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다 좋다는 책이 내게는 별로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안봐도 불을 보듯 명약관화한 경우가 일본 소설이다.

일본 소설이라면 정서가 우리와 비슷해서, 보통 쉽게들 감정이입을 하곤 하나본데,

난 어쩐 일에선지 영 불편하고 마뜩잖다.

 

 

 

 

 

 

 

 

그렇다고 일본 작가라고 하여 마냥 간과할 수만은 없는게,

내가 엄청 감동 받았던 '신들의 봉우리'를 썼던 '유메 마쿠라바쿠'의 경우,

'음양사' 라는 책은 어떨까 하였는데,

그야말로 귀신과 혼령이 블루스를 추는, 나로써는 감당 불가인 기괴한 소설이었다.

 

가만보면, 일본소설에는 혼령이랄까 영혼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그게 내게는 낯설고 거부감이 생기는 거다.

 

SF소설에 등장하는 science fiction이나 social fantasy적 요소를 수긍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혼령이나 영혼이 시도 때도 없이, 어떤 기준이나 경계도 없이 등장하는게,

개연성을 방해함은 물론, 억지다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코널리'의 '모든 죽은 것' 정도가 되면 낫다.

혼령이나 영혼의 중간자로서의, 영매가 등장하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일본은 혼령이나 영혼을 하나의 전통이나 민간신앙 차원에서 흔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한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의 경우,

내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

수도꼭지 끝에 맺힌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울리는 것처럼, 외로워, 외로워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59쪽)

라는 표현 따위로 미루어볼때, 이사람의 감수성과 필력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하긴 내가 이 사람의 다른 것들을 평가할 깜냥은 아닌 고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사람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겠는데,

나와 코드가 안 맞을 뿐이다.

 

어차피 애도라는 것은 죽은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부고가 난 이후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들의 편의와 마음대로 꿰어맞추고 각색하고 해석하려든다.

 

왜냐하면 애도라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면,

"ㆍㆍㆍㆍㆍㆍ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551쪽)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인생의 본질이라는 허울 좋은 살아 있는 동안에 대해서, 가 아니라,

죽어서 어떤가 따위를 얘기해야 할텐데...

살아있을 때의 그(그녀)와 죽어서의 그(그녀)가 마치 별개인양 얘기하고 있다.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살아있는 나날들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강령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자신과 타인의 죽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거야.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죽은 사람과 자신을 같이 생각하는 건 달라.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일이 감정을 이입해서는 안 돼.ㆍㆍㆍㆍㆍㆍ(264쪽)"

이렇게 산자의 삶 위주로 얘기하고 있다.

내가 생략해버린 저 말 줄임표 부분에는,

우리식으로 따지면 죽은자는 죽은자고, 어찌되었건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는 뉘앙스가 담기게 마련이다.

어차피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거라면 죽은자를 위한 애도보다는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얘기하는게 낫지 않을까?

지지고 볶고 싸우고 다투더라도, 그게 삶의 온기가 바탕이 되어 비롯되는 그것 말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느라 왕방울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고마워할까?

눈물 흘리는 내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닐까?

애도의 목적이 내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니라,

진짜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면,

살아있는 동안 하루를 살아도 매순간순간을 가열차게 살 수 있도록,

사람의 단점보다는 작은 장점이라도 찾아내어 북돋워 주고 발휘할 수 있도록,

그러려고 애쓰느라고 흘린 작은 땀방울을 같이 나누는게 오히려 값지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니까 의미가 좀 애매모호한데,

사고사를 제외하고,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고,

자신의 명대로 다산 다음,

자신의 죽음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혜경 외 지음, KBS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 엮음 /

 애플북스 / 2014년 3월

 

죽을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면,

죽은 다음에 자신이 애도받고 못받고는 차후의 문제가 될 것 같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의 여부가 우선이 될 거 같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다양한 집단과 연령대의 국민들 총 16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단다.

이게 확률과 통계를 필요로 하는 역학조사라면, 165명이라면 대상이 좀 작은 감이 있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니 충분하다고 본다.

 

이 자료를 보니, 품위 있는 죽음의 조건으로 응답자가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이었고,

‘주변 정리’,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음’, ‘통증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그 뒤를 이었단다.

