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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맛 한겨레 동시나무 1
이정록 시, 오윤화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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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말미에 2016년 가장 짧은 달에 '옥수수수염 머리 이정록'이라는 서명으로 미루어, 책 앞 날개 안쪽의 이 그림도 옥수수수염인고로 이정록 시인이 손수 그리신 자화상이 분명하다. 그림 밑에 날짜와 낙관을 흉내낸 돋을새김'록'자 하며 시인 특유의 자상함과 재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도드라진다.

 

그동안의 나는 어른과 어린이로 연령 상의 분류는 피치 못할 것이지만,

언어의 바다에서 아름다운 시어를 길어올려 시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런 시를 읽고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동시 또한 쓸 수도 있고 감상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시와 동시를 구태여 경계 나누는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었다.

 

'동시는 유치하다'고 할 친구들을 위해 요번엔 생각이 깊고 의젓한 동시를 묶었다고 하길래,

시인의 세심한 배려라기보다는 심한 과장법이구나 싶었었다.

그런데,

그간 시를 공부하며 느낀 하나는

좋은 시집에는 분명 빼어난 동시가 알알이 박혀 있다는 것이에요.

좋은 동시집에 뛰어난 시가 숨어 있듯 말이죠.

그건 본래 시와 동시가 한몸이기 때문이죠.

동심이 바탕이 돼야 기가 막힌 시가 탄생하죠.

어른 시와 동시는 동심원이 같아서 딱히 경계선을 긋기 어려워요.

시를 품은 동시, 동심을 꼭 감싸 안고 있는 시를

한곳에 모아 보고 싶었어요.

                                                                                                                  ('시인의 말' 부분)

라고 하는데,

어린아이의 마음을 일컫는 '동심'과 수학용어 동심원에서 원의 중심이 같고 반지름이 다른 원에서 동음이의어의 묘를 살려내는걸 보면,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가 틀림없다.

일반적인 언어를 벼리고 모두어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걸 보면 확실한 스페셜리스트 같기도 하고 말이다.

 

좋은 시가 참 많지만,

그동안 시인의 전작을 읽었던 이들이라면 정서가 크게 새로울게 없다고 느껴질 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래서 '요번엔 생각이 깊고 의젓한 동시를 묶었다'고 했구나 하고 느껴질 정도로,

어려운 시들도 있었다.

 

나도 뛸래

 

 

처음으로 차를 산 담임 선생님

운동장에서 주차 연습하다가

축구 골대를 박았다.

 

"조기축구회 공격수라면서요!"

 

"뒷발질로 골인시키기가 쉽냐?

 후진은 너무 어려워."

 

그날 밤,

축구 골대가

꺾인 골대가

꺾인 무릎을 쓰다듬으며

달에게 소리쳤다.

 

"보름아.

나도 너처럼 공을 차올릴 수 있겠어.

이제 한쪽 다리가 접혔거든."

 

이 시는 축구골대를 주차라인 삼아,

차를 후진시켜 주차연습을 해본 어른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쉬운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난 모든 사물을 의인화해서 의미를 부여하며 혼잣말하기를 즐기는 사차원이라 이해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부자되세요

 

목욕탕에서

아빠 등을 밀어 드리는데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부자 되셔!

 

서커스 공연장에

아빠 손잡고 들어가는데

매표소 누나가 빙긋이 웃는다.

 

--부자 되세요!

 

느낌표가 아니라

아빠와 아들 사이냐 묻는

물음표란 걸 나도 안다.

 

--네 부자예요.

벌써 부잔걸요.

 

난 아빠의 웃음이 좋다.

더운 나라에 사시는 외할머니는

우리가 부자인 걸 단박에 아셨는데.

 

이 시는 요즘 애들 말로 하면 '아제 개그'도 아니고, 썰렁 개그 정도 되시겠다.

아, 춥다, 추워~--;

 

어떤 시들은 시인이 과거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쓰였고,

또 어떤 시들은 시인의 자녀 정도의 설정이지 싶고,

또 어떤 시들은 요즘 뉴스에서 차용했지 싶은것이, 시대가 제각각이다.

 

달이 환하게 웃는다.

구름에 숨은 달처럼

엄마 아빠는 조금만 웃는다

                     '보름달 돈가스' 중에서

같은 경우, 설정도 그럴 듯 하고 상황도 애잔한 것이,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마음  가운데를 파고 든다.

 

'우유주머니'라는 시는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아침에 우유주머니가 하교시 현관 열쇠주머니가 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요즘은 지문인식키, 비밀번호 설정키가 대세를 이루니,

요즘 아이들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일 수도 있겠다.

왼손과 오른손이 번갈아 어긋나는 상황을,

'이제야 짝을 맞춘다'고 한 것도 참 긍정적인 발상이고 말이다, ㅋ~.

 

'골고루', '골목', '압력밥솥', '사랑', '네가 나를 부를때', '왜가리' , 등 재미있거나 기발하거나 재미있고 기발하고 이쁘기까지한 시가 넘쳐난다.

말 못하는 아기들은 궁금한건 일단 입에 넣고 본다.

난 아기는 아니지만,

한가득 머금고 입안에서 궁글려서 조금씩 음미하듯 베어 삼킬 것인지,

한꺼번에 눌러 삼킬 것인지, 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달라요~!'되시겠다.

그러다가 얹히거나 소화불량이 되는 건?

팔자소관 되시겠고, ㅋ~.

 

 

이런 팔방미인인 이정록시인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서둘러 리뷰를 썼다.

(시집이 나온것에 비해 한참 게으르지만~--;)

6월26일 오후 3시, 충남홍성 홍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2016 문학콘서트>에 가시면 만나실 수 있겠다.

(자세한 기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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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6-22 23:22   좋아요 0 | URL
동시는 그야말로 마음이 순수한 사람만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동시를 썻던 윤동주 시인도 생각나네요....

양철나무꾼 2016-06-23 13:37   좋아요 1 | URL
점심 드셨어요?
윤동주를 말씀하시는데, 내 고장 칠설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하는 이육사가 떠오르는 뜬금없음이란...ㅋ~.

