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트라우마 사용 설명서에서 마크 엡스타인이 수년의 분투 끝에 붓다께서 찾은 트라우마 해결 방법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설명한 부분으로부터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거머 역시 심리치료에서 지혜와 자비의 역할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슬픔을 밀어내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 조언한다. 거머 박사는 인간은 뇌 구조상 불행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아잔 브라흐마는 성난 물소 놓아주기에서 고통을 극복하려 하거나 변화시키려 하거나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 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거머 박사의 경우이다. 그는 심리치료에 지혜와 자비를 접목시킨 분이다. 마음챙김에만 집중하던 기존 방식과 다른 요법인 그의 방식에서 지혜는 곧 이해와 행동이다. 나로서는 브라흐마가 말한 이해와 거머 박사가 말한 이해가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다소 혼란스러운데 분명한 것은 세상은 고통스럽다는 사실이다. 거머 박사가 인간의 불행을 증거하는 것으로 제시한 것은 우리는 쉴 새 없이 과거를 되새김하고 미래를 떠올린다는 사실이다. 거머 박사는 쉬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가르친다.

 

 

2002년 명상 스승은 마음 챙김이란 무엇을 할 때 그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라 가르치셨다. 그 이후로 오래 동안 그런 생활과 거리가 먼 시간을 보냈다. 가끔 그 분의 트위터에 들어가 볼 뿐이다. 오늘 들어가 보니 변함없이 명상에 대한 내용이 올라 있었다. “부처님은 조건이 성숙되어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조건이 다하여 나무 밑에서 반열반에 드셨다.”는 글, “잘못된 견해는 ''가 있다는 생각이며, 바른 것을 바르지 않다고 하고,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다고하는 것이라는 글.. 그리고 할 수 있는 자유도 있지만 하지 않는 자유도 있으며 갈애를 일으키는 자유보다 알아차리는 자유가 좋다.”는 글...

 

 

현실이라는 거친 탁류(濁流)에서 정신적으로 표류(漂流)하다가 그 분의 트위터에 들어가면(또는 그 분의 카페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내가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세속(?)의 공부란 생각이 든다. 내가 부러운 것은 수행을 업으로 삼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용기가 젊어서도 발휘되지 않았으니 이 늦은 나이에는 더욱 그렇지 못하리란 것은 분명하다. 과거 내게도 출가를 권유한 사람이 있었고 줄곧 들어온 말이 출가해야 한다는 진단이었음을 감안하면 참으로 길고도 끈질긴 수난(受難)의 개인사(個人史)라 할 만하다.

 

 

거머 박사가 뇌 구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보며 나는 세속의 뇌구조에 대한 고찰로 돌아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를 위해 논할 것은 멋진 신세계를 통해 드러난 올더스 헉슬리와 ‘1984’를 통해 드러난 조지 오웰의 사상적 차이이다. ‘1984’가 형벌에 의해 통제당하는 현실을 그린 작품이라면 멋진 신세계는 쾌락에 의해 통제당하는 현실을 그린 작품이라는 차이가 있다.(통제는 결국 뇌를 조작하는 것이다.) 작품의 공통점은 두 조건(고통, 쾌락) 모두 외부에 의해 주입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자발적이지만 고통으로 도피하거나 쾌락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정신의학 용어로 메저키즘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것이 고통스런 위안을 추구하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다시 거머 박사의 이야기를 하자. 그는 고통을 바라볼 수 있어야하며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어야하며 그 고통이 줄어들기를 바라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자기연민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도 이해할 수 없고 자비도 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極端)을 보며 오늘의 뇌과학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0148월 과학저널 네이처(Nature)에 생쥐의 뇌에 빛을 조사(照射)해 기억을 바꿔치기했다는 논문이 실렸다. 전기충격을 당한 나쁜 기억을 이성(異性)과 어울린 좋은 기억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빛과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 뉴런의 활동을 조절하는 광유전학(optogenetics)의 성과이다. 생쥐의 뇌에 광섬유를 꽂아 특정 기억을 담당하는 뉴런을 자극해 처음의 기억에 다른 기억을 덧씌운 것이다. 뉴런이 관계하는 전기 스위치를 on - off하는 방법을 찾으면 뇌 신경회로를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데에 착안한 것이다. 부분적으로 파킨슨병 치료에 쓰이고 있는 이 방법은 과연 어떤 미래를 낳을까?

