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전생 체험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였을때,

텔레비젼에 한 여자연예인이 나왔었다.

그녀는 전생에 가난한 집의 사내아이였는데,

구걸을 갔다가 부잣집 딸을 보게 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암튼 전생의 그 사내아이가 죽은 이유가 죽은 이유가 상사병이었는지, 아사(餓死)였는지는 가물가물 하지만,

그 여자연예인의 현재모습은 부잣집 딸의 모습과 꼭 같았단다.

얼마나 그리고 염원하였으면 그렇게 꼭 닮은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싶어...꺼이 꺼이 울었었다.

 

'배 부른 돼지보다 배 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둥 육체적ㆍ정신적 경계를 나눠가며 행복해지라고 강요할 만큼,

'행복해지소서~'하는게 어찌보면 괜찮은 덕담처럼 들리는 세상이지만,

고인 물은 썪는다는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과학이고 철학이고 종교고,

하찮은 장르소설에서조차 행복할때는 아무런 역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불행의 기록이고 소산이다.

 

왜 이런 연결도 안되는 것 같은 엉뚱한 얘길 하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너무 행복해서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하고 싶은건지,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하고 싶은건지,

내 자신을 나도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오랫만에 빼꼼, 고개를 내민 이유는...

'Y씨의 최후' 라는 너무 너무 근사한 책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책 뒷표지에 '영문학과 소속이지만 물리학심리학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에어리얼 만토.'

그리고 '영리하고, 우아하고, 아찔하고, 그리고 매우 위험한 스릴러'

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쉬운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레 겂을 먹어 이렇게 근사한 책을 놓치는 것 또한 정말 너무 너무 아쉬워서 이렇게 떠벌인다, ㅋ~.

 

 

 

 

 

 

 

 

 Y씨의 최후
 스칼렛 토마스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이 책의 주인공은 에어리얼 만토라는 여자다.

대학교 영문학과 소속이라고 해서 알 수 있듯이,

지적 호기심은 풍부하지만, 육체적ㆍ정신적 경계를 나눌 것도 없이 최저의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지도교수가 관심을 갖던 'Y씨의 최후'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고,

그로 인하여 그녀 또한 인생에 최후를 맞게 되는데...

 

 

 

 

 

 

 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타나토노트 2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 열린책들 / 2000년 9월

 

 

옛날에 '타나토 노트'를 읽었을때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때 죽음을 체험하는 게 묘사되는데,

죽음의 세계가 너무 근사하여...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면 누구나 그쪽으로 넘어가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형수 중에서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을 뽑아,

그중에서도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야 하는 타당한 개연성을 부여했던게 관건이었다.

이 책 'Y씨의 최후'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내가 이 책을 너무 너무 근사하다며 침을 튀기는 이유는,

과학, 철학, 심리, 물리, 천문 등...온갖 학문의 여러가지 학설들이 경계도 없는 듯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에드거 앨런 포' 같은 경우 '검은 고양이'를 쓴 작가로만 알고 있었지, 과학적 사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장르소설에선 경험과 실험외에도 과학적 사고 또한 필수불가결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연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실험과 같이 검증된 방법으로 얻어낸 체계적 지식과학이라고 한단다.

하지만, 과학이라고 하여 논리정연하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유효기간은, 새로운 진리나 법칙이 발견되기 전까지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올레르스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사고실험의 원칙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혹자는 그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족히 몇백 년 앞서 사고실험의 원칙들을 이용하여 대폭발이론을 만들어 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그는 산문시 '유레카'에서 자신의 다양한 과학적, 우주론적 사고들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포는 실험적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론들은 사고실험 형태로, 혹은 그가 무한을 묘사하는 방식이라고 했던 '생각에 대한 생각'으로서 발현되었다. 그가 올베르그의 역설을 풀어 낸 방식은 역사상 가장 우아한 사고실험들 가운데 하나이다.ㆍㆍㆍㆍㆍㆍ에드거 앨런 포는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고 "우리의 망원경이 셀 수 없이 많은 방향에서 찾을 수 있는 빈 공간들"에 대한 더 간단하고 개연성 있는 해답은 별들 가운데 일부가 단순히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빛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34~135쪽)

 

삶은 무 자르듯,그렇게 흑백논리로 명확히 잘라낼 수 없는 게 아닐까?

좋고 나쁜 신념이란 것만 해도,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 에 따라 결과는 엄청 달라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글쎄, 그 남자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자네는 좋은 사람들에 속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좋은 사람들은 무엇을 대변하지? 자네가 그들과 싸울 예정이라면 왜 그들과 싸우는건지 이해할 필요가 있어."(310쪽)

 

 말을 하는 동안 내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내가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는 것뿐이라는 걸 깨닫는 지점까지 간다. 그러나 나는 울 수가 없다. 울면 끝장이다. 아드레날린이 모두 씻겨 나갈 텐데. 아드레날린이야말로 내게 남은 유일한 것이다.(330쪽)

이 부분은 그동안 내가 생각하던 눈물이랑 다른 견해여서 옮겨봤다.

울기까지 감정이 고조되고, 교감신경이 항진되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은 맞지만,

난 울고난 후,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난 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오히려 개운하고 홀가분함을 느끼는데,

이 책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무기쯤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얘기하면, 이 페이퍼의 제일 처음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가열차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행복에 겨워 우는 사람이 '울면 끝장이다'라고 하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나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이에요. 적어도 잡지에선 나를 그런 식으로 분류하더군요." 내가 말한다.

