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다.” 한 글쓰기 지침서에서 읽은 이 글이 유난히 공감되는 순간을 맞고 있다. 어떻게 시작하는 글을 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 다른 사연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책 리뷰를 써야 하기 때문도 아니고 주제가 특별한 글을 써야 하기 때문도 아니다. 발단은 내가, 참 흔하지만 너무도 중요하고 참 아픈 이야기를 들은 데에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해 글을 써 올려야 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아 2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 데 그쳤다. 우리란 나와 H를 말한다. H는 올해 스물 넷의 청년이다. 올해 처음 알게 된 H는 웨이트 트레이닝도 열심히 하고 기타도 잘 치는 잘 생긴 청년이다. H는 지난 3월 심한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가는 바람에 내가 보이지 않자 걱정되어 전화한 청년이기도 하다. 오늘은 H가 119 소방대원 시험을 치르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 그가 시험 대신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H가 친 곡은 ‘금지된 장난‘의 삽입곡인 ‘로망스’였다.



스물 넷의 H가 결혼을 한 것은 작년 10월의 일이라고 한다. 내가 왜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H는 무슨 일이 있다고 했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아내가 관계를 다시 생각하자며 P市의 친정으로 간 지 아흐레 정도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래도 시험을 쳐보지 그랬냐는 내 말에 H는 마음이 심난해서 준비를 못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험을 칠 수 없었다는 말을 했다. H는 자신이 참 나쁜 짓을 했다며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어떤 일이기에 그랬냐 묻자 H는 퇴근해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자신을 기다린 아내를 두고 티브이를 보고 다른 일을 하고 음악을 듣고 기타를 치며 혼자 있었다고 했다. 아내가 외롭다는 말을 했다는 말을 전하며 H는 옆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다. 나는 옆에 같이 있어도 말을 나누고 무언가를 함께 하는 참여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H는 자신이 아내가 늘 같이 있어 그 소중함을 몰랐던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H는 여자도 아니고, 여자를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여자는 결정을 하는 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느냐는 말을 했다. 나는 오래 전 한 외국인 여자를 떠나보낸 뒤 마치 나 홀로 절벽 같은 곳에 갇힌 기분에 너무 힘들고 힘들었다는 말로 그의 심경에 공감을 표하고 말았다. 나는 재작년 이즈음 있었던 한 작가의 출간 관련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작가를 지망하는 한 블로거가 모(某) 작가의 글을 좋아해 그 작가의 거처인 섬에 들어가게 된데서 시작된다.



그 섬에 사는 한 남자가 자신의 치부라고도 할 연애사를 술에 취해 그 작가에게 늘어놓았고 작가는 당사자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그 내용을 담아 책으로 엮어냈다. 후일 이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그 이야기를 H에게 하자 H는 저는 연애 몰라요, 라고 답했다. 나는 요지는 본인의 이야기가 허락도 없이 다른 작가에 의해 책으로 출간된다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H는 익명(匿名)으로라면 괜찮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 만난 지 얼마만인지는 모르지만 H,가 결혼한 것은 스물 셋의 나이였으니 아마 첫 눈에 반한 결혼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H는 연애는 잘 모른다는 말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H는 아내를 외롭게 한 것 말고 다른 것이 더 있다는 말을 했다. 더 이상 물을 수 없어 그냥 이야기를 끝마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자네라면 내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자네는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말을 했다.



H는 자신은 그렇다며 그래도 지난 며칠 전처럼 오늘도 술을 마실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H가 내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한 것이 며칠 전이었다. 힘들어서였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H가 연주한 로망스는 아내가 좋아하는 곡이라고 한다. H는 늘 옆에 있던 사람이 없는 현실이 힘들어 견딜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 출산, 육아에 인간관계, 그리고 내집 마련 등 다섯 가지 중요한 통과제의적 행위들을 포기하고 산다. 그래서 5포(抛) 세대라 불리기도 하고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 불리기도 한다. precarious(불안정한)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 정도의 말이다. 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나이에 맞는 고뇌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생각해 보니 불안정함은 젊은이에 한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나는 H에게 아내와의 일이 잘 해결되어 하반기 시험은 꼭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요즘 내 화두는 ‘상처’이고 ‘남녀관계의 사랑과 공격성’(이라는 책)이다. 그런 나에게 H의 이야기가 들려온 것은 우연은 아닌 것 같다. 화두라 했지만 읽고 싶은 책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Otto Kernberg의 ‘남녀관계의 사랑과 공격성’은 사랑이 공격성을 통합, 중화시키며 많은 상황에서 공격성에 승리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제를 이해하게 하는 책이라고 한다.



