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나무 아우또노미아총서 12
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 갈무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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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를 체험하는 것. 우리는 세계의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색채 공간을 체험하는 것”... 이는 세계는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만들어 낸 세계이며 이 세계는 다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너무 뚜렷하고 당연한 까닭에 오히려 깨닫기가 매우 어려운 진실을 일깨우는 ‘앎의 나무’의 기본 메시지이다. 인식 활동이 세계를 산출한다고 전제하는 두 저자는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 절대적인 세계를 반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에게 출발점이자 인식 도구이자 문제로 설정된 것은 언어이다. 저자들은 인식을 한 생물이 특정 환경에서 자신의 세계를 산출함으로써 그 환경에서 생존을 지속하게 해주는 행위로 정의한다.(38 페이지) 그 인식의 바탕에 인식자의 구조가 깔려 있다. 저자들은 생물을 자기 자신을 생산하면서 자신의 경계도 결정하는 분자적 상호 작용들의 그물로 정의한다.(49 페이지) 그렇기에 생물을 정의하는 조직은 자기생성조직이다.(56 페이지)



저자들에 의하면 공간 안에 무엇이 생길 수 있게 해주는 구조물이 막(membrane)이다. 중요한 점은 이 테두리는 단지 세포가 하는 물질 대사의 산물이 아니라 구성 요소들을 생성하는 변화 작용 그물의 크기를 한정할 뿐 아니라 변화 작용 자체에도 참여한다는 점이다. 생물 뿐 아니라 모든 구성물들이 조직을 가지고 있다. 다만 생물은 조직의 유일한 산물이자 자신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자기생성 개체의 존재의 행위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자기 생성 개체는 분자들을 구성 요소로 가지고 있기에 물리적 법칙들을 따르게 된다.



저자들은 세포의 생식에 전형적인 것들로 복제, 복사, 증식 등을 든다. 복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생산 기제가 자기와 상관 없는 요소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복사는 모델이 되는 개체에 투사 기법을 이용해 모델과 같은 개체를 산출하는 것이다. 증식은 한 개체가 나뉘어 그것과 같은 부류의 두 개체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포의 생식은 개체의 복제나 복사가 아니라 증식이라는 사실이다.(80 페이지) 하지만 세포의 경우 분열이 일어나도록 작용하는 것은 세포의 자기 생성적 역동성 자체이다.



저자들은 유전자에 한 생물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정보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DNA라는 세포의 특정 구성 요소를 여러 세대에 걸쳐 꽤 안정되게 복제하는 기제를 유전현상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한 생물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데 필요한 것이 DNA에 들어 있다는 주장은 자기 생성 그물의 한 구성 요소인 DNA를 함께 얽혀 있는 그물의 나머지와 분리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현대의 유전 연구가 핵산 유전학에 쏠려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미토콘드리아와 세포막 같은 다른 세포 구조물들과 관련된 유전 체계들도 있음을 거론한다. 한 개의 세포에서 생겨난 세포들이 함께 뭉쳐 메타세포적 개체를 이루는 것이 세포들의 지속적인 자기 생성 과정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메타세포체는 구조상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세포들의 집합이 발견되는 개체를 말한다.)



오늘날 세상에 알려진 다세포 생물들은 세포의 조직과 계통발생이라는 주선율의 변주곡들이다. 저자들은 구조 변천의 역사적 기제를 이해해야만 인식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생물이 환경과 상호 작용을 주고받아 생긴 변화는 섭동(攝動: 저자들이 사용하는 섭동이란 말은 부정적 의미가 담긴 방해와 달리 어떤 체계의 구조에서 일어나는 상태변화가 환경의 어떤 상태에 의해 바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유발됨을 가리킨다.) 작용을 준 개체로부터 유발되지만 그 작용을 받은 체계의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113 페이지)



저자들은 진화를 계통 발생적 선택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구조적 표류로 본다. 저자들에 의하면 환경 이용을 최적화한다는 뜻에서 진보는 없고 유기체와 환경의 구조접속(적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적응과 자기생성의 보존이 있을 뿐이다.(134 페이지) 저자들이 말했듯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구조적으로 결정된 어떤 체계의 작업 결과로 다룬다는 뜻이다.(142 페이지)



저자들은 갓 태어난 양을 몇 시간 동안 어미로부터 떼어 놓았다가 되돌린 뒤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소개한다. 그 새끼양이 다른 어린 양들과 달리 장난도 치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 지내는 현상이 관찰되었는데 결정적인 것은 어미양은 자기가 낳은 새끼의 온 몸을 핥는다는 사실로 저자들은 핥아내기라는 단순한 상호 작용이 신경계의 구조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을 내린다.(147 페이지) 이런 현상이 인간에게도 발생했음은 주목할 만하다.



저자들이 말하는 바는 신경계(감각 부위와 운동 부위가 매우 정밀하게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그 사이를 이어주는 뉴런들이 그물처럼 얽힌 것)란 유기체가 환경에서 가져온 정보들로 세계에 대한 표상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생존에 필요한 행동을 계산하는데 쓰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평생 한 번도 잠수함 밖으로 나간 적이 없이 잠수함을 조종한 사람을 예로 든다. 저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그가 암초를 피해 수면 위로 가볍게 떠오르자 그 모습을 밖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축하하고 환호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그런 칭찬과 환호를 받게 된 이유를 의아하게 여겼다.



