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용한 걸음으로
김병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내가 가진 책 가운데 현대 사상사를 전공한 유진 런의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이 있다. 이 책은 번역자 이름이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뿐 아니라 글자 크기도 상당히 작아 격세지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나온 지 17년이 지난 책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지만 무엇보다 金炳翼이란 번역자와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책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은 내 지난 역사도 돌아보게 한다. 그 책의 번역자인 문학평론가 김병익 선생의 최신작‘조용한 걸음으로‘를 보며 오랜만에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을 다시 펼쳐 보았다. 아울러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김천혜의 ’소설 구조의 이론‘, 피에르 앙사르의 ’현대 프랑스 사회학‘, 정찬의 ’아늑한 길', 김성기의‘포스트모더니즘과 비판사회과학’, 박상륭의‘죽음의 한 연구’, 한강의‘여수의 사랑’, 김현의‘말들의 풍경’, 김현문학 전집 9, 12, 14번, 몇 권의 문지 시선 등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다른 책들도...
이 책들은 모두 2000년 이전 책들이다. 2000년이란 연도를 굳이 말하는 것은 김병익 선생이 출판사 대표직에서 물러난 해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선생은 김현, 김치수, 김주연 등과 함께 1980년대 문지(문학과 지성사) 문학평론가 4K의 한 사람이었다. 그 분이 어느덧 팔십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었다.‘조용한 걸음으로‘는 다소 독특한 책이다. 평론가의 예리한 감식안과 개인적 감회(感懷)가 독특하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선생은 당신의 글을 잡문이며 잡탕이라 규정하신다. 그리고 혹 당신의 책을 보실지도 모를 운 없는 독자가 있다면 당신의 소홀한 마음가짐을 사과해야 할 일이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벗어나고 싶은 소망도 내보이신다. 물론 사과(赦過) 언급은 지나친 조심스러움으로 보이고 두려움을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은 둘레 안도 아니고 금 밖도 아닌 가장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욕망과 체념 사이를 두리번거리는 선생의 위상(205 페이지)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마지널리안이라는 다소 생소한 외국어를 제목으로 쓰기가 망설여져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다란 우리 말 소제목을 3부에 붙였지만 선생은 자칭 마지널리안이다. 마지널리안은 독서 중 느끼고 배운 내용들을 책 가장자리에 메모해 넣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 마지널리안의 정체성과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개념은 로버트 단턴의‘책의 미래’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단턴에 의하면 프랜시스 베이컨, 존 밀턴, 존 로크, 바루흐 스피노자 등이 그런 류의 독자였다. 선생이 마지널리아적 독서 습관을 갖게 된 것은 읽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가장자리라는 공통점은 심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조용한 걸음으로‘는 제목 자체가 인상적이다. 이 제목은“아직 하늘에서 막내의 여전한 섣부름을 안쓰러워하실 아버님 어머님이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그분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서일까. 조용한 걸음으로나마 내가 그 거리를 줄여가고 있는 중임은 분명하다.”(325 페이지)는 글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성전 스님은 ’삼천 년의 생을 지나 당신과 내가 만났습니다‘란 책에서“세상에 와서 내가 가장 귀하게 만난 사람들은 바로 나의 부모님”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조용한 걸음으로란 선생의 말은 그 스님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도 ’조용한 걸음으로‘는 부모와의 인연을 다룬 책은 아니다. 다만 황동규, 오정희, 황석영, 박이도 등 생존 문인들은 물론 김수영, 김규동, 김영태, 오규원, 김현, 황순원, 이청준, 안우식, 박경리, 박완서, 전숙희, 천관우 등 작고 문인들에 대한 기억과 호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분들을 호명하며 선생이 덧붙인 글들은 에피소드 이상이다. 선생은 마르크스와 톨스토이 등의 위선과 이중성을 폭로한 폴 존슨의 ’두 얼굴의 지식인‘에 대해 사상과 작품을 인품 및 인격과 나누어 보라는 말씀을 하신다.“그들의 창조적 정신은 인품과 인격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기성의 세계와 그 윤리와의 갈등과 싸움에서 빚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조용한 걸음으로‘의 핵심을 들라면 제목 짓기의 어려움, 모방 단계를 지나 자기의 문체를 갖는 것, 자료 찾기의 어려움, 편집자로서의 역할과 책임, 지식사회에 대한 성찰적 회고와 전망 등으로 꾸려진 3부를 들 것이다. 이 부분은 무엇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도움은 ’소나기‘와 ’독짓는 늙은이‘의 작가인 황순원 선생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도 전해진다. 대학 2학년 때 막 사귄 시인 황동규를 따라 그의 집에 갔다가 시인의 부친인 황순원 선생을 처음 뵈었다는 선생은 거실 탁자에서, 끼어 넣고 지우고 화살표로 빈 자리에 보태 쓴, 복잡하게 퇴고(推敲)한 원고지를 보고“그 아름다운 선생님의 문장도 이런 탁마(琢磨)를 통해 만들어지는구나 감탄하며 작가의 내면적인 각고(刻苦)의 증례를”보았다고 한다.
