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未生)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신조어인가 싶어 검색해 보니 기성 단어이다.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는 정확한 풀이가 아니다. 사전이 말하는 미생(未生)은 양의 해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 관심을 먼저 끄는 부분은 스토리가 아니라 이름이다. 관련 사이트에서는 친절하게 미생의 장르를 만화라고 설명해 놓았다. 한쪽에서는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라는 장르를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라이트 노벨(light novel)이라는 장르를 말하는 어지러움 속에서 미생을 굳이 만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혼란에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일본어인 망가(まんが)를 써서 망가 장르라 해도 이상하니 그냥 미생이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이끼》의 작가 윤태호가 선보이는 대한민국 직장인을 위한 다음 웹툰’이라는 소개 글이 아, 그렇구나란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web toon이기에 이렇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란 생각도 가능하지만 어떻든 작가의 내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생은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던 주인공 '장그레'가 프로 입문을 하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겪는 삶을 스토리화한 작품이다. 한 신문에 “‘미생’인 듯, ‘미생’ 아닌, ‘미생’ 같은 배우“라는 글(2014년 11월 13일 경향신문)이 올라 미생의 신드롬적 측면을 실감하게 하고 있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전 7권(으로 완결되는 것인지 모르지만)으로 구성된 ‘미생’ 7권에 ‘사회라는 거대한 바둑판에서 성실히 돌을 놓아가는 여정!’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을 보면 큰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공감 코드 때문에 인기를 끌고 리얼하게 그렸기 때문에 선풍을 일으킨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미생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미병(未病)과 비교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미병은 구체적으로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이상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미생은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라는 뜻을 담고 있어 가치존재론적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면도 지니고 있다. 플라톤의 주요 사상 중 하나인 가치존재론은 존재가 형상(形相)을 부여받은 정도 또는 모방한 정도에 따라 존재 가치를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로 분류 판단하는 사상이다. 사실 가치와 존재를 별개로 생각하지 않는 사상은 우리에게 낯설다. 우리는 대안(代案) 즉 있거나 없거나의 사유를 하는 데 익숙하지만 플라톤은 그렇지 않고 정도(程度)의 사유를 펼쳐 덜 존재한다, 더 존재한다는 말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레가 후에 어떤 여정을 밟을지 모르지만 나는 작가가 정도의 사유를 펼쳐 더 나은 존재와 그 사이에 다양한 정도 차이를 두는 설정을 할지, 대안의 사유를 펼쳐 성공한 존재 즉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살아 있는 자를 그릴지 궁금하다. 이 경우 그 존재를 미생이 아닌 생(生)이라 할지, 우생(優生)이라 할지,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도 궁금하다. 물론 생이란 이름은 이상하고 우생이란 이름은 석연치 않다.



아울러 이 사변(思辨)과 함께 생각해 볼 문제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단어이다. 중국 고전에 출처를 둔 미생(尾生)의 맹목적 믿음을 말하는 이 성어(成語)는 미생이 결혼할 사람과 약속한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 죽은 고사에서 유래했다. 미생이 비가 쏟아져 위험한 가운데에서도 약속 장소로 정한 다리에서 기다린 것은 그녀가 찾아왔을 때 자신이 약속 장소에 없으면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리석고 맹목적인 믿음에 초점을 두고 미생을 거론하지만 미생 같다는 평을 들어야 할 사람은 그런 맹목적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평가를 들어야 할 사람들(세력)은 따로 있다. 권력과 탐욕에 중독되어, 뻔뻔하기 때문에, 근시안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고 결국 다음 세대에까지 엄청난 부담을 떠넘기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미생(未生)도 아니고 미생(尾生)도 아닌 미생(迷生)들일 뿐이다.



 
 
 
모나리자 훔치기 -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What's Up 7
다리안 리더 지음, 박소현 옮김 / 새물결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나리자 훔치기’는 라캉 정신분석학에 근거해 미술과 관련한 이슈들을 새롭게 풀어낸 정신분석학자 다리안 리더(Darian Leader)의 책이다.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원제: Why Do Women Write More Letters Than they Post? - 이 책에서는 저자가 대리언 리더로 기록되어 있다.)’로 유명한 리더는 고전문학을 공부한 문학도이기도 하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빈첸조 페루지아(Vincenzo Peruggia: 1881 - 1925)의 미술품(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절도(竊盜)로 인한 결과들을 정신분석학 이론으로 풀어낸 ‘모나리자 훔치기’는 거침없는 언어 구사에 실린 리더 특유의 서사적 상상력이 빛나는 책이다.