저자들은 이 이야기를 전하며 잠수함과 주위 환경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잠수함의 행동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다. 저자들은 유기체의 인식 활동이란 유기체가 살아가는 구조 접속의 영역 안에서 감각작용적 상관관계로 일어나는 활동이라 설명한다.(188 페이지) 저자들은 신경계를 구조가 늘 변하는 신축적(plastisch) 체계로 정의한다. 물론 신경계의 구조 변화는 보통 주요 연결 경로들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신경계가 신축적인 것은 상호 작용의 결과 끊임 없이 변화하면서도 환경 변화와 줄곧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193 페이지)



저자들은 유기체의 모든 상호 작용(관찰한 행동 전체)을 인지적 행위로 평가하며 그렇기에 삶이 곧 앎이라는 경구를 제시한다.(197 페이지) 저자들은 진화를 거쳐 현생 인류로 이어진 영장류의 구조 변천의 역사를 낱낱이 알지 못한다고 전제하는데 그 이유는 사회적이고 언어적인 삶은 어떤 화석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245 페이지) 저자들은 원시 인류의 화석에 대해 뼈대의 해부학적 구조로 보아 아마 마주 보고 성교하면서 표정으로 언어적 상호 작용을 주고 받았다고 설명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그것은 성생활의 일부로 추측된다.(247 페이지) 저자들은 그들의 그런 생활 양식이 보존되는 가운데 애정에 찬 협업의 결과 나타난 것이 언어라고 설명한다. 저자들은 우리가 언어 안에 함께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작업적 응집성의 새 차원을 의식, 정신, 나(我) 등으로 설명한다.(261 페이지) 저자들에 의하면 정신은 사회적, 언어적 접속의 그물에서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지 내 머리 속의 어떤 것이 아니다.(262 페이지)



표상주의(객관주의)와 유아론(唯我論: 자기의 내면 세계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관념론 철학의 한 분야)이라는 양극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줄타기를 해야 한다.(270 페이지) 저자들은 우리는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로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사는 방식일 뿐이라 결론짓는다.(271 페이지) 저자들은 말한다. 앎(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가지면 얽매인다고.(275 페이지) 앎의 앎은 확실성의 유혹에 대해 늘 깨어 있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우리의 세계가 타인과 함께 산출한 세계임을 알게 되면 타인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공존하고자 하는 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을 고집할 수 없게 된다.(275 페이지) 사랑 없이, 타인을 받아들여 우리 곁에서 살도록 놓아두는 일 없이, 사회적 과정과 사회화, 나아가 사람다움이란 있을 수 없다.(277 페이지)



신경과학자 캔더스 퍼트가 감정이란 단어를 중용(重用)하는 파격을 선보였지만 사랑은 물론 감정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쓰는 움베르또 마뚜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예 역시 파격적인 만큼 신선하다. 긴 우회로를 거쳐 과학적 엄밀성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연대를 강조한 두 저자의 정성은 돋보인다. 그러나 실천은 각자의 몫이지만 아니 그렇기에 우리가 져야 하지만 이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두 저자가 섬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Agalma 2015-01-28 01:22   댓글달기 | URL
언급해주신 언급이 하나하나 다 공감이 가네요. 우주를 뒤덮은 암흑물질처럼 세포구조물 또한. 어떤 책에서 읽기론 실상 바이러스가 있기에 DNA의 실질적 전달이 가능하며, 돌연변이를 통해 그 우성인자가 강해지므로 존속에 유리하게 되었다..는 말도 오버랩이 되네요.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1 - 네오르네상스를 위하여
이정우 엮음 / 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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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1’은 ‘네오르네상스를 위하여‘란 부제를 가진 책이다. 새로운 문예 부흥과 같은 혁명적 변화가 필요한 우리의 상황을 반영한 제목이자 인식론적 단절과 인식론적 회귀, 또는 깨달음과 그것을 잇는 회향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첫 순서인 ’인륜의 등불을 켜다: 유교의 이해’편에서 필자 임종수 교수는 동북아 문명에 가장 오래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온 유교를 조명한다.



전쟁과 가렴주구 등으로 도(道가 사라진 시대에 공자는 평화의 세계를 일구어내기 위해 주유천하(周遊天下)한 인물이다. 그는 남자다움과 씩씩함 등의 의미로 통하던 인(仁)에 평화와 연대의 맥락을 추가했다. 그의 뒤를 이은 맹자와 순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적 사유의 능력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하도록 이끌었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선진(先秦) 시대 불교와 도교의 세계와 만나지 않았고 형이상학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했던 신유학 즉 성리학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우주 및 세계, 인간론으로서의 성격을 구비해갔다.



한때 황도(皇道) 유학과 같은 국가의 어용(御用) 학문으로 기능했던 유교는 오늘날 중국에서 부흥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꼭 긍정적일까란 의문을 제시하는 필자는 유교가 우리의 내면을 검열하는 억압 기제인가, 아니면 우리의 삶과 문화를 풍요롭게 일궈나가는 데 긴요한 인문적 자원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주나라의 도서관장이었던 노자(老子)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합곡관에 이르러 관문지기인 윤희에게 ‘도덕경‘을 써준 뒤 자취를 감추었다.