2016-06-23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9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06-29 10: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은 시에서나 가능한 거고,
청포도는 이 무렵이 젤 맛날 때죠~^^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
위화 지음, 이욱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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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아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기억력이 깜박깜박 하는 나이 때문이지만, ㅋ~.)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 느낌을 붙들어 두기위해서 글을 쓰는지라, 위화 같은 전문 작가의 경우에는 뭔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쓴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를 읽기 시작하면서 먼저 읽었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비해서 훨씬 둥글렸다는 느낌이 들어 맥이 빠져버릴 때 즈음, 책날개에 적힌 그간의 사정을 읽게 되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검열'로 인해 중국이 아닌 대만에서만 출간되었으며,『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이 책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 10년 만에 발간된 산문집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자체 검열의 과정을 거쳤을 테고 그러면서 순화되었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이 책이 유난히 반가워졌고 그간이랑 다른 의미로 읽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기 형식을 띤 이 산문집을 통해서 위화라는 작가가 우리에게 얘기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 불균등한 삶이다. 지역 간의 불균등, 경제 발전의 불균등, 개인적 삶의 불균등이 나중에 마음의 불균등이 되었고, 끝내는 꿈의 불균등으로 이어졌다. 꿈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원래 지니고 있는 재산이고, 모든 사람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잃어도 꿈만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꿈조차 균형을 잃었다.

ㆍㆍㆍㆍㆍㆍ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우리는 현실과 역사라는 이중의 거대한 격차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환자라고 할 수 있고, 모두 건강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극단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과 과거를 비교해도 그러하고, 오늘과 오늘을 비교해도 역시 그러하다.ㆍㆍㆍㆍㆍㆍ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12~13쪽)

곳곳에서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와의 비교가 나와서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요량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사유 방식과 생활 방식, 세계관과 가치관 따위가 천치(지)가 개벽하듯이 변했고(15쪽), 사람들의 추격 속도는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지쳐가고 있다며,

개인의 가치와 가정의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발걸음을 늦춰야 한다고 하는 데에서야 저자 위화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일례로 93년부터 컴퓨터로 글을 쓴 386세대인 그가, 그 이전에 10년 정도 손으로 글을 써서 생긴 손가락의 굳은살을 은근 자랑스러워 했었는데, 나중에 왕멍(왕멍의 쾌활한 장자 읽기의 그 왕멍인듯~^^)을 만나 그의 손에 굳은살을 보고는 완전 감탄한 얘기를 들려준다. 자신은 겨우10년이지만, 왕멍은 286세대로 컴퓨터로 글을 쓴것도 먼저이지만, 이전 손으로 글을 쓴 것도 반평생이란다.

내겐 '차이'로 읽히지 않고, '꾸준함을 이기는 힘은 없다' 쯤으로 읽혔다.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소설가 위화가 쓴 산문집 답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책머리에,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13쪽)

라고 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않고, 다양한 해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책과 글을 통하여 문제 제기를 하고, 치유책을 찾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과정에서, 독서를 할 때 중요한 문제가 부상하기도 하고,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토대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잘못이며, 위대한 독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읽는 것이란 점이다. 그것은 텅빈 마음을 품고 읽는 것으로, 독서 과정에서 마음은 빠르게 풍성해진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제나 미완성이고 부조리 서사의 특징도 미완성이기 때문이다.(66쪽)

영향을 준 작가는 많지만, 다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포크너 만을 진정한 스승이라고 하는데,

스승의 요건으로 이론뿐 아니라 제자에게 직접 전수해주는 한 수가 있어야 하는데,

포크너는 어떻게 심리묘사를 처리해야 하는지 절묘한 한 수를 알려주었다고 치하한다.(95쪽 내용 재배열)

 

위화 자신이 '스트린드 베리'의 '빨간방'을 다시 읽은 독서 경험을 살려 이런 말도 한다.

지나간 삶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만 지나간 독서는 세월이 지나면 더욱 새롭다. 20여년 동안 위대한 작품들을 읽을 때면 늘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의 작가들에게서 나 자신의 감성을 읽었고, 심지어 나 자신의 삶도 읽었다. 문학에 어떤 신비한 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112쪽)

 

작가 사이의 상호 영향 내지는 다른 작가나 외부의 영향을 이렇게 비유했었다.

한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주는 것은 태양이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으나, 중요한 것은 식물이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성장할 때 결코 태양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식물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118쪽)

이 말은 무척 멋지게 들렸지만, 어찌보면 자신의 본성을 고집한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과연 식물은 성장할때 식물의 방식만을,

또는 태양은 빛을 비추일때 태양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태양이 빛을 비춰주고 식물이 받아들여 성장하는게, 태양이나 식물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번지고 스며 물드는, 통섭이나 융합 따위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이 책의 뒷부분 '부록'으로 가면, 위화 본인이 쓴 소설 『형제』에 대한 본인의 해설이 나오고,

달라이 나마와 관련 오늘날 중국에 대한 비판과,

창간 50주년을 맞는 잡지에 축하문을 기고하며 자신의 20년 작가인생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을 지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화는,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요량이 아니라,

향후 10년 혹은 20년 동안의 중국 사회 형태가 차츰 보수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부드러운 방향으로 나아가길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 『형제』의 해설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ㆍㆍㆍㆍㆍㆍ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쓰면서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느꼈고, 사납게 썼다. 그래서 따뜻한 부분이 필요했고, 지극히 선한 부분이 필요했으며, 이는 내게 희망을 주고, 독자에게 희망을 주었다. 현실 세계가 사람들을 실망시킨 뒤 나는 아름다운 죽은 자들의 세계를 쓴 것이다. 이 세계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다. 하지만 무척 아름답다.(244쪽)

그의 글이 내게 치유인 이유이다.

맨날맨날 그날이 그날인,

다를게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일지라도,

조금쯤은 현실세계에 냉혹함과 각박함을 느끼더라도,

우리가 무조건 따뜻한 남쪽나라를 그릴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맞잡은 손으로 온기를 더할 수는 있고,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는 있지만,

우리는 죽은 자들이 아니고, 현실에 발 딛고 서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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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6-21 21:13   좋아요 1 | URL
오늘 지금 북플 화제의 글에 이 책 리뷰만 세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첨 보는 저자와 책이라 갑작스런 리뷰 폭풍에 갑자기 이유가 궁금합니다. ㅎㅎ

양철나무꾼 2016-06-22 10:09   좋아요 1 | URL
ㅋㅋㅋ~, 리뷰 폭풍이 일었나요?
어제가 위화의 산문 두권 리뷰 이벤트 마감일이었어요.

