁명이란 글에서 김석은 무의식은 의식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같이 있으면서 동작한다고 말한다.(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콤플렉스는 양가적 감정을, 충동은 성과 관련해 신체적인 것도 포함하고 정신적인 것도 포함하는 경계 개념을, 욕망은 존재결여의 표현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메타심리학이라 불렀다.(심리학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심리학을 넘어서는 즉 무의식 탐구의 학문이라는 뜻) 메타심리학의 원리 중 하나는 경제성이다. 동일한 에너지를 이드와 자아가 함께 쓰기에 문제가 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신경증 환자이며 치료는 증상 제거가 아닌 완화에 목표가 있다. 김석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쾌락 원리는 장애물 없이 내부의 긴장을 직접 발산하면서 유기체가 만족을 추구하는 방식이라 말한다. 또한 자아도 본질적으로 이드의 욕구를 조절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말한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현실 원리와 쾌락 원리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자아는 이드의 또 다른 원리이다. 본능은 타고난 것이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동물적 행동 양상이지만 충동은 인간만의 고유한 행동이다. 특기할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단초가 된 사건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의 아들인 프로이트가 자기 엄마와 나이가 같은, (아버지의) 첫째 아내의 아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또는 경계심에서 비롯되었다.(68 페이지) 우리의 정신은 쾌락 원리와 현실 원리의 끊임 없는 갈등 속에서 타협점을 형성하면서 여러 가지 증상을 표현하는 역동적 존재이다. 프로이트 이론은 타나토스(죽음 충동)에 이르러 난해해지고 갈리게 된다. 이 개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사람이 멜라니 클라인과 자크 라캉이다.(정신분석은 진정한 나를 찾는 지적 여정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백승영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시한 미래 철학의 서곡, 관계론에서 니체가 제시한 관계론의 토대 개념은 힘에의 의지라고 말한다.(83 페이지) 니체는 세계를 힘에의 의지들이 구성해내는 관계 - 세계로 보았다. 필자는 언어에서 주어 - 술어 문법은 늘 술어의 주체 역할을 하는 주어를 필요로 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 없을 경우 가주어라도 만든다고 말한다.(86 페이지) 필자에 의하면 힘에의 의지의 운동은 외적 관계와 내적 관계, 작용과 반작용, 능동과 수동이 분리불가능하게 혼융되고 융합된 매우 독특한 운동이다. 동시적이고 쌍방향적인 상호 작용과 적에 대한 적극적 인정, 이것이 니체가 제시하는 관계론의 핵심이다.(91 페이지)

 

 

힘에의 의지에 입각한 관계론 철학을 세운 니체의 의도는 전통 형이상학적 이분법 및 일원론 철학에 대한 심층적 불만에서 기인한다.(95 페이지)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란 세계를 존재와 생성으로 이원화하고 전자에 후자에 대한 존재적, 인식적, 가치적 우위를 부여하는 사유 방식이다. 니체는 스피노자 철학에도 이원론 철학의 잔재가 있다고 보았다. 최상의 비유라면 불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을 상기하자. 니체에게 공동적 개인과 공동적 세계는 근대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한 니체의 바람이 현시된 것이다. 또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는 ‘이 사람을 보라’의 한 구절을 음미하자.

 

 

이남인은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에서 후설이 현상학을 정립할 때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후설은 철학의 위기가 학문 전체의 위기를 낳았고 학문 전체의 위기가 인간 삶 전체의 위기를 낳았다고 진단했다. 후설 현상학의 목표는 실증주의를 극복하고 참다운 철학을 정립함으로써 현대 학문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었다.(현상학은 그릇된 철학인 실증주의를 비판할 뿐 실증 과학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필자는 우리는 어떤 의식의 능력을 통해 우리 의식에 대해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필자는 우리의 의식을 경험할 수 있는 내적 지각의 능력이라는 고유한 의식의 능력을 이야기한다.(현상학은 외적 지각이 아닌 내적 지각에 관한 학문이다.)

 

 

필자는 내적 지각의 경우 내가 나의 기쁨에 대한 나의 의식이 틀릴 수 없다고 말한다.(124 페이지) 그런데 내 감정이 맞는가 아닌가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이 바른가일 것이다.(감정은 인식에 기반한다.) 가령 사건이나 행동에 대해 해석을 잘못할 경우 잘못된 느낌이나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닌가. 또한 우리는 애매한 감정 즉 확정지을 수 없는 감정 또한 겪곤 한다. 이 경우 정확하다, 잘 안다는 의미는 공허하다.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을 이야기한다. 모든 의식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 지향성이 모든 의식을 의식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본질이다.(126 페이지) 의식과 대상 중 우선적인 것은 의식이라는 것이 현상학의 입장이다. 한편 초월론적 현상학은 경험 세계가 아닌 의미로서의 세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의미로서의 세계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세계의식을 통해 구성된다. 세계의식과 의미로서의 세계는 끊임 없이 변화한다. 필자는 의미로서의 대상과 세계를 창조하는 초월론적 주관 즉 창조적인 주관을 이야기한다.