사랑이 승리한다는 점에서 해피 엔딩을 말할 수 있지만 관건은 사랑에 공격성이 내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함께 언급할 책은 보리스 시륄니크의 ‘관계’라는 책이다. 인간은 “때로 관계가 어긋나 좌절하고 상대에게 아픔을 안기기도 하겠지만 인간에겐 관계를 회복할 능력이 있다. 그러니 고독보다는 삶의 의미를 찾아 모험하라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이다. Otto Kernberg, 보리스 시륄니크 모두 정신분석학자이다. H가 빨리 웃음을 되찾는 길은 아내가 돌아오는 것 뿐이겠다. 벚꽃 화려한 이 봄에 홀로(?) 힘든 H의 웃음을 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 - 인생을 바꾸는 고전의 힘
누치오 오르디네 지음, 김효정 옮김 / 컬처그라퍼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탈리아 문학 교수이자 철학자인 누치오 오르디네의 ‘쓸모 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은 인문학의 위상과 나아갈 바를 확고하게 인식시키는 좋은 책이다. 장자의 역설의 지혜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을 가진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룬 내용은 다수의 문학 고전들에서 길어낸 지혜들과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 푸앵카레 등 몇몇 과학자들 및 과학의 중요 사례들이다. 오르디네의 책은 고전 및 독서의 가치를 한 마디로 정의했다고 할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가난해지지 않는 재산”이라는 말이 더 없이 어울리는 책이다.



저자가 말했듯 인문학은 지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무용하지만 결과적으로 미덕을 가져다주는 유용한 지식이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용함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인문학 진영 내부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상품과 화폐로 치환시키는 사악한 메커니즘이자 미래 세대에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조국도 동정심도 없는 괴물 같은 체제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책의 부록이 말하듯 실용적인 목적과 무관하게 순수한 호기심에서 이루어진 과학 연구가 결과적으로 실용 기술로 이어진 예는 우리에게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한다. 한편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관해 제기된 저자의 중요한 지적은 또 다른 시사점으로 다가온다. 찰스 퍼시 스노우가 ‘두 문화’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지식 대립이 심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오르디네는 그 지적 이후 양 진영의 대립이 더 심해졌다고 지적한다.



오르디네는 시장 논리적인 면에서 무용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용한 인문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내적인 위대한 동기가 있어야 가능한 힘겨운 과정으로 정의한다. 지식은 전수자(傳授者)는 가난하게 하고 수용자(收容者)는 풍요롭게 하는 자산이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두 사람 모두 풍요롭게 한다. 잉여와 무용함의 가치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타유이다. 그는 잉여(剩餘)만이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과 시, 인간 생활의 충만한 활력과 연결될 수 있는 바 이 에너지가 없다면 우리는 노예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이탈로 칼비노가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말했듯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효용과 무관하게 읽는 것이고 그보다는 덜 바람직스럽지만 읽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이 도움을 바라고라도 읽는 경우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문학이 사회적 차원의 바람직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은 유명한데 오르디네는 문학은 이윤에 대한 어떤 열망과도 무관하기에 현재의 이기주의에 맞서는 저항의 형식으로 나설 수 있다고 말한다.(35 페이지)



저자의 안내를 따라 우리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틀란티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등의 작품이 이윤과 무관한 이상적 왕국을 꿈꾼 문학작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경우 마르크스에 의해 분석되어 화제를 낳았다. 물론 등장 인물인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자본주의의 화신이라는 마르크스의 해명은 평범한 면이 있다. 물론 샤일록을 실제 유대인과 아무 관련이 없는, 자본의 비유이자 돈과 상품으로 전락한 소외된 인간의 비유로 읽는 것은 돋보이는 면이 있다.



