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는 ‘영원의 철학’(2014년 7월 출간)에서 현재의 경제 및 사회, 국제적 제도들은 대부분 조직화된 냉혹함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헉슬리에 의하면 경제 및 사회, 국제적 제도들은 대자연에 대한 자비심 부족에서 기인하고 예술과 관련된 냉혹함을 낳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헉슬리는 예술에 대한 냉혹함을 인간에 대한 냉혹함으로 정의하며 그런 점은 기계적인 예술 대용품들에 의해 부과된 ‘아주 쉽지만 은총이 통하지 않는 일들’을 수행할 때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말할 것이 없이 다루기 쉽지만 기계적이고 인공적인 세계에 길들여지면 미적 감각이 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연상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원본성, 진품성, 일회성과 무관한 예술작품(복제품)에 아우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서 생각해 볼 장르가 바로 시이다. 시는 모호성과 비실용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지적(진은영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해설 이광호 평론가 글 ‘내게서 먼, 긴 손가락’ 참고)이 있지만 시는 사실 정치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물론 관건은 두 항목 사이의 긴장과 균형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미학적 장치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참으로 인상적인 말이 있다. “원근법이 없는 상상력은 맹목이고 상상력이 없는 원근법은 공허하다, 시인은 비평가에게 상상력을 보태주고 비평가는 시인에게 원근법을 빌려주며 시인과 비평가가 서로 다른 당파성을 견지하면서도 함께 일정한 객관성, 최소한의 도덕을 공유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1993년 출간 김인환 지음 ‘상상력과 원근법’ 참고)란 글이 그것이다.



“서정시의 경우에도 시인은 늘 여러 개의 가면을 통하여 서로 다른 목소리들을 들려준다.” 같은 말을 비롯해 다수의 인상적인 말들이 담긴 이 책의 한 챕터인 ‘정치와 시’에서 저자는 김지하 시인에 대해 20 세기 후반기의 한국 자본주의를 집중적으로 묘파(描破: 남김없이 밝히어 그려 냄)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했다. 시인이 추구하는 후천개벽이라는 종교적 의미의 유토피아도 피와 땀과 먼지로 구성된 자본주의를 반드시 뚫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출간 1년 후에 나온 도정일 평론가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의 운문 신화집 등 세계 문학의 고전들이 예외 없이 역사적 순간에 인간이 대면해야 했던 당대적 모순들을 다루었다고 전하며 그렇기에 그 작품들이 훼손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대적 모순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살아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럼 2000년대의 사정은 어떤가. 진은영 시인이 눈에 띈다. 첫 시집인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 시인은 특별한 정치적 언어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 시집에서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시에 관한 정의 또는 자의식이다. 시인은 “대마법사 하느님이 잠깐/ 외출하시면서” 자신에게 창세기를 맡기셨다고 말한다.(‘견습생 마법사’) “복숭아 나무 아래 떨어지는 분홍 꽃잎, 꽃잎/ 뉴턴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만유인력 법칙도 상대성 원리도 우주선도 사라진다/ 맑은 밤, 들에 나가면 목성의 주황색 얼음 띠가/ 예쁜 팔찌처럼 선명하네”라고 말한 시인은 “그래도 세잔은 한 알의 복숭아로 빛의 마술을 부렸겠지/ 프로스트는 복숭아를 딴 후에 한 편의 시를 완성했을 거야”란 말과 함께 “그래도 나는 오늘 한 그루 말의 복숭아 나무를 심으리라“란 다짐을 내비친다.



‘어제‘라는 시에서 시인은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으로/ 어제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뒤집을까?/ 오늘 혼자 부르는 노래는 지겹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명명한다, 베껴쓰기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무수한 어제들의 브리콜라주로 오늘의 화판을 메워야 한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어제와 장미 향기가 다 증발하기 전에/ 너를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보이는 것은 실험적 사유, 실험적 글쓰기의 시도이다. 하지만 그 시들은 어제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플라톤, 마르크스, 레닌 등을 베낀 것이라 말한다.