노장(老莊)은 천(天)의 존재를 도(道)의 하위에 두면서 천을 의지나 인격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치부했다. 노장의 무위자연 사상은 다른 존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것이 되고 그런 주체적 존재들의 공동체는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저절로 다스려지는 이상사회가 될 것임을 주장한 사람이다.(57, 58 페이지) 단 인간의 지식으로 파악하기 힘든 도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가 관건임은 물론이다.



윤지산 교수는 동북아 정치사상의 특징 중 하나로 유교의 배면에 항상 법가 사상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내법외유: 內法外儒)을 들었다.(71 페이지) 인간은 악하다는 성악설에 바탕한 법가 사상은 인성론에 대한 논의를 요구한다. 필자는 노동자들에게 자주 ’생각하지 말라(Do not think!)‘고 외쳤다는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 Taylor)를 언급하며 모든 노동자들을 기계화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는 테일러주의에는 법가적인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말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정우 교수는 불교의 세계를 고뇌와 해탈을 주제로 정리한 ‘고뇌와 해탈: 불교의 세계’란 글에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단일한 문화가 아니라 수많은 문화들이 분포한 거대한 장(場)으로 보며 그렇기에 인도는 다양한 지역/ 국가를 포함하는 아대륙(亞大陸: 대륙보다는 작지만 섬보다는 큰 땅덩이)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96 페이지) 중요한 것은 불교가 힌두교로 대표되는 인도 문명이라는 넓은 장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힌두교는 브라만교를 새롭게 창조한 종교이다. 그리스와 동북아에서 철학적 사유가 등장했던 시기와 같은 시기(대략 기원전 6세기 전후)에 인도에서도 기존 전통에 도전하는 다양하고 활기찬 철학사조들이 도래했다.(99 페이지) 붓다는 경험 세계를 나의 경험세계로 보고 나라는 실체와 굳게 결부된 실재로 여기는 데에서 집착이 생겨난다고 보는 한편 ‘나’를 실체성을 갖춘 존재로 여겨(아집: 我執) 5온(5蘊: 색수상행식)의 세계를 실재로 착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생성하는 것일 뿐이라는 진실을 깨닫도록 가르쳤다.(102 페이지)



색(色)은 우리가 경험하는 한에서의 물질성이고 수(受)는 감응이나 느낌이며 상(想)은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 및 사유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고 행(行)은 유위(有爲)이며 식(識)은 정신작용이다.(수가 정서적 차원에서 성립한다면 상은 인지적 차원에서 성립한다.) 붓다 사후 나뉜 여러 부파들 중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붓다의 생성존재론(生成存在論)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생성하는 가운데 생성하지 않는 실체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실체주의 또는 현상의 깊은 곳에는 불변의 본질들이 존재한다고 믿은 본질주의자들이었다.(105 페이지)



상좌부(上座部)와 설일체유부가 붓다의 본지(本旨)를 배반하고 실체주의로 빠졌다고 비판한 경량부(經量部)와 독자부(犢子部)는 현재와 과거, 미래 즉 삼세(三世)에 걸쳐 항존하는 법(法: 대상)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현재 생성하는 세계만을 인정했기에 업과 윤회를 설명할 수 없었다. 또한 생성만을 인정하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조금 전에 본 것들의 그림자일 수 밖에 없기에 세계를 불가피하게 환각으로 파악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생성의 밑바닥에서 식(識)을 읽어내려 했는데 이는 유식불교의 산출로 이어졌다. 아비달마 불교는 아(我)의 실체성을 부정했지만 이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로서의 법(다르마)들은 논했다.(아공법유: 我空法有) 대승불교는 철저한 생성존재론 즉 모든 것은 공하다는 생각을 전개했다. 후기 대승불교의 유식과 여래장 사상은 불교의 생성존재론을 이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힌두교의 영향에 따라 띠게 된 실재론적 경향을 대표한다. 힌두교의 아트만에 해당하는 불성과, 윤회의 주체로 이해된 아뢰야식 등이 그것이다.



유식사상은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법을 부정하고 마음을 사유한다. 필자는 동북아인들은 인도의 사유를 접하면서 처음으로 현실을 가현(假現)으로 보는 법 즉 일체유심조의 관점을 배웠지만 결국 여래장 사상 같은 실체론이 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고 지적한다.(119 페이지) 필자는 동북아 불교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선종(禪宗)이 주류를 이룸으로써 자칫 반지성주의의 흐름으로 빠질 위험이 있고 얼핏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평등을 통해 현실적인 불평등을 묵인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본래의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기복적 경향이 강한 대중과 영합하면서 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일종의 비즈니스나 네트워크가 되어 버린다는 것 등이다.



모영환 연구원은 공자의 유학(儒學)이 탄생한 시기가 혼란이 커져가던 시기인 반면 성리학(性理學)이 태동하던 때의 송(宋) 나라는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내적 단결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말로 성리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표방했다. 그 주의 위에 성립된 것이 성리학이다. 지적해야 할 것은 유교망국론이나 유교자본주의론은 모두 공자의 원유학(原儒學)이 아닌 주희에 의해 종합된 성리학에 대해 전개된 이론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두 이론(유교망국론, 유교자본주의론)이 결국 성리학의 제도적, 사회실천적 측면에만 주목한 것일 뿐이라 말한다. 성리학 본래의 이념마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는 땅도 척박(瘠薄)하고 역사도 짧으며 기원 전 4세기 후반까지 통일 국가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학문과 문화와 철학의 꽃을 피운 나라이다. 김주일 연구원은 그리스 문명의 비밀이 폴리스의 성립에 있다고 본다.