 

이걸 누구의 문제로 돌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걸 외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언제부턴가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이 인사치레가 되어버렸다.

건강함이란 몸과 마음, 심신이 균형과 조화되어야 한다.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것은, 균형과 조화가 어긋나는 것이니...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겠다.

 

그러니, 곱게 나이먹는다 내지는 나이값하고 산다는 게 제대로 된 덕담이다.

  

암튼,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다.

알지도 못하는 사돈의 팔촌, 조문을 가고 인사치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나와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거다.

태어나는건 내가 어쩌지 못했지만,
나의 죽음은 예비하는 순간 많은 것들을 내 의지대로 처리하고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죽음마저도 스스로 예비할 수 있다면 바랄 게없는 어른일게다.

동안을 부러워하지말고,

나이값하고 사는걸 부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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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3-07 23:33   좋아요 0 | URL
나이가 넘 빨 리 들어서 그 값하기도 허걱되네요 저도 반성해요

Ralph 2014-04-03 10:15   좋아요 0 | URL
죽음을 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매우 힘든것처럼 생각됨니다. 대부분 자신이 죽는 지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 이나 주위 사람이 안다해도 가르쳐주거나 도와주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면 누구도 가르쳐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어차피 자신이 알아야하고, 자신이 준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인생을 사는 것과 같겠지요.
 

 

 

여자의 솜씨라고 해도 좋다 싶은 이건 울아들의 작품되시겠다.

얼마전 날 추웠던 어느날 더이상 책은 보기 싫고 할일은 없어 심심해서 만들었단다.

난생 처음 만든거라는데, '마음씨, 맵씨, 솜씨' 3씨를 자랑하는 날 닮지 않았다고 할까봐 손끝이 야무지다.

 

이게 정체성이란 말로 대치 되어도 좋을까 싶지만,

어렸을때 난 이 야무진 솜씨를 자랑하는 무언가를 직업으로 갖게 될 줄 알았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고, 아직도 그게 회한으로 남는다.

 

 

책을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대충 골라 읽는 타입이기 때문에,

보통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영국 남자와 중국 여자의 러브 라인을 그린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을 읽은 다음엔,

영국 조각가 남자가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런던 디자인 산책'을 읽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독서는 말 그대로 내 기분 내키는 대로이기 때문에, 선택을 할때 신중하지도 않지만,

읽다가 별로이면 집어던지면 그만이었다.

 

근데, 근래에 읽은 책 두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것이,

끝까지 읽느라 인내심을 발휘하는 수고를 하여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게,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게 일반적인 검증을 거친작품인 것은 맞지만,

다른 사람이 큰 감동을 느낀 책이라고 해서,

나도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것이다.

 

 

 

 

 

 

 

우선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같은 경우,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 만으로도 결의를 다지기 충분한데,

강신주의 감정수업, '자긍심'편에서 언급되어 읽어봐야 겠다 싶었었다.

강신주는 '자긍심'을 일컬어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이라고 한다.

 

솔직히  '정체성'의 개념조차 모호했던 난,

책을 읽고나니까 선명해지는게 아니라 더 모르겠었고,

그리하여 네이버를 찾아보니,
'어린이가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차별화되고 사회에서 취득하는 과정을 발전시키게 되는 '자아'의 의미를 말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래도 애매모호해서,

강신주가 언급한 자긍심이란 단어와 연결시켜 생각해보았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본인만의 고유한 개성을 얘기하는듯 한데,

그중 지속되어 자신의 것으로 습관화 돼고,

긍정적이어서 본인이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겠다.

'자긍심','자아존중감' 정도가 되면 뜻이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이렇게 무덤덤한걸,

처음 너무 어려웠거나 내 취향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했다.

'정체성'은 신프로이트주의 이론가인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언급한거라고 하는데,

프로이트 이론도 모르는 내게 신프로이트주의라니 머리에 쥐가 날 수밖에~--;

 

근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 책이 별로였던 이유는 샹탈이라는 여자 때문이었다.

자신이 늙어 간다는 사실에 서글퍼하던 샹탈이라는 여자가, 어느 날 연하의 애인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라고 하소연 하게 되고,

애인 장마르크는 그런 샹탈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시라노'라는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내용인데,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때마다 놀라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녀와 다른 여자들의 차이점이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라고 한다.