’詩‘라는 시에서 시인은 ”내가 이름을 불러보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들이여/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숨어버린 모음들/ 손을 담그기 전에 흘러가 버린 강물이여“라는 말로 창작의 어려움을 말한다. 그리고 ’푸른색 Reminiscence‘에서는 시와 혁명과 사랑의 겹침을 이야기한다. ”시를 쓰고 나서 혁명에 실패하고/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혁명에 실패하고 나서 한 남자를 사랑한 후 시를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대학 시절‘에서는 ”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 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라고 말한다. ’긴 손가락의 시‘에서 시인은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며 손가락을 가장 멀리 있는 가지에 비유한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 무를 지탱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나는/ 쓴다“고,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가 시인의 결론이고 결의이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 매일‘을 거쳐 세 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에서 시인은 정치사회적 의미의 실천의 언어들을 본격 선보인다.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멀리 있으니까”(’그 머나먼‘)가 그렇고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한 김진숙 노동자를 보고 쓴 ‘Bucket List'("당신의 삶은 정말 주머니들로 가득한 옷 같소/ 얼마나 많은 슬픔/ 얼마나 많은 기쁨/ 얼마나 많은 분노/ 얼마나 많은 영혼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지.")가 그렇다.



하지만 시인의 시 세계는 결코 하나의 경향으로 정형화되지 않는다. 실험적인 경향, 정치적 감수성, 서정적 세계, 낯선 이미지들이 시인의 시에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함돈균 평론가와의 대담에서 “세계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도피하는 방법으로 예술만한 게 없고, 세상과 가장 확실하게 결합하는 방법으로도 예술만한 게 없다”는 괴테의 말을 상기시켰다.(창비 2012년 겨울호 ’청춘의 시인, 우리 시대의 전위가 되다‘ 참고) ’견습생 마법사‘에서 하느님이 자신에게 창세기를 맡기셨다고 표현한 시인은 첫 번째 시집은 천진난만한 전지전능함으로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고 그 사물들을 정의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제목에 담은 것이라 설명했다.



시인은 “남의 상처나 삶에 한 눈 팔고 정신을 빼앗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슨 대단한 대의나 윤리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단 자신을 위해서“.. 시인은 대학 시절 내내 시집보다 사회과학 서적을 더 열심히 읽었다는 말로 시와 정치에 대해 말한다. ’푸른색 Reminiscence‘에서 시와 혁명과 사랑에 대해 언급했던 시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체불 임금을 한 푼이라도 받기 위해 초초하고 원통한 얼굴로 골목길에서 몇날 며칠을 서 있던 어린 노동자를 보며 견디기 힘들었던 고교 시절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자본론‘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존재라기보다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영세자본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고 말하며 자신에게는 그것이 혁명이라 설명한다.



시인은 들뢰즈를 인용하며 시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시인이 하는 그 어떤 것이 바로 ‘시가 할 수 있는 것(시의 역량)’을 공교화(工巧化)한다고 말한다. 시인과 시민의 분열이라는 난처한 상황을 일정하게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지양하고 극복하는 입장에서 이 시간을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대한 답인 시인의 말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이 나온 것을 연상하게 한다. 도식적일지 모르지만 첫 시집이 ‘무엇을 알 수 있는가?‘란 문제의식에서 나왔다면 이제 다음의 시집은 어떤 위상을 지닐지 궁금하다. 참고로 칸트의 세 번째 질문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이다.



물론 칸트의 세 질문이 상호 침투하듯(연관되듯) 진은영 시인의 문제의식 역시 순환하고 공명할 것이다. 다만 어느 점에 비중이 더 두어지느냐가 관건이다. 최근 시인은 ’문학의 아토포스’를 냈다. 이 책의 한 챕터인 ‘문학의 비윤리‘의 첫 장은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는 제목을 하고 있다. 이는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Le partage du sensible)’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정치라고 불러 온 활동들은 치안에 불과했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는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으로 규정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 정치성은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거나 특정 이데올로기를 옹호 또는 공격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시인은 “예술은 미술관에, 정치는 의회에 있다는 이분법의 허구성을 파열시키고자 했다. 이런 틀 안에서는 정치와 예술 중 양자택일만이 가능하다. 한국 문단에서는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지만 용산(참사현장)에서 시를 읊으면 논란이 된다. ‘이것도 문학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술과 정치의 공통점으로 ‘기성 체제와의 불화’를 규정한 랑시에르의 이론이 해결점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한국일보 2014년 8월 22일 ‘정치와 예술은 사실 밀회하고 있었다‘ 참고)는 말을 했다. 정치와 미학, 정치와 예술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을 짐작하게 할 ’문학의 아토포스‘를 읽으며 이미 읽은 시들의 새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무게를 동시에 느낀다.