 

 

현실화하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장애물도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일반화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궁금하다. 불안해 하기 잘하고 비판적인 성향에 경도(傾倒)되는 편이기에 하는 말은 아니지만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근본적인 변화가 뒤따르리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불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또 말하게 될까? 말할 수 있는 것은 쾌락만으로 도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용 문제를 별도로 하면 고통의 순기능은 어떻게 되고 또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란 점이다. 문제는 극단의 고통에 처한 사람들 앞에서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저어된다는 점이다.

 

 

* 여시아독이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독서를 가을에만 하는 것으로 한정(限定)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럼에도 나는 이 가을 들어 마치 시는 가을에만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시를 많이 읽고 있다. 어느 면 이상한 일이다. 시 읽기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시는 어려운 독해의 과정을 거쳐 내 안목으로 느낌을 정리할 수 있을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 읽는 과정이 즐거운 것은 아니다. 요즘 나는 정상에 올랐거나 일가를 이룬 시인들의 시들을 읽기보다 덜 알려진 시인들의 좋은 작품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신미나 시인의 첫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를 읽으면서는 시인들의 서정성 속에 나타나는 차이들을 가려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설득력 있는 독법을 갖추는 것이다. 자신만의 안목을 갖추는 일도 그렇고 파격도 그렇고 모두 기존의 시각에 바탕을 둔 설득력 있는 읽기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성호 교수의 낯익은 시, 낯설게 읽기같은 책은 반갑다. 이 책에 실린 시는 어렵다?’, ‘즐기는 만큼 느낀다’, ‘시의 언어에 대한 존중’, ‘자기 나름의 시 읽기’, ‘해석의 도식성과 사고의 단순화등의 글이 눈에 띈다. 문학평론가인 오성호 교수는 1984년 박두진 선생의 추천으로 등단해 몇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빈집의 기억이란 시집에서 그는 시인의 말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시를 향해 걷는 이 느린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걷다 보면 언젠가 빛나는 시의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을것이다. 궁금한 것은 평론가들이나 일반 독자들이 자신의 시를 다르게 읽은 것에 대해 시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과격할 정도로 시를 다르게 읽은 사람은 반경환 평론가이다. ‘행복의 깊이에서 그는 탄탄한 설득력에 근거한 파격과 새로운 시 읽기의 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분명 신성모독이란 말이 어울리는 부분도 있다. 그는 정신병자라는 소리도 들었다. ‘비판, 비판 그리고 또 비판에서 그가 실명 거론한 문학인들은 김현, 정과리, 김윤식, 유종호, 백낙청(이상 평론가),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고은, 신경림, 정현종, 김용택(이상 시인), 이문열(작가) 등이다. 어떻든 분명한 것은 그의 비판 역시 나에게는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일 뿐이라는 점이다. 물론 강을 건너기 전에는 나침반 같은 것이라는 지적도 맞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의존하면 자신의 시각을 잃는다는 점도 분명하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비유를 드시며 불법(佛法)도 그렇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겠는가라고 하신 붓다의 말씀이 귓전을 맴돈다.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시선 378
신미나 지음 / 창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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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고, 라고 불렀다의 주요 시 가운데 하나인 싱고에서 싱고는 시인이 자신의 기분에 붙인 이름이다. 시인은 너무 작아서/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은 싱고와 함께 아궁이 앞에 앉아/ 막대기로 재를 파헤쳐 은박지 조각을 골라냈다고 말한다. “은단껌을 싸고 있던은박지 조각을 보며 시인은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맛도 냄새도 없는 싱고는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저무는 태양 속에 있었고” “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던 때의 기분을 묘사한 이름이다.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미묘한 존재이다.

 

 

저자는 등단(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7년만에 첫 시집을 낸 신미나 시인이다. 1978년생인 시인은 오래 되고 익숙한 農耕을 담아내는 대체 불가의 시인이다. ‘싱고, 라고 불렀다에 실린 시들은 스무살에 고향 충남 청양을 떠나 서울과 강원 강릉에서 지낸 시인이 아궁이에 불 때며 살던 유년의 시골 기억으로부터 길어올린 시들이다. 대표적으로 농촌 풍경을 담은 시는 백치라는 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어미 소가 새끼를 낳고” ‘이내 무릎을 꿇은 이야기를 한다.