 

어린 아들이 죽은 후 또다시 임신을 하라고 부추기는 시누이와 거기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회의를 느껴 이혼하고,

일 잘하고 돈 잘버는 캐리어우먼이 된다.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와 같이 사는데, 잘은 모르지만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는 변변치 못한것 같다. 

 

나이가 먹고 늙어가는 걸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가지고 서글퍼할 수는 있다.

평생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하여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내가 샹탈이 별로인건 이런 것들 때문이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라면,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이고 실천의 방법이지,

장마르크에게 그렇게 표현한 순간 또 다른 애인이 가능하다는 허용이 되어버리는게 아닌가 말이다.

같은 의미에서 '시라노'라는 익명에게서 받은 편지를 감추는 그 마음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들을 '정체성'으로 제한시켜 버린 작가도 별로가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또 한권, '올리버 키터리지'가 그렇다.

 

인간의 감정은 얼마나 세밀한가.

감정이 느끼는 파동은 얼마나 섬세할 수 있나?

인간과 인간이 내는 파동이 물결처럼 어우러져,

서로 간섭 현상을 일으키는 점이지대도 있겠지만,

어떤 파동에도 휩쓸리지 않는 소외지대도 있는 법.

 

이 책은 'ㄱ'님의 리뷰의 이 구절이 너무 좋아 외우다가, 내 편견이 잊혀질때쯤 되어 집어 들었다.

이 책 같은 경우는,

꽃이 피어 붉기는 잠깐이고 줄기에 이파리를 매단 채 견뎌내는 시간이 더 오래임을 조용히 얘기한다.

우리의 불편하고 추레한 현실 한쪽 자락을 건드려 감성을 자극하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인지는 모르겠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조각조각 단편의 삶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은,

삶은 매순간 우리가 계획하거나 맘 먹은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거나 늙었거나, 나이를 먹었거나 덜 먹었거나, 에 관계없이,

우리가 매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거기 나오는 '샹탈'과 '장 마르크'로 돌아가,

내가 별로라고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이유는,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해서도 아니고,

사랑이 영원할거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순간에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순간조차도 서로를 비껴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현세의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라는 책이 궁금하다.

이 책엔 '해지기전 한걸만 더 걷다보면' 류의 글이 가득할 것 같다.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
 이현세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2월

 

다시 처음의 만두 빚는 울아들로 돌아가서,

자신의 소질을 계발하고 그것을 발휘하며 살 수 있으면 행복하겠지만,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것을 선택한다고 하여 삶도 2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를 할땐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서,

놀땐 노는데서,

만두를 빚을땐 만두를 이쁘게 빚는데서, 울아들은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샹탈은 그순간 뭇 남자들이 아닌 장 마르크가 쳐다봐주지 않는다면 서글퍼하면 그만인 것이고,

장 마르크 또한 샹탈을 여러번 다른 여자와 혼동한 과거를 놓고 그럴게 아니라,

그순간 샹탈을 헤아릴 수 없다면 그때 놀라면 된다.

 

흔히들, 몸이 나이를 먹지 마음이 나이가 먹지를 않는다는 말을 한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게 마련이고 언제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사는 인생이라면,

밥을 꼭꼭 씹어먹듯, 내 발로 한걸음씩 내딛듯,온 몸으로 통과하며 살고 볼 일이다.

이것은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랑은 좀 다른 의미인데,

사람이 항상 전력질주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항상 최선을 다하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는가?

잘하고 못하고, 의 개념이 아니라,

나를 올곧이 내어맡기는 의미라고 해야할까?

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하기 싫어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지만, 그게 다 한 대상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관계가 정리되면 또 다른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고 밍기적거릴 수도 있고 그런 것.

 

정체성을 난 '자긍심' 내지는 '자아존중감' 정도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다.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거기서 최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두번째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차선의 자아를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이 얘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정도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그게 사람이어도 좋고 사물이어도 좋다.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그 순간에는 대상에 집중하고 볼 일이다.