선생은 명에의 허욕을 긍정적으로 보고(82 페이지) 속물근성도 진지하고 긍정적인 것이라면 유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신다.(104 페이지) 그리고 과학자와 예술이란 글에서 당신은“현대 과학의 내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76 페이지)다고 말씀하시지만 고생물학자 故 스티븐 제이 굴드의 ’여덟 마리 새끼 돼지‘나 ’시간의 순환, 시간의 화살‘ 같은 책을 언급하시기도 하고 무엇보다 과학자들의 평전을 많이 읽으신다. 선생에 의하면 굴드는 ”그 자리에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인간이기를 그만 두고 그 방의 벽에 붙어 있는 파리가 되고자 할 것.“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구나 그렇게 파리가 되어서라도 엿듣고 싶은 모임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굴드의 이야기는 공감이 간다. 선생의 관심은 기술로 이어진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기술이란 어느 영웅의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행동을 통해 발전된다는 것, 그리고 기술이란 대개 어떤 필요를 미리 내다보고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 이후에 그 용도가 새로 발견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293 페이지)
그런데 이 부분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달리 있다. 1960년 4, 19 오전 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몇 명의 고등학생들이 낄낄거리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못마땅해 하다가 좀더 성숙해진 뒤 당신의 생각이 순진했음을 깨달았다는 선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무거운 역사적 사건도 처음에는 사소하거나 우발적이었다가 의미와 결과가 창대해지고 우연의 얼굴 속에 필연의 역동성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37 페이지) 이는 시선의 여유로움과 관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나에게는 발명된 이후 사후적으로 용도가 발견되는 기술과, 처음에는 사소하거나 우발적이었다가 의미와 결과가 창대해지는 역사적 사건을 닮은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선생은 장정(裝幀) 담당자 외의 저자, 역자, 편자, 편집자, 기획자, 교정자, 출판기자, 발행자, 영업자 등 출판과 관련한 모든 일을 역임했다고 한다.(224 페이지) 이런 예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저자들 사이에서도 격은 다를 것이다. 선생은 ”작가란 역시 나 같은 범인(凡人)과는 다르“며 ”그들의 작품을 가지고 해설이나 서평을 쓰는 비평가의 한계를 실감하곤“ 한다고 말씀하신다.(244 페이지)
선생은 만년(晩年)이다. 그런 선생이 ’만년의 양식에 관하여’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부분에서 나는 묘한 감회를 느꼈다. ’만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 이름이다. 이 책에서 사이드는 만년의 양식을 보여준 예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모차르트(서른 다섯 살에 고인이 된 모차르트에게서 발견하는 만년의 양식!), 토마스 만, 장 주네, 글렌 굴드 등을 들었다. 사이드가 ’만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쓴 것은 노벨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의 한 구절을 보고 깊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구절은 ”나이를 먹으면서 문득 깨닫고 보니 아주 고요한 비탄이라고나 불러야 할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구절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한 작가나 주제에 대해 3년 동안 집중하여 독서하면 대체로 그에 대해 지적 정리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선생으로 하여금 도스토에프스키나 카뮈 등의 문학 전집을 메모해 가며 우직하게 읽게 한 요인이 되었다.(277 페이지) 나는‘조용한 걸음으로‘가 이전 문학평론집과 다음 문학평론집을 이어줄 다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