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계숙 평론가의 ‘우울의 빛’을 읽고 있다. 책 머리에서 저자는 “이해하기 힘들면 짜증부터 내고 자기방어적인 신경질을 감추지 않는 지적 천박함이 갈수록 도를 더하는 곳에서, 텍스트를 경유하여 벌인 정신의 고투와 개진을 밤 새워가며 최선을 다해 한 글자 한 글자 적는 일이 이 세계 바깥의 별스러운 행위인 양 이해와 공감을 바랄 수 없고 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체험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라 적었다.



전문가가 아닌 입장으로 문학 평론집을 꽤 읽는다고 자부해 왔지만 아직 강계숙 평론가의 책은 한 권도 완독하지 못했다. 미언(迷言), 미언(未言), 미언(美言), 미언(微言)이라는 참신한 제목의 글들을 선보인 ’미언‘이라는 제목의 평론집을 사려 하다가 시(詩) 전문 평론집에 자신이 서지 않아 망설이던 중 지난 2월 22일 한 중고 서점에서 ’미언‘ 다음에 나온 ’우울의 빛‘을 사게 되었다. 저자는 미언은 수수께끼에 가까운 말(謎言), 자신을 미혹시키고 매혹시키기도 한 말(迷言), 미래의 어느 때엔가 완성될 말(未言), 그렇기에 작고도 아름다운 말(微言/美言), 그리고 그 모든 말과 함께 숨 쉰 자신의 말이라 밝힌 바 있다.



책 머리에 적힌 이해와 공감을 바랄 수 없고 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체험하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 부분보다 나를 더욱 공감하게 하는 부분은 ”2년 넘게 글을 쓰지 못했다.“는 글이다. 저자는 사막 같은 공허의 한복판에 오직 자신 혼자 있는 느낌이라는 말과 글쓰는 일은 내상(內傷)을 입는 일이라는 말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우울의 빛‘은 내가 이해하기 벅차지만 저자가 밤새 고투하며 한 자 한 자 적어 나갔을 글들을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라 타박할 수는 없다. 내 이해가 부족하고 내공이 모자란 탓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해석한 시인들은 모두 자신만의 언어, 개성, 이해를 선보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현대 음악을 생각했다. 기존의 고전, 낭만의 문법으로 곡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 불협화음과 무조 음악 등의 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었듯 현대 시인들은 더 이상 서정적이고 단아한 시들을 쓰는 데 머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그것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표면화되길 기다리는 시의 별자리들은 각기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품은 채 넓게 산포되어 있다.“(149 페이지)고 말한다. 배움으로 치자면 이 부분이 서언(序言)보다 더 본격적인 도움이 된다. 물론 인용한 글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라는 말로 반가움을 느끼게 하는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감도 느끼게 한다.



얼마 전 읽은 김혜영 평론가의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에서 확인한 바 역시 시인의 새로움과 독창성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진은영 시인/ 평론가의 ’문학의 아토포스‘를 읽으며 확인한 바는 수많은 철학 및 문예 이론서들의 산적(山積)이었다. 그런데 수로 치자면 그에 못 미치는 ’우울의 빛’을 읽으며 쓰는 것도 힘들고 읽는 것도 힘들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물론 두 평론집을 비교하는 것에 내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나누자면 ‘문학의 아토포스’는 내 입장에서 읽기가 쉽고 ‘우울의 빛’은 ‘문학의 아토포스’에 비해 덜 그런 것은 후자가 시 전문 평론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울의 빛’이란 제목 때문은 아니고 사는 것이 참 우울하고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희종 교수가 ‘생명’에서 말했듯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 아닌 깨어 있음이 아닐까 싶다. 한 순간이라도 경계(警戒)를 소홀히 하면 곧 탁류(濁流)에 휩싸이는 무대가 삶이다. 우희종 교수는 생명의 특성을 개체고유성과 개방성으로 들며 아상(我相)을 새롭게 해석했다.