그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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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2-20 10:46   좋아요 0 | URL
아드님이 빚은 만두 정말 이쁘네요. 맛나보여요.
감동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느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여러 사람이 좋다고해도 내겐 읽기 어렵고 별 감동없는 것들도 많더라구요.
정체성에 관한 고민은 어릴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는 것이라 아마도 죽을때까지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알케 2014-02-21 08:43   좋아요 0 | URL
아이고 딸래미를 키우시는군요ㅎㅎ 맵시하고는..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사다놓긴 했는데 저는 어째 시들합니다 ,

하늘바람 2014-02-22 07:45   좋아요 0 | URL
만두 만두 정말 아드님솜씨여요? 것도 첨 만든?와 정말 감탄에 입이 쩍 벌어지네요.
 

연말 연시를 고뿔 속에서 헤롱거리며 보낸다.

연말의 그것은 그나마 약하게 지나가 책은 들춰볼 수 있었으나,

지금 나를 통과하여 가고 있는 이 녀석은,

기침에 몸살을 동반해서 책을 들추는 것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다.

 

'한살 더 먹는다' 생각했을때는 그닥 감흥없는, 그리 유쾌할 일도, 불쾌할 일도 아니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나이 먹는것마저 이렇게 몸으로 통과해가며 깨닫는 건가 싶으니 씁쓸하기는 하다~--;

 

기실, 내가 요번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건,

해마다 맞아오던 예방접종을 (무슨 배짱으로 건너뛰었는지 모르겠다~--;) 건너 뛰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많은 직업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감기나 독감에 노출된 환자들과의 접촉도 많아,

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건 늘 있는 일이고,

그걸 알면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데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종로 한복판에서 동서남북 오가는 찬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아니고,

겨울 막다른 골목길에서 만나게 되는 군고구마 장사도 아니지만서도,

그들이 보면, '형님'하고 팔굽혀 고개를 숙이고 갈 정도로 둘둘 싸매고 다니는 데,

어디로 그 녀석들이 침범했는지 모르겠다.

 

거의 엇비슷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어도,

나만 유독 길고 오래 강력하게,

마침내 기필코,

초토화시키는 걸 보면,

면역력이 약해서일테고,

그렇다면 운동을 통해서 면역력을 강하게 해주어얄 밖에~--;

운동은 고사하고 하루 몇분이라도 걸어볼 요량으로,

팟캐스트로 다운받아 듣던 강신주는 다 들어주시고,

그 다음으로 건드린게 '이박사 이작가의 이이제이'라는 방송이었다.

 

근데 이 방송은 욕이 난무하는데,

그게 우아한 나의 기본정서와는 좀 맞지 않는것 같아서,

접으려고 하다가...

(이게 어디까지나 킬링 타임용으로 듣는 건데,

 이 사람들이 욕하는 걸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게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으면 들을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말이다.)

이들의 방송이 다 그렇지만,

'조봉암 특집 2부'같은 경우, 베스트 반열에  올라있는거라,

그리 많은 사람들이 들은 것은,

그들이 대세여서,

시대에 편승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뭔가가 있을거라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봉암 특집의 2부가 끝나갈 무렵,

그들은 우리가 그 프로그램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석기 사건도 그렇고,

통합진보당 사건도 그렇고,

그렇게 연일 방송에서 때릴 정도의 대단한 이슈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이 '특.검.'에서 끝나야지, '헌.재.'까지 끌고갈 사건이 아니라는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란다.

막말로 이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창당을 하면 그만이란다.

 

하지만, 이들을 극좌로, 빨갱이로 만들어버림으로 인하여,

그들과 대척점에 섰던 사람들은 공ㆍ사 구별없이 자유민주주의의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국정원 댓글사건'과 관련하여 좌천을 당한 윤석열 검사의 경우, 그를 야당편이라거나 좌편향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경찰청 정보국장을 구속했던,

노무현 정부에선 안희정, 강금원 같은 노 최측근을 구속한, 인물이다.

 

위정자 입장에선,

국민들이 자기들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좋을게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국민들이 자기네들끼리 편가르고 싸우다가 지쳐가길 원하고 있단다.

 

지금부터 하는 얘긴,

같은 얘기의 연장선 상으로 봐도 좋고, 전혀 다른 얘기로 봐도 좋다.

 

요즘 여러 주역 책을 짬뽕하여 읽는데,

읽으면서 느끼는건,

이 모두가 耳懸鈴鼻懸鈴이라는 거다.