폴리스는 연설의 중시, 지식 공개에 대한 강조 등을 특징으로 했다. 이 가운데 지식의 공개에 대한 강조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형태를 요구했다. 그리스는 이집트로부터 기하학을, 수메르로부터 천문학을 받아들였는데 각기 실용적인 형태의 것을 학문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은 물론 증명의 요구를 통해 철학을 낳았다. 필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발견한 정신세계에 대한 다양한 변주와 비판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아직 정신의 왕국은 학문의 세계에서 그 성채(城砦)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장의준 교수는 기독교를 비롯한 일신교가 중세 문명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도들은 박해에 맞서 자신들의 종교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를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했고 이는 기독교 신학의 초석으로 작용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그리스화(철학화) 되었다는 점이다.



신의 비물질적 본성과 악의 존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 기독교의 주요 난제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물질적 이해와 이원론을 토대로 이 문제를 풀려한 마니교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답을 찾은 것은 신플라톤주의에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물질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비물질세계에 대한 개념과, 악은 긍정적인 실제가 아닌 선의 결핍 또는 부재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문제는 그가 선의 결핍이나 부재라는 개념으로 악의 실재성을 부정할 수 있었지만(이 부분 역시 관념의 유희이다.) 선(善)과 ‘선의 부재(不在) 또는 결핍(缺乏)’이 빚는 차이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선과 선의 부재가 같을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을 같다고 한다면 이는 그가 처음부터 관념과 환(幻)에 붙들려 있었음을 증거할 뿐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는 가졌지만 죄를 짓지 않을 자유는 가지고 있지 않으며, 구원은 예정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칼뱅이나 루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는 보편(普遍) 논쟁으로 유명하다. 인간이라는 보편자는 하나의 단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어딘가에 실재하는 실체를 가리키는가? 보편(普遍) 논쟁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논쟁이다. 필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이후에도 종교적인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종교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314 페이지) 정치의 종교화(종교를 정치를 위해 이용하는 것)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종교의 정치화(권력화하는 종교!)로부터는 아직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필자는 종교의 진정한 적(敵)은 합리주의(로 신까지 설명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종교인들이라 말한다. ‘인간적인 것의 발견: 르네상스의 사상’에서 임상훈 교수는 르네상스 시기가 저 멀리 있는 보편을 우리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라 말한다. 르네상스 시기에 사람들은 신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인간의 존재 근거를 찾지 않았을 뿐이다. 당연히 당시 사람들이 본질이나 보편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위대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과학의 탄생이다.(339 페이지) 무한(無限)의 발견이 대표적이다. 이는 원(圓)에 대한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필자에 의하면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등은 이 시기에 잉태된 결과들이다. 필자는 인간적이라는 말(르네상스의 한 특징인 휴머니즘을 염두에 둔 말)은 이상향을 제시하는 보편을 향해 끊임없이 뒤척이고 좌절하면서도 결코 이를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발 한 발 떼는 실존적 인간의 덕을 찬양하는 말이 아닐까? 말한다.



근대는 과학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전통 형이상학이 점차 퇴조하고 인식론이 부상(浮上)한 시대였다. 칸트를 빼놓을 수 없다. 인식 대상이 아닌 인식 주체를 중심에 두고 현상으로 주어지는 대상이 그 주위를 돌도록 한 칸트는 그로 인해 사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철학자로 불린다. 그는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선험적 종합판단 즉 새로운 지식을 주면서도 필연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영국 경험주의가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칸트에게서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주체(주관)의 틀이 작동함에 따라 경험을 하고 그와 함께 인식이 이루어진다.(365 페이지) 현대의 주체론은 칸트의 주체철학처럼 선험적 인식의 틀로 대상을 일방적으로 종합하고 구성하는 사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 속에서 형성되고 변환되는 사유이다.



성일권 박사는 모순적인 대의제(代議制)가 인민의 힘을 통해 근대민주사회의 정치적 초석을 세웠다는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이라는 역설적 현실을 지적한다. 문제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이다. 필자는 인간의 이성과 주체의식의 발현을 목표로 권위에 대한 용감한 도전과 위험을 무릅쓰는 정치적 투쟁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394 페이지) 현재 우리가 불완전하게나마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자연적인 진화나 경제발전의 결과도 아니고 개인주의나 시장의 불가피한 부산물도 아니라는 지적이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렇듯 더 크고 저 좋은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희생 뿐 아니라 적극적 참여와 숙의(熟議)를 요구한다는 필자의 결론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 시사(時事)적인 글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와 역사, 문명, 철학 등의 키워드로 논의를 해온 책의 유종의 미에 해당하는 글이기도 하고.



전편(全篇)이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편집자로 참여해 불교의 사상적 흐름을 개괄한 이정우 교수의 글에서 가장 큰 만족을 느꼈다. 개인적 취향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고 대상을 다루는 방법론에 대한 공감과 그로 인한 공명(共鳴)과 관련된 바이기도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골라 전체를 아우르는 문제의식으로 우리의 지금을 해명하는 글의 스타일은 역시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탕 때문이지만 이정우 교수의 글은 주목에 값한다.