아상을 개체고유성의 불교적 표현으로 보는 우희종 교수는 ‘주위와의 관계에서 열려 있는 아상’에 의미를 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독창성을 갖춘 자신만의 글을 위해 주위와의 관계에서 열려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일 테다. 자신의 글을 위해 수많은 글을 참조하되 아니 참조해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일 테다.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푸른사상 평론선 11
김혜영 / 푸른사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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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정신분석, 문학 평론과 정신분석, 기독교와 정신분석.. 이런 연관 관계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가운데 정신분석과 기독교의 유사성에 생각이 가장 많이 간다. 그런데 그 이전에 정신분석이 프로이트가 히스테리라는 신경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페미니즘과 정신분석’ 97 페이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에 실린 ‘히스테리: 여성의 육체 언어/ 권력/ 욕망‘에서 임옥희 교수는 히스테리를 “여성이 죽거나 미치지 않고 가부장제에서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망의 다른 표현“(109 페이지)으로 정의했다.



이런 점은 이명호 교수의 ’누가 안티고네를 두려워 하는가‘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정신분석학은 히스테리 연구에서 출발했다.’(97 페이지) 이명호 교수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은 근원적인 의미에서 히스테리를 겪고 있다고“ 보았다.(100 페이지) 이 부분에서 내가 보는 것은 정신분석과 기독교의 유사성이다. 기독교의 원죄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원죄를 지닌 존재로 본다. 물론 정신분석은 인간이 지닌 히스테리는 정도의 차이를 지닌다고 보았고 기독교는 전적인 타락을 주장한다.(칼뱅의 다섯 교의 가운데 하나인 전적 타락total deprivacy을 상기하자. 웨슬리역시 인간은 모든 면에서 부패했다고 말했다.)



임홍빈 교수의 '수치심과 죄책감‘(2013년 6월 출간)을 보자. 이 책에서 저자는 ”무엇보다 인류가 아담의 죄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모든 개인이 다른 모든 개인의 역사와 어떤 의미에서 본질적인 연관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말과 함께 “한 개인의 역사와 운명에 대해서 인류 전체가 무관심할 수 없다는 인식은 ‘종교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이때 내가 지금 이 순간에 한 인간, 즉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투명한 자기관계에 의해서 하나의 통일된 자기의식을 통해 만족스럽게 실현되거나, 경험될 수 없다.”는 말로 원죄를 새롭게 해석했다.



김혜영 교수의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은 본격적으로 원죄를 다룬 책은 아니지만 뚜렷하게 차이나는 두 개의 원죄관(原罪觀)을 소개해 주목된다. 1부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에 실린 ’미친 예언자의 고백 - 로버트 로웰의 시적 화자 분석‘에 의하면 “니체는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기독교 교리의 근본인 원죄의식을 꼬집는다. 니체에 의하면 죄악과 과오는 인간 현존 그 자체에 속하는 현상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 뿐이다.”(81 페이지) 반면 로버트 로웰은 “하느님을 짓밟는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념이 얼마나 허구적일 수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83 페이지)준 시인이다.



책 제목이자 1부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을 잘 보여주는 단서가 아닐 수 없다. 정신분석을 무엇을 드러내는 학문으로 볼 수 있을까? 분열, 환상이 대표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정신분석을 “유용한 틀”(’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87 페이지)로 삼아 문학 작품을 분석한 정신분석 문학 평론에서는 사정이 달라질 법하다. 1부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2부 ’폭력과 유머‘, 3부 ’트라우마와 여성시‘로 구성된 ’김혜영 교수의 책에서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부분은 3부 ‘트라우마와 여성시’이다.



바로 그 3부를 논하기 전에 정신분석 시 비평집이기에 시에 대해, 그리고 시인에 대해 시인이기도 한 문학 평론가 저자가 어떤 분석과 정의를 내리는지 알아 보자. 새로움은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 낱말이다. 그것은 독창성을 의미한다.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하는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자유에의 의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진입하는 나만의 언어를 갖고 싶은 욕망이다.”(52 페이지)



그러나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시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새로 태어나는 환상이며, 그 환상은 스스로를 죽이고 새로운 육체를 얻으려 하는 잔혹한 욕망”(250 페이지)이라는 정의이다. 정신분석은 특별히 환상을 논하는 학문이다. 이명호 교수가 ’누가 안티고네를 두려워 하는가‘에서 남자들의 포르노에의 몰입을 남근적 어머니에 대한 공포와 초월의 환상에 의한 것으로 분석(151 페이지)했다면 김혜영 저자는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언명을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a(부분 대상)라는 환상 속의 존재를 사랑하고 여자는 현실 속의 남자가 아닌 상징적 男根을 사랑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남녀간의 사랑이나 섹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환상을 설명했다.(21, 22 페이지)