한괘에 있는 여섯효를 가지고도,

두, 세개를 아래와 연관시켜 묶느냐, 위와 연관시켜 묶느냐, 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해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여럿이다.

그 중, 어떤 해석이 맞는지 틀리는지, 를 놓고도 갑론을박이다.

 

국사, 세계사에 취약한 나도 어디선가 한번쯤 들었던 얘기들도 있다.

점서로 읽겠다는 사람에겐 그 효용성을 장담할 수 없으니 안되겠고,

처세서나 인문학 책으로 읽겠다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재미있는 이야기 책이 될 수 있겠다.

 

세상을 살면서, 또는 일을 하면서...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지 싶다.

예를 들면 비를 만나면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린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물론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이 아니라, 조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린다는 뜻이 되겠다.

비를 여러번 만나본 사람은 이 비가 언젠가는 그치리라는 걸 믿고 기다리겠지만,

처음 비를 보는 사람이라면, 이 비가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지는 않을까 심리적으로 동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힘을 비축한 이가 맞이하는 비 갠 하늘과,

노심초사하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소비해 버린 후에 맞이하는 하늘은,

긴장도 다르겠지만,

같은 하늘을 놓고도 하늘의 빛깔도 한참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처음의 '이박사, 이작가의 이이제이'로 돌아가서,

난무하는 욕설 때문에 이 방송을 놓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요즘 읽는 '인문으로 읽는 주역'의 '比'괘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작은 것으로써 큰것을 섬기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일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따르는, 또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먼저 스스로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뜻을 굽혀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다.  상사는, "내면에서부터 따르고자 하니, 스스로 잃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자존심과 관계기 있다.(132쪽)

비'比'괘는 즐거워하고 평화로운 관계이지만, 이건 서로 평등한 관계라기보다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받드는 괘이다.

『자하전』에서는, "대지는 물을 얻어 부드러워지고, 물은 대지를 얻어 흘러가니, 이 때문에 비(比)라 했다"라고 설명한다. 물과 대지가 서로를 얻어상생하는 것처럼,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 간의 상생 관계를 나타낸 것이 바로 비괘다.(126쪽)라고 되어 있단다.

 

자연이나 국가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즐겁고 평화로운 관계라는건,

서로 평등한 관계라기보다는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받드는, 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존경을 할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는 그런 관계가 아닐까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위정자가 위정자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건지,

국민이 머리 박고 자기편끼리 편갈라 싸우는 일은 막아 보자는 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님, 

믿을 수 있고 믿음을 주는 인물의 '부재'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건지,

헷갈린다, 끙~(,.)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점을 갖춘 사람'인 것만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적어도 그래야, 즐겁고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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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17 22:41   좋아요 1 | URL
오늘은 좀 나으셨나요? 가까운곳에 살면 맛난 죽이라도 싸가고 싶네요. 저도 이번에 예방접종을 건너 뛴 상태라 불안불안하긴한데,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야겠어요. 언니, 감기 얼른 낫길 빌게요. 그리고 그동안 넘 소원했지요. 그래도 가끔 들러 좋은 글 많이 읽었어요.^^ 올 해는 자주 찾아올게요.

양철나무꾼 2014-02-04 18:31   좋아요 1 | URL
왠지 꿈섬님은 음식솜씨도 야무지실 것 같다는~^^
어디선가 퓨전 피자 사진 본것 같아요.
저 그 피자 한쪽 얻어먹으면, 앞으로 거뜬할 것 같다는...ㅋ~.
현준이, 현수 많이 컸죠?
네, 저도 자주 마실 가도록 노력할게요~^^
 

며칠전 생기부 작성을 학생에게 시켜서 적발이 된 교사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고 만감이 교차하였다.

선생님들에게 가르치는 것 외에 잡무가 많기 때문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만으로 돌려버리기엔 뭔가 부족한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생기부 내용이 수능에 반영이 되기 때문이다.

매 학년 초가 되면 이름은 다르지만 가정환경 조사서 같은걸 집에서 작성해서 가져가야 한다.

뭐 그리 기록해야 할 빈칸이 많은지,

집중을 하여 작성을 하고 나면 거사를 치룬 것마냥 온몸에 힘이 빠진다.