책 밑에 딸리는 서지 정보나 이벤트 정보를 잘 들여다보면, 간혹 이런 이벤트가 있고,
음, 저도 그동안 종종 당첨 됐어요.

뭐, 글을 잘 써야 하지 않을까...생각들을 하시겠지만,
리뷰대회가 아닌 다음에야 성의껏 쓰면 되고,
거의 추첨이나 제비뽑기 방식이더라구요~.

상품이나 상금으로 받은 것 중 제일 고가는 `비밀`이구요, ㅋ~.
보통은 책 한두권이나 책 한두권을 구입할 수 있는 도서상품권 정도인데,
우리 같이 책에 환장한 사람들은 그게 제일 좋죠~^^

제일 쓸모없었던 경품은요.
무슨 닥터백이라나.
노랑색 천으로 만든 가방이었는데,
천도 네 귀퉁이가 안 맞아 울고 조악한 것이,
제가 만들면 더 잘만들 자신이 있었어요.
애먼 천과 부자재가 아깝더라는~--;

이렇게 상세 브리핑했으니,
자, 님도 트라이 투 해보시길~!!!

북다이제스터 2016-06-22 23:48   좋아요 1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양철나무꾼 2016-06-23 13:38   좋아요 1 | URL
It`s my pleasure~^^

루쉰P 2016-06-23 14:29   좋아요 1 | URL
아우 저 표현 정말 좋네요 ㅎ

한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주는 것은 태양이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으나, 중요한 것은 식물이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성장할 때 결코 태양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식물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118쪽)

어떻게 이런 문장을 ㅋ 감탄을 하게 되네요. 위화가 말한 나는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다라는 말에서는 루쉰 선생의 스멜이 느껴지네요. 루쉰 선생은 의학 공부를 하다가 문예를 종사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의학관련 지식을 비유해 글을 쓰곤 했거든요.

마지막에 쓰신 글은 무척이나 함축적이지만 철학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의 글이 내게 치유인 이유이다. 맨날맨날 그날이 그날인, 다를게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일지라도, 조금쯤은 현실세계에 냉혹함과 각박함을 느끼더라도, 우리가 무조건 따뜻한 남쪽나라를 그릴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맞잡은 손으로 온기를 더할 수는 있고,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는 있지만,우리는 죽은 자들이 아니고, 현실에 발 딛고 서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베스트 문장입니다. ㅋ 감동 쩔어 ㅋ

양철나무꾼 2016-06-29 10:40   좋아요 1 | URL
위화도 작가가 되기 전에 발치사였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전 한때 모옌과 위화를 살짝 헷갈렸는데여, 지금 생각해보니 위화나 루쉰 입장에서는 되게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모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노벨문학상을 받기는 했지만, 중국 같은 나라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체제 순응적이란 말은 일종의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 것이~.

요번 기회에 위화의 다른 소설들을 알게 된게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2016-06-28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06-29 10:43   좋아요 1 | URL
히힛~^^
저보다 고수이신 님께 축하를 받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한 걸요~^^

뭐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종의 제비뽑기 같은 것일테니까요.
그리고 요번엔 어쩐 일인지, 알라딘 적립금이 아니라, 게좌번호를 대라는 것이...여간 번거롭지가 않은걸요~ㅠ.ㅠ
 
인문학적 독법이란 인간의 삶 전반에 걸친 가변적인 것이다

때때로 누군 말로써 자신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 글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는 말과 글 양쪽 다 자신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웅현 님의 '다시, 책은 도끼다'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실전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근사한 책이었다.

 

 

 

 

 

 다시,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6월

 

 

얼마 전,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다가 혼란스러웠던 부분을 잘라내어, 지인에게 여쭙는 과정을 리뷰에 올린 적이 있다.

난 이 지인이라는 사람과 계속 책에 관해서 이것 저것 여쭙는 사이였고,

그래서 용어가 통일되다보니,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서,

박웅현보다 쉽게 이해가 되었지만, 모두가 그런건 아니었나 보다.

 

혼란스러움을 줄이겠다는 선의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나 보다~--;

 

그리고 이 책의 한 부분, 불교와 관련하여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어, 지인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이런 답을 주셨다.

나도 지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불교의 개념 자체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었고,

이책에서 궁금하였던 부분에 관해서 였다.

'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적은 환생이 아니라 멸이랍니다'라고 한 저 문장과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이 호응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이 강의내용을 토대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강의 도중에는, 말하기 중에는 말외의 모든 공감각적인 표현들이 감정전달의 수단이기 때문에 의미하는 바가 충분히 전달되었겠지만, 책으로만 읽어선 충분히 오해할 여지가 있다 싶어서 였다.

 

그러다 보니, 일이 커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침묵을 지킨다는 것도 비겁한 일인것 같아 바로 잡아본다.

 

내가 책에서 궁금했었던 부분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인의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같은 경우도,

처음 저 구절만을 접한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나 또한 그 부분을 간과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가 '언어도단'을 일걷는 것만 인지하고는,

언어도단을 말함으로써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근데, 사실은...

불교의 언어는 언어도단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어서 이렇듯 오해가 생길 여지가 다분하다는데,

이건 넷상에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인, 반어법이랑도 닮았다.

나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역설이나 반어를 많이 사용해서, 때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곤 한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다던지, 감정이 목소리에 실리는 대화의 경우에는 덜 한데,

글자로 어떤 상황이나 사실을 전달할 경우, 분위기까지 통째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때문에 여간 아쉽지가 않다.

 

태어남도 없고 소멸됨도 없는 것,

그리하여 멸 자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 아닐까?

모든 고뇌를 멸해서 새로운 연을 이루는 게 아니라,

모든 고뇌 자체가 망상임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열반이요, 해탈이 아닐까?

그러니 내 마음이 곧 부처고,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달으면,

곧 부처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박웅현 님이 책에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고통임을 깨달으라'는 말을 빼먹은 채로, 

그냥 멸만을 얘기해서, 의미를 모호하게 한것을 바로 잡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불교의 개념 자체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었다.