불교를 다시 공부하고 싶게 함은 물론 철학적 사유에 몰입하게 하는 새 자극제였음을 말하고 싶다. 불교의 정치(精緻)함도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사유해야 하고 어느 면 아포리아 같은 난경(難境)에 처해 전개해 나간 노고(勞苦)의 결과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아공법유, 삼세실유, 일체개공, 유식, 생성과 본질 등의 사유는 숨막히는 치열함을 느끼게 해준 선택이었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벌써 현대 문명의 역사와 철학을 주제로 생성존재론, 현상학, 해석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이미지 시대의 철학 등을 다룬 2권이 기다려진다.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 이준구 교수의,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
이준구 지음 / 푸른숲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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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는 이준구 교수(서울대 경제학부)가 한겨레 신문과 가진 인터뷰 기사(2015년 1월 22일)를 읽었다. 이 교수는 최근의 세제 개편과 관련해 자신이 지난 1월 20일 언급한 부분에 후회할 만한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용기있는 열린 정신을 보였다. 이 교수는 1월 21일 인터뷰에서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정책을 주창하고 확산시켜온 직업으로서의 한국 경제학자들의 극단적인 보수 편향은 지금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자 기이한 현상이라고 언급해 주목을 끌었다. 이 교수는 “상속자본 등 세습자본주의는 우리가 미국보다 현저하다. 미국의 억만장자 중 세습은 10명 중 2~3명인데 한국은 8명 이상이라고 한다. 세습자본에 대한 피케티의 메시지가 서구에 비해 우리 사회에 더 잘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기업의 경영권 대물림은 올림픽 대표팀을 구성할 때 실제로 100m 뛰어보게 한 뒤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지에 따라 뽑는 거나 다름없다.”는 말로 우리나라 재벌의 경영권 세습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지난 2009년 츨간된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의 리뷰를 싣는다. 이 책이 나올 당시 우리 나라는 종부세 논쟁, 4대강 논쟁 등으로 한창 시끄러웠다. 당시에 비해 나아지기는커녕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 나는 좋은 경제학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시장(市場)의 탐욕과 맹목, 진보와 보수의 차이 등은 내 주된 관심사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다는 핑계로 원하는 만큼 책을 읽지는 못했다. 최근 상황이 많이 변했다. 이글루의 렛츠 리뷰를 통해 알게 된 이준구 교수의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는 나의 관심을 일정 정도 해결해 준 책이다.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는 이준구 교수가 국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새 정부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 글이다.(물론 참여정부의 실정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이준구 교수는 책의 곳곳에서 국가를 위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평범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의 잘못을 정죄(定罪)하는 통렬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나와 국가를 위하는 대승적인 저자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사명감을 갖고 있던 학자인 이준구 교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보수 일변도로 치닫는 사회 분위기이다. 저자는 그 분위기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절박감을 느꼈다고 한다.(6 페이지) 저자는 합리적인 시장주의자이며, 생산수단의 국유화나 징벌적인 부유세 징수를 주장한 적이 결코 없지만 단지 대운하 사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좌파 빨갱이 취급을 당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대응 수준이 얼마나 비이론적이고 감정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가 다룬 이슈들은 대운하 사업, 주택 시장이 지닌 여러 문제점들, 종부세 폐지의 문제, 교육 정책 등이다. 저자는 그런 문제들을 냉철한 이성과 학자적인 양심으로 돌파해 나갔다. 치밀함과 합리성으로 상대(새 정부)의 의도를 파헤치는 대목에서는 저자가 심리학에 능통한 학자 같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었다. 학자적 양심을 바탕으로 누구보다도 더 깊이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나는 종부세가 세금 폭탄이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종부세 납세자들이나 언론들, 그리고 종부세와 전혀 무관함에도 종부세를 폐지해야 한다고 믿었던 서민들 - 이는 그 자체로 한 바탕 코메디가 아닐 수 없다. - 모두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의 3부인 ‘종부세, 그 경제학의 진실’ 부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비우고 그 부분을 읽는다면 종부세에 대한 숱한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고소득층이 주로 내는 종합소득세나 상속세는 세무사의 농간 여하에 따라 얼마든 납세액을 줄일 수 있지만 종부세는 보유 부동산을 처분하기 전에는 납세액을 줄일 수 없다는 점이 종부세를 한사코 반대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며 ‘만약 종부세 부담을 쉽게 회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면 집 부자들이 그렇게 격렬하게 반대투쟁에 나서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123, 124 페이지) 나는 이 말에 대해 어느 누구도 쉽게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믿는다.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를 읽으며 많은 점을 배우고 공감했다. 온건한 시장주의자를 좌빨로 몰아 붙이는 세태가 안타까우며 소통 부재의 상황, 진실 왜곡이 너무도 일상적이기에 바로 알고 바로 보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생각 등등... 다만 경제에 대한 과도한 믿음 때문에 오늘의 사태를 자초한 유권자들에 대해 저자가 한 마디의 비판이나 지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철학자 이정우 교수는 최근 철학 아카데미에 실은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이란 글에서 대중들의 바람을 실현시켜 주지 못한 무능력한 정부에서 그런 바람을 아예 거부하는 수구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정부를 선택한 것은 어리석은 대중들이고 따라서 결과에 대해서는 그들이 책임져야 할 뿐이라는 말을 했다.