 

 

1978년생의 젊은 시인이 전통과 농경을 노래하는 것이 의외일 수 있지만 시집은 느린 농경의 삶과 사랑과 이별, 그리고 도시의 삶을 두루 담았다. 시인은 서울서 쓰리를 당했다며 속상해 하는 현주의 말투가 부러웠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서울은 미아삼거리 지하도 입구에서 만난 앞니 빠져 입이 옴팡한 할머니가 파는 두릅 다발이 노래되는 등 시골의 풍경과 그리 먼 풍경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추천글에서 김사인 시인은 이제 저마다 새로워서 결국 누구도 새롭지 않은 시대, 열매에 팔린 나머지 아무도 뿌리를 돌아보지 않는 이상한 세계로 우리는 밀려오고 말았다.”고 썼다. 시인의 삶을 채색한 것은 가난,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정, 농촌의 전통적 풍경 등이다. 모성적 비유도 빼놓을 수 없다. 큰물 진 것을 내천에 젖이 분 것으로, 어린 조약돌 몇이 내는 소리를 이빨 가는 것으로 그려낸 것이 그것이다.

 

 

안타까움의 대상인 어머니와 달리 시인의 아버지는 고드름 칼 같은 존재, 소주병을 피라미드처럼 쌓은 존재, 엄마를 삽으로 때리던 존재이다. 시인은 신부 입장할 때 아버지가 자신의 손을 날계란 쥐듯 쥔 것을 드문 일이라 표현한다.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다음 생에서는/ 엄마로 태어나지 말라고 말한다. 시인은 생쌀을 먹으면 엄마가 일찍 죽는다는 소리를, ”손톱 깎아서 아무 데나 버리면/ 미물이 주워 먹고/ 요사스러운 일을 꾸민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면 이별수가 있다는 말도 시인 덕에 들은 아스라한 추억 거리이다.

 

 

공기돌을 굴리며 손안에서 피어나는 민물 냄새를 맡으며 자란 시인은, 할아버지의 무등을 탄 채 지붕 위로 어금니를 던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시인의 어린 의식 속에서는 서울에서 온 목사분이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날/ 신도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한 말이 아름답고 무서운 것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결국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기분에 싱고라는 이름을 붙인 시인은 라는 시에서 상상력과 시의 관계에 생각하게 한다. ”내 머릿속에 지금 고인 것은/ 한사발의 붉음인데/ 처음 본 붉은빛은 다리를 달고 달아났다/ 뿔뿔이 흩어져 천만갈래 비슷한 붉기만 번지고 있다시인이 머릿속에 한사발의 붉음이 고였다고 말한 것은 선지피를 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절이 말해주는 것은 시 창작의 어려움이다.

 

 

여러 시들 가운데 돋보이는 것은 자귀나무 꽃살문이다. ”...너는 오래도록 서러웠고/ 내 귀는 닫혀 있었네/ 꽃길 열리고/ 꽃문 닫히고/ 비단이불 위에 너의 속눈썹/ 꽃술 떨어지네/ 당신이 저무네아름다운 연시(緣詩/戀詩)로 읽히는 이 시를 끝으로 나는 박혜경 평론가의 세기말의 서정성이란 책을 펴본다. 평론가는 미래의 시간을 기획하기보다 과거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아오려는 서정시들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나름의 생존 방식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동의할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신미나 시인의 부레옥잠같은 시는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

하여 물 위에 空房(공방)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

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솜털 뻗는거

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

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불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

네 문 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

는 걸음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맨낯을 보

겠네(‘부레옥잠전문)

 

 

상상력이 싱그러운 참 아름다운 시이다. 서정성 속에 나타나는 차이들을 가려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끄는 시이기도 하고.



 
 
 
야만의 스포츠 - 전 세계로 번지는 재앙
마르크 페렐망 지음, 이현웅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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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 여가(餘暇), 여흥(餘興), 사냥 등 유사한 범주 속에 비교적 이질적인 도박의 의미까지 포함된 스포츠(sports)라는 단어의 기원은 프랑스어 desport라고 한다. 일부이지만 sports의 기원을, 분리를 뜻하는 dis와 운반(이동)을 뜻하는 port가 결합된 disport로 보며 마음(관심)을 본연(本然)인 일로부터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 즉 기분 전환을 위한 활동으로 정의하는 논리이다. 중요한 점은 내게 desport(s) 또는 disport(s)에서 des/ dis가 분리되고 port만 남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스포츠에 여가나 오락적 요소보다 거의 고도의 전문성과 엘리트적 요소만 남은 현실과 관계있다.