 

길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는데, 난 때로 너무 집착하고 연연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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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탈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6-06-21 13:4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님께서도 지적했듯이, '맥락' 없이 인용하는 글들은 곧잘 '말도 안되는 소리'로 매도될 때가 자주 있는 듯합니다. 저 역시 (바로 그런 '표현'을 앞세운 지인의 글을 보고) 대뜸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지요. '연도 멸도 없는 해탈의 세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저도 한동안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해탈'이 곧 불교도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 해탈에 이르면 곧 '윤회'를 벗어난다는 뜻일진대, 왜 거기서 다시 '새로
 
 
2016-06-20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1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6-06-20 16:51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 버려야 하는데.. 아직도 아내를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옳은 생각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06-21 17:26   좋아요 1 | URL
낭만인생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버려야 할 건 아니지요.
잠시 접어두는 것일 수도 있고,
살다보면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잠시 잊혀지거나 잃어버릴 수는 있지만 말예요.

구태여 칼로 무우자르듯이, 상처를 도려내듯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충분히 애도하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빠져버리거나 침잠하지만 않는다면...요~^^
힘 내세요~^^

2016-06-21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시, 책은 도끼다 -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두번째 애인인 아들이 대학교 2학년이라고 하면, 첫번째 애인인 남편에 대해선 더이상 묻지 않는다.

으레 그렇고 그런 과정을 거쳐 애정을 남발하기보다는 유지하는 쪽으로 가족 간의 유대관계를 이어가고 있으려니 생각들을 하는 모양이다.

이런 관계가 나름 괜찮은 것은, 애먼 데 에너지 소모를 안 하게 되기 때문이지만,

결정적인 한방 내지는 극적인 순간, 인생의 정점이라고 할만한 변곡점이 없다는 점에선 좀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나의 유일한 樂은 사촌 여동생의 딸내미이다.

5촌 당숙 간이니까, '이모~, 조카~'하는 사이지만, 혈연적이나 유전적으로 유전적으로 유기적 관계를 따지기엔 아주 미미하지 싶다.

그런데 이 조카가 야무지고 똑부러지는 것이 내 맘에 쏘옥 들게 행동을 한다.

어릴때 나를 보는 것 같은 것이, 어찌보면 표정도 닮은 것 같고, 내 속으로 낳았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겠다, ㅋ~.

당연히 애정 표현도 과할 수밖에 없고, 응원하는 의미에서 해주는 칭찬도 항상 하이톤이다.

얼마 전 이 조카와 전화통화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 두번째 애인은,

"엄마 그러는 거 아니지~,

 난 이제 다 커서 엄마가 의욕을 북돋워주려고 그냥 오버하는 거라는 걸 알지만,

 어린애가 그런 말 들으면, 정말 잘해야 한다는 뜻인줄 알잖아.

 이것 저것 다 잘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엄마랑 비교되는 게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인지 생각해 봤어?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애한테 맨날 뭘 잘해라, 열심히 해라 야?

 어릴땐 아프지 않고 잘 놀면 되는거지,

 좀만 더 커봐라, 걔도 학원 여기저기 다니느라고 엄마랑 전화통화 할 시간도 없달거다."

맹세컨대,

난 우리 아들에게 나와의 경쟁심을 불태워야 한다고 한 적도 없고,

앞만 보고 내달리라고 한 적도 없으며,

나를 닮으라고 한 적은 더더욱 없다.

반대로만 하는 청개구리 아들을 둔 청개구리 엄마 마냥,

산에다 묻으라고 하면 개울에 묻어 떠내려 가게 될까봐,

반대로 개울에다 묻으라고 했는데, 

청개구리 아들이 처음으로 엄마 말 듣고 개울가에 묻어서,

진짜 떠내려가게된 엄마의 신세라면 모를까~(,.)

암튼 내 뜻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조물주의 독자적인 창작품이 확실하다.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독특하다고 하는 것과 관련,

내가 아들 녀석을 볼때 유니크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한번씩 나랑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체념을 하게 될뿐이다.

 

분위기를 바꾸어, 인문학 강독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어떤 강연을 갈무리 한 것 같은데,

'책은 도끼다', '여덟 단어'와는 또 다른 의미로 읽히는 것이,

그동안은 박웅현이 좋을때도 있고 별로일 때도 있었던 내게,

그만의 고유한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그동안  이 책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독서록이라든지 서평집, 책 읽는 법에 관한 책을 좀 읽어왔었다.

그의 전작들을 포함한 그동안의 책들은 '왜 읽느냐'고 묻고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라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요번 책 '다시, 책은 도끼다'는 '어떻게 읽느냐'고 묻고 '천천히'라는 독법을 답으로 제시하고 있다.

 

'천천히 책을 읽는다'에서 '천천히'란 물론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읽고 있는 글에 내 감정을 들이밀어 보는 일, 가끔 읽기를 멈추고 한 줄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일, 가끔 읽기를 멈추고 한줄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일, 화자의 상황에 나를 적극적으로 대입시켜 보는 일, 그런 노력을 하며 천천히 읽지 않고서는 책의 봉인을 해제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6쪽)

'저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문학ㆍ역사ㆍ철학'을 아우르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책을 막 시작할때까지만 해도, '인문학 강독'이라는 소제목과 첫 텍스트로 소개되는 '쇼팬하우어'의 '문장론'과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를 보고, 지레 겁을 먹었었다.

고백하자면, 이런 책들은 우리 말로 적혀 있어서 읽더라도 읽을 수 있다 뿐이지, 무슨 뜻인지 알아먹기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었다.

뭐 좀 묵히고 이리저리 굴리고 둥글리다 보면 다른 해법이 나와줄지도 모르겠지만,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내게 책 한권을 상대로 묵히고 굴리기까지 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을 매달려야 하는데,

세상은 넓고 책은 무한정 많다는건 핑계고, 앞만 보고 내달리기 바빴으니까 말이다,ㅋ~.

 

그런데, 인문학을 막연하게 '문학ㆍ역사ㆍ철학'따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바꿔놓고 보면 한결 접근하기가 쉬워지는데,

내가 '인간'인 이상 지금 이 시간에도 숨을 쉬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놓고보면 한결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접근하기가 수월해진다.