페루지아가 ‘모나리자’를 절도한 날은 1911년 8월 21일이었다. 후일 그는 그 그림이 자신에게 미소짓는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리더는 대부분의 물건은 잃어버리고 나야 더 관심을 받게 되며 우리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진가를 깨닫는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환원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정신분석은 미술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는 방식을 상상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우리의 시선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역동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처음부터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보여진다는 것이다.



저자가 환기시키는 것은 시선의 역설이라 할 이론이다. 우리는 각자의 사회적 상황에 필요한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를 연기할 때 훨씬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망막이 광선이 수렴되어 눈 속에 대상의 상(象)이 그려지는 장소가 되었듯 일부 철학자들에게 정신은 외부 세계를 향해 뚫려 있는 작은 구멍(조리개)을 통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암흑의 장 즉 카메라 옵스큐라와 동일시되었다. 우리가 대상이 아닌 ‘대상의 상‘을 보며 이 상은 빛의 수학적 결과물임을 지적하는 저자는 “인간은 정말 상을 포획하는 장치일까?“라고 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초기 라캉의 흥미를 끈 것은 보는 사람과 시각적 이미지 사이의 비대칭성이었다. 이때의 비대칭성이란 우리가 포착하려 하지만 각기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밀면서 저항하는 이미지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저자는 이미지에 빨려들어가는 인간의 성향으로 인해 소외가 야기된다고 말한다. 이미지가 우리 정체성의 분열이나 불일치를 대가로 해 신체적 통합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위치 속으로 완벽하게 들어갈 수 없듯 거울 이미지가 있는 위치 속에 완벽하게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인간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인간을 상을 포획하는 장치가 아닌 영원히 상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로 정의한다. 저자는 실연 후 패션 스타일이나 머리 모양을 바꾸는 사람들을 거론하며 그것이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혐오(에서 도출된 결과)라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모나리자를 훔친 도둑이 하나의 메시지를 던졌다고 말한다. 미술 세계에 다가가는 일이 유리판에 반사된 신체의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오염되었다면 그냥 허영심을 지키며 예술 작품 따위는 없이 지내는 쪽이 더 나으리라는 것이다. 라캉은 인간은 이미지로부터의 상상적 포획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는데 그것은 주체가 스크린 기능(차단, 은폐 기능)을 분별해 그 기능을 가지고 유희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인간은 이미지 너머에 응시가 존재한다는 듯 가면놀이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다른 사람이나 어떤 시선을 뜻하는 응시는 불안이나 공포를 자아낸다.) 저자에 의하면 정신병자는 누군가에게 바라보이거나 염탐당한다고 확신하는데 이런 점은 잠재적인 수준에서 우리 모두에게서 일어난다. 저자는 공포의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 불교도 존경과 애정과 함께 신격화 과정에 존재하는 탱화에 공포를 담는 예외적인 작업에 대해 설명한다. 라캉은 몇몇 경우 시각 예술은 사악한 눈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무장해제 시키기 위한 스크린으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Zeuksis)‘와 ’파라시오스(Parrasjos)‘의 이야기를 전하며 이는 예술적 이미지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유혹하려는 고유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제욱시스가 포도를 너무 리얼하게 그려 새들이 몰려들게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 자신의 걸작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걷어보라고 한다. 이 순간 제욱시스는 베일 자체가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따라서 긴장은 이미지와 현실 사이가 아닌 타자의 시선과 화가 사이에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긴장이란 타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지만 타자를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기 위한 것인 데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저자는 그림을 그리려면 범행을 저지르는 데 필요한 만큼의 교활함이 필요하다고 말한 화가 드가를 예로 들며 회화를 유미주의자의 한가한 도락이기보다 사악한 타자를 물리치려는 격렬한 방어 작전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은 채 고독한 상태로 존재했다면 ’모나리자‘가 계속 회화였을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왜 미술 작품은 항상 보여지기 위한 것이라고 가정될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페루지아의 행위는 단순 절도 이상이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던 아트가 제공하는 텅 빈 공간을 보려고 미술관 화랑에 가는 한 세기를 준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화가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관념과, 다른 사람과 다르게 그리는 사람이라는 관념 사이에서 후자를 따르면 화가는 자신들의 욕망이 독특해서 사회가 가치를 부여하는 대상과 동떨어져 있고 항상 근본적으로 다른 대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물론 사회는 예술 작품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이 차이를 인지, 승인한다. 저자는 추상화란 무엇을 그렸는지 즉각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재현하는 회화라는 속설의 오류를 지적하며 어떤 의미에서 추상(抽象: 개별의 사물이나 표상表象의 공통된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뽑아냄. 뺄 추, 모양 상)한다는 것은 화가가 구상한 형태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요소를 미술작품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그런 배제를 포함하는 미술은 추상이 아닌 적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장 바젠느(Jean Bazaine: 1904 - 2001)가 말했듯 무언가를 재현할 때조차도 미술은 재현과는 다른 일을 한다. ‘모나리자’가 도난당했을 때 한 영국 신문은 “루브르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추상화(抽象化: abstract, 이 단어에는 추상하다 외에 떼어내다, 분리하다, 절취하다 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고 썼다. 저자는 추상화 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을 선(線)이라는 개념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며 선은 공간을 나누는 수단으로 추상한다는 것은 공간의 가장 단순한 분할과 동일시될 수 있기에 선의 사용은 분리시키는 행위라고 규정한 추상화를 수반하므로 가장 재현적인 리얼리즘적 초상화가 하는 것이야말로 추상 작업이라 말한다.