 

 

한형식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의 변증법에서 로자를, 혁명을 주객관적 조건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본 사람으로 보아야지 경제결정론자나 자유주의적 의지의 사상가로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139 페이지) 로자는 철학적 관점에서 수정주의자들이 비변증법적 접근을 했다고 판단했다. 수정주의자인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가 현실에 걸맞지 않은 이론이 된 책임이 변증법적 방법에 있다고 보았다. 로자가 보기에 수정주의자들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만을 강조했는데 그것이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혁명 자체를 포기했다.(수정주의는 제국주의 찬성 논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레닌과 로자의 차이도 중요하다. 레닌은 노동자 계급의 의식화와 실천으로의 동원이 노동자 계급의 바깥 즉 선진적 분자들의 의식적 지도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로자는 전위나 당의 지도와 반대되는 대중 스스로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강조했다.(149, 150 페이지) 하지만 로자는 대중이 바로 어떤 지도도 필요 없을 정도로 혁명적이 되고 혁명을 완수할 역량을 갖출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로자는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지고 주관적 조건도 성숙된 뒤에 단 한 번의 돌발적인 시도로 성공하는 혁명은 현실에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대중은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 되어간다) 로자는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는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근본적인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157 페이지)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의 소리에 귀기울이다에서 박찬국은 사람들이 불안을 하나의 주관적 기분에 불과한 것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하이데거는 근본 기분으로 부르며 다른 기분들과 구별했다고 말한다.(168 페이지) 하이데거는 좁은 이해관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돌파하면서 존재의 열린 장으로 진입하는 사건을, 우리가 근본 기분에 의해 엄습되는 것과 함께 그것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인수하는 사건이라고 보았다.(173 페이지) 하이데거는 존재의 열린 장에 진입하여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와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인간을 시인이라 불렀다.(176 페이지)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 문명이 인간으로 하여금 시인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기술인으로 전락하게 했다고 보고 우리에게 시인으로서 지상에서 거주할 것을 촉구했다.(하이데거가 말한 시인이란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와 아름다움에 잘 감응하는 사람이다.)

 

 

필자는 우리가 기술적인 대상들에 대한 집착과 기술적 지배 의지를 온전히 버릴 때 불안이라는 기분은 경이라는 기분으로 전환하면서 그 동안 우리의 기술적인 지배 의지에 대해서 자신을 은닉하고 있었던 존재를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183 페이지) 그리고 하이데거는 사후 영혼의 존재 여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을 분석하는 현상학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183 페이지) 하이데거는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경험에서 죽음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지 분석했을 뿐이다. 초기 하이데거는 불안을 시대를 불문한 채 분석했고 후기 하이데거는 역사적으로 분석했다.(기술시대에 초점을 두고)

 

 

심혜련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몰락 이후의 아우라에서 아우라는 몰락, 상실, 붕괴 등과 연결되어 논의되는 개념이라 설명한다.(195 페이지) 벤야민에 의하면 아우라는 없어야 하는 것, 몰락해야 바람직한 것이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지금 가까이 있지만 사실은 멀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았다. 필자에 의하면 늘 현재성을 가진 벤야민 논의의 한 가운데에는 늘 아우라란 무엇이며 아우라의 몰락이란 무엇인가, 하는 논쟁과 해석이 있었다. 이는 벤야민이 아우라라는 개념을 매우 시적으로 또는 모순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저작을 통해 알 수 있는 아우라에 대한 반복적이고도 동일한 서술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지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 현상이라는 말이다.(201 페이지)

 

 

벤야민은 예술적 작품에 대한 거리감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원작의 진품성을 특성으로 설명한다.(예술작품은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이라는 물리적인 특징을 토대로 아우라는 형성한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의 가치와 기능을 무엇보다도 제의적인 것과 관련해 파악했다.(204 페이지) 제의적 가치를 가지는 예술작품들에서 중요한 것은 전시가 아닌 존재한다는 것 자체이다. 예술 작품의 아우라는 제의적 기능 및 가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아우라는 주체의 경험이나 심미적 경험이기도 하다. 나에게 늘 멀리 있다고 생각한 물건이나 사람을 가까이서 접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떨림과 흥분이 아우라적 경험이다.(예술 작품은 기본적으로 멀리 있는 것이다.)