 

언제부턴가 나만의 리듬과 속도를 가지고 책을 읽을려고 노력해왔고,

책을 읽은 느낌을 나름 정리해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고는 있지만,

한편으론 많은 양의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나 읽은 느낌을 잘 갈무리하여 기록으로 남겨놓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 박웅현은 논어와 쇼펜하우어를 인용해,

알기 위해서는 물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라고 하고 있으며,

지혜보다 높은 것이 있다. 느끼는 것

이라며 시인 고은의 목소리를 인용해 이 부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인 앎인데 반해서, 사색은 주관적인 깨달음이라는 것이며,

읽기 쉽고 정확하게 이해되는 문체를 만들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주장하고 싶은 사상을 소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말은, 책을 읽기만 해선 아무 소용이 없고, 읽었으면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하고, 깨달았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미이겠다.

 

이것이 인문학을 학문의 틀 안에서 접근하면 마냥 어렵지만,

살아 숨쉬는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바꾸어 놓고 보면 한결 수월해진다는 의미이겠다.

 

그러니 인문학서적을 계속 확장시키다 보면 우리가 읽는 도서 전체가 될 것이고,

그러니 인문학의 의미를 확대시키다보면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 될 수 있는 까닭이겠다.

 

그러면서,

짧은 길을 긴 시간을 들여 여행한 사람은 경험상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하며, 『생각의 탄생』에 나온 꽃을 그리는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숨을 거두기 직전 '관찰'에 대해 한 말을 인용하는데,

"꽃을 보려면 시간이 걸려.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말이지"라고요. 마찬가지로 책도, 여행도, 생각도, 천천히 나의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57쪽)

가 그것이다.

 

이 얘긴 책도 제대로 읽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정도의 의미가 될 수 있겠으며,

바꾸어 말하면 각 연령대 별로 책이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는 의미이겠으며,

또 다른 의미로, 각 연령대 별로 삶의 방식 내지는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변한다는 얘기이겠다.

 

때문에 인문학적인 독서를 한다는 것은,

읽은 것을 깨닫고 느낀 것으로 전환시키느냐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고,

독서를 시각적인 영역에서 오감을 이용한 공감각적인 영역으로 얼마나 잘 확장시키느냐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각 연령 대 별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얘기는,

전에는 읽으면서 재미없거나 내용이 이해가 안 된던 책들이,

나이가 들면서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기에 따라선 재미있을 수도 있고 충분히 공감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저자 박웅현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몇가지 기행문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좋다고 설레발을 치면서 강력 추천하고 있는 책을 읽지않고 견딜 도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렇지만) 그가 나이 지긋한 중년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만약 그가 꽃보다 아름다운 청춘이었어도,

(그는 인간을 주체로 놓고 이런 비교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ㅋ~.)

삶의 매순간순간을 아름답다고 했을 것이며, 매 순간을 우아하게 보내는 법 따위를 언급했을까 싶었다.

 

삶의 매 순간순간이 아름답게 보이는건, 연령대 별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얘기이겠고,

삶 대신 책을 적용시켜도 마찬가지 이겠다.

다만 연령대 별로 달라지는 책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적용시킬려면, 살아온 날만큼 견뎌낼 수 있도록 책의 수명이 길어야 하겠고,

그런 것들로 고전을 적용시키는 게 가장 적절한 방법이겠다.

나의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고전들이 이제 무한감동을 주듯이 말이다.

 

젊은 시절은 서정적일 수가 있어요. 한 여자에게 반했을 때, 온전히 그 사랑의 긍정적인 측면만 보이죠. 오십이 되고 나면 그 뒤가 보여요. 그게 보이니까 사랑에 집중을 못해요. 그런데 젊은 시절에는 사랑에만 집중하기가 쉽죠.ㆍㆍㆍㆍㆍㆍ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한테 로맨스가 쉽지 않은 거죠.(247쪽)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젊은 여자들이 자기 또래의 남자가 아니라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서투름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남자의 성격적 매력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주는 매력에 매혹된다는 거죠.(258~259쪽)

 

이렇게 젊은시절과 중년시절을 모두 아우르는 얘기들을 하는데,

젊은 시절을 통과한 중년의 그가 하는 얘기니까 수긍할 수 있는 것이고 멋져 보이는 거 겠지만,

만약 젊은 청춘이 이런 얘기를 관조적으로 늘어놓거나,

그 같은 중년이 젊은 청춘의 로맨스에 대해서 '로망을 갖고' 이런 얘기를 했다면, 

글쎄~, 처량 맞아 보이는 차원을 넘어서, 주책이지 않았을까 싶다.

 

암튼, 이 책에서의 '인문학'을 '인간의 삶 전반'으로 바꿔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랑에만 집중하게 되는 젊은 날에는 안 보이고, 못 보고 지나갈지 모르는 것들인,

방귀뀌는 습관과 짜증내는 모습,이런 걸 다 알고는 사랑에 빠질 수 없다고 하지만,

중년에 이르면, 방귀뀌는 습관과 짜증내는 모습 따위, 우리의 삶에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 산재해 있다는 걸 깨닫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데, 누구도 거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토를 달지 않으니까 말이다.

 

박웅현은 마르케스를 현실적이고도 낭만적인 아름다운 이야기로 표현하며, 시대상와 문예사조로 설명하려 드는데,

난 사람마다 연령대 별로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쯤으로 바꾸고 싶다.

아무리 매혹적인 로맨스라도 너무 어렸을때 읽어선 그 의미를 모를 것이고,

사랑에 목숨거는 젊은 시절엔 머리는 다 빠졌고, 지팡이를 짚고, 의치를 끼는 중년이나 노년의 유대 방식은 이해불가일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걸 그는 이렇게 멋진 말로 마무리 한다.

모든 사람의 독법은 저마다 다 다를 겁니다. 글을 일으켜 세우고 우리 삶의 모습과 닮은 부분들을 눈여겨본다면 공감이 되면서 더욱 감동스러운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겁니다. 말의 정글을 여행하고 나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길 거라고 믿습니다.(294쪽)

 

암튼, 여기까지 읽게 되면 '인문학'을 '인간의 삶 전반'으로 바꿔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될 뿐더러,

젊음이나, 청춘, 중년이나 노년 따위의 한 단어가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단어가 아니란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기존의 가치와 형식들이나 현재의 그것을 놓고, 어떤게 더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따위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만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자연과 인간 사이에 경계가 없어지게 되면서,

'죽음'도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난 개인적으로 '장자'를 참 좋아하는데,

이 책에선, 『천상의 두나라』에 나온 장자를 인용하고 있다.