저자는 이미지들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을 환기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설명한다. 즉 이미지들은 스크린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미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가장 흔히 선택되는 이미지 즉 보티첼리의 ‘비너스’조차 섬뜩한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여기서 감춰지는 것은 비너스의 탄생 즉 사투르누스가 우라누스를 거세한 다음 잘라낸 성기를 바다에 던져버린 끔찍한 행동으로 인해 생겨난 내력이다.) 저자는 이미지에는 항상 사라진 부분이 존재하기에 온전함을 환기시키는 것은 오직 미완성 이미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으로 이런 까닭에 낭만주의자들은 완성된 것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추정한다.



저자는 원근법(시각적 공간의 묘사와 깊이감의 환영(幻影)을 창조하는 데 적용되는 고유의 처방과 제한 조건을 가진 하나의 체계)의 인공적이고 상징적인 체계로서의 위상이 정신분석 저술가들을 매료시켜 왔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미술은 어떤 방식으로 시각장이 연속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콜라주의 단절되고 이질적인 표면들로부터 옵아트(Op Art)의 불편한 경험에 이르기까지 확실한 예는 수없이 많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정신분석적 접근에 따르면 시각적 현실은 배제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배제는 금지보다 불가능성의 결과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세계가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어떤 것들이 은폐되거나 금기시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시각화나 용이한 상상의 수준으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고상한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쓸데없는 행동에 의해 도난당한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저자는 페루지아는 훔친 작품의 명성 때문에 작품을 팔 수 없었기에 ‘모나리자’는 특별한 가치 즉 순수한 향락의 대상이라는 가치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범인 파악을 둘러싸고 벌어진 파란은 에드가 알렌 포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미술 작품이 기거하는 곳은 특별하고 신성한 공간 즉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미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의 문제이자 힘은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미술은 우리에게 그런 공간을 환기시켜줄 수 있으나 그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미술은 우리에게 그것을 볼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부재의 논리, 보여주면서 은폐하는 기묘한 메커니즘을 리얼하게, 긴 과정을 우회해 설명한 저자의 구성력을 확인하게 하는 화룡점정 같은 문장이다.

 



 
 
 

 

 

승계호 교수의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는 흥미로운 책이다. 이 흥미롭다는 말은 학문적으로 깊이가 없다는 뜻이나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새롭고 독창적인 관점이 돋보여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요한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등을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의 사상으로 일관되게 읽어냈다. 평론은 오류가 있을망정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관점으로 대상이나 텍스트, 현상 등을 새롭게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괴테, 니체, 바그너는 모두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괴테는 스피노자를 답습하지는 않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읽기에 난점이 있는 책이다. 내용이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니체 자신 이 작품을 어떤 작품을 패러디한 것이라 했을 뿐 그 대상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대상을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로 정의하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네 챕터가 각각 ‘니벨룽의 반지’의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 등 네 챕터와 주제적으로 어떻게 상응하는지 밝혔다.



저자는 주제학(主題學)을 제창한 학자이다.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는 바로 이 주제학에 따라 작품의 모든 부분이 조화롭게 합일하는 주제를 설득력 있게 밝힌 책이라는 평을 받는다. 모든 부분이 조화롭게 합일하는 주제를 밝힌 저자의 작업은 그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4부를 주제와 연결하기가 어려워 본문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아온 전통에 경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우리 시대의 일상적 인간들은 파우스트같이 거창한 영웅에게는 이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이는 인식론적으로 총체성을 포기하는 상황으로 읽으면 어떨까?