 

 

이제 스포츠는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여가나 오락보다 고도의 전문가적 안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원래의 의미대로 스포츠를 여가, 오락, 사냥 등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볼 경우 호이징가가 말한 유희(루덴스)적 측면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호이징가가 말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인간 즉 Man the player(playing man)를 뜻한다. 문제는 play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이 단어에는 유희, 연극, 경기(競技), 방법, 행동, 도박, 투자 등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논의와 관련해 한정해 말하자면 유희, 경기, 도박 등이 남는다. 오늘날 스포츠의 유희적 측면은 동호인 스포츠팀들의 만남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유희적 정신을 잘 실현하고 있는 듯 하다.

 

 

나 역시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거의 야구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관심이 많았다는 말은 실제 하는 스포츠에 대해서가 아니라 거의 보는 것에 대해 그렇다는 뜻이다. 내 경험과 관련지어 갖는 것이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은 하는 스포츠가 아닌 보는 스포츠를 통해 열광, 흥분하고 희열을 느끼고 난 뒤 무엇이 남는가가 참 궁금하다. 공허감과 허탈감이 아닐지? 혹자는 스포츠의 매력이 공정한 룰에 따라 승리를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치열함에 있다고 말한다. 일리 있지만 나는 스포츠를 뇌과학에서 말하는 거울 뉴런의 작용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고 싶은 마음과 상징제의의 하나로 보고 싶은 마음을 두루 가지고 있다.

 

 

거울 뉴런은 특정 움직임을 수행할 때 또는 다른 개체의 움직임을 볼 때 활성화되는 신경세포이다. 그런데 최근 논의에 따르면 인간의 거울신경 영역에서 생기는 신호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가 결과에 따르면 반드시 진짜 거울신경세포가 발생시키는 신호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때문에 과학자들은 인간을 연구하는 경우 거울 신경 세포보다 거울신경 체계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한다. 이 거울 뉴런의 작용과 관련지어 스포츠를 보는 것은 인간이 모방적 동물이라는 사실과 관계있다. 거울 뉴런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긍정적 기능도 하고 부정적 기능도 한다.

 

 

한편 스포츠를 상징제의의 하나로 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사유 거리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해야 할 것은 상징제의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다. 상징 제의는 현실을 개조하지 않고도 무언가 중요한 개조가 이루어지는 듯한 만족감을 공급하고 존재의 불안과 불만을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하며 현실 모순의 현실적 해결을 연기(延期)할 수 있게 한다.”(도정일 지음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279 페이지) 상징적 제의를 논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희생양이다. 지라르에 의해 논의된 희생양은 예수가 십자가를 진 것처럼 사회적 불만이나 증오 해소에 이용되는 존재이다.

 

 

그로써 사회는 질서와 평화를 되찾은 듯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연유로 희생양은 특별한 존재이다. 아득히 먼 과거에 상징 제의는 예수라는 한 존재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지만 현대의 그것은 스포츠를 통해 거듭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스포츠 분야에서만 희생 제의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선수들이 실제로 희생당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을 경우 지지자들의 비난을 받고 공항에서 호박엿 세례를 받기도 한다. 호박엿은 현실을 축제로 만드는 데 실패한 스포츠맨들에 대한 상징적 의미의 응징이다. 사실 이런 응징은 무해하다 할 수 있다. 지난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선수는 그 대가로 총격 사망을 당했다.

 

 