 "자기 파괴적이라. 흥미로운 용어네요. 나는 나야말로 자기 파괴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좀 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렇죠. 그것이 바로 도(道)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거든요. 자신을 파괴하고 자아를 제거하라."애덤이 말한다.(346쪽)

"나는 내가 신을 잃어버렸고, 그 다음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일반적으로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찾고 그리고 신을 찾도록 돕는다는 걸 당신도 알 거예요.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데 성공했죠. 나는 그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욕망을 버리고 자아를 버리는 것에 관해 내가 읽은 모든 책들ㆍㆍㆍㆍㆍㆍ그것은 모두 문자 그대로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었죠. 그 모든 책을 읽었어도, 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종교의 일부분이 아닌 상태에서 종교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고요. 성경은 다른 여느 책들처럼 그저 한 권의 책이 되었어요. 나는 여전히 그것을 읽을 수 잇었고, 이런저런 부분이 의미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고, 이런저런 부분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걸 믿을 수는 없었어요."

 "영혼을 파괴하는 거죠. 자아를 파괴하는 것처럼."

"그래요. 난 진정 무아(無我)의 상태를 경험했어요. 그리고 그건 빌어먹을 만큼 무서웠죠."

"애덤ㆍㆍㆍㆍㆍㆍ."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 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 것.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지옥이에요. 타인은 지옥이라고 누가 말했죠?"

"사르트르요."(348쪽)

게다가,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우리가 흔히 절대적이라고 얘기하는 종교도 결국 입장에 따라 변하더라 하는 걸,

또 다른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얘기하고 있다.

'도(道)를 자신을 파괴하고 자아를 제거하라'라고 해석한 것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모두 쿼크와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면ㆍㆍㆍㆍㆍㆍ."그가 운을 뗀다.

"뭐라고요?"

"우리는 사랑을 나눌 수 있고, 그것은 쿼크와 전자를 서로 비비는 것에 지나지 않겠군요."

"그보단 낫죠. 미시적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실제로 '서로 비비지' 않아요. 사실 물질은 다른 물질을 결코 건드리지 않죠.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원자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전자는 다른 전자들을 밀어내면서 원자의 외부에 자리를 잡는다는 걸 명심해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지만 동시에 서로를 밀어낼 수 있는 거죠." 내가 말한다.(352쪽)

이 글을 읽으면서, 처음엔 과학자들은(음,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멋대가리 없이 사랑을 표현할까 싶었었다.

하지만, 다른 수식이나 미사여구 없이도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고갱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도(道)를 '자신을 파괴하고 자아를 제거하라'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언어학자들은 좀 나은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언어는 끝없이 어긋나면서 맞물리기도 하는 등,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어쩜 불가능하기 때문에...

표정이나 몸짓, 주변 상황 등을 고려하는 상호적인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의식이 언어와 연결외어 있다는 정신분석학적 주장을 폈다. 그에 의하면 옹알이 하는 아기, 즉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상징 질서'의 일부가 되는 것(즉 의식적인 세계를 갖는 것)으로의 도약은 정확히 우리가 언어를 획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세서 개별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아니다. (주여, 고맙습니다.)우리는 자아라고 불리는 무언가가 되는데, 자아는 오직 타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 (혹은 적어도 나의 세계는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시뮬라크르이다. 그것은 수학처럼 닫힌 체계로, 모든 것은 오직 그것이 다른 무언가가 아닐 때에만 의미가 있다. 2라는 숫자는 그것이 1이나 3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ㆍㆍㆍㆍㆍㆍ나는 오직 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이다. 이것은 기의 없는, 오직 기표만 있는 존재의 체계이다. 이 모든 존재의 체계는 마치 자물쇠를 채워놓은 호버크라프트처럼 무(無) 위를 떠다니는 닫힌 체계이다.(466쪽)

그렇다면 언어 외에  표정이나 몸짓, 주변 상황 등에 제약이 따른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할까?

자아는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타자에 대한 배려가 우선 시 되는 수밖에 없다.

 

'언어' 만으로 사랑을 할때는,

그래서 '언어'가 서로를 어루만지고, 비비고, 느끼면서 사랑하는,

자아를 드러내고 타자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감정(emotion)을 그냥 '움직임(motion)'으로 부를 수도 있을걸세. 실제로 감정이란 단어가 단순히 움직임, 혹은 한 가지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동을 의미했다는 걸 나는 기억하네. 언어로 만들어진 이 세계에서는, 의미가 실제로 쓸모없어지는 경우는 결코 없어. 이 경우 움직임은 질량을 가지지 않는 어떤 것, 즉 움직임 그 자체에 관한 것일세. 그래서 그것이 운반하는 의미는 불가해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지. 자네를 거꾸로 이동시킬 수 있을 만큼 빠른 속도로도 말이야.ㆍㆍㆍㆍㆍㆍ.(478~479쪽)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과학은 없다
 맹성렬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8월

 

 

이 책에서 나는 현대 주류 과학의 입장에서는 '아웃사이더'나 마찬가지인 UFO와 미스터리 서클, 초능력과 죽음 뒤의 삶을 논할 것이며, 이들의 향후 과학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올 가능성을 검토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아는 과학은 모두 허구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것은 무조건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며 인류의 사고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두려 하는,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오류를 걷어내자는 것이다.

 

 창조는 파괴를 필요로 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최첨단 주류 과학에 갇힌 현대인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넓혀주고 싶다. 주류 과학계가 애써 외면하는 초상현상을 탐구하는 일은 과학의 재도약을 준비하는 첫번째 작업이다. 이 작업은 우리 스스로 머릿속에 그어놓은 상상력의 한계를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류가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축복된 재능은 빛을 보지 못하고 녹슬어버릴 것이다.(12~13쪽, 프롤로그 중에서)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과학이라고 하여 논리정연하고 절대불변은 아니라는 거다.

그것들의 유효기간은, 새로운 진리나 법칙이 발견되기 전까지이다.