그중 나를 가장 애먹이는건, 아이 성격의 장점과 단점을 기록하는 칸이다.

 

사람이나 사물의 장점과 단점을 구분하는것은,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체념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가 자라나는 새싹인 것도 있지만, 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가 되려면 아주 쿨하고 객관적이 되어야 하는데,

난 아무래도 팔불출인지 아이가 그저 좋다, 사랑스럽다.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따위는 구분해 낼 수도 없을 뿐더러,

다른이들에게 단점으로 보이는 것들이 내겐 그저 좋고 사랑스러운 장점으로 보이는 걸 어쩌겠는가 말이다.

 

사람이고 사물이고 간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을 때 하는 평가라야 의미가 있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생기부 작성을 선생님이 하지 못하고 학생한데 맡기는 것에 관한 적법성을 따지기 이전에,

생기부가 수능에 반영되는것이 타당하고 객관적인지,

제대로된 기준을 가지고 적용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고,

아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부모조차도 기재하기 어려운 그런 아이성격의 장ㆍ단점을,

물론 생기부야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겠지만,

선생님의 입장에선 이래저래 곤란할 수도 있겠다.

 

물론 선생님의 관점은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라던 장금이의 그것처럼,

아이가 그저 좋고 사랑스러운 엄마의 관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 참에 느끼고 깨닫게 되는 분명한 것은,

진정한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라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따위의 조건을 달지 않은 '그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사나 의료인이라면 차마 쓸 수 없는,

하지만 의학계에 웬만한 애정을 갖지 않고는 쓰기 힘든 책 한 권을 보았다.

'위험한 서양의학 모호한 동양의학'이라는 제목 아래,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 사이에서 흔들리는 환자들이 모르면 위험한 동양의학의 허와 실, 그리고 통합 이야기!'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띠지로 두르고 있는 책인데,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고 있는 정보의 보물창고라는 것이,

그리하여 이 책을 읽을 독자 층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중 어느 하나에 종사하는 의사나 의료인의 입장이라면 이 정도의 객관성도 유지하기 힘들었을테고 당연히 한쪽으로 치유친 글이 되었을 것이다.

저자 김영수는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중 어느 하나에 종사하는 의사나 의료인은 아니지만,

경제학 박사이며 금융전문가인 동시에, 국제적인 당뇨병 치료약 생산회사를 만든 사람이었다.

 

당연 사업수완이나 경제적 측면으로는 촉이 엄청 발달하였을테고,

거기다가 의학적 지식 내지는 의료상식에 대해서 갖는 내공은,

겸손하게 의학관련 고서적을 모으는게 취미라고 하였지만, 凡人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독자층이라는 타겟을 제대로 정하지 않은게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어찌보면 그의 제약회사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효과일지도 모른다 싶어졌고,

그럴 경우라면 구태여 독자층이라는 타겟 따위는 의미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암튼,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을 '제도권 현대 서양의학','제도권 동양(한)의학','비제도권 민간의학'해가며 어느 하나 신뢰할 수 없도록 낱낱이 파헤치던 그는,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안수기도로 큰병을 고친적이 있다고 고백하는데,

그게 나같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신비스러움이라는 탈을 쓴,

'성령의 힘으로~'내지는 '믿습니다'수준의 기독교 환자라고 여겨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의학, 대체의학에 대한 책을 두루 섭렵한 그가 덧붙이는 코멘트를 통해서,

수많은 의학 관련 서적 중에서 쓸데없는 책을 걸러내고 읽어야 할 책만을 엄선해준다는 것이고,

이슈가 되는 사안과 연관시켜 개념정리를 쉽게 해놓아,

경제적 측면에서 내가 노력해야할 시간을 한참 줄여준 것을 들 수 있겠다.