주제와 관련해 주목할 문인은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이다. 그는 오직 자신을 위해 책을 쓴 문인이다. 몽테뉴는 자신이 공부를 한 것은 오직 즐기기 위해서일 뿐 이득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수상록’은 명확한 목적 없이 집필되어 수필이란 장르의 시초가 된 책이다. 하이데거는 쓸모 없는 것이 가장 유용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 말했다. 하이데거가 말한 유용함이란 인간을 구제한다는 의미 즉 인간을 인간답게 소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100 페이지)



일본 미술운동의 지도자이자 문명 사상가인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2 - 1913]은 쓸모 없음을 발견하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야만성에서 인간성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라 정의했다.(102 페이지) 텐신은 인간이 꽃을 사랑하게 된 순간 연애시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오르디네는 졸업장과 학위를 파는 대학 현실을 고발한다. 오늘날 대학은 기업이 되었고 교수는 경영에 참여하는 관료, 학생은 고객이 되었다. 오르디네는 대학이 취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지적하는 것은 전문적 기술을 가르치기 이전에 폭넓은 인문 교육을 해야 미래를 내다보며 공공복지를 포용하고 연대감을 나누며 관용 정신을 옹호하고 자유를 위해 싸우며 환경을 걱정하고 정의를 지킬 수 있는 책임 있는 시민을 길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116 페이지) 1848년 11월 10일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의 헌법 제정회의에서 문화 예산 삭감을 반대하는 연설을 해 화제를 낳았다. 위고는 국가적 위기일수록 사회가 무지의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학문과 청년 교육에 대한 지원금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120 페이지)



생명을 유지할 빵과 더불어 생각의 빵도 원한다는 위고의 계속되는 주장 역시 인상적이다. 위고의 주장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렉시스 토크빌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고전 및 예술 작품이 정신의 사막화를 막는 유일한 해독제는 아니다.(124 페이지)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이윤과 효용성만을 향해 질주하는 사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막스 셸러는 괴테를 인용하면서 “앎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이 강하고 생생할수록 지식은 깊고 완벽하다.”는 말을 했다.(141 페이지) 오르디네는 문학과 철학의 유용한 쓸모 없음에 대한 찬가를 다른 학문에 대한 비판으로 오해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오르디네가 말했듯 대학과 연구 기관이 개인 기업 및 다국적 기업에 연구비를 요청하는 추세가 일반화된 이래 과학자들의 부정행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푸앵카레는 과학자가 자연을 공부하는 것은 그것이 그저 재미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재미있는 이유는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물론 이때 아름다움은 외양에서가 아닌 조화나 질서를 이루는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르디네는 사랑과 진리는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말한다. 가난의 여신 페니아와 풍요의 신 포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에로스는 두 속성을 다 가진 매개자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에로스는 무지와 지혜 여부를 늘 묻고 의심하는 철학자를 생징한다.(180 페이지)



오르디네의 주요 연구 대상이었던 조르다노 브루노는 완전한 이해보다 지식에 접근하는 여정을 중시한 중세의 철학자, 사상가이다. 오르디네는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독단주의자들은 배타적이고 불관용적이고 비타협적이라 말한다. 오직 진리를 사랑하는 자만이 계속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186 페이지) 부록으로 실린 에이브러햄 플렉스너(1866 - 1959)의 ‘쓸모 없는 지식의 쓸모 있음’은 주목할 글이다.



이 글은 제임스 맥스웰,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아이작 뉴턴, 마이클 패러데이, 루드비히 헤르츠 등 유명 과학자들이 효용을 생각하지 않은 채 지적 탐구를 위해 연구한 결과 세상에 큰 공헌을 했다는 주장을 담은 글이다. 맥스웰과 헤르츠의 연구가 없었다면 무선 통신이나 라디오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듯 가우스의 비유클리드 기하학 연구가 없었다면 상대성 이론 역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200 페이지)



플렉스너는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은 뜻하지 않게 응용될 뿐, 과학 연구의 당위성이 그 실제적인 활용에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205 페이지) 플렉스너는 한 사람에게만 과학적 발견의 업적을 돌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이 최초의 부분적인 발견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새로운 요소를 밝혀낸 뒤 마지막에 한 천재가 작은 조각들을 모두 맞추어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는 것이다.(207, 208 페이지)