이정우 교수가 ‘인간의 얼굴‘에서 한 말을 떠올려보자. 그는 “총체성을 버릴 필요는 없다. 아니 버려서는 안 된다. 새로운 형태의 총체성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331 페이지) 덧붙여 그는 “탈근대성 논의가 총체성을 추구한다면 그것을 열린 총체성, 즉 헤겔적 총체성이 아니라 세르적 총체성”이라는 말을 했다.(37 페이지)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는 소통이 단절된 시대를 극복하는 관계의 철학을 담은 ‘천사들의 전설’에서 천사(angel)라는 말이 메신저를 뜻하는 그리스어 앙겔로스(angelos)에서 유래한 데서 보듯 세계는 각종 관계를 맺어주는 천사들의 무수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근대의 학문은 나누기에만 급급해 서로 연결돼 있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체로서 볼 줄 모른다는 말을 했다.

 

 

백과전서파의 후예 세르가 주장하는 총체성은 개별 분야에서 논의를 시작하되, 분과를 나누는 벽을 천사처럼 투과하고, 흔들며 조금씩 총체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헤겔의 총체성과 다르다. 1930년생인 세르는 최근 작(원서 2012년 출간)인 ‘엄지 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로 다른 사람을 해하려 하지 않는 사회, 기성세대가 깨뜨리지 못했던 벽을 부수고 활기찬 새 시대를 열 엄지세대와 함께할 새로운 사회를 상상한다.



‘엄지 세대‘란 두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스마트폰 문자를 치는 젊은 세대를 말한다. 물론 세르는 엄지세대에게 과제도 제시했다. 세르에 의하면 엄지 세대는 “세상이 너무 급격하게 바뀐 탓에 모든 것을 다시금 창조해야 하는 세대”로 “함께 사는 방법, 제도, 존재 방식, 인지 방식 등 모든 것을 새로운 세상에 어울리도록 재창조해야” 하는 과제 역시 부여받았다. 본질적으로 낯선 것을 만나 성숙해가는 여행 같은 것으로 문화를 본 세르의 글을 통해 읽는 사람 역시 열린 총체성에 익숙해지고 적응하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천사들의 전설 - 현대의 신화
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 그린비 / 2008년 3월
50,000원 → 45,0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0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1월 2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4년 11월 22일에 저장

헤르메스 - 개정판
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1월 2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4년 11월 22일에 저장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미셸 세르.실비 그뤼스조프 외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1월 2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4년 11월 22일에 저장

엄지세대, 두 개의 뇌로 만들 미래 -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장 미셸 세르의 신인류 예찬
미셸 세르 지음, 양영란 옮김, 송은주 / 갈라파고스 / 2014년 2월
8,800원 → 7,920원(10%할인) / 마일리지 440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오늘(17~21시) 사이" 택배 수령 가능
2014년 11월 22일에 저장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돌아온 희생자들 - 스탈린 사후, 굴라크 생존자들의 증언
스티븐 F. 코언 지음,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돌아온 희생자들(The Victims Return)‘은 소비에트와 포스트 소비에트 전문 연구자인 스티븐 코언의 책이다. 스탈린 사후 굴라크(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과 방대한 자료를 해석해 써낸 이 책에서 저자는 스탈린의 희생자들 중 70 퍼센트 이상이 평범한 시민들이었음을 밝힌다. 스탈린 치하에서 희생자들이 수백만 단위에 이른 것은 한 명이 체포될 때마다 반드시 처벌할 공모자들을 찾아야 하는 형법 제 58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돌아오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수도 없이 들었다는 저자는 우리들에게도 그들을 잊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이 책은 서구의 다른 소비에트 체제 관련 책보다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저자는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의 모델이 된 니콜라이 부하린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쓴 미국 출신의 뉴욕 대학교 교수이다. ’돌아온 희생자들‘은 바로 그 논문에서 시작되었다. 저자의 글은 스탈린 사망 이전을 다루거나 굴라크 이후의 삶은 거의 언급되지 않은 현실에 시사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책 탄생의 배경을 언급한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듯 스탈린의 희생자들은 정치적 배경이 다양했다. 저자의 책이 출간된 기저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여건과 위험 속에서도 정보를 제공하고 선의를 베푼 의인(義人) 같은 존재들이 있다. 예브게니 그네딘, 안나 라니나, 일리야 예렌부르크 등이 그들이다. 굴라크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첫 외국인인 저자는 그 과정에서 벌일 수 밖에 없었던 첩보전적 양상을 전한다.