새로움에 대한 정의는 “시인은 남들이 가질 수 없는 자신만의 귀와 눈이 있어야 한다. 절벽을 기어오르는 연어처럼 세상을 거슬러 갈 용기와 자만심을 가져야만 독자적인 시의 지평을 열 수 있다.”(258 페이지)는 말과도 상응한다. 이는 ‘황하의 순례자‘란 글을 통해 이재훈 시인에 대해 “이 세상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나만의 시원, 나만의 언어 찾기에 골몰”(136 페이지)한다고 말한 것과도 함께 읽힐 수 있다. “한국의 여성 시인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글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할 듯 하다. 저자는 시적 세계의 협소함으로 일상 안을 맴도는 것을 한국의 여성 시인들의 한계로 지적한다.(264 페이지)



이는 서정시를 염두에 둔 평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저자는 서정시(를 읽는 것)에 대한 고충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서정시를 읽을 때면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느끼지만 때로 너무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한다. 시가 그런 것 아닌가? 할 말이 없어지는 그 무엇, 그러다가 그래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61 페이지) 나는 그래도 저자가 말한 현대시의 입지에 마음이 간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와 따스함이 효율이라는 잣대 아래 무시되는 현대에서 시인의 입지는 너무 좁다.”(64 페이지)



그렇게 좁은 입지를 극복하고 아니 극복하기 위해 (후술할) 자유분방한 성적 사유체계를 드러낸 황병승 시인 같은 상상력, ‘통제 구역’이란 시를 통해 “트라우마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아주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시적 포즈를 취“(277 페이지)했다는 김영미 시인 같은 상상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안효희 시인의 ‘꽃잎 같은 새벽 네시’를 분석한 ‘꽃과 독(毒)의 공존’에서 “꽃이나 죽음, 가족사에 대한 서사를 벗어나 고유한 자신만의 시적 방법론을 더욱 견고하게 구축할 필요가 있다.”(250 페이지)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남성 시인들에 대해 저자는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적실성을 잃었다 할 수 있다. 여성 시인들 사이에서 호명된 ‘모래의 밥상’의 시인인 노준옥 시인에 대해 저자는 “삶의 억압이나 모순을 토로하기보다 그것들을 가볍고 경쾌하게 뛰어넘어가는 보폭을 보여”주고 “각 시들이 독특한 리듬을 끌고 가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평을 내린다.(252 페이지) 저자는 황병승 시인에 대해 “한국 현대시에서 아직도 서정시가 대세인 상황에서, 자유분방한 성적 사유체계를 드러내어 신선한 충격과 변화를 꾀한 황병승 시인이 있어 다행스럽다.”(27 페이지)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황병승 시인의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로 인한 평가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강계숙 평론가가 두 번째 평론집인 ‘우울의 빛’(2013년 출간)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이 시집에 대한 글을 썼다는 성취감이라는 사실이다.(‘우울의 빛’ 7 페이지) 강계숙 평론가에 의하면 “비평가의 직함을 얻은 후부터 그(황병승)에 대한 평문을 쓰는 것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였다.“



저자는 기존의 가치와 체계를 전복하기도 하고 탈주를 꿈꾸기도 하는 의식의 창을 열어둘 때 새로운 서정의 깃발이 나부끼게 될 것”(264 페이지)이라는 말로 새로움, 그리고 새로운 서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신분석을 분석 틀로 한 시 비평집인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은 당연하게도 무의식과 시에 대한 논의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저자에 의하면 ‘시인에게 있어 광기는 새로운 예술 창작의 동기가 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인의 삶을 파괴시키는 극단“(69 페이지)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내가 보는 것은 당연히 분열이다. 이 글은 자연스럽게 ”시 속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가 난무하지만, 삶의 뜰 안에서는 황폐하고 착박한 경우가 많“기도 하고 ”거친 내면을 토로한 시인은 시와 반대로 삶이 오히려 따스하고 배려가 넘치는 경우도 있“(53 페이지)는 시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나를 이끈다. ”시가 아름다운 사람도 멋있지만 시와 함께 고고한 인격을 갖춘 시인이 그리워진다.“(161 페이지)는 말을 한다. 그리고 시와 무의식의 관계: 저자는 ”시가 무의식의 대변일 수 있지만 시는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구도와 논리성을 보여“주며 ”시 속에는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가 혼재할 수 있다.“(91 페이지)고 말한다.