 

 

필자는 화폐를 대신하는 고가의 그림들이 가지고 있는 게 아우라라면 몰락하는 게 좋을 것이라 말한다.(205 페이지) 결국 아우라는 예술 작품이 갖는 물질적 특징과 이로 인한 심미적 경험이 교차하면서 형성하는 직물 같은 것이다.(206 페이지) 그런데 벤야민은 아우라를 시선으로서의 의미로 이야기하기도 한다.(Blick um Blick) 이때 중요한 것은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 등이 아니다.(207 페이지) 벤야민이 이렇듯 다양하게 아우라를 논의하는 것은 아우라 자체를 논의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몰락을 이야기하면서 몰락했다는 그 아우라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가 그 이전에 행해졌던 복제와 다르다고 했다. 그것은 복제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를 복재로 야기된 예술 작품의 수용에서의 변화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본성을 해치지 않는 기술적 복제가 왜 아우라의 몰락을 초래하는가이다. 벤야민은 수용자의 요구와 편의에 따라 예술 작품은 본래의 장소에서 떠나 그 어떤 자리에도 놓일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예술 작품은 더 이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210 페이지) 제의적 가치에서 전시 가치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접근 가능성이 보장된 그리고 전시 가치를 가진 예술 작품, 이것이 바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의 특징이며 이를 벤야민은 아우라의 몰락이라 본 것이다.(212 페이지) 벤야민이 아우라의 몰락을 이야기했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봤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214 페이지) 또한 논쟁의 핵심이 아우라의 몰락 여부에 그쳐서는 안 되고 오히려 디지털 매체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221 페이지)

 

 

부정당하면서 전진하는 사유의 찬란함, 테오도르 아도르노에서 이순예는 한국에서 아도르노가 미학 영역에서 연구되었다는 말을 한다. 필자는 아도르노의 사상이 예술론에서 과학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한다고 강조한다.(231 페이지) 필자가 말했듯 자유의지는 과학적 자연의 결정력과 충돌하는 생래적 모순을 야기한다. 필자는 아도르노 사상이 등장한 배경에 사회혁명을 통과하지 않고 시민사회를 구성하여 19 세기를 보낸 뒤 20 세기에 파시즘을 맞은 독일 사회의 특수성이 있다고 말한다.(231 페이지) 아도르노는 폭력 비판에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다.(234 페이지) 필자에 의하면 칸트라는 근대의 진원지에서 아도르노가 본 것은 비판정신이다. 필자는 전통을 계승하면서 자신이 처한 객관적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는 점에서 맑스와 아도르노는 관념론자라고 정의한다. 필자에 의하면 철학과 예술을 모두 섭렵했다는 견지에서 아도르노야말로 18 세기에 시작된 미학적 예술 체계를 제대로 발전시킨 사상가이다.(248 페이지)

 

 

김선욱은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를 넘어 정치의 길을 보다에서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규정한 데 비해 아렌트는 정치에 참여하는 인간의 특징을 새로운 시작, 탄생성으로 보았다고 말한다.(261 페이지) 아렌트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전체주의로 몰고 가며 그 속에서 어떻게 테러를 작동시키는지 분석했다.(267 페이지)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 공적 문제를 다루는 부분을 특징해 정치적인 것이라 부르고, 경제와 같은 것 즉 본래 사적인 것이었지만 공적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을 사회적인 것이라 부른다.(269 페이지) 필자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보편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고, 보편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면서도 구체적인 차원을 절대로 방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렌트 정치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말한다.(278 페이지)

 

 

실현의 진리를 찾아 나선 한스 가다머에서 박남희는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이란 책에서 진리는 실체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달리 이해되며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이해의 운동으로 보았다고 말한다.(289 페이지)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한 작업은 도구적 이성에 의한 동일성의 논리에 따른 도그마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사유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철학 안으로 긴 여정을 떠난 것이다.(293 페이지) 가다머가 이성이 아닌 이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근대의 도구적 이성과의 구별을 하기 위해서이다. 가다머가 말하는 이성은 무엇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융합하면서 나를 있게 하는 전체성의 지평을 의미한다.

 

 

가다머는 진리란 무엇이 아닌 늘 달리 유동하는 이해의 운동 자체로 이해의 운동은 실체적이지도 실재하지도 않는다고 역설했다.(295 페이지) 가다머는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의 신을 이야기하듯 이해와 적용, 해석은 모두 하나의 다른 측면이라 보았다. 가다머는 이해와 적용과 해석은 앎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생성해내는 삶의 일이라 보았다.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는 무엇을 알고 모르는 차원이 아닌 나의 전체가 세계와 만나는 전인적인 행위이다.(297 페이지)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 소통 행위 이론과 생활세계 식민화에서 김원식은 하버마스가 홀로 사유하는 데카르트적 ‘나’가 아니라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우리‘가 논의의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이야기한다.(311, 312 페이지) 하버마스는 언어적이면서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에게는 타자를 도구화하지 않고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의사소통 행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고 보았다.

 

 

악셀 호네트의 인정 이론과 병리적 사회 비판에서 문성훈은 호네트가 도구적 합리성을 통해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잠식이라는 고차원적 비판의식이 아니라 인정과 무시 개념을 통해 사회적으로 억압 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울분‘을 사회적 저항과 연결시키려 했다고 말한다.(346 페이지) 필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를 고찰해 보면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인정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사회적 무시 때문에 자기 실현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365 페이지) 필자는 인정 투쟁은 새로운 인정 질서를 형성함으로써 모든 시회 구성원이 동등한 존재로서 서로 공존하고 화해할 뿐 아니라 각자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건강한 사회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한다.(36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