우리가 절대불변이라고 알고 있는 신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새롭게 유일신이나 절대 종교가 나타나기 전까지로 보면 된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이런 최근접 체험은 공군 조종사들이나 관제요원들에 의해 비교적 먼 거리에서 목격되는 사례와는 구분되는 현상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책 제목에 '정확히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여러 유사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하는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 후 다양하고 면밀한 연구ㆍ조사를 거치면서 그 모든 현상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63쪽)

 

그렇다고 내가 이 글을 이렇게 멋대가리 없게 끝낼까?

절대 그렇지 않지, ㅋ~.

세상에 절대불변한 것이 있긴 하다.

그건 '사랑'이다.

'사랑'이 절대불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눈 멀게 하여 물불 안가리게 되면,

세상은 온통 분홍분홍*^^*하게 변하고,

그땐 절대불변이 되고,

마냥 행복해진다.

 

하지만, 마냥 행복해지는 이 상황을 경계해야 할지 말지를 놓고 고민하는건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다들 각자의 고민으로 이 가을 秋男, 秋女가 되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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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22 17:56   좋아요 0 | URL
물질과 물질은 '서로 건드리거나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에서 밝힌 이야기예요.

따지고 보면, 이 댓글을 쓴다며 자판을 두들긴다 하더라도,
자판과 내 손가락은 '본질로는 서로 스치지도 부딪히지도 않'아요.

어쩌면, 이 댓글에 담기는 제 마음도
어느 곳으로도 안 간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씨앗을 살며시 뿌린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

아이리시스 2012-10-22 18:15   좋아요 0 | URL
다시 봐도 저 세 종류의 책은 양철나무꾼님 아니면 연결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뭐하느라 행복하신지 저도 좀 알려주세요, 책 좀 집어치우게요( '')
청춘을 책과 보내기에는 좀 억울하다는 느낌이 어제쯤부터 들기 시작했거든요.........
그동안은 아무도 저더러 책을 덮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저는 이 글도 책 덮고 사랑하라는 말로 읽혀요 히히

자주 오세요^-^

프레이야 2012-10-22 22:47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이 있어서 저도 있군요. 동감~
타자에 대한 배려가 결국 자아를 존중하는 길이군요.
진리! 새삼 이렇게 풀어주시니 참 좋아요.
절대불변은 없는 것 같구요. 마냥 행복해지는 순간을
경계하라. 저에게 내리는 명령ㅋ
자주오세요2.ㅎㅎ

감은빛 2012-10-23 11:18   좋아요 0 | URL
저는 추남입니다. ^^
양철님 글 오랫만에 읽네요.
가을을 맞아 관심있는 소설 몇 권을 주문해서 일터 책상 한쪽 구석에 쌓아놓았는데,
바빠서인지 아니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한번 들춰보지도 못하고 며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기온이 갑자기 확 떨어졌어요.
따뜻하게 입고 다니셔요!
 

 

 

 

 

 

 

 

 

 서서비행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금정연의 서서비행(書書飛行)을 읽었다.

읽는 내내 '난 왜 리뷰를 쓰나?'내지는 '난 왜 페이퍼를 쓰나'하는 자문에 시달렸다.

왜냐하면 책 겉표지의 '생계 독서가 금정연 매문기'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난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서평자는 아니다.

내가 쓰는 글들이 '서평'이라는 대접을 받을 정도의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그럼, 내가 쓰레기 같은 글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김경민이 쓴, '시 읽기 좋은 날'의 프롤로그를 인용해야 할 것 같다.

 

 

 

 시 읽기 좋은 날
 김경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1년 12월

 

아홉 살 때 <플란다스의 개>를 읽은 후 한 동안 힘들었다. 이건 그 전에 읽었던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이야기, 혹은 예쁘고 착한 여자가 멋진 왕자와 결혼하는 따위의 해피엔딩 동화와는 뭔가 질적으로 다르게 느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플란다스의 개>는 나에게 최초의 문학적 정서체험을 선사했던 셈인데, 그 체험의 강렬함이 아홉 살꼬마가 감당하기에는 좀 컸다.

이 동화는 나에게 세상엔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걸, 문학은 그걸 감추지 않고 기어이 드러내기에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때때로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프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그 아픔엔 슬픔뿐 아니라 마약 같은 중독성과 모종의 희열과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도 함께 들어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해주었다(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것이고, 당시의 난 그저 네로와 파트라슈가 너무 불쌍해 마냥 눈물이 났다).

 

읽은 뒤에 밀려오는 감정의 압도성과 그 감정을 제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언어의 빈곤함 말고도 나를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그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었다. 아홉 살 아이의 눈치로도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너무 바빠 보였고, 내가 기대하는 만큼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감정의 공유와 좀 비슷하면서 다른 감정일 수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의 감동, 기억하거나 붙잡아두고 싶었던 순간의 느낌을...

읽는 순간 만큼 생생하게는 아니어도 가끔 되새기고 싶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기억력이 감퇴해가자, 그걸 기록해보겠다고 시작하였다.

때문에, 책소개나 줄거리 따위 클릭질 한두번하는 수고로 알아낼 수 있는 걸 적는게 아니라,

감동이나 느낌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럼 알라딘 서재에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을 살아가는 평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

전정기관과 반고리관쯤 되겠다.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을 쉬이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곳이고,

같은 책을 읽고도 각자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도 이 곳이다.

이곳에서 난 사람사는 세상 지지고 볶고 다 똑같구나 하는 걸 느끼기도 하고,

제각각 개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살아가는 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한다.

독선과 아집에 빠지거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이중적인 잣대가 되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서평자 대접을 받을 정도도 아니지만,

굳이 서평자로 불리우길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책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난 책과는 전혀 관계없는 직업이지만,

 직장이 출판사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보니...책이 얼마나 어렵게 만들어지는지 어렴풋이 안다.

 아니,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 오히려 잘 안다고 해야 하려나?)

그런 책들을 한마디 말로 쉽게 평가하는 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좋지않은 책을 그저 좋다고 하는 건 또 베어넘겨진 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싶다.