그리고 ”시인이 시를 창작할 때 그의 내면에서 작동되는 메커니즘은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와 혼합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할 때 압축과 전치를 언급했고, 라캉은 이것을 은유와 환유의 이론으로 설명하듯 시인 역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은유와 환유를 사용하여 의식과 무의식을 교묘하게 축조한다.“(16 페이지)는 글. 또한 덧붙여야 할 허혜정 시인! "사회적 제약이나 편견에 아랑곳 없이 당당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222 페이지)인 허혜정 시인과 얽힌 개인사를 풀어놓은 저자의 허심탄회를 보며 나 역시 허혜정 시인의 시론집인 ’에로틱 아우라‘를 읽기로 했다는 개인사를 말하고 싶다.



이 책에 예의 황병승의 시를 통해 본 엽기성의 미학을 중심으로 한 ’퀴어의 감수성‘이란 글이 있다. ’현대시와 포르노그래피 신드롬‘, ’여자인가 죄인인가 광인인가 - 여성주의 비평을 말하다‘ 등도 흥미롭게 읽힐 ’에로틱 아우라‘라는 책.



저자에 의하면 허혜정 시인은 “대화와 인문학적 가치가 존중되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라다가 여성의 무한희생을 요구하는 결혼제도에 편입되어야 했던 충격, 표현과 인식을 절대가치로 여기는 그녀의 일에 대한 가족의 몰이해 속에 그녀는 공부할 때마다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며 왜 그래야 하는가? 분노하며 묻곤 했다.”고 한다.(225 페이지) 저자는 “시심(詩心)이 세속에 얽매인 독자에게 평온한 안식을 선물한다. 시를 읽는 즐거움에 겨울이 따스하다. 봄빛이 바다 너머에서 나의 서재로 밀려올 것”(241 페이지)이란 말을 한다. 위로이고 시(詩)의 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이 봄빛이 서재로 밀려올 때이다. 시를 읽어야 할 것이다.



 
 
Agalma 2015-02-26 22:32   댓글달기 | URL
제가 본 황병승 시인은 퀴어(여성도 남성도 아닌 중간지대)를 가장 강력하게 탐험한 개척자죠. 남성-여성 외피/내부성을 모두 찢으며 나아가는...
한국의 여성 시인들의 현재 한계는(서정시 부분은 생략) 남성의 외피를 찢거나, 더 철저히 남성의 외피를 덮어쓴, 아니면 여성성 자체를 파괴하는 이 세 종류의 경향밖에 안보여요. 언어적 탐구(황병승 시인의 환유의 성취같은)도 기대해 볼만한데 아직 그 탐구들이 확연히 안 보여서 안타까워요.

흔적 2015-02-26 22:28   URL
문학 평론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별 거 아닌 저와 달리 님의 분석은 평소 문학 평론의 소재가 되는 시, 소설 등에 일관된 일정 수준의 안목을 갖추었다고 생각됩니다. 부끄럽습니다...그리고 감사합니다...

Agalma 2015-02-26 22:31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평소 제가 생각하는 바를 흔적님 글들 보며 정리가 돼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흔적 2015-02-26 22:32   URL
아,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생명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주제탐구세미나
우희종 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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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주제 탐구 세미나의 한 권인 ‘생명’은 면역학자(우희종 교수), 과학철학자이자 진화학자(장대익 교수), 미술학자(김형숙 박사)가 각각 필자로 참여한 책이다. 생명과 삶의 밀접성을 지적하는 우희종 교수는 생명체(생명 현상을 보이는 물체)와 생명(길, 진리, 불성, 영성, 본래면목, 자성, 한 마음 등으로 불리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현대과학은 생명체를 물질적 형태를 가지고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대사작용과 자기 복제를 하며 진화하는 특성을 지닌 것으로 정의한다.(참고로 대부분 DNA, 드물게는 RNA 유전자를 단백질이 보호하며 싸고 있는 유기체인 바이러스는 물질 대사 외에 에너지 대사에 필요한 효소가 없지만 숙주 세포에 자신의 유전 정보를 감염시키면 복제가 가능하고 세포로서의 기능을 하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특징을 갖는다. 단백질은 특정 유전자에 상응하는 암호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다.)