 

땅이 내 관이 되고, 하늘이 내 묘비가 될 게야. 해와 달과 별이 내 무덤을 장식할 게야. 그보다 더 아름다운 어떤 것을 더할 수 있는가? 장례식 없이 나를 보내도록 하라. 나는 무덤을 원치 않는다.ㆍㆍㆍㆍㆍㆍ'하지만 독수리가 시신을 먹어 치울 텐데요. ㆍㆍㆍㆍㆍㆍ나를 묻지 않으면 독수리가 먹어 치울 것이다. 하지만 나를 묻게 되면 벌레들이 나를 먹어 치울 것이다. 전자보다 후자를 선호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187쪽)

성장하면서, 살아가면서,

각 연령대 별로 책이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수도 있다.

바꾸어서, 각 연령대 별로 삶의 방식 내지는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어느게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따위를 판단할 수 있는 가치 판단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나는, 나만의 리듬과 속도를 가지고 그렇게,

나만의 책을 읽을려고 노력해하고,

책을 읽은 느낌을 나름 정리해 내것으로 만들고,

깨달았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실천으로 옮기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한 부분, 불교와 관련하여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어, 지인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이런 답을 주셨다.

나도 지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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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길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데...
    from Insure safety distance 2016-06-20 14:46 
    때때로 누군 말로써 자신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 글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또는 말과 글 양쪽 다 자신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웅현 님의 '다시, 책은 도끼다'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실전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근사한 책이었다. 다시,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6월 얼마 전,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다가 혼란스러웠던
 
 
oren 2016-06-18 10:49   좋아요 1 | URL
저는 지인의 글이 오히려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지인의 말씀대로 `해탈의 세계는 연도 멸도 없는 것`이라고 했는데, 불교가 `해탈`이 목적이라면 지인의 말씀대로 `연도 멸도 없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거야 말로 박웅현 님의 글 속 주장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게 아닐까요?(비록 최종 목적이 `멸도 없는`이 아니라 `멸`이라고는 밝혔지만, 결국 그 뜻은 `다시는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궁국적으로는 `연도 멸도 없는 상태`를 말할 따름이니까요.)

지인의 글은 어쨌든 제게는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해탈`을 설명해 놓고, 뒤이어 곧바로 `해탈`과는 반대되는 말씀을 하시니까 말이지요. 곧 `연도 멸도 없는 상태`를 바라는 게 아니라, `새로운 연`을 이루고, 그 연을 따라 무엇이 되고, 또 무엇이 되는, 해탈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쪽으로 흘러가니까 말이지요.

양철나무꾼 2016-06-18 12:32   좋아요 1 | URL
네, oren 님의 입장 충분히 이해하고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불교의 목적을 `멸로 보느냐, 해탈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얘기이고, 이건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테면 용어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팔꿈치를 삐끗했을 경우, 병원 가면 어떤 사람은 부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염좌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며칠 치료하면 나을거라고 하는 것처럼 말예요.

박웅현 님 말씀에서 혼란스러웠던게 제가 인용한 저 문장`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적은 환생이 아니라 멸이랍니다`에서 멸을 환생의 반대개념처럼 놓았다는 것이지요. 그래놓고 그 다음에 설명되는 것들은 환도, 멸도 아닌 `해탈`의 개념이라는 것이었고, 님도 그부분을 명확하게 짚어 주셨구요.

제가 지인의 말에 수긍하겠다고 한 이유는 `해탈`이나 `空`의 개념과 관련하여서인데,
환의 반대 개념이 멸이라면, 멸의 반대 개념은 환이 되어야 하지만,
환생과 멸을 따로 떼어 있음과 없음 처럼 대척점으로 둘것이 아니라,
`환생과 멸이 있는 상태`를 한데 묶어 `있음`으로 보았고
`환생도 멸도 없는 상태`를 또 한데 묶어 `없음`으로 보았다는 것이지요.

아, 저는 이해가 가는데, 설명에 한계를 느끼네요.
박웅현 님 말씀대로라면, 이건 알아도 아는게 아닐텐데 말예요~ㅠ.ㅠ

2016-06-18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8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8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작가를 인식하게 된 건 재작년인가 노벨 문학상 때문이었겠고,

나와 독서 취향이 비슷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했었고,

책을 추천해주는 여러 사이트와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에서도 소개되어 집어 들었지만,

책을 펼치고 몇 쪽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내 귀가 팔랑귀인건 아닌가, 또는 나의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들로 혼란스러웠었다.

사람들은 김화영의 번역이라고 하면 찬사를 아끼지 않던데, 나는 어쩐 일에선지 자꾸 삐그덕거리고 엇나가기만 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반양장)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마저 읽을 것인가 집어던질것인가 고민하며 책을 팔랑팔랑 뒤로 넘기던 중,

끝부분 김화영의 '해설'과 맨 뒤 도서 정보를 살펴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내가 가진 것은 개정판 5쇄(2013년 8월 21일)였는데,

2010년 4월에 김화영이 쓴 해설을 보면 그가 파트릭 모디아노를 처음 번역 소개한 것은 1978년이었단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고, 그사이 널리 알려졌고, ㆍㆍㆍㆍㆍㆍ이제 수십년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번역으로 새로운 독자들에게 이 매혹적인 소설을 다시 내보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271쪽)'고 소회를 밝히고 있는데~--;

 

책을 읽으며 1978년에 처음 번역이 된 후로 한번도 손 본 일이 없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었다.

백번 양보하여, 2010년 해설을 쓸 당시에 먼지만 떼어내고 새로 번역을 하지 않았던건 아닌가?

그런데 관점을 조금 바꾸니,

번역을 새로 하려고 시도는 하였으나 시늉에 그친 것이어도 그렇지만,

제대로 번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어도, 우울하긴 매한가지다.

 

불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내가, 번역을 가지고 툴툴거리니 의아해 하겠지만,

사실 내가 딴지를 거는 것들은 번역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것들이다.

 

가장 흔한 것이, 용어 사용 방식이 일관되지 않은 것이다.