 

이런 내가 금정연을 서평자로 '아흐~, 멋져.'하고 생각하게 된건,

'온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픈 책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진심어린 각자의 이야기들'과,

'좋아하는 책에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책에 불평하기를 망설이지 않으며 쓸데없이 공정한 체하지 않는 것' 이란 내용을 볼드체로 돌출시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정연은 좋은 서평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다독이나 정독, 사람을 홀리는 글빨이나 말빨을 꼽지 않고...

정직함(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정직할 것)을 꼽고 있는데, 나는 솔직함으로 바꾸어 말하고 싶다.

 

알라딘은 이익기업이고,

그런 알라딘으로부터 내가 블로그를 빌려쓰고 있으니, 어느 정도의 책팔이 노릇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읽는 노력을 기울인 책에 대하여 '나쁜 말을 조심하는 것'이 알라딘서재를 빌려쓰는 대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금정연은 좋은 서평자라는 게 나의 견해이다.

금정연은 '좋은 '서평'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그의 서평은 좋은 글이라는 논리도 성립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은 좀 가벼운 듯 하지만, 폼 잡지않아서 좋다.

좌충우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것이 좀 대책 없는 듯 하지만,

그의 경험과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어서 좋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일갈하는,

 물론 그들 입장에서야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니 독서에 맞춤한 계절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건강한 영혼이라면 이런 날 방구석에 앉아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 법이다. 낮이면 문득 떠나고픈 마음을 주체할 길 없고, 밤이면 살갗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에 술 생각 간절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세상엔 책보다 아름답고 또 즐거운 것들이 존재한다. 출판 관계자들이 독서의 계절이란 문구를 떠올린 것도 어느 나들이나 술자리에서였을 거라는데에 소주 두 병과 오뎅탕을 걸 수도 있다.(52~53쪽)

 

이프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독서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문장도, 힘차거나 화려한 서사도, 유쾌한 말장난과 온갖 지식의 나열도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개미 같은 활자들은 나의 시선을 벗어나 저마다의 세상으로, 아마도 건강할 그들만의 세상으로 유유히 걸아간다. 나는 그들의 생기를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은 나의 병약함에 신경 쓰지 않는다.

ㆍㆍㆍㆍㆍㆍ

 지난 주말 나는 내가 언제나 사랑하는 도시인 부산에 갔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집에 돌아왔고, 아팠다. 아무래도 아무 생각 없이 나이만 먹다 체해버린 것만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75~76쪽)

 

이 책을 읽으면서 직ㆍ간접적으로 위안이 되었는데,

나의 책탑 행각과 관련하여 에코의,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정답!(24쪽)

이 그 하나이고,

그의 가벼움을 젊음의 그것이라 치부하고,

나의 좌충우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대책 없는 짬뽕공 같은 행각과 감히 동격으로 놓는 것이 그 하나이다.

 

서평집을 읽는 이유는 이쯤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고,

시평집, 내지는 시 해석집을 읽는 이유도 별다르지 않다.

'김경민'의 '시읽기 좋은 날'을 통하여, '이성복'의 '서해'를 처음 만났는데,

그니의 해석도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나중에 사별을 하고 쓴 시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뭐 어쩔 것인가?

내가 필 받았으면 그 뿐, 난 그 순간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싶을 따름이다.

 

      서   해

                                       -이 성 복 -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이란 결국 어떤 공간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엇던 곳,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었던 곳은 나에게도 특별한 곳이 된다. '서해'는 그런 곳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추억이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말하고 있지 않으나, 어쨌든 서해는 특별한 곳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가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유를 밝혔는데 그 이유란 것이 사람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나의 진짜 속마음은 뭘까?

나는 당신이 너무나도 그립기에 지금 당신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아프고, 영영 당신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무섭다. 나는 당신이 서해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찾아갔는데 만약 그곳에 당신이 없다면, 나는 당신의 부재를 실감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당신을 찾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당신이 그곳에 계시리라고 믿고 있는 편이 나에겐 더 위안이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나는 과잉된 슬픔을 표현하는 연기나 노래에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아직 그 슬픔에 공명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건만 먼저 대성통곡을 해버리면 당황스러워 오히려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교요한 눈빛 뒤에 숨겨진 '진펄' 같은 속마음을 엿보게 될때,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애써 누르고 나오는 담담한 목소리를 엿듣게 될 때,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은 심하게 동요한다. 그리곤 문득 궁금해진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그래서 그런 걸까.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도리어 나는 '서해'에 가보고 싶어진다. 나만의 서해에. '여느 바다와 다를'바 없는 그곳에 말이다.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볕이 좋다.

인간이 아무리 책을 읽고 애를 쓰고 소리 높여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아 본댔자 하늘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금정연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여, 이런 말이 하고 싶다.

하늘이 높건 말건, 볕이 좋건 말건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책을 읽어야 할텐데~--;

 

책의 내용이나, 이 페이퍼랑은 전혀 상관없는...내가 요즘 푹 빠져있는 The one.

(짬뽕공 마인드를 십분 발휘하여,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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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9-20 15:21   좋아요 1 | URL
'서서비행' 책의 교정, 편집상태가 좋아...딴지를 걸자면,
102쪽의'미치오 카쿠'가 103쪽엔 '미치오 가쿠'가 되어 있다.
한쪽으로 통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책읽는나무 2012-09-20 18:21   좋아요 1 | URL
좋.다.
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 좋고,님이 이글을 쓸 수 있게 만든 작가도 좋고,
거기다 노래도 좋군요.
좋은 가을이에요.

프레이야 2012-09-21 09:14   좋아요 1 | URL
님, 아침부터 마음을 울리는 노래^^ 좋아요~~~
남자의 사랑은 뿌리 같아요. 여자의 사랑이 잎사귀 같다면요.
가을하늘 만끽하며 마음에 평화가 늘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님에게도 저에게도^^

서평이든 어떤 글이든 기본, 즉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말에 동감이에요.
문제는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너무 의식하다보면 좋은 글이 안 나올 우려가 많다는 점이겠지요.
 