* 이준구 교수는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노무현 정부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용기를 내 노무현 정부를 두둔하지 않고 있었다. ‘3불 교육정책’이나 종합부동산세 등 당시 정부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대목들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보수 언론과 보수적 지식인으로부터 공격받고 몰매를 맞았다.”고 말했다.(2015년 1월 21일 한겨레신문)



 
 
 
별 헤는 밤 천문우주 실험실 - 별 하나에 낭만, 별 하나에 과학
김지현.김동훈 지음, 강선욱 그림, 박승철 사진 / 어바웃어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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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밤 천문 우주 실험실’은 실험으로 별과 관련한 이해를 돕는 책이다. 본문 사이 사이에 소개된 실험은 대체로 쉽게 실시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별이 반짝이는 이유, 화성이 붉은 이유 등과, 별의 거리를 재는 연주시차(年周視差)에 대해 알게 되고 페트병으로 태양의 크기를 재고 성운 속의 티끌이 어디에서 오는지 등을 알게 되는 등 기발하고 새로운 실험들이 독자의 관심을 끈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우리가 흔히 봄철 별자리, 여름철 별자리라 부르는 것은 그 계절의 저녁에 동남쪽 하늘에서 잘 보이는 별자리이고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는 전체 88개 가운데 약 50개이며 하룻밤을 새면 세 계절의 별자리를 웬만큼 볼 수 있고 별의 한 등급 차이는 2.5배의 밝기 차이로 나타난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된다.



저자가 말했듯 250만년 전 안드로메다 은하를 떠난 기나긴 종착역이 우리의 눈인 것은 신비와 함께 장구한 시간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천문학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 관측의 비중이 크다. 별의 실체를 접하는 데 방해물로 작용하는 빛 공해, 별을 보려면 각별히 주의해 유지해야 하는 암적응 상태, 대물렌즈가 맺은 상을 접안 렌즈로 확대함으로써 멀리 있는 물체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게 하는 망원경의 원리 등이 모두 관측과 밀접한 사안들이다.



2007년 태양계의 행성들 중 명왕성이 왜소 행성으로 분류되어 소행성 134340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잃은 것은 그와 비슷한 소행성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지구와 관련해 과학자들을 괴롭히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지구의 많은 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여러 가설들 중 지구 생성 초기에 태양계 가장자리에서 혜성이 날아와 지구에 충격을 일으킬 때 열이 생기고 혜성의 물이 증발해 공기 중에 수증기 형태로 머물다가 비가 되어 내렸고 그것이 모여 바다가 생겼다는 가설이 흥미롭다. 지름 200km 정도의 혜성 200개 정도가 충돌해야 생길 수 있는 사실이라 한다.



흥미로운 점은 북극이나 남극에서는 천정을 중심으로 별들이 돌기만 할 뿐 뜨거나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달이 뜨는 시각의 변화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초승달은 이른 아침에 뜨고 보름달은 해질 무렵에, 하현달은 자정 무렵에 뜨는데 이때부터 달이 뜨는 시각이 점점 새벽으로 가게 되고 그믐에 가까워지면서 새벽에 뜨게 된다.



박석재 박사의 ‘하늘을 잊은 하늘의 자손’에 초승달은 초저녁 달이라는 내용이 있다.(62 페이지) ‘별 헤는 밤 천문 우주 실험실‘은 초승달이 이른 아침에 뜨지만 밝은 태양빛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해가 진 뒤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하늘을 잊은 하늘의 자손’은 상현달, 그믐달, 하현달, 보름달 등에 대해서는 어느 시각에 뜨고 어느 시각에 진다는 표현을 하지만 초승달에 대해서는 어느 시각에 뜬다고 하지 않고 초저녁 달이라고만 표현하고 있다. 다만 초승달은 해가 질 때 해가 근처에 머물다가 해가 지면 곧 따라 진다는 표현을 한다.



초승달은 초저녁 달이라는 표현이 초저녁에 뜨는 달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해가 질 무렵 떴다가 해가 지면 곧 따라 질 만큼 짧게 우리에게 모습을 보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잊은 하늘의 자손’은 달이 뜨는 시각과 지는 시각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초승달은 (이른 아침에 뜨지만 햇빛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해가 지면 보이기에) 초저녁 달이고 해가 지면 따라 진다.



상현달은 해가 질 때 남쪽 하늘 높이 더 있다가 자정 무렵 지고 보름달은 해가 질 때 뜨고 해가 뜰 때 진다. 하현달은 해가 뜰 때 남쪽 하늘 높이 떠 있다가 정오쯤 진다. 그믐달은 해가 뜰 때에 근처에 머물렀다가 해가 떠오르면 사라진다. 한편 월식은 보름달일 때에만 일어난다. 달의 공전 궤도면은 지구의 공전 궤도면에 대해 약 5도 기울어져 있는데 그렇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한 달에 한번씩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게 된다.