‘쓸모 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은 개별 고전들을 소개한 책이 아니라 쓸모 없는 것들(인문학의 고전들, 자연과학의 연구)이 가져다준(또는 가져다주는) 놀라운 성과들을 짚어낸 새로운 책이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무용함의 가치를 간파하고 그 당위성을 주장한 사상가, 문인들이 많다는 점이 새로웠다, 특히 나에게는 과학 연구의 성과 및 역학관계 등을 접할 수 있었던 흔하지 않은 기회를 허락한 책이어서 좋았다. 오르디네의 책은 오늘 우리의 읽기와 무용함의 가치를 생각하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이 꽤 지났지만 한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읽은 글 이야기를 해야겠다. 크게 공감하며 읽은 그 글에 의하면 소설가는 기억력이 좋은 유형, 기억력은 형편이 없지만 상상력은 뛰어난 유형, 기억력도 좋고 상상력도 좋은 유형 등으로 나뉜다. 대체로 ‘기억력이 좋은 유형‘이나 ‘기억력은 형편이 없지만 상상력은 뛰어난 공상가 유형’이 많고 ‘기억력도 좋고 상상력도 좋은 사람’은 드물 수 밖에 없다. ‘기억력은 형편이 없지만 상상력은 뛰어난 공상가’는 위험하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소설 쓰지 말라" 는 식의 소설 폄하의 말이 생겨난다. 사람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迷惑)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공자의 말씀이 생각난다. 미혹되는 경우는 당연히 이 경우에 한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중 두 가지를 고르라면 글을 읽되 쓰지 않는 경우, 새로이 책을 읽지는 않으며 부실한 콘텐츠이나마 희미해지고 왜곡될 수 밖에 없는 옛 독서물에 의거해 여전히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며 말을 하는 경우 등이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 샤를 단치가 ‘왜 책을 읽는가’에서 독서는 결국 글쓰기로 나아간다고 말했지만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빈약하고 불확실한 기억에 매달려 말을 하는 경우는 흔하다. 나는 소설가가 아니지만 내가 기억력은 좋지만 상상력은 좋지 않은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소설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백상현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을 앞에 두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당시 유령이 무슨 의미일까 이리 저리 궁리했지만 결국 예측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물론 책을 읽으면 금세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지만 두뇌의 원활함으로 표현될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초라한 기분에 빠질 만하다. 이한 변호사의 ‘이것이 공부다’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다. 공부는 결국 생각 굴리기라는 글이다.



효율적인 의미의 굴리기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의문을 발전적으로 설정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지금은 답이 불만족스러워도 더 나은 답이 있을 수 있다는 낙관적 태도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관적일 경우 사고를 멈추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가마타 히로키가 좋은 과학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가설을 세우는 능력이다. 이는 연구할 것을 효과적으로 찾아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도움이 되는 글이다.



어떻든 나는 외계인에게 잡혀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구상하고인지도 모르겠다.) 있다는 윤이형 소설가의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쓰라면 참 막막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괴담들의 밤‘ 연재를 앞 두고 기대 글을 댓글로 받는다는 김휘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장편 소설 ’해마 도시‘에 이어 얼마 전 ’눈보라 구슬‘이라는 소설집을 냈다.