우려했던 대로 건강이 안 좋으셨군요.
십 수년 전에도 고생을 한 적이 있으신데,

비슷한 상황의 반복이라면, 혼나셔야 해요.

관리 소홀의 책임이 커요, ㅋ~.

 

전 요즘 김영민의 '공부론'을 다시 보고 있어요.

 

 

 

 

 

 

 

 

 

 김영민의 공부론
 김영민 지음 / 샘터사 /

 2010년 1월

 

 

인이불발(引而不發)이라고 하여, 활을 당기되 쏘지 않는 일,

즉 '알면서 모른 체하기'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것,

가려운 곳을 긁는 것,

기침을 하는 것 등은 결코 숨길 수 없다죠.

여기에 한가지 더 추가하자면,

아프면서 아프지 않은 척 하는 것이요.

왜 그러셨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心身으로다가 잘 조절하셔서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불교의 '자'와 '비'의 의미와 '내려 놓음'을 약간은 깨달은 바 있어
그동안의 님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셨다고 하셨는데,

한가지 우려되는 바가 있어서 치마폭 자랑을 해보려구요.

'내려놓음'은 님을 반성하는 의미가 아니라 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의미로 챙겨가지셔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내려 놓을려고 해서가 아니라 내려놓지 않으면 연명하기 어렵다는 말이 가슴에 '콕~!'하고 와서 박혀 버려서말이지요.

 

그래서 반야심경보다는 태허의 개념으로 접근하는게 좀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욕심의 반대 개념이라도고 볼 수 있는, 자기애는 챙겨가져야 한다는 것일테니까요.


시간은 쏜살 같이 흐른다고 하셔서 생각난건데요,

활을 당기는 것과,

잠시 숨조차 멈추는 그 '사이'와,

화살을 쏘는 것, 이 하나의 연결 동작 같지만...

잘게 나누다보면 경계가 있는 일이지요.

 

활 시위를 힘껏 당긴 후,

화살을 더 멀리 보내기 위한 잠깐의 쉼, 멈춤(止)이라고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냥 내려놓는다고 하기엔,

님의 그간 이곳에 들인 공과 애정을 부정해 버리는 꼴이 되잖아요.

또 한가지,

갑자기 생기게 된 여유라고 하여,

너무 생각에 연연해 하지 마시라는 거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생각에 연연하다가 공상으로 사상누각을 쌓지 마시고,

그저 말끄러미 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책들도 읽으시되,

그냥 본다는 느낌으로 하시구요,

컴퓨터나 텔레비젼이나 그 밖의 것들도 그냥 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맑은 날엔 해님의 고마움을 모르게 마련이지요.

가끔 해님을 향하여 땡큐도 날려주시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광합성도 한번씩 해주시구요.

 

이런 말이 님을 이곳 알라딘 서재에 마냥 잡아두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님이 계셔서 이곳이 조금 더 환하고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제겐.


소식 남겨 주셔서 반가운 마음에 몇 자 적는다는 게 길어졌습니다.

생각날때마다 한번씩  염력을 날려드릴테니,

어서 쾌차하셔서 이곳에서 웃으며 뵐 수 있기 고대하겠습니다.

요즘 제가 아껴 읽는 시 한편은 덤으로요.

               산등성이를 건너다보며

 

                                 - 이  건 청 -

 


 

지난 겨울 나는 어느 절간 요사채에

방 하나를 빌려 빈둥빈둥 놀면서

절간 건너편 산등성이를 바라보곤 하였다.

어떤 땐 하루 종일 산등성이만 건너다보기도 하였다.

산등성이 위로 구름이 흐르고,

황조롱이 같은 놈이

자작나무 가지에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별안간 긴한 볼일이라도 생긴 듯 펄쩍 날아

옆 골짝으로 사라지곤 하였다.

밤이 되면 산비탈 모두가

깜장이 되어 초롱초롱한 별을 띄워 올리곤 하였는데

어느 날 나는 산등성이 풀덤불에 무덤 하나가

버려져 있는 걸 창자내었다.

죽은 자를 거기 묻었던 사람들도

모두 늙어 죽었는지, 무덤은 잊혀지고

지워지면서 낮은 흙더미만 남아 있었다.

조그만 흙더미가 삭은 뼈를 보듬고 있는 거기서

절간 요사채에 빈둥거리는 나 사이는

영겁인 것도 같고 지척인 것도 같았는데

창 너머로 산등성이를 자세히 보면서

그 무덤이 그냥 버려진 것이 아닌 걸 알게 되었다.

가끔은 이 산에 사는 고라니가 와서 쉬다 가고

숱하게 많은 새들도 들렀다 가곤 하였는데

한낮의 고라니도, 흰 구름도 황조롱이도,

한밤 초롱초롱한 별떨기까지도 사람들이 잊어버린 삭은 뼈와 막역해져서

각각의 몸짓으로 적멸 속을 넘나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냥 산등성이처럼 건너다보이는 거기가

피안이고 화엄인 걸 알게 되었다.

 

 


왠지 이 책도 觀하는 데는 좋을 것 같아서 골라봤어요.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필 지음 / 김영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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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9-20 10:35   좋아요 0 | URL
누구에게 보내시는 글인지 알겠어요 언니의 마음이 그분께 닿길
더불어 저도 참 좋네요
제게도 와닿는 구절이 참 많아서
이건청 시인의 시를 읽다 26살의 저를 만났어요
그 때 이건청 교수님 시창작 수업에 시를 내고 칭찬에 한껏 으쓱해했거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지만 오래오래 곱씹어 즐기게도 하네요
덕분에 좋은 시 덩달아 감상합니다

양철나무꾼 2012-09-20 15:28   좋아요 0 | URL
이건청 시인은 되게 로멘티스트일 것 같아요, ㅋ~.
이제 정년퇴직하셔서 다작이시라는데...
무색케할 정도로 깊이가 느껴지더라구여~^^

우린 카카오 스토리에서 종종 만나 오랫만 아니죠? ㅋ~.
그래도 이렇게 보는 것도 반갑당~!