사람이 숨을 쉴 때 폐가 커졌다 작아지듯 태양도 아주 작게나마 진동을 한다. 이 진동을 분석해 태양 내부의 성질을 알 수 있다. 태양은 핵, 복사층, 대류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심부인 핵에서 형성된 빛 에너지는 밀도가 높은 복사층을 지나 바깥쪽인 대류층으로 빠져 나오는데 100만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1775년 철학자 칸트는 은하수 외에 우주 공간 구석 구석에 희미한 빛 덩어리로 보이는 성운을 보고 그것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별무리가 아닐까 여겨 섬 우주라 불렀고 외부 은하의 존재를 예견했다. 태양은 우리 은하 중심에서 약 2억 7천만년 광년 거리에 있으며 초속 220km의 속도로 은하 중심 주위를 회전한다. 태양의 나이가 46억년 정도이니 지금껏 우리 은하 주위를 스무 번 넘게 회전한 것이 태양이다.(태양이 우리 은하 주위를 한번 회전하는 데 약 2억 2600만년 정도가 걸린다.)



별도 인간처럼 생성소멸한다. 우주 공간 구석 구석의 가스와 먼지로 된 성운 속에서 별이 생긴다. 이곳의 한 지점에서 밀도가 높아지면 주위의 물질을 끌어당겨 덩어리가 커진다. 크기가 점점 커짐에 따라 중심부는 수축해 뜨거워진다. 새로 태어난 별은 계속 되는 중력 수축으로 중심부의 온도가 1000만도에 이르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며 질량 결손에 의해 빛을 낸다. 별 내부의 핵융합 반응이 만드는 에너지에 의해 팽창하려는 힘과 중력에 의해 수축하려는 힘이 균형을 이루면 수축이 멈추고 안정된 별이 되어 자리를 잡는다.



태양은 적색거성으로 변해 늙어갈 것이다. 몸집은 더 커지지만 표면 온도는 현재의 5500도에서 3000도 아래로 떨어지고 밝기는 수천배 이상 올라간다. 수성을 삼켜버릴 정도로 부풀어 오르고 지구의 표면 온도는 750도 이상이 될 것이다. 바닷물은 증발하고 하늘은 수증기와 구름으로 뒤덮일 것이다. 그러면 지구는 현재의 금성처럼 뜨겁고 메마른 행성으로 변해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다.



별이 일생을 마치면서 날려 보낸 부스러기는 우주 공간을 떠돌다가 다른 성운과 만날 수 있다. 성운의 밀도가 높아지면 중력에 의해 뭉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새로운 별로 거듭나는 것이다. 초신성은 은하를 이루는 별을 모두 더한 것보다 밝은 빛을 내며 죽어가는 별이다. 지금껏 망원경이 발명된 이래 그 존재가 발견된 적이 없다. 1054년 황소자리에서 나타난 초신성의 잔해가 지금도 우주 공간을 퍼져 나가고 있다.



초신성은 두 종류로 나뉜다. 자체 폭발하는 Il형과 주변의 별에서 물질을 빨아들여 폭발하는 Ia형이 그것이다.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괴물이라는 생각은 오해이다. 블랙홀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효과들은 블랙홀의 강한 중력 영향권 가까이에 접근했을 때에나 겪을 수 있다. 멀리 떨어진 물체가 받는 중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빛마저도 빠져 나올 수 없는 블랙홀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물질은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그로 인해 굉장한 마찰 에너지가 생기고 1억도 이상으로 뜨거워질 수 있다. 이렇게 뜨거운 물질은 X선 형태의 복사 에너지를 방출한다.



‘별 헤는 밤 천문 우주 실험실’은 별자리에 대한 내용, 별과 은하, 우주의 원리 및 실험 등을 포함시켜 전체적인 내용을 아우른 책이다. 나는 별자리에 대한 정보보다 별과 은하, 우주의 구성 원리에 더 초점을 두고 책을 읽었다. 이 책 이전에도 나는 늘 그래왔다. 천문학보다 우주론에 더 관심이 큰 것인 셈이다.



천문학은 앞에서 말했듯 관측의 의미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학문이다. 천문학의 대상은 직접 실험실로 가져와 만져볼 수 없는 만큼 하루 종일 볼 수도 없는 대상들이다. 그렇기에 가설과 법칙을 만들어 별을 연속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천문학, 하면 앞서 언급한 ‘하늘을 잊은 하늘의 자손’의 저자인 박석재 박사의 다른 책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의 서문이 생각난다.



“모든 자연과학이 다 그렇듯이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도 암기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저자의 다른 책인 ‘별과 우주와 은하가 진화하는 원리’에서 언급된 것처럼 별과 우주와 은하가 진화하는 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슷비슷한 천문학 책을 계속 읽는 것은 전공을 한(천문학 책을 쓴 사람들은 대부분 전공을 한 사람들이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도 설명하는 방식과 내용, 구성 등이 다른 것을 두루 접할 수 있어서이다.



지금 읽고 있는 ‘작은 수학자의 생각 실험’과 ‘미적분으로 바라본 하루’(2015년 1월 27일 출간)를 비교하면 유익하고 유의미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문학 책들 역시 그런 비교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좋은 천문학 책들을 찾아 떠도는(어디 천문학 책만이겠는가만) 내 모습이 유성(遊星)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우주 공간의 먼지인지도 모를 일이다. 