’해마 도시‘를 읽었는데 (읽는 사람이)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과학책을 읽다 보면 떠올릴 수 있는 기본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이다. 이 소설에는 슬프거나 고통스런 기억을 부분적이거나 전체적으로 지우는 사람들, 행복한 사람의 기억을 사서 이식받는 사람들, 인지 능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두뇌 시술을 받는 사람들이 나온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서 무의식과 언어, 그리고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을 강조했다. 박지영 평론가는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것이 문학이라고 말했다.(’욕망의 꼬리는 길다‘ 참고) 나의 이야기는 결국 문학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자유 연상은 특정 주제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한 연상의 고리를 따라 생각들을 뻗어나가는 독특한 사고 작용이다. 여기서 분석가는 환자의 의식에 떠오르는 것들을 분석, 치료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최면 요법 대신 자유연상을 도입했다. 그러나 무의미한 수다에 가까운 말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유로움 속에서 의미 있는 내용들이 건져올려진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백상현의 글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접한 부분은 저자가 자신이 말한 유령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느꼈던 오싹함의 실체로 풀이한 대목이다. 당시 그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는데 중요한 것은 후에 라캉을 좀 더 자세히 읽고 그날의 두려움이 응시(gaze)에 대한 두려움이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어떤 경계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백상현에 의하면 유령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현상들의 정상성의 효과들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나타나는 또는 기존 지식 체계의 균열점으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지식 체계이다. 정상성의 효과들이란 세계가 지닌 환영(幻影)적 속성을 은폐하는 것들을 뜻한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논의가 인문학이라는 장(場)에서 펼쳐진다는 점이다. 이는 유령의 의미가 여러 맥락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분리해 생각하는 랑시에르에 의하면 정치는 치안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만든 사람들, 자신의 터전에서 내쫓긴 사람들이 평등에 근거해 자신들의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반면 정치적인 것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몫 없는 자의 몫이 제도화됨으로써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중단될 때 발생하는 ’정치’에서 몫 없는 자,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유령이라는 점이다. 고봉준 평론가는 ‘유령들’에서 현 시대를 유령의 시대로 규정하며 우리의 삶이 유령적 삶이 되고 도처에서 통치성의 유령들이 양산되고 있으며 자신이 “유령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고 말한다. 고봉준은 유령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은 유령이 기존 지식 체계의 균열점으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지식 체계를 의미하는 백상현의 맥락과 비교해 보아도 타당하다. 백상현의 맥락에서 유령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역량을 가졌다. 번역, 출간된 지 8년이 된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오늘 읽었다. 이 책에는 여러 내용이 인상적이지만 유령 역시 그렇게 나온다. 창조성의 원천(源泉)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래 상상력을 유령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상상력을 유령이라 부르면 이상할까?’하는 의구심이 자연스럽게 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04-16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흔적 2015-04-17 06:28   URL
반갑습니다... 맞습니다. 결국 독서와 사유의 노동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에 영감을 기대할 수 있겠지요.

040707 2015-04-17 13:13   댓글달기 | URL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글쓰기
흔적님의 공력덕에 촘촘한 그물망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됩니다. 무거운 것은 가볍게, 얕은 것은 깊게...
힘이 됩니다

흔적 2015-04-17 18:33   URL
그렇습니다. 힘이 많이 듭니다.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 글을 쓰려니 더 힘든 것이지요...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자서전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말한 칼 융에 대한 글을 읽고 그의 자서전인 ‘기억, 꿈, 사상’을 찾아다녔던 것은 상당히 오래 전이다. 칼 융(Karl Jung: 1875 - 1961)은 내적 사건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의이다. 미출간이어서 번역이 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정작 책이 번역된 지 8년이 지난 지금 그 책을 손에 들게 되었으니 감격과 아쉬운 마음이 함께 든다.



옮긴이 서문에 의하면 융의 이 자서전은 19권이나 되는 전집에 포함되지 않았다. 자서전은 학문적인 저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저작에 대한 적응을 목표로 한다면 자서전 읽기는 도움이 될 것이다. '기억, 꿈, 사상‘이라는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융의 자서전은 어린 시절인 네 살 이전의 사건에 대한 기억, 꿈, 자발적인 환상, 그리고 사상적 지형도 등 융의 전채적 면모를 접할 수 있는 책이다.



부모의 별거로 크게 힘들었던 융은 여성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에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졌다.(26 페이지) 융은 스스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의 일종으로 명명한 꿈을 통해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어두컴컴한 넓은 초원의 한 가운데 위치한 교회당에서 남근상을 한 신을 만난 그 꿈은 일생 동안 융을 사로잡았다. 융은 혼자 있을 때 종종 자신이 돌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자신인지 아니면 자신이 돌이고 다른 사람이 자신 위에 앉아 있는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사고 실험 같은 것이 아닌지?