북극곰 2012-09-20 13:57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읽으시면 곧 쾌차하실테지요.
저까지 덩달아
(혼나는 듯도 하면서도,) 힘도 나고, 가슴도 따땃해지고, 애정도 담뿍 느끼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2-09-20 15:29   좋아요 0 | URL
잘 지내세요, 북극곰님?
오랫만이에요.
반갑다~~~~~
부비 부비*^^*

책읽는나무 2012-09-20 18:15   좋아요 0 | URL
모두 다 건강관리 잘해야 합니다.그죠?
님의 글을 읽으면서 연륜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끼고 가네요.^^
전 A형 성격 그대로 반응이 나오더라구요.ㅋ
암튼...그분도 어서 쾌차하시어 벌떡 일어나셨음 하구요.
또한 님도 건강하세요.
요즘은 건강이란 단어로 자꾸 인사를 하게 되네요.앞으로 점점 더 그러하겠죠.^^;;

hnine 2012-09-20 21:51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의 따뜻한 이 마음이 그분께 잘 전달되어 건강이 나아지셨으면 좋겠어요.

2012-10-05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재료를 가지고,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요리를 만든다.

 

 

이 말을 나의 음식에 관한 신조대로 바꾸면 이쯤되겠다.

최상의, 가장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원형에 가깝게 쓰되,

최소한의 가미를 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을'이기 때문이다.

요리의 고수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입이 짧아서 그런가 아무리 먹고싶어서 음식을 만들다가도,

음식 냄새를 너무 맡거나 하면 정작 먹을 수는 없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9월의 첫날 아침,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이 책을 읽는다.

아무리, 천고마비의 계절이라지만...

바디는 함부로 살찌울 수 없고,

우리 소울(=서울)이나 함께 살찌워 봅시다, 들~!

 

 

노래는 잔잔하니 청명한 가을날 아침에 듣기 좋지만,

가사는 곰곰 들어보면,

좀 청승 맞은 듯~!

반면 이곡은 경쾌한 것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 책을 몬~ 읽게한다.

곡에서는 9월 다 가거든 그때 깨워달라는데,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면서라도 이 책을 꼭 읽어주셔야겠다.

왜냐구?

이만한 서울 푸드(soul food)도 없으니까~.

 

 

근데,

암만 생각해도,

난 말도 아닌 것이,

어쩔려고 이런 책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맛깔나면 여기서 멈출 수도 없고,

어쩌란 말야~--;

 

 그렇지만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조연의 존재가 좋은 영화를 만들곤 한다. 모든 배우가 송강호이기는 어렵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이문식이나 유해진도 나오고, 김수미도 있어야 영화의 소소한 맛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그런 캐릭터의 맛이 바로 신맛이고 쓴맛이다. 신맛은 혼자서 맛의 캐릭터를 드러내지 않는다. 순수한 신맛은 매우 고통스러운 화학적 돌출이다. 신맛은 단맛이나 짠맛과 어울려 놀라운 맛의 두께를 마련해낸다. 생각만 해도 혀끝에 침이 고이는 묵은 김치나 냉면의 시원한 동치미 육수도 딱 그런 맛이다. 신맛의 예각적 맛을 짠맛이 든든히 잡아준다. 우리 혀는 매우 둔감하고 이기적이며 감정적이어서 몇가지 맛의 복합성을 화학적 배합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매우 주관적으로 반응하는데, 똑같은 신맛이라고 해도 짠맛의 배려가 없으면 어떤 경우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 맛있는 군만두를 식초에만 찍어 먹는다고 해 보시라.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간장과 배합해서 쓰면 신맛의 아슬아슬한 각도가 슬쩍 눌리면서 입맛을 돋워주는 신비한 미각으로 변화한다. 물론, 맛이란 게 혀로만 설명할 수도 없다. 혀도 정신의 지배를 받아 감각의 층위가 달라진다. 기분이 좋을 때, 화가 났을 때 혀의 반응이 모두 달라진다. 아버지에게 화풀이하느라고 일부러 짜게 한 것이 아니라, 혀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기능 이상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랑하면 디저트가 유독 맛있는 것은 혀에서 단맛을 느끼는 미각돌기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8~9쪽)

 

"인생이란 한 번 사는 것, 즐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 인생의 쓴맛도 때로는 단맛과 만나면 기막힌 맛이 된다구. 초콜릿처럼 말이야."(10쪽)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그의 글 맛이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보조멈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그의 전작들을 슬금슬금 장바구니에 담는다.

 

글이 어찌 그리 맛깔스러운가 했더니,

'기자로 일하던 중 이탈리아 영화에 매혹되어 무작정 이탈리아 요리학교로 떠났다'라고 책 날개 안쪽에 적혀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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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9-01 12:37   좋아요 0 | URL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는 것에 정말 동의해요 입맛을 자극하는 맛들 거기에 더해지는 추억은 오래가지요.
멋진 추억을 선물을 입맛에 손맛을 가졌다면 그리고 선물할 수 있다면
요즘들어 늘 제 음식이 맛없다는 가족들때무ㅡㄴ에 골머리 중이라 흑흑

양철나무꾼 2012-09-11 11:22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 님, 요즘은 어떠세요?
모쪼록 뱃 속의 꼬물이를 생각하여 암거나 자알~ 드세요. ㅋ~.
나도 참~, 먹을 걸 주지도 않음서 잘 드시란다~~~^^

이쁜 수제 비누의 솜씨로 미루어 보건데...
님의 음식솜씨도 좀 짱일듯~!

mira 2012-09-02 19:45   좋아요 0 | URL
저도 주말에 이책 금방끝내고 리뷰를 어떻게 맛깔스럽게 적나 이작가의 책을 읽었을때 느꼈던 맛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지 고민하고 있어요

양철나무꾼 2012-09-11 11:23   좋아요 0 | URL
mira-da님, 반갑습니다여~^^

지금쯤 리뷰 올리셨으려나?
님은 어떻게 맛깔스럽게 표현했을지 보러가려구여, ㅋ~.
 