우희종 교수는 생명체를 개체고유성과 개방성을 지닌 존재로 본다. 필자도 말했듯 개체고유성과 종 다양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필자는 진화를 최선의 상태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진화에는 목적성이나 의도성이 없다. 개체고유성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도 모두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필자는 아상(我相)을 개체고유성의 불교적 표현으로 본다.(필자에 의하면 개체고유성의 기원은 욕망이다.)



필자는 생명체의 진화는 ‘관계이자 과거로부터의 긴 시간의 전개에 따른 창발적 적응’을 의미한다고 말한다.(50 페이지) 진화는 주어진 조건에서 가장 안정된 것이지 가장 좋은 결과를 향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53 페이지) 필자는 인간이 유전자의 확산을 위한 운반체에 불과하다면 같은 논리로 유전자 역시 Adenine, Guanine, Cytosine, Thymine이라는 물질의 확산을 위한 운반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57 페이지)



필자는 DNA가 아닌 RNA가 생명의 주인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껏 RNA는 분자생물학에서 일시적 정보 전달체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필자는 린 마굴리스가 밝힌 미토콘드리아(진핵 세포 내의 에너지 생산 기관)의 기원이 외부에서 진핵 세포 안으로 들어간 생명체와의 공생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생명의 상의상존성(相依相存性)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데니스 노블에 의거해 생명이란 단순한 음표가 아닌 모두 음들이 어우러져 창출되는 하나의 음악과 같다고 말한다.



필자는 생명체의 개방성을 무상(無常)에, 개체고유성을 아상(我相)에 대응시킨다. 필자는 생명현상이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인 상태를 유지하는 창발적인 새로운 질서로 정의한다.(72 페이지) 주목할 것은 필자가 아상을 고통의 원인으로 보기보다 다양한 존재가 서로의 차이를 보면서도 차별 없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인간의 욕망을 중독된 욕망 즉 만족을 모르는 욕망으로 본다. 필자는 동물과 인간의 욕망이 지닌 차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파악한 라캉보다 욕망을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처럼 일종의 실재를 생산하는 힘과 같이 내재적인 것으로 보면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통해 좀 더 상황적 관계로 파악하는 들뢰즈의 입장이 최근이 통합 생명과학으로서의 이보디보(evo - devo: 진화발생생물학)적 설명에 더욱 가깝다고 설명한다.



필자는 합리성을 이성에 근거한 합리성, 감성에 근거한 합리성, 영성(靈性)에 근거한 합리성으로 나누며 그것들이 주체적이고 행복한 삶을 위해 함께 필요함을 역설한다. 깨어 있음이 갖추어지지 않은 깨달음을 질곡(桎梏)으로 표현하는 필자는 ‘주위와의 관계에서 열려 있는 아상’에 의미를 부여한다.(102, 103 페이지) ‘나’라는 아상이 없으면 화엄 세계는 없지만 단지 그것에 집착하고 머무르려는 물든 마음을 경계할 것을 주문하는 필자는 ‘나’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나는 생명은 주위와의 관계 속에서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인 창발적 형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장대익 교수는 생명과 진화라는 글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이 가진 생명과의 관계를 집중 논의한다. 다윈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생명의 나무라는 아이디어와 자연선택이라는 아이디어이다.(125 페이지) 다윈에 의하면 인간과 침팬지는 600만년 전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 자연선택은 변이, 경쟁, 유전성 등을 보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필자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이야기한다. 이 책에 나오는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은 논쟁적이다. 필자는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적시하는 데서 그치는 책이 아니라 유전자가 이기적인데 어떻게 그로부터 이타적인 인간이 나올 수 있는가를 논한 책이라 설명한다.(150 페이지) 이타적인 행동마저도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도출된다는 것이 도킨스의 결론이다.