 
 
 

 

감사합니다. 이상협 님께서 '목련 나무가 있던 골목'을 낭송하시는 것을 들을 때 마치 제 시라도 되는 양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습니다. 제가 추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시인들이 정성을 다해 새 눈으로 쓰시는 작품들을 대하면 요즘 읽고 있는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의 한 구절을 생각하게 됩니다. "알고,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는 분야에서도 고행이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론 살림지식총서 384
유해무 지음 / 살림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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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라는 관조(이론)가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며 삶의 실천이 없는 관조는 공허하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을 펼치는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저자는 신학이란 관조(觀照)와 실천을 통합하고 조화를 이루도록 반성하는 작업이며 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교의(dogma)의 전형이다. 저자는 나사렛 예수의 역사가 삼위일체론의 뿌리라고 설명한다.



저자가 말했듯 예수라는 역사적 존재에 대한 관점에 따라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고, 오해와 갈등이 지속되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고대와 현대의 여섯 가지 삼위일체론(카바도키아 교부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칼 바르트, 칼 라너, 존 맥쿼리, 로버트 젠슨)과 최근의 삼위일체 논의(슐라이어마허, 위르겐 몰트만, 에버하르트 융엘)를 소개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삼위일체론은 다양하고 경우에 따라 난삽하기까지 하다.



맥그래스는 최근의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기초와 함의를 다룬 연구 가운데 캐서린 모리 라쿠냐(1952 - 1992)의 ‘우리를 위한 하나님: 삼위일체와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책을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꼽았다.(캐서린 모리 라쿠냐는 ‘삼위일체론‘의 주요 참고 서적 가운데 한 권이다.) 라쿠냐는 페미니스트 카톨릭 신학자이다. 맥그래스에 의하면 라쿠냐는 서방 교회의 삼위일체론이 구원의 경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 자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무시하고 하나님의 본성 자체에 대한 사변적인 숙고에 몰입한 경향이 있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맥그래스는 인간은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내재적 삶을 알 수 없는데 기독교 전통은 성서의 계시가 아닌 그리스 철학으로 다듬어진 신 개념으로 삼위일체론을 세웠다는 말을 한다. 라쿠냐의 주장은 인상적인데 문제는 플라톤 사상이 삼위일체 교리의 근원이라는 주장이다. 관건은 삼위일체론이 그리스 사상의 영향에 따라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그리스 사상에 의해 다듬어졌을 뿐인가이다. 저자는 성경에 삼위일체론이 문자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원천은 성경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성령으로가 아니면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다(고린도 전서 12장 3절)고 언급하며 성자를 성육(成育)하게 하신 이가 성령이라 덧붙인다. 삼위일체론을 구약에서 명시적으로 찾기 어렵고 삼위일체론이 예수의 정체성과 관계된 문제이기에 저자는 예수가 구약의 구절들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지적한다. 가령 예수가 많은 표적을 행했음에도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은 것은 이사야 53장 1절(”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의 성취라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의 고난은 이사야 53장 4절(”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의 성취이며, 십자가상에서 예수가 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복음 15장 34절)란 말씀은 시편 22편 1절(”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니이까“)의 성취라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을 구원 사역의 관점에서 읽으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성령은 해방을 베풀고 생기를 주는 힘이며 우주 내의 생명의 근원이다. 저자는 예배는 예배자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주고받는 교제이며 예배 중 하나님과 예배자는 신비적 연합을 이룬다고 말한다. 저자는 성령을 받아야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잘 알다시피 유대교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와의 이런 차이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성령 역시 줄탁동기처럼 받는 쪽과 주는 쪽이 맞아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기독교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는 무엇 때문에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기독교는 성령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고 유대교는 그렇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이는 인간이 궁극적인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인가? 사실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 사건과 성육신(을 하게 한) 사건이 증거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절대자의 섭리에 (부정적이지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에리히 프롬이다. 그는 아담과 이브의 반항으로 시작된 구약의 이야기를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투쟁의 기록으로 해석했다.