관건은 스포츠가 무언가 중요한 개조가 이루어지는 듯한 착각을 제공하고 사회적 갈등이나 쟁점 등에 대한 관심을 일시적으로 잊게 한다는 데 있다. 스포츠의 미덕에도 주의해야 하지만 관중을 몰입하게 하는 엘리트 스포츠의 속성은 파괴적인 면이 분명 있다다.(스포츠의 미덕을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음을 알려주는 것. 역경과 수난을 딛고 무명의 설움을 이기는 역전의 드라마가 가능하다는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전 세계로 번지는 재앙이라는 부제를 가진 마르크 페렐망의 야만의 스포츠가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철학자/ 미학자인 저자는 지금 쇼(show)로서 스포츠는 세계적인 사업이 되었.”몇 년 사이에 스타디움은 스포츠 분야의 국가대표팀을 내세워 서로 대결을 벌이는 축소판의 영토가 됐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타자와의 경쟁을 부추기고 기록 경신을 위한 육체적 폭력, 적에 대한 증오와 히스테릭한 민족주의를 유발하는 스포츠는 국제스포츠기구와 국가들이 정치와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고 군림하는 전 지구적 종교가 되었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디어로 기능하는 스포츠는 전 세계를 일률적인 체제로 만들어 다양성을 잠식하는 재앙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재앙의 근원이라니 하는 말이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어 공공서비스를 고사(枯死)시키고 경기장 건설을 강행함으로써 도시 빈민들을 내몰았고 수십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사 도중 사망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브라질 정부가 시민들의 폭발적 분노를 초래한 것은 결코 이변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도시 정화라는 미명(美名) 아래 72만 명이 집을 잃고 거리로 쫓겨났다. 저자는 말한다. 이런 현상들은 개발도상국들만의 현상이 아니라 사실상 거의 모든 올림픽 개최 국가에서 반복되었다고.(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토건 세력의 배를 불리고 결국 시민들/ 국민들이 재정 적자를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스포츠는 국제스포츠기구와 국가의 탐욕이 쉴 새 없이 작동하는 장()이 되고 있다. 저자는 단호하게 스포츠를 현대자본주의의 축소판으로 정의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 승자독식 구조,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공수되는 농노제적 선수 등을 보라. 몸값이란 말, 임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스포츠 선수들은 자본이 만든 상품으로 취급받고 있다.(저자는 몸값은 내 몸과 내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자 나의 가치라고 말한다.) 스포츠는 자본주의를 닮았다. 시간을 교차하며 벌어지는 수많은 스포츠 행사들은 멈추지 않는 기관차를 연상하게 하지만 그보다는 자본의 자가증식성을 닮았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스포츠가 닮은 것이 더 있다. 바로 종교이다. 오늘날 세계대회나 올림픽 등의 우승자는 신처럼 군림하고 승리한 자는 천국의 기쁨을, 패배한 자는 지옥의 고통을 맛본다. 경기장은 신전(神殿)처럼 기능하고 관중은 충실한 신도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그들이 내는 입장료는 헌금(獻金)인 셈이다. 저자는 스포츠 쇼 앞에서는 어떤 비판도 무력하다고 말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비판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스포츠가 자본주의의 고전적 장소이자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현실화시킨 영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했듯 오늘날 성과지향,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 정신,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과 그로부터 얻어진다는 효율성, 자기계발과 자조의 구현체 등 금융자본주의의 규범들을 스포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정의한 것은 유명한데 이제 스포츠를 민중의 아편으로 정의해도 무리는 아닌 듯 보인다. 이제 스포츠를 상징제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순박한 것인지 드러난 셈이다.

 

 

야만의 스포츠를 읽으며 줄곧 생각한 것은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이다. 이 책의 4(현대인의 얼굴)5(욕망의 세계사)에서 논의된 스포츠와 노동, 금융자본주의, 종교, 욕망이 발생하는 장()은 그대로 야만의 스포츠와 문제의식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스포츠를 영웅 신화의 현대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스포츠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공동체의 전쟁으로 대중들은 그들에 열광하며 잊혀진 고대에 대한 아련한 추억에 빠져든다.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영웅이라는 말과 관련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영웅이라는 말에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 등을 떠올릴 뿐 몸바쳐 역사에 충실한 사람들을 홀대하거나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는다. 스포츠(sports)는 한때 영화(screen), (sex) 등과 함께 국민을 부패한 정치에서 눈돌리게 하는 수단(3 s)의 하나로 인식되었었다. 그때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스포츠는 즐기되 현실에 대한 관심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침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현대 스포츠는 거물 아니 괴물, 그리고 총체적인 초거대 메커니즘이 되었다. 문제는 무엇인가. 스포츠가 인간 통제의 손을 벗어난 꽃을 든 괴물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반박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리라



 
 