윌슨을 비롯한 사회생물학자들이 이 세계의 수많은 기능을 보며 이것들은 모두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이라고 본데 비해 건축에서 말하는 스팬드럴(spandrel)처럼 역삼각형 모양의 장식을 우연한 부산물로 본 사람들이 굴드와 르원틴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니엘 데닛이 건축에는 스팬드럴 뿐 아니라 코벨 양식처럼 툭 튀어나온 방식으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는 점이다. 건축물의 구조를 가지고 자연계에 수없이 많은 부산물도 잘 선택하고 설계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도킨스와 굴드는 점진진화냐 단속(斷續) 평형적인 진화냐를 놓고도 대립했다. 굴드는 단속평형론을 주장했는데 도킨스는 점진론은 등속론(等速論)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대응했다. 도킨스의 주장은 스케일에 따라 변화가 점진적일 수 있고 격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경쟁을 통해 진화가 일어나고 진화를 통해 진보로 나아간다고 설명하는 것은 그렇게 명확하게 볼 수 없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필자는 생명체의 능력은 환경에 맞게 진화했기에 우리가 하등동물이냐 우월한 동물이냐는 말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놀랍게도 다윈은 처음에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진화 과정에서 복잡성이 증가했을 것이란 추론에 제동을 건 사람이 굴드이다.



굴드는 지구 생명의 역사가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 같은 것이라 상상하고 6500만년 전 소행성이 떨어지기 전까지 감았다가 큰 소행성이 아닌 작은 소행성이 떨어진 것으로 설정하는 등 초기조건을 달리 해 다시 풀어 놓으면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는 절대 다시 나올 수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의 탄생은 우발적이라는 의미이다.



도킨스는 진화의 큰 그림을 보면 일종의 되돌릴 수 없는 분수령 같은 것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방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유전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홀로 그 모든 중요한 일들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181 페이지) 유전자는 요리책과 같다. 어떤 환경과 상호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진화가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경쟁을 넘어서는 협동의 진화가 있을 것이라 강조한다.(단세포가 진화해 다세포가 되지만 이는 세포들이 협동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는 필자의 말이 가슴을 친다. 암은 다세포 생물 속의 하나의 세포가 자신만 복제본을 남기려는 결과 생기는 병이다.)



김형숙 박사는 시각 문화에 재현된 생명이란 글에서 자연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정의하며 자연의 생명체를 사유하고 탐구하고 관조하면서 직관을 통해 표현하는 미술 작품은 자연에서 숨쉬는 생명체의 살아 있음을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고 덧붙인다.(192 페이지) 필자는 생명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실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하거나 반복이 없으며 고정불변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생명의 차이 나는 반복을 말한 들뢰즈의 사상과 비교해 보자.)



필자가 단순함과 간결함의 가치, 텅빈 공간의 무한함, 초시간성과 초월성 등에 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예술가로 소개한 볼프강 라이프는 ‘우유돌’이라는 작품을 통해 대리석 위에 우유를 매일 붓고 비우는 행위를 반복하여 신(神)과의 소통을 기원하는 제식행위를 시도했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207 페이지) 필자는 우희종 교수의 ‘생명은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라는 논의를 인용해 작품들을 분석한다.



생명을 우리가 우주의 섭리에 따라 어딘가로 움직이고 초월의 세계로 가는 여정으로 보는 라이프의 작품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중간 정착역에 서 있는 듯한 비현실적 분위기를 내는 것들이 있다.(211 페이지) 생명이 시각 문화에서 재현된 양상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사회적, 역사적 차원까지 그 층위가 다양하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250 페이지) 생명의 다양한 현상을 역사적 사실 속에서 재해석한 작가들은 생명의 문제는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이 아닌 역사적 맥락 안에서 그 의미가 발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55 페이지)