인간 세계에서 멀어져 자연의 본질에 침잠하는 데 희열을 느끼던 융은 어느 순간 갑자기 자아의식을 갖는다. 이는 융이 현실과 내면의 인격으로 분열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융 자신은 제 1인격과 제2 인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 두 인격(으로의 분열)은 의학에서 말하는 분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설명한다.(91 페이지) 제1 인격은 현실에 관심을 갖는 인격이고, 제2 인격은 종교적 의미의 내적 인격이다.



융은 자신이 전 생애에 걸쳐 두 인격으로 분열되었다고 고백한다. 융은 세상에 대해서 그런 것처럼 신에 대해서도 양가적 감정을 가졌다. 융은 신을 위대한 위험으로 정의했다. 신에 대해 회의적이던 융은 성령 체험을 하고서도 하느님을 은총과 무서움의 이중적 존재로 생각했다. 융은 어머니도 이중적 존재로 생각했다. 이런 분열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에 대한 태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2 인격을 생각할 때 제1 인격이 침울해졌다는 융은 대극적인 충돌로부터 생애 처음으로 체계적인 환상을 체험한다.(134 페이지) 그것은 북서풍이 세차게 불어와 파도를 일으키는 라인강에서의 일로 그 강 대신 알자스 지방이 물에 덮여 호수가 된다면 어떨까?란 생각과 함께 빠져든 환상이었다. 융은 의학을 선택하며 그것을 계시를 받은 결과로 설명한다. 융은 몇몇 꿈에 대해 계시와 같다는 말을 쓴다. 융은 꿈은 어디서 오는가를 자문한다. 융이 내린 결론은 꿈이 제2 인격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융은 말한다. 제2 인격은 일종의 유령, 세계의 어둠에 맞설 만큼 힘이 커진 혼(魂)이라고.(172 페이지) 융은 하느님이 자신의 꿈 속에서 신학과 그것에 기초를 둔 교회를 부인한 한편 그 밖의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을 허용해주었다고 말한다.(180 페이지) 융은 저 세상 사람이 된 아버지가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난 꿈을 꾸고 사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186 페이지) 융은 니체를 닮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불안감을 갖지만 호기심에 끌려 니체의 책들을 읽는다.



융은 차라투스트라를 니체의 파우스트로 정의하며 자신의 제2 인격을 차라투스트라라 말한다.(199 페이지) 융은 니체는 인생 후반에 제2의 인격을 비로소 발견했으나 자신은 그것을 소년 시절부터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융은 결국 철학자들을 불신했다. 그것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한 철학자들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결과였다.



융으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철학을 지양하고 정신의학으로 들어서게 한 것은 멀쩡한 통나무 식탁의 한가운데가 아무 일도 없이 갈라진 사건으로 융은 이를 계기로 유령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다. 융은 정신의학 및 정신병에 대해 바른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아무도 따라오려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에 들어선 것이라 설명한다. 융은 그것을 숙명이라고까지 말한다.(211 페이지)



융은 정상적인 것의 병적인 변형들이 자신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고 말한다. 융은 그런 것들은 정신에 관해 더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융은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 환자가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고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고 언급한다.(225 페이지) 융은 같은 차원의 말을 또 이렇게 들려준다. “정신의학이 마침내 정신병의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 나는 늘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241 페이지)



“겉으로 보면 정신병 환자에게는 비극적인 붕괴만이 보인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환자 영혼의 다른 측면의 삶을 보는 일은 드물다.”(243 페이지) 융이 주목한 부분은 정신병 환자의 내적 체험의 의미 있는 현상들이었다. 융은 자신의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고, 자신은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자신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라고, 모든 환자에게는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고, 어떤 분석에서는 자신이 아들러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다른 분석에서는 프로이트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249 페이지)



융은 “의사는 그 자신이 고통을 당한 경우에만 효과를 얻는 법이다.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 자아가 외부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세계가 바라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253 페이지) 이는 분석가가 된다는 것은 우선 분석가가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히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글과도. “정신치료의 효력을 위해 꼭 필요한 환자와 의사 간의 교감으로 인해 의사는 환자가 당하는 고통의 높이와 깊이로부터 받는 강렬한 인상을 외면할 수가 없다.”(269 페이지)는.