제목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도 책을 다 읽고난 후라면 '어두운'보다는 '희미한'이나 '아련한' 따위가 적절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미묘한 어감은 차치하기로 하자.

폴 두메르 가(街)(10쪽)

아나톨 드 라 포르주 가(16쪽)

부티크 옵스퀴르 가(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88쪽)

를 보면 알겠지만,

어디에는 원어를 소리나는 그대로 적었고, 어디에는 억지로 우리말로 번역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 둘 사이엔 아무런 일관성도 없어 보인다. 즉, 마음대로다.

 

처음 9쪽의 '우유빛의 전등 불빛'이, 77쪽에서 젖빛 램프로 번역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놀라웠던 건, 이 책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장치일수도 있는 '전화번호부와 연감'을 나중에는 '사교계신사록' 또는 '신사록'이란 용어로 번역해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지난 오십년 동안의 각종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것들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작업도구라고 위트는 몇 번이나 내게 말하곤 했었다. 그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페이지마다에는 오직 그것들만이 증언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들과 세계들이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10쪽)

 

나는 옛날 전화번호부들, 그리고 그보다 좀더 근래의 것들을 열람하면서 발견되는 것이 있을때마다 노트를 한다.ㆍㆍㆍㆍㆍㆍ이런 것이 기록된 사교계 신사록은 삼십여 년 전 것이다.(77쪽)

내 앞에는 신사록들과 전화번호부들이 가지런히 꽂힌 선반이 있다.(106쪽)

 

그애를 안 적이 있으세요?(136쪽)

같은 경우는 번역할때 흔히 보게 되는 오류이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불어번역자라고 일컬어지는 그에게선 보고 싶지 않은 문장이었다.

 

나는 건물의 문을 지나서 시간제한등을 켰다. 낡은 바닥돌이 검은 색과 회색의 장미 무늬였던 복도, 쇠로 된 그물, 받침벽, 노란 벽의 우편함들, 그리고 여전히 풍기는 저 돼지기름 냄새.(141쪽)

위 문장에서 '시간제한등'이란 단어도 생소했지만, 앞뒤에서 수식해주는 말들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서 더 모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120쪽)

심근은 불수의근인데 내가 마음대로 두근거리게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쯤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소소한것까지 따지다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용어 사용 방식을 통일시키지 않은 것과 어법과 관련된 기본적인 것 몇 가지만 언급하였다.

 

이런 것들부터 어긋나 버리니, 아무리 좋은 소설이라고 할 지라도 내용을 알아먹을 수가 없고 감정이입 될 턱이 없다.

한국 문학의 국제화나, 외국 문학의 한국화가 갈 길은 멀고도 요원하기만 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의 '맨부커 인터네셔널 상'수상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분위기를 바꾸어,

종편의 텔레비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인기였던 건 잃어버린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미로처럼 좁은 비탈길이나 골목길을 이리저리 걷다보면 막다른 골목이 나오고,

그 좁은 골목에 담장과 대문을 나란히 하고 고만고만 집들이 있고, 고만고만한 동네 꼬마 녀석들이 있었다.

누구네 집 쌀독이 비었는지, 누구네 집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 동네 통장이나 반장이 아니어도 훤히 알았고,

동네 어귀의 평상은 온갖 '~카더라'하는 소문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지만,

혼자 외로움에 몸부림을 치거나 먹을게 없어 배곯아죽는 야박한 인심은 피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언제부턴가 1인 가족이 특별할게 없는 삶의 형태가 되었으며,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의 형태라고 하더라도 하루에 1,2끼 정도 혼자 밥먹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주거형태도 변하여 아파트, 빌라, 다세대 다가구 주택, 원룸 뿐만 아니라,

고시원이나 쪽방촌 등 특수한 주거형태에 사는 사람도 많아졌고,

그 사람들 모두를 이웃으로 일일이 기억하기엔 역부족이다.

 

때로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거나,

마무것도 기억 못하는 치매어르신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

오히려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억해야만 하는 정보들이 넘쳐난다.

 

이 책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중 화자인 '기 볼랑'과 탐정 '콘스탄틴 폰 위트'는 생애 한부분의 기억을 잃어버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간판은 흥신소라고 되어 있고, 호칭은 탐정이라고 되어 있는 묘한 번역이다.홍신소는 소장이고, 탐정사무소는 탐정일것 같은데, 끙~(,.))

난 1987년에 고딩이었던 고로, 6월 10일 무렵의 우리나라 상황을 최근에야 비교적 자세히 들었는데, 

이 책의 그것들과 닮은 듯도 하고,

어찌보면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는 듯한 착각에도 빠져드는 것이,

두번의 큰 전쟁의 정점에 있었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전쟁과 망명자, 국경, 위조된 여권 따위는 자유, 민주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고,

1987년 6월의 우리나라는 독재와 외력에 항거하는 그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그 전쟁으로 인한 폐해의 한가지를 쟁점으로 하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쟁이 진행중인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이 책에 나오는 '기 롤랑'이라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오히려  '콘스탄틴 폰 위트'처럼 어디 휴양 도시에서 말년을 조용히 늙어가는 쪽을 택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기 롤랑이 어떤 이유에서 기억을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것과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이전의 기억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쩜 살아가는데 더 편리하거나 유리하기 때문에,

그의 무의식이 그로 하여금 기억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사주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안개 속을 더듬거리는 그에게 기 롤랑이라는 신분을 만들어 주고,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라'고 했지만,

은퇴 후  니스로 가서 어린 시절을 하나하나 되살리게 되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기 롤랑의 지난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맞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모두 틀리기도 하는데,

삶에 있어서 '기준과 방향성'이 같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청춘들에게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잠시 미뤄 두어도 좋겠다.

지금 현재, 여기에서, 이 순간을 살면 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도, 언제일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도, 연연해 하는 순간 집착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은퇴 후,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에서라도, 하루하루가 똑같은 모습으로만 흘러간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겠다.

거리를 가다가 우연히 삼십 년이나 못 보았던 사람이라든가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안개속을 더듬는 듯한 흐릿한 기억도 쓸모가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가지, 인간이란 제 멋대로인 존재들이어서,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들은 진정한 나이며,

타인이 보는 나는, 과연 나의 본 모습일까?