이는 “한 개인의 내적 심리도 개별 현상에 그치지 않으며 시대적 징후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는 한 문학평론가의 말을 돌아보게 한다.(강계숙 지음 ‘우울의 빛’ 참고) 나는 이렇게 상호 연관된 맥락을 생명을 이야기하는 책의 마지막에서 생명의 특징으로 삼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아름답고 열려 있는, 더불어 고통과 의미를 지닌 생명의 위상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중독이 poisoning과 addiction을 함께 의미하는 어지러움 속에서 담배에 몰입하는 것은 해로운 음식에 몸이 상하듯 뇌와 폐 등을 망가뜨리는 것은 물론 애착하고 의존하게 한다는 점에서 poisoning과 addiction을 함께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흡연자이지만 최근 어떤 계기로 인해 ‘애착 장애로서의 중독’이란 책을 읽으려 하고 있습니다.(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리고 몸과 마음에 해가 되는 형태로는 아니지만 최근 일주일 넘게 특정 가수의 음악만을 집중적으로 듣는 것이 혹시 어떤 문제거리는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담배를 끊는 데에도 다른 중독을 극복할 때 필요한 노하우가 필요하리라 생각하기에 알콜, 도박, 性 중독 등에서 벗어나는 책과 문제의식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20년간의 흡연 이력을 지닌 전지석 정신과 전문의의 체험이 유용하게 빛을 발할 ‘담배 끊을 용기’는 욕구를 참는 일보다 자신이 담배를 피우게 된 계기를 먼저 돌아보아야 금연에 성공할 수 있다는 팁을 내세운 책이어서 관심이 갑니다. 모든 정신적 의존을 이해하는 데 한 출발점을 삼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신청합니다.



 
 
2015-02-23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흔적 2015-02-23 20:41   URL
아, 재미 있는 반전(?)이네요...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마르크스 자본론'의 핵심을 찌르는, 제2판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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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제목이 좀 그렇다. 원숭이도 이해한다는데 나는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란 걱정이 되고 아니 그 이전에 원숭이도 이해한다니 그간 다른 책들의 설명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가, 란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자본론’의 핵심은 상품과 화폐 부분이라고 한다. 핵심인 만큼 어렵기가 그지 없다고 한다. 포기자가 속출하는 사례가 이 부분으로 인한 것일 만큼.



마르크스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며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언급한다. 사용가치가 있다는 것은 상품에 쓸모가 있음을 의미한다. 교환가치란 상품들끼리 교환되는 비율을 뜻한다. 상품이 교환가치를 갖는 것은 그것이 노동의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각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제도권 경제학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가격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이는 일정 부분 맞지만 왜 그런 균형점이 생기고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가 밝혔듯 교환가치가 형성되는 근본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이고 이는 노동가치론이란 이름을 얻는다. 즉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의미이다.(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평균적인 숙련도를 지닌 노동자가 평균적인 노동 강도로 일했을 때 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화폐가 상품들 사이의 거래를 매개하는 것을 넘어 자본으로 기능한다.(시장 경제가 곧 자본주의는 아니다.) 저자는 모든 상품간의 교환 과정을 등가교환으로 정의한다.(자본주의에서 속임수나 사기 없이 정상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데도 자본가에 의해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화폐가 자본으로 기능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상품간의 교환을 매개하는 역할을 넘어서서 끊임 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식하는 주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상품간의 교환 과정 즉 유통 과정에서는 어떤 가치의 증가도 발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개인 차원에서 유통은 교환 가치의 증가 즉 이윤을 창출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 전체 차원에서는 어떤 가치도 낳지 못한다. 이윤과 손해가 상쇄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몫으로 챙기는 부분은 노동자가 하루 일당으로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기에 생긴 것이다.(84 페이지) 착취가 발생하는 것이다.(빵공장을 예로 든다면 밀가루 1kg은 빵에 1 노동 시간의 교환 가치를 이전시키고 제빵 기계는 자신의 감가상각 만큼의 교환가치를 빵에 이전시킬 뿐이다. 더도 덜도 아닌 딱 자신의 교환 가치만큼만 이전시키는 것이다. 반면 노동자는 노동 시간만큼을 빵에 이전시킨다. 밀가루 1kg = 1 노동 시간으로 가정.)



밀가루, 제빵 기계 등 생산과정에서 자신의 교환가치만큼을 생산물에 이전시키는 생산수단을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을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이라 한다. 노동자를 고용하는데 사용되는 자본을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이라 한다. 빵 8개의 가치를 C(16 노동시간) + V(3 노동 시간) + 5 노동 시간 = 24 노동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다. 5 노동 시간은 노동자가 일당을 받지 못하고 온전히 자본가의 행복을 위해 일한 시간으로 잉여 노동시간이라 불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가치를 잉여가치라 한다. 상품의 가치는 결국 C(불변자본) + V(가변자본) + S(잉여가치)로 표현된다.(S는 surplus value의 약자이다.)