인터뷰 이후 30년만에 나온 특별한 책인 ’돌아온 희생자들‘을 통해 저자는 그 생존자들의 위대한 귀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임을 강조한다. 스탈린(1878 - 1953)은 1920년대 중반부터 사망시인 1953년까지 25년이 넘는 기간 소비에트 정치 체제를 전제권력과 집단 테러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 스탈린 사후 희생자들은 대부분 감옥 또는 수용소, 유형지 등에서 바로 풀려나기는커녕 관료적 장애물과 서류작업에 묶였다.



그 자신 독재자이지만 대규모 탄압을 일삼은 죽은 독재자 스탈린을 비난함으로써 희생자들의 무죄를 인정해준 존재가 바로 흐루쇼프(Khrushchov: 1894 - 1971)이다. 수용자들의 조건 없는 석방을 명한 것도 그였다. 돌아온 몇몇 희생자들은 자신들을 몸의 뼈대에 살가죽이 늘어붙어 있는 형상으로 묘사했다. 어떤 사람들은 불확실한 자유보다 1953년 이후 어느 정도 상태가 개선된 굴라크의 규칙적인 생활을 더 선호했다.



바실리 그로스만(Vassili Grossman: 1905 - 1964)이 ’모든 것은 흘러간다‘란 소설에서 썼듯 그들은 수용소를 떠나고자 하는 열망을 잃어버린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수용소를 떠나기를 갈망했다. 굴라크 생존자들의 삶은 인간 조건 자체 만큼 각양각색이었다. 놀랍게도 80, 90대까지 살다간 희생자들이 꽤 있었다. 굴라크 생존 후 걸출한 경력을 쌓은 사례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우회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1930, 40년대의 정치 희생자들 중 다수가 공산당에 가입했거나 가입을 위해 애썼다.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신상의 안락을 위해, 무죄판결의 보증서로 활용하기 위해 등등이었지만 강한 정치적 신념을 위해서인 경우도 많았다. 생존자들 가운데 논쟁이 일기도 했다.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이 굴라크 경험을 개인적, 도덕적 구원으로도 볼 수 있다고 본 반면 시인, 극작가 바를람 샬라모프(Varlam Shalamov: 1907 - 1982)는 그곳에는 오직 인간성 말살과 죽음만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스탈린의 희생자들은 정치적 관점에 상관없이 대부분 스탈린을 증오했지만 이 부분에서조차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귀환자들은 자녀들 뿐 아니라 풀려난 가족들과도 예전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귀환자들의 잃어버린 삶과 남아있던 사람들이 살아낸 삶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생존자들 가운데 환영(歡迎)이 아닌 의심의 눈초리와 적대감을 감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의 세뇌 정책 때문이지만 공식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생존자들에게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란 의심이 돌아왔다.



잡혀가는 사람들을 도우려 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노력은 대부분 허사가 되었고 당사자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굴라크 생존자들의 대량 귀환과 이주로 소련 사회는 테러의 희생자와 가해자들의 깊은 반목에 휩싸였다. 일부 희생자는 스탈린의 테러는 누구에게도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기에 아무도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받아들였다. 석방과 동시에 권력의 중심부 가까이 올라간 사례도 있었다.



저자는 정치적 논리만으로는 흐루쇼프가 개인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의 범죄를 폭로하고 생존자들을 풀어주며 도와주는 일에 앞장선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흐루쇼프의 행동을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 도덕적 지각에 의한 결과 등으로 이해했다. 반스탈린주의는 흐루쇼프의 지도부를 굳건히 하는 한편 위태롭게도 했다. 폭로는 저항을 불렀다. 흐루쇼프가 감행한 폭로의 영향으로 비밀 경찰의 장군과 굴라크의 사령관 수십명이 자살했다. 동료들의 체포를 묵인했다는 죄책감에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스탈린 시대에 국민의 약 5 퍼센트가 비밀 정보원이었고 최소 100만명이 굴라크의 직원이었다. 흐루쇼프 역시 무고한 사람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이는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의 범죄나 공공의 범죄를 폭로할수록 위태해짐을 의미한다. 흐루쇼프는 그럼에도 스탈린 시절의 죄악상을 조사할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스탈린이 테러를 통해 독재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소비에트 정치체제를 경찰국가로 변형시켰다고 결론지었다.