어제는 누군가에게 미안한 일이 있었다.

미안하다고는 해야겠는데 말은 안 나오고,

코 밑에서 알짱거리면서 엉뚱한 일로 딴지를 걸면서 기회를 엿보고만 있었다.

누군가는 사람 좋게 '헤헤~'거리면서,

오히려 자기가 미안하다고 할 태세였고,

이래저래 어쩔 줄 몰라하는 날 향하여,

급기야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음 다 보인다'고 하는 '관심법'까지 구사하는 거다.

아니,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그래...

내가 미안해서 쩔쩔매는 것을 모르나 싶은 것이 서운하여,

나무들 사이에 있을땐 숲을 볼 수 없다며 툴툴거리게 되었다.

그러자 나무를 많이 심다보면 언젠가는 숲도 보이겠지라며 또 '헤헤~'거린다.

 

 

 

 

 

 

 

 

 

화담집
김교빈 지음, 서경덕 원작 /

풀빛 / 2011년 12월

 

 

그때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청소년 철학창고'라는 부제를 단 <화담집>이었다.

그동안 화담 서경덕을 황진이의 요망(?)을 이겨낸 군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

성리학의 최고봉이나, 이기론의 중심 사상가 등을 외울때 서경덕을 제일 먼저 외웠으면서도...

한번도 그 서경덕으로 연관시켜 생각하지는 못 했었다.

때문에 황진이가 그토록 연모하고 어쩌고 하여도,

송도3절 어쩌고 하여도,

그런가보다 했을뿐 그토록 훌륭한 인물인지를 놓고는 심사숙고한 적이 없었다.

 

실토하자면...

옛날에 두꺼운 하드커버의 '화담집'을 한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채 본문을 들추기도 전 서문의 빽빽한 한자에 기가 죽어, 하품만 하다가 덮었었다~--;

그동안의 책들에서 서경덕은 둔갑술이나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선이나 도인쯤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이 책에선 인간 서경덕이 등장해서 좋았다.

 

어찌되었건, 인간이라고 해야 그의 심오한 학문세계를 가히 범접해 볼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인간적이라는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훌륭한 군자일지라도...

그도 성리학자이기 때문에 성리학적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고 사고하는 구태의연함을 버리지 못했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지고 볶더라도 구태의연한 가운데 좀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게 좋지,

가끔 신선이나 도인이 부럽고 좋아 보일 때는 있겠지만,

신선이나 도인을 닮고 싶지도,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동안 내게 이와 기의 개념은 좀(=very much) 어려웠다.

기는 리와는 달리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는 바탕이며 리와 기는 한 사물 속에 같이 들어 있다.(25쪽)

 

그러니 이와 기를 자유자재로 운용, 구사해야 하는 태극과 태허 개념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태극이 우주만물의 변화를 설명하고, 주역이나 우리나라 국기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성리학 전반에 걸쳐 두루 쓰였다면...

태허는 성리학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개념으로, 장자가 가장 최고의 경지로 말한 절대 자유의 개념이란다.

하지만 서경덕은 모든 만물을 의 변화로 설명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에,

성리학에서 가장 궁극의 이치라고 생각하는 태극보다는 최고 변화의 경지인 태허를 중요 개념으로 삼았다.

오히려 태극을 사물의 변화 속에 담긴 변화의 궤적 정도로 낮추어 보았다.

서경덕의 관점은 도교나 불교의 관점과 다르다.그는 비록 자연과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장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여전히 도덕을 강조하는 유학자였다. 다만 일반 유학자들과 다른 점은 '내면을 닦는 공부'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는 공부'가 학문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모든 집착을 버리라는 의미에서 공(空)을 강조했지만 서경덕은 빈 듯해 보이는 '공'도 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고 봄으로써 존재에 대한 불교의 이해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유롭게 살고자 했지만 그런 힘 또한 장자가 아닌, 맹자가 강조했던 호연지기(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도덕적 용기)에서 온다고 보았다.(58쪽)

 

암튼 서경덕은 어렸을때부터 남달랐나 보다.

열네 살때 <서경>을 배웠는데 그 다음 해까지 300회를 읽었다고 하고,

열여덟 살때 <대학>을 읽다가 "앎을 완성하는 것이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깨닫는 일에 있다."라고 한 문장을 보고 "공부를 하면서 먼저 사물의 이츠를 궁구하지 못한다면 독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하고 

날마다 책상 앞에 사물 이름을 한 가지씩 써 붙여 놓고 그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한다.(94쪽)

 

서경덕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올린 인물이 있는데, 바로 이현주 목사님이다.

이현주 목사님의 <사랑 아닌 것이 없다 - 부제;사물과 나눈 이야기 >를 읽었던 터였는데,

그때는 많은 부분이 서경덕의 그것을 차용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 이옥의 글들을 읽다가...