마르크스는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닌 노동력의 대가임을 분명히 했다. 불변 자본과 가변자본은 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시키는 방식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용어이고 필요 노동과 잉여노동은 하루 노동 시간 중 자신의 임금에 해당하는 시간과 그 이상의 시간으로 나눈 용어이다.



이윤율은 S/ C + V로 표현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의 연장을 통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방식을 절대적 잉여가치의 창출이라 불렀다.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은 필요 노동 시간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기술 발달에 따른 생산력 증가가 필요 노동 시간을 단축시키는데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착취해 가는 몫인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증가가 노동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보다 자본가가 챙기는 몫이 상대적으로 더 많아지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마르크스는 러다이트 운동에 대해 기계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기술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성과급 제도는 이윤율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더 많은 시간이 투여되는 결과를 낳아 이윤 규모에서 큰 증가를 초래한다. 저자는 인간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갖는 생존 본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철저히 이기적이 되도록 작동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을 화폐에 대한 환상으로 바꿔버리는 현상(모든 것을 화폐로 환원하는 현상)을 물신주의라 불렀다. 마르크스는 제빵 기계처럼 한 번에 가치가 회수되지 않는 자본을 고정자본이라 칭했고 한 번에 가치가 회수되는 자본을 유동자본이라 불렀다.(가변자본 및 불변자본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지출에, 고정자본 및 유동자본은 회수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 한다.(C/ V)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이 상승하는 것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한다고 표현한다.(인건비 비중이 줄고 기계 등을 구입하는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한다는 것은 산업 예비군(실업자)이 증가한다는 의미이다. 자본가들에게는 산업 예비군의 존재가 필요하다. 저자는 새로운 사회 즉 하루 8 시간 노동이 필요 노동 3 시간과 잉여 노동 시간 5 시간이 아닌 필요 노동(8시간)만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다.



자본가가 쉬지 않고 노동자들을 노동하도록 몰아붙이는 것에는 새로운 기계나 설비를 충분히 쓰지 못한 상황에서 새 기술, 새 기계가 등장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다. 당연하지만 산업 자본의 이윤, 상업자본의 이윤, 대부(貸付) 자본의 이자, 지주(地主) 자본의 지대 등은 노동자에게서 착취한 잉여가치에서 유래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이전에도 착취가 있었지만 차이는 자본주의의 노동자들에게는 사상이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1인당 총생산이 우리의 1/3 수준으로 우리보다 못 사는 베네수엘라가 석유 산업을 국유화해 그 재원(財源)으로 무상 의료 및 무상 교육을 실시하는 사실을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공황(恐慌)을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수요에 비해 너무 많은 상품들이 생산되는) 과잉의 결과 생기는 현상으로 분석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공황은 과소 소비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비정규직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구매력 하락은 대표적 사례이다. 마르크스는 공황은 자본주의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필연이라 보았다. 실업은 산업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인구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이다.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자본주의는 사회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를 조화시킬 능력이 없는 체제이다.



논쟁적이지만 자본주의는 발전(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할수록 이윤율(S/ C + V)이 하락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따른 이윤율 하락의 경향의 법칙이라 부른 이윤율 하락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자본을 투입해도 노동자를 적게 고용하기에 생기는 필연이다.(이로부터 우리는 잉여가치는 노동에 의한 것임을 재확인한다.)



논쟁적이라 했지만 지금까지 착취율(S/ V)을 불변이라 가정했는데 그 수치가 변할 수 있다고 보면(분모인 V 즉 필요 노동 시간을 줄이면), 그리고 새로운 상품이 등장한다고 보면 이윤율 하락은 생쇄된다. 생산력의 발전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기도 하지만 착취율을 강화하기도 한다. 생산력 발달에 따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장기적으로 이윤율을 하락시키지만 생산력 발달은 동시에 착취율을 증가시켜 이윤율을 상승시키는 작용도 한다. 이 두 가지 효과 중 어떤 것이 더 강한가에 따라 정기적 이윤율이 결정된다.(258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