급기야 흐루쇼프의 반스탈린 계획에 너무 많은 사람이 얽혀 있어 소비에트 체제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보고되기까지 했다. 결국 흐루쇼프는 反스탈린 정책 때문에 실각한다.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親스탈린 정책으로 전개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소비에트와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의 스탈린 희생자들의 지위는 스탈린의 공식 평판 및 흐루쇼프의 평판에 따라 계속 불안정하게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소비에트 관료들이 처음 흐루쇼프의 脫스탈린 정책을 지지했던 주요 이유는 폭력적 개인 독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때문이었다. 反스탈린주의는 서구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적들이 날조한 반공산주의 슬로건으로 규탄을 받았다. 1969년 스탈린의 90번째 생일을 앞에 두고 新스탈린주의자들은 폭군 스탈린의 절대적 복권을 위한 저돌적 캠페인에 들어갔다. 스탈린 흉상이 정기적으로 꽃으로 장식되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굴라크 생존자들이 범죄 혐의를 벗지 못한 채 사망했다. 복권된 사람들도 불안에 시달렸다.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으로 인해 복권자들의 다수가 복권받지 못했다는 느낌으로 살아야 했다. 완전한 구제를 희망하는 스탈린의 희생자들은 또 다른 흐루쇼프가 언젠가 나타나리라는 생각과 흐루쇼프 시절에 대한 기억에 매달렸다. 실각한 흐루쇼프는 솔제니친의 금지된 소설들을 밀수본으로 읽고 “나도, 그 친구도 미쳤구먼”이라고 말했다.



‘수용소 군도’가 소비에트에서 출간된 1990년을 스탈린의 희생자들이 진정으로 돌아온 때라고 생각한다며 저자는 100만명 이상의 무죄를 인정해주었고 1991년 스탈린의 희생자들을 모두 복권시킨다는 내용의 포괄적 대통령령을 발표한 고르바초프를 언급한다. 저자는 스탈린의 희생자들은 비극적이면서 신성했던 사람들이라 정의한다.



학자에게 객관성은 중요한 자질이지만 고르바초프 시절 자주 시험에 들었다는 저자는 1989년 노동절 행진 행사를 앞두고 붉은 광장에서 소비에트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해 달라는 갑작스런 공식 초청에 응해 모호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스탈린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까지 자제할 필요는 없었다고 느끼고 그들을 위한 행사와 추모의 밤 행사에도 갔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가 예전부터 알았던 굴라크 생존자들은 벌거벗은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며 살아온 세월’을 뒤로 하고 새로운 상황에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모순적이었다. 스스로 손에 피를 묻혔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지 못했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와 바실리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을 금지했고 1956년 이후 억압적인 조치로 몇몇 노동 수용소를 다시 죄수들로 채웠지만 굴라크 생존자들에게는 감사한 존재였다.



죽은 스탈린이 러시아를 양극화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고도 시사적인 사안이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그를 수백만의 무고한 생명을 죽인 잔혹하고 무자비한 독재자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그가 정직한 시민을 탄압한 적이 없는 위대하고 지혜로운 지도자로 생각하거나 그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그의 업적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저자는 러시아 근대사에서 스탈린주의는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로 그 형성에 크게 기여했고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수십년 동안 미국을 분열시켰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나라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스탈린주의 르네상스가 1990년대 포스트 소비에트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정권하에서 아래로부터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옐친의 주도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및 복권 등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가 자유시장 자본주의로의 빠른 전환을 위해 도입한 경제안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포스트 소비에트 러시아는 미국의 1930년대 대공황 시기를 능가하는 경제적 붕괴에 직면했다.



超 인플레이션, 극단적 빈부격차, 파산자 속출, (남자들의) 평균 수명의 급격 하락 등 난세 속에서 소비에트 시대에 대한 향수와 스탈린에 대한 지지 및 재평가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불로소득 등의 특권을 누리는 계층의 등장은 스탈린의 탄압이 인민의 실제 적에 대한 응징이었다는 해석을 낳기까지 했다. 스탈린 지지도의 상승은 흐루쇼프, 고르바초프, 옐친 지지도 하락과 맞물렸다.



푸틴은 스탈린에 대한 모순적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스탈린주의 르네상스가 한때 신성했던 굴라크 희생자들의 지위를 무참히 무너뜨렸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찬란함과 처절함이 공존하는 나라는 그 둘을 조화시키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의 범죄를 둘러싼 정치 투쟁이 러시아의 최고위층에서도 다시 진행되고 있기에 희생자들의 기나긴 귀환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결론짓는다. 우리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책 ‘돌아온 희생자들’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