과거 내가 열광했던 김탁환의 미문들이 이옥의 그것이란걸 알았을 때의 배신의 충격이랑 흡사 맞먹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서경덕의 그것은 이황의 그것과는 명맥을 달리, 이이의 그것과는 명맥을 같이 하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옛것을 배워서 새 것을 암.)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허는 빈 듯하면서도 비어 있지 않으니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빈 것 같은 기이다. '빈 것'은 끝도 없고 무한히 펼쳐져 있으므로 기 또한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 이미 '빈 것'이라고 해놓고 어째서 기라고 말하는가? 빈 듯하면서 고요한 것이 기의 본모습이고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 기의 작용이니, '빈 것'이 비어 있지 않은 것임을 안다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노자가 "있음이 없음에서 나온다."라고 한 것은 '빈 것'이 곧 기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자가 또 "빈 것이 기를 만들어낸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틀렸다. 만일 '빈 것이 기를 만들어낸다.'라고 한다면, 바야흐로 아직 아무것도 생기지 않앗을 때는 기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빈 것'은 죽은 물건이 된다.

  이미 기가 없다면 또 어디에서 기가 생길 것인가? 기는 시작이 없으니 생겨남도 없다. 이미 시작이 없는데 어떻게 끝이 있겠는가? 이미 생겨남이 없는데 어떻게 없어짐이 있겠는가?

  도가에서는 허(虛)와 무(無)를 말하고 불교에서는 적(寂)과 멸(滅)을 말한 것은 리와 기의 근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니, 어찌 도를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78~79쪽)

 

이 책을 읽으면서 멈춰서서 깊이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서경덕이 개성 국립학교 선생으로 와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대관자(大觀子) 심의에게 준 송서(送序)를 읽으면서 이다.

서경덕은 말처럼 가난하여 다른 선물을 줄 길이 없어서 《주역》을 읽다가 떠오른 글자 멈춤(止)에 대한 생각을 선물로 준 것이다.

글자를 선물로 준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그토록 가난한 비참함이 될수도 있는것인데...

그걸 선물로 줄 수 있는 마음과 받을 수 있는 마음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 마음만으로도 천하를 모두 얻은 것보다 호기롭고 넉넉할 것 같다.

 

서경덕의 그것이 그간의 것들과 다르게 와닿은 까닭은,

글자 멈춤(止)에서 사물의 사물됨이나 사람의 도리를 읽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서경덕은 그의 좋은 점을 높이 사면서도 "머물 만한 때면 머물고 갈 만한 때면 간다." 라고 했던 《주역》의 가르침을 끌어와서 벼슬이든 시 쓰는 일이든 자연의 법칙에 맡기라고 하고 있다.

 

태극과 태허도 그렇고,

글자 멈출 지'止'도 그렇고,

관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말들이다.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에 따라서 의미가 상반될 수도 있겠다.

이럴때 학식이나 덕망이 높은 사람의 관점을 욕심내거나 탐내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고,

자기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만 여기에 머물고 안주하느냐,

도움을 받아, 자기가 바라보는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느냐, 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하겠다.

관점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로는 책, 벗, 스승 등이 있겠다.

 

실토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불교나 도교적 얘기도 아니고, 성리학적 얘기도 아니다.

어떤 종교적 관점들을 통하여 예측하게된 미래를 놓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또는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내 자신을 닦아 가는데 있다.

 

  '기자이(機自爾)'란 기틀이 스스로 그렇게 될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꽃 필 때 되면 꽃이 피고 바람 불 때가 되면 바람 불며, 배고플 때가 되면 배가 고파 오는 그런 계기의 변화를 뜻한다.(74쪽)

 

태극과 태허를 얘기할때도 그렇고,

글자 멈출 지'止'를 얘기할 때도 그렇고,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를 얘기할 때도 그렇고,

관점과 기준이 되는 그 '무엇' 또는 그'누군가'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내게 그런 역할을 하는 이가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누군가'라는 거다.

 

때로 관점을 갖고 고민하게 될때,

누군가와 한편인가를 놓고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게,

그 누군가를 내게 거울인양 비추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합집합, 교집합, 부분집합의 빗금으로 나타낼때 마냥...

자연스럽게 나와 누군가를 제외한 나머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선비들이 왜 거문고를 가까이했는지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됐다.

선비들은 늘 거문고를 가까이했다. 그 까닭은 거문고가 한자로는 금(琴)인데, 그 발음이 잘못된 행위를 삼가한다는 뜻의 금(禁)과 통하기 때문이다.

  먼저 앞의 두 시는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이고 뒤의 두 시는 줄 있는 거문고에 대한 이야기다. 줄 없는 거문고는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줄은 소리를 내는 도구다. 하지만 소리를 통해 듣는 것보다 소리 없음을 통해 듣는 것이 한 단계 위다. 이는 글자를 통해 써진 의미를 보지만 글자의 조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들 속에 담긴 의미를 보는 것과 같다.

더불어, 소리를 통해 듣는 것과 소리 없음을 통해 듣는 것에 대해서도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때론 소리와 소리 사이의 적막도 의미 있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요즘은 사물의 중심을 일부러 살짝 흩고, 어질러 놓는다.

그렇게 하여, 무게 중심을 바꾸게 되면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세상에는 무엇 하나 사소하고 소홀한 것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럴거라 믿는다.

나무를 많이 심다보면 언젠간 숲도 보이겠지~.

 

  

 

   청소년 철학창고 세트 - 전30권
   플라톤 외 지음, 송재범 외 옮김 /

   풀빛 / 2012년 3월

 

 

이 시리즈의 책은 '근사록'에 이어 두번째인데, 가볍고 이해하기 쉽다.

단점이라면 한자가 병기되지 않아서 의미가 모호한 경우가 있다.

화담집은 '김교빈'님의 풀이가 단연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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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2-08-24 18:58   좋아요 0 | URL
오늘은 좀(very much) 어려운 내용이군요.
무식한 저로서는 도무지 따라잡기 어렵사옵니다.
언급하신 이현주 목사님의 책은 저도 살짝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저 옛날 서경덕 조상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었군요.

다 이해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배운 게 조금(a little) 있는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