이와 달리 예수의 성육신을 있게 한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쾰른의 도이치 수도원 소속이었던 루페르트(1070 - 1129)는 성육신에 기초한 기독론을 구원 역사의 중심으로 보았다. 즉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 출생해 창조와 성육신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를 받아들이면 타락과 무관하게 성육신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만나게 된다.



저자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세 가지 오해를 거론한다. 1) 인간이 고안한 사변이라는 오해, 2) 이단 논쟁의 결과 발생한 이론이라는 오해, 3) 그리스적이라는 오해가 그것이다. 앞서 맥그래스가 소개한 여러 삼위일체론을 언급했는데 이 책에서 거론된 삼위일체론 역시 어렵고 다기(多岐)하다. 이단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는 논의들도 통일된 체계와 거리가 있다. 저자는 삼위 하나님의 다스림은 세상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사랑을 계시하는데 나타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뵐 수 있고 그분과 누리는 교제에서 그분을 받는다고 말한다. 결코 홀로 계시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만이 개인주의를 치유할 수 있고 예배자는 교회에서 이 교제를 즐기고 교제의 기쁨을 세상에서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성령 안에서 찾고 계신다고 덧붙인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에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왕성(旺盛)할 것이라고 한다. 새겨들을 말이다.



 
 
 

손은 제2의 뇌, 밖으로 드러난 뇌라는 말이 있는데 오늘 아침 한 FM의 진행자는 손은 밖으로 드러난 가슴이라는 말을 했다. 손을 내밀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돕는 것이 그가 말한 손의 역할이다. 손은 밖으로 드러난 뇌라는 말, 손은 밖으로 드러난 가슴이라는 말은 모순관계에 있지 않다.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가진 존재에게는 당연하게...



 
 
 

 

종교도 인간의 일인지라 갈등과 논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듯 하다. 최근 교황(敎皇)의 방한을 계기로 개신교계 일각에서 기독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일치 반대를 위한 세미나를 연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교황 방한 이전부터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극대화해 설명하는 뉴스도 있었다. 그 보도 내용들 중 카톨릭의 성모 마리아는 비성경적이라는 개신교계의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개신교가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의 외형은 변하지 않지만 그 실체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인 카톨릭의 화체설(化體說)을 비판하는 것 역시 설득력이 있다 싶다. 개신교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제사가 완성되었기에 그런 의식(儀式)이 필요 없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세미나에서 거론된 내용들은 우려스럽다. 그들은 가톨릭을 “예수님을 근원으로 해 성령에 의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한 기독교회가 아니라 기독교회와 바벨론의 태양신과 우상숭배 종교와 인본주의 사상과 세상정치가 혼합, 혼재돼 로마에서 신생한 기독교회의 유사 종교”로 규정했다. 중요한 것은 로마에서 신생한 기독교회의 유사 종교라는 구절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그것은 “일요일(주일)예배,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 부활 이후 안식일이 폐지되고 부활을 기념하여 지키기 시작했다는 단순 논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그것이 “교회의 예배일이 되기까지 수많은 이교들과 로마의 황제들과 이교적 신학자들의 영향, 태양신과의 관계, 그리고 엄청난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는 기사(2014년 8월 6일 매일종교신문의 기사 ‘가톨릭과 개신교의 비교’) 때문이다. 나 역시 평소 일요일 예배가 예수의 부활로 인해 안식일이 폐지되어 지키기 시작한 것이라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위의 기사를 따르면 카톨릭의 일요일 예배는 로마의 세속 권력과 결부된 비성경적인 것으로 보면서도 자신들의 일요일 예배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개신교의 주장은 무리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굳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가르자면 유대교는 성경적이고 카톨릭과 개신교는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한다. 개신교로서는 종교 개혁 이전인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명분으로 태양의 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성수하도록 한 결의를 부인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기에 궁여지책을 내렸을 것이다. 이런 궁여지책은 개신교가 부활절에 예수의 피와 살을 기념해 치르는 성찬(聖餐) 의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개신교가 카톨릭처럼 매주 미사시에 그렇게 하지 않지만 부활절에 한해 그렇게 하는 것은 일요일 예배를 둘러싼 진퇴양난을 연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