 
 
 
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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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마이너스‘는 1980년에 태어나 혼란과 소용돌이의 한복판이었던 2000년대 초 서울대 미학과 학생이 된 손아람의 장편 소설이다. 미학은 철학의 한 분야이고 인식론과 상관이 깊은 학문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생각, 체 게바라, 칸트, 세계화, 습격, 대공분실(對共分室), 자유 시장, 죄수의 딜레마, 투쟁선봉대, 패배, 좌파 성향, 자본의 논리, 용산재개발 참사, 이라크 파병 등 저자의 전공인 미학과 연결되어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부분들은 하나 같이 심상치 않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 시대가 격동기였음을 증거한다. 그렇기에 소설의 무게감은 작지 않다.



처음에는 수필처럼 단편적이고 고립적인 이야기들이 무질서하게 배치된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감정이입을 하게 하고 흥미와 의미에 빠지게 하는 소설 제목인 ’디 마이너스‘의 디 마이너스는 엄혹하고 치열하고, 야만적이면서도 낭만적이었던 당시를 상징하는 성적표이자 메타포라 할 수 있다. 이야기는 학생 운동에 참여한 주인공 태의가 대공(對共) 담당 형사의 회유를 이기지 못하고 이름을 판 동료 진우와의 인연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학생 운동을 하다가 억울한 희생양이 되고 한쪽 눈을 실명하기까지 한 진우는 감성과 이성을 두루 가진 공학 전공자였다. 진우에 대한 죄책감에 고민하던 태의는 시간이 많이 흘러 그의 결혼 초대 청첩장을 받는다.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음을 충분히 이해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 내가 주의 깊게 접한 부분은 언어 문제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겠지만 특히 철학의 한 분야인 미학은 말을 다루는 것이 본연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말로 배울 수는 없다는 말은 말로 배운 것이었다는 말(10 페이지), 겸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어야 하지 단어를 선택하며 발휘되는 게 아니라는 말(15 페이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모두 진심일 수 있지만 모두 진실일 수는 없다는 말(44 페이지), 언어 폭력(性的 실언),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원죄와 곱게 자란 수치심 따위를 수납할 공간이 없어 보였다는 말(98 페이지), 논쟁의 기술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논제는 뒤로 밀려나고 수준의 우열을 가리는 일이 중요해지기 마련(121 페이지)이라는 말,



’거짓말은 모두 젖어 있다‘는 제목, ’해결 방법 1‘에서 피력된 다음의 말: “왜 모두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보트에서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장롱에 침대까지 챙겨 들고 보트에 탔느냐는 것입니다.”란 말에서 나타난 비유, 그리고 촌철살인의 지혜(154 페이지), “정신이 골절된 사람들”이라는 표현(193 페이지), 자백이 아닌 자폐(196 페이지), “감정에 질식사”한다는 표현(198 페이지), “인간을 상처 입히는 건 언제나 말”이란 말(219 페이지) 등...



사실 이 부분들은 말과 사물, 말과 행동, 말과 진실의 관계를 밝히는 사유의 보고(寶庫)라 해야 옳을 것이다. 작품에는 곳곳에 저자의 전공과 사유의 내공을 만끽하게 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푸코의 영향을 논할 수 있을 권력은 무차별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유(90 페이지), 인문학도는 여자를 숭배한다는 말(265 페이지), 자신을 일러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라 부른 1980년대, 1990년대의 말들을 스스로의 장엄한 소멸을 기리는 애도사라고 표현한 부분(484 페이지) 등.



소설을 읽으며 참 많은 곡절과 충격을 견디고 겪어왔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가슴에 남는 아프게 보아야 할 캐릭터 진우 부분을 읽으며 그랬다, 그는 학생운동을 떠나 열심히 공부하고 무사히 졸업해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반성문을 쓰라는 동료, 후배들의 설득을 끝까지 들어준 뒤 결국 반성문 쓰기를 거부하고 미소를 지은 사람, 자신을 판 동료 학우를 문제삼지 않은 의인이라 할 수 있다.



진우는 후배 여학생 수리와 결혼을 한다. 철학 박사인 수리는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에 들어간다. “공학도인 진우가 삼성전자와 맞서 싸우는 동안 인문학도인 나는 무얼 했는가? 나는 삼성전자를 위해 일했다... 세계의 부조리를 거칠게 꾸짖던 손으로 세계 최고의 제품을 칭찬하는 유려한 문구를 썼다. 그런 나에게 진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이처럼 좋아했다.”(520 페이지).. 진우는 태의에게 후원을 요청한다. 이에 태의가 삼성전자 홍보실 직원에게 진심으로 돈을 받고 싶냐고 묻자 진우는 이렇게 답한다.



“삼성전자 홍보실에서 나온 돈으로 삼성전자의 목을 조르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안 그래?” 세상이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크게든 작게든 변하고 있다. 문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을 해야 할 급격하거나 혁명적인 변화이다. 진우와 태의는 만남, 그리고 대화, 사고(思考)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삶의 어려움, 그리고 얽히고 설킨 인연(因緣)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 하나에 대한민국을 다 담으려는 탐욕을 부렸”으며 자신의 이야기가 “수십명의 사람들에 의해 쓰였”고 “엄밀하게 말해 이 이야기는 결코 소설이 아니“라고 말했다. 소설을 읽으면 어김 없이 정치, 사회적 연관성을 찾으려 애쓰곤 하는데 ’디 마이너스‘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자체로 훌륭한 사회학적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한 것은 중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골라내는 일이다. 이 부분은 단점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정밀하게 그려내는 작업이 필요하고 그런 작업을 기다리는 일이 필요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