융은 프로이트가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276 페이지) 융이 신경증 사례에서 성욕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성욕은 부차적일 뿐이었다. 프로이트는 성욕의 다른 요인들을 무시했다. 물론 융은 “네가 프로이트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다면 사기(詐欺)”라는 제2 인격의 말을 듣고 프로이트를 변호하기 위해 싸우기까지 했다. 융은 자신에게 성이론은 가능성만을 지닌, 증명할 수 없는 가설 즉 신비적 이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281 페이지)



융은 프로이트에게 성욕은 질투하는 신의 대체물, 교리 같은 것이었다고 주장한다.(282 페이지) 융은 (니체의 저서를 읽은 적이 전혀 없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니체의 권력원리의 우상화를 보상하는 정신사의 교묘한 책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285, 286 페이지) 융은 프로이트가 근친상간 등의 꿈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집착해 그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한다.(309 페이지) 융은 자신이 성의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인 의미를 넘어 정신적 측면과 신성체험적 의미를 탐구하고 설명하려 했다고 말한다.



융은 성을 신의 이미지의 어두운 면으로 보았다. 융은 자신을 압도하는 환상에 저항감과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애썼다. 융은 자신 안의 여성성을 남성 무의식 속의 전형적이거나 원형적인 형상으로 파악해 거기에 아니마란 이름을 붙였다. 융은 자신을 한 여성적인 혼(魂)에 의해 분석을 받는 환자처럼 여기기도 했다.(340 페이지) 융은 매일 저녁 글을 쓰는 데에 매달렸다. 그 자신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아니마)가 자신의 환상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고 이미 적어 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하지도 그것을 가지고 책략을 부리지도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341 페이지)



융은 무의식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운 뒤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꿈을 통해 직접 추론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중개자인 아니마와 대화할 필요가 없어졌다.(343 페이지) 융은 인생 후반기에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감정이나 이미지의 형태로이지만 초기의 체험 속에 이미 들어 있었다고 말한다.(351 페이지) 융은 연금술이 그노시스와 미래 즉 현대의 무의식의 심리학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말한다.(366 페이지)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다. 융은 자신의 모든 저술은 숙명적인 강요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라고 말한다.(397 페이지) 융은 동시성 현상을 일상적이라 할 만큼 겪었다. 동시성 현상은 내적 감각으로 지각하거나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외부의 현실과 자주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413 페이지) 우리의 마음도 신체가 그렇듯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420 페이지)고 말하는 융은 그 조상들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우리는 자신을 그만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422 페이지)



융은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 사는 것에 익숙했다. 융은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무의식적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434 페이지) 융 심리학에서 그림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림자는 자아의 뒷면에 해당하는,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요소들이 모여 있는 층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적인 것으로 나의 의식적 인격과는 상관이 없고 나의 전인격 즉 나의 자기(selbst)와 관계가 있다.(437, 438 페이지)



융은 자신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자기는 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인격의 전체성 등을 의미한다. 융은 인간이 신의 압도적인 작용에 충분히 응답할 수 있으며 반대로 신에게조차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개인을 형이상학적 요소를 지닌 위엄에까지 이르도록 고양하는 자부심이라 설명하며 그런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덧붙인다.(452 페이지)



융은 원형(原型)이 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실제 사례를 들며 설명한다. 융은 꿈의 예지능력을 가진 샤먼 같은 사람이었다. 융은 인도 여행 사실을 전하며 자신이 성자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도둑질처럼 여겨졌을 것이라 말한다.(488 페이지) “그들의 지혜는 그들에게 속하고,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만이 나에게 속할 뿐이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하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 것이거나 본성이 내게 가져다 주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488, 489 페이지)는 융의 말은 단호하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 영혼, 그리고 인생은 나에게 활짝 피어난 신성처럼 여겨진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491 페이지) 융은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리지만 자신은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至福)이라고 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고 말한다.(525 페이지)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533 페이지) 말한 융은 환상과 꿈 등과 연관된 예지적 능력에 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융은 무의식의 가능성과 능력에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비평적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그런 무의식의 전달이 언제나 주관적인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인다.(539 페이지) 융은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 단계로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라 말한다.(551 페이지)