우리는 엄청나게 큰 코끼리를 눈 감고 만지면서,

누군가는 코끼리의 다리를, 누군가는 코끼리의 코를, 누군가는 몸통을 만지면서, 코끼리 전체라고 우기는 눈뜬 장님들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타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지랖 넓게 너무 깊숙히 관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들이 보는 사람이 기 볼랑이 찾는 그 사람이라는 정확한 근거가 없으면서도 섣부르게 판단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상처를 꽁꽁 사매서 곪아터지게 할 것이 아니라,

잘 소독해주고 바람도 통하고 세월의 더께도 앉게 해주고,

딱지도 앉았다 떨어지고,

그리하여 나무에 단단히 박힌 옹이처럼 고통을 이겨낸 자리마다 굳은 살로 자라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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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84년에 나온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번역본
    from 개썅마이리딩 2016-06-11 11:44 
    작년 헌책방에서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번역본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번역본 제목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누구나 제목만 보면 프루스트의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책 뒤편에 소설 원제가 있습니다. ‘Rue Des Boutiques Obscures’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작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84년 한국출판공사에서 나온 번역본입니다. 펼쳐 보면 세로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지
 
 
서니데이 2016-06-10 23:27   좋아요 0 | URL
외국원서는 번역본이 여러 권 나와있었으면 좋겠어요. 같은 원문이라도 번역자에 따라 조금 느낌이 다를 때가 있어서요.^^
양철나무꾼님 좋은밤되세요.^^

양철나무꾼 2016-06-11 09:31   좋아요 1 | URL
좋은 아침이예요~^^
전에 까뮈의 이방인 때도 그랬지만, 기존의 번역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게 학계의 관행인가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참 편하네요.
이쪽으론 학계라고 할만한 학맥이 없어서리~, ㅋ~.

시이소오 2016-06-10 23:57   좋아요 0 | URL
꼼꼼한 독해시네요. 전 다른 번역본을 읽었는데, 별 감흥은 없었어요. `심근의 불수의근`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김화영 역자,실망스럽네요. 양철나무꾼
님 말씀대로 재번역이 필요할것같습니다 . 문동 문학전집에 대한 판타지가 깨지네요.
리뷰, 잘 봤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6-06-11 09:43   좋아요 0 | URL
얼마전 까뮈 `이방인` 이정서 역으로도 읽으신것 같던데요.
어떠시던가요~?^^

학계의 원로라는 이유만으로 기존의 번역을 신성불가침의 그것처럼 생각하는 건 재고의 여지가 있어요.

심근의 불수의근이라 함은,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120쪽)`에서,
심장은 내가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고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근육이 아니라는거죠. 심장은 움직임을 멈추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말예요, ㅋ~.

그러니까 `나는`이라는 주어를 빼주던지, `나는`을 넣고 싶었다면 심장이 움직이는걸 느끼며 정도로 바꿔줬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너무 어려운 용어를 고른 저도 설명에 인색했네요, 죄송~(__)

문학동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으로 만들어내는 품이나 적극적인 마케팅 따위는 타의추종을 불허하죠~^^


시이소오 2016-06-11 09:47   좋아요 0 | URL
이정서 역에도 문제가 많아서 설득이 안되던데
양철나무꾼님 설명에 설득되네요. ^^

양철나무꾼 2016-06-13 16:13   좋아요 0 | URL
저도 이정서 의 이방인이 완전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 출판 번역계의 정서가 뭐랄까,
그런 것에 대해 감추고 쉬쉬하는 걸 관행으로 했다면,
이정서의 그것은...과거의 그런 것에서 탈피했다는 걸 높이 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내부고발자`라는 개념으로 보고,
`죄가 없는 사람만 돌을 던질 수 있다`는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종류의 다양한 시도를 용인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이겠죠~^^

시이소오 2016-06-13 16:29   좋아요 0 | URL
이정서 씨가 번역 관행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켰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워낙에 자아도취적인 글이어서 본질이 왜곡되어 보였거든요.
양철나무꾼님, 말씀을 들으니 역자의 과보단 공을 더 높이 사야할것 같네요.^^


cyrus 2016-06-11 11:42   좋아요 0 | URL
작년 헌책방에서 1984년에 나온 <어두운 거리의 상점> 번역본을 만난 적이 있어요. 1978년에도 나온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6-06-13 16:15   좋아요 0 | URL
이런게 헌책방의 묘미이겠군요.
헌책방은 고사하고, 도서관이라도 맘 편히 가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요즘처럼 일에 치여서는 말이죠~ㅠ.ㅠ

루쉰P 2016-06-11 11:52   좋아요 0 | URL
전 한국의 번역은 신뢰를 하지 않아요 ㅋ 그렇다고 한국작가 책만 읽는 것도 아니에요 ㅋ 번역은 제2의 창작인데 그러고 보면 한강의 상 받은 건 대단한 일이네요 ㅋ 우리는 번역이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항의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ㅋ 하여튼 집단의 체제안에서는 무얼 못하는 한국의 근성 최악이에염

양철나무꾼 2016-06-13 16:20   좋아요 0 | URL
저도 한국 소설 잘 안 읽는 경향이 있는데, 장르소설은 진짜 우리나라 작가거 안 읽는다, 반성~!__!
제가 이렇게 번역에 민감한 건, 예전에 장르소설 번역 해보고 싶어했어서 그럴거예요, 아마.

전 우리나라 소설가, 예전엔 성석제, 지금은 이기호 좋아하는데, 재밌어서 이지만,
성석제에서 이기호로 갈아탄 이유는 재밌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어서예요~^^

교주님, 날 더운데 잘 지내세요?
쉬이 지치지 않게 우리, 힘내자구요~ㅅ!

세실 2016-06-12 07:35   좋아요 0 | URL
대번역가, 대출판사라면 무조건 믿고 보는 저! 반성합니다^^ 비판적 독서력이 부족해요. 역시!
이 책 읽다 말았지요.

양철나무꾼 2016-06-13 16:26   좋아요 1 | URL
전 지금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는데, 거기서 박웅현이 그래요.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다량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소량의 언어를 사용했다`고요.
그러고 보면, 책을 읽고 체화하는 것까지가 중요할 듯 한데,
그런 의미에서 세실 님은 잘 하고 계실뿐만 아니라, 훌륭하십니다여~^^

2016-06-14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5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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