 
상어 뛰어넘기
로맹 모네리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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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모네리의 상어 뛰어넘기는 전작인 낮잠형 인간이상으로 시니컬한 문체와 톡톡 튀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1980년생인 저자와 동시대를 사는 젊은 남녀의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랑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이 작품에는 전작이 그렇듯 정치적 해석이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런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랑이 신자유주의 확산의 결과라는 말이 있다는 정도의 진술은 담고 있다. 다소 시간이 지난 용어로 우리나라에는 88만원 세대, 유럽에는 유로 세대라는 개념이 있었다. ‘상어 뛰어넘기는 그 2000년대 초의 현실이 현재 어떤 방식으로 변했고 어떻게 전개될지 알려주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sex와 관련된 언어들이 자주 나오지만 결코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고 정치적 해석이 없지만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냄으로써 정치적 메시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꼽을 만하다. 가장 돋보이는 점은 책임감 있는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작품 의도이다. 이 작품의 피날레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지기 세대(작품의 남자 주인공인 지기의 이름을 딴 용어)라는 말이 제시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지려는 무능한 집단을 일컫는 단어이다. 이 부분에서 거론하고 싶은 말은 시는 정지 화면에, 소설은 활동 사진에 비유된다는 논의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물론 나는 소설이 활동 사진에 비유되지만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소설 역시 시처럼 현실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장치일 뿐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른이 넘은 남자 지기와 그보다 네 살 어린 여자 멜린의 만남을 다룬 상어 뛰어넘기는 그들이 인터넷 만남 사이트에서 만났다는 점에서 가볍지만은 않은 앞날을 예고한다. 지기는 서른이 넘었지만 무책임한 백수이기에 당연히 가정을 이끌어갈 여력과 의지가 없다. 멜린은 광고대행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기에 지기보다는 낫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 성관계를 갖는다. 멜린은 그 만남 이후 sex가 뇌구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다. 성 능력면에서도 초라한 지기는 무책임한 남자답게 멜린에게 지극히 이기적이고 뻔뻔하기까지 한 십계명을 제시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아쉬울 때만 여자를 만나겠다는 의도가 너무도 노골적인 그 십계명을 요악하면 결국 sex와 감정을 분리하겠다는 것, 초라한 현실을 간섭받지 않고 언제 이룰지 모르는 꿈에 안주하겠다는 것이다. 지기는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섭렵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로 porno에 탐닉한다.

 

 

소설은 지기는 알 수 없는 호르몬에 의해 휘둘리고 멜린은 그녀가 사랑의 멘토로 삼은 노에미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지기와 멜린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한다. 줄다리기란 사랑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치열한 전투 이상이 아니다. 둘 사이에 파브리스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곤궁에 처한 지기는 sex로 멜린을 만족시키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멜린은 자신감 넘치는 어제의 지기와 오늘의 헌신적인 지기를 적절히 섞어 놓은 지기를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둘은 지쳐간다.

 

 

그러던 중 메나주 아 트루아가 답으로 제시된다. 메나주 아 트루아는 다중 연애를 뜻한다. 말이 다중 연애이지만 두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지기는 돈을 벌기로 생각하지만 현실과는 괴리가 분명하다. 멜린은 두 남자를 모두 사랑했다. 멜린의 언니 마틸드는 두 남자에게 모두 임신했다고 말해보라고 제안한다. 한 자리에서 폭탄처럼 던져진 이 말에 한 사람은 환호하고 다른 한 사람은 도망한다. 누가 환호했고 누가 도망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니 무슨 세대라는 말로 이미 답을 말했다.

 

 

상어는 무엇일까? 나는 상어란 건너 뛰어야 할 무책임한 젊음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말한다.(이 작품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남과 여가 줄곧 벌여온 유혹게임은 어느 순간 여자쪽이 완전히 주도권을 손에 넣었고 이로 인해 모든 게 바뀌었다고. 요즘 남자는 이른바 스트리밍 시대의 도래로 언제든지 porno를 실컷 볼 수 있게 되면서 사냥꾼의 본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디지털 혁신으로 인해 남자는 모두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훔쳐보는 변태성욕자가 되었다고.

 

 

상어 뛰어넘기는 무엇을 말하는 소설일까? 나는 교과서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은 현실에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래도 살아야 하는 삶이란 건너야 할 사막 같은 것이 아닐지? 동력인 일마저 여의치 않다면 고난은 더 클 것이다. 지기의 모습이 바로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작가의 다음 작품은 어떤 방식의 소설이 될지 궁금하다. 다만 시니컬한 문체와, 제안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을 계기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시대를 위한 논의가 활성화하기를 바란다. 너무 거창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