융은 어떤 원인으로 자신이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는 격렬한 충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며 그 본능이 신화적 표상을 찾아내기 위해 의식을 만든 셈이라고 말한다.(567 페이지) 융은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라 말한다.(572 페이지) 융은 빛에는 창조주의 다른 측면이 그림자가 따른다고 전제하며 이제는 더 이상 악을 선의 결여라는 완곡어법으로 과소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579 페이지)



일종의 메타노이아 즉 회심, 회개가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악에는 물론 선에도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융의 진의는 분명하다. 극단을 피하는 것이 그것이다. 니르드반드바(nirdvandva) 즉 양쪽으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선악의 대극에 더 이상 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580 페이지) 그러나 융은 선악이 상대적이라 해서 그 범주가 무가치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설명한다.



일찍이 그노시스파로부터 제기된 “어디서 악이 나오는가?”란 문제에 대해 기독교 세계는 답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융은 인간 정신이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일깨운다.(586 페이지) 융은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597 페이지) 신화는 우리가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해진 것이다. 정신은 원형적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백지 상태(tabula rasa)로서 출생시 새로 생기며 스스로 상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진부한 것으로 정의하며 융은 몸이 수백만년의 해부학적 전사(前史)를 가졌듯 정신체계도 그러하다고 설명한다.(610 페이지)



융은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하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 속으로 예상되는 일 뿐 아니라 그 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한다.(625 페이지) 자신의 안에 데몬이 있었다고 말하는 융은 그것이 잠잠해진 곳에서만 사람들과 중간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627 페이지)



융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는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하며 그것이 자신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라고 말한다. 자신의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음으로 많은 일을 후회하지만 그런 어리석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라 말하는 융,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며 의미가 우세하여 모든 전투에서 이기기를 마음 졸이며 바란다는 융이다. 융은 세계를 거칠고 잔혹한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세상으로 보았다. 모순과 역설 속에서 완성된 지자(智者)라는 말로 융을 수식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40707 2015-04-16 17:40   댓글달기 | URL
오늘도 긴글 쓰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얼마전 저도 읽었습니다 다시 정리가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흔적 2015-04-16 17:39   URL
감사합니다... 글이 긴 것은 내공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고 시간이 부족한 탓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비용 따위를 짐작으로 미루어 미리 계산함. 견적(見積)의 사전적 의미이다. 아침 책 서핑(대개 구경만 하거나 구경하다 한 두 권 사는 것에 그치지만)을 하다가 이 단어를 보았다. 문제(?)는 출처가 어디이고 무엇에 쓰였느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말에서 흥미 그리고 신선함까지는 아니지만 새로운 자극(刺戟)을 받았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견적이 불어난다는 말이고 쓰인 곳은 책을 사는 데 있어서이다. 이런 경우, 너무나 공감된다. 사연인 즉 쉬잔 엠 드 라코트의 ‘들뢰즈: 철학과 영화’로부터 비롯된 서핑의 끝에서 이 단어를 만난 것이다. ‘들뢰즈와 시네마’에 대해 로쟈가 (저자인 보그가) “시간에 관한 베르그송의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시네마1>과 <시네마2>의 많은 부분이 애매하게 된다."(11쪽)고 협박해놓고 있으니 견적은 더 불어난다.”고 쓴 것이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났다. 2007년 2월의 일이니.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난 1월에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읽고 또 들뢰즈의 <푸코>까지 읽어보겠다던 계획이 입에 침만 묻히고 무산돼 버렸는데, 어느새 스테이지는 '들뢰즈'로 바뀌었다. 이 숨가쁘게 반복되는 차이 속에서 잠시 넋을 놓는다...”는 말 때문이다. 어려운 것은 나만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다. 바이런이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을 했지만 나의 경우 자고 일어나면 쏟아져 나오는 탐나는 책들 앞에서 넋을 잃는다. 과장하면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란 릴케의 탄식이 내 것인 듯 하다. 읽어야 할 책은 많은데 시간은 한정적이고 독해(讀解) 내공(內攻)은 태부족(太不足)하기 때문이다. 구매에 드는 돈도 만만치 않다. 바이런이 저절로(노력 없이) 유명해졌을 리 없듯 책이 나오는 것도 그럴 것이다. 느슨해진 고삐를 다시 꽉 쥐어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