 

내가 그의 이런 입장을 놓고,

기독교 환자의 그것 내지는 모든 것을 사업과 연관시킨 노이즈 마케팅이 아닌가 의심들게 한 저변에는,

제도권, 비제도권 해가며 과학적 근거를 중요시하던 그도,

 'ㆍㆍㆍㆍㆍㆍ성경이 침묵하는 문제는 그 침묵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하는가 하면,

'솔직히 민간의료나 대체의학 쪽에서는 기독교 교리로 해당 의료분야를 정복하는 것이 오히려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59쪽)'고 하면서

'ㆍㆍㆍㆍㆍㆍ안수와 기도, 금식과 강도 높은 종교활동이 효과가 있는 몇몇 질병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참으로 좋은 시도' 라고 하고 있는데,

'안수와 기도, 금식과 강도 높은 종교활동' 따위가 과학적으로 어떤 근거가 있는지 알 수 없겠기 때문이다.

 

위양성(병이 없는데도 있다고 판정하는 것. 그래서 필요치 않은 의험한 치료를 하게됨)과 위음성(병이 있는데도 없다고 판정하는 것. 그래서 필요한 치료를 하지 않게 됨) 검사의 설명은 충분히 필요한 것이지만,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방을 절제했다는 언급은,

그녀가 유명인이라는 걸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보기에 충분히 선동적인 내용이다.

 

더우기 충격적이었던건,

새로 개발되는 의료 용품이 효과적이고 안전할수록 환자를 빼앗길까봐 박해하고 따돌리며(100쪽),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적당히 좋아야 받아들인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기존 제도권, 제도권 제약회사두고 치사하고 더러운 암투라는 표현을 해가며 경제적 이윤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고 있는데,

그렇게 놓고 본다면 당뇨병 치료약 생산회사를 만든 그도 거기서 크게 비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암튼, 난 '안수와 기도, 금식과 강도 높은 종교활동'이 과학적 근거가 없고,

그리하여 제도권 현대의학과 상반된 개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현대의학의 문제점으로 사이비 종교성을 들고 있고, 아무리 좋은 학문ㆍ지식체계라도 사이비 종교성을 띠게되면 남용과 부조리가 발생한다(109쪽)고 하고 있다.

  

 

 

 

 

 

 

 

 

 

 

 

 

 

이쯤에서, 얼마전에 들었던 벙커강의 강신주의 '다상담'마지막편이 생각났다.

당근 책도 구입해주었다.

강신주의 다상담 강의가 마지막인데, 그렇게 쫑을 하게 된 원인을 두고 강신주는 우리들이 그를 사이비교주로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나 신은 우리가 넘어졌을때 일으켜세워주고, 자신들의 어깨도 내어주면서 기대라고 한다고 한다.

반면, 철학과 인문학은 우리가 넘어졌을때 결코 일으켜세워주지 않는단다.

홀로 일어섰을때 훌훌 털고 재정비하여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단다.

그런데 우리가 철퍼덕 넘어져서는 손내밀고 일으켜세워주길 바라고,

자꾸만 그에게 기대고 의지하려고 하니까 그는 떠난다고 하였다.

그걸 책의 에필로그에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ㆍㆍㆍㆍㆍㆍ저는 철학자의 역할을 생각했습니다. 철학자란 끝내 당당해야 한다는, 산처럼 일체 감정의 동요 없이 여러분 곁에 있어야 하는 의무를 다시 생각했습니다.ㆍㆍㆍㆍㆍㆍ제가 <다상담>을 마무리하는 이유는 바로 여러분 때문이라고 나무랐습니다. 여러분들이 제게 너무 기대거나 혹은 저를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사실 그건 일정 정도 정확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아무리 여러분의 감정을 건드리려고 해도, 여러분들은 이제 그냥 그걸 제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ㆍㆍㆍㆍㆍㆍ저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저는 보고 싶었던 겁니다. 저는 제가 망가져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욕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 다시 스스로 당당한 삶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말입니다.ㆍㆍㆍㆍㆍㆍ그런데 불행히도 어느 순간 <다상담>이 일종의 관광 명소처럼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을 먹고사는 연예인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512~513쪽)

 

앞의 '현대의학의 문제점이라고 한 사이비 종교성' 내용으로 돌아가서,

'거대제약회사'나 '위약효과'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왜 강신주가 생각났느냐 하면...

종교나 신은 손내밀어 일으켜주고 기댈 수 있는 어깨는 빌려주는 대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의지가 되도록 한다.

서양의학, 동양의학, 민간요법, 대체의학 등, 의학이라는 허울을 쓴 것도 마찬가지이다.

쾌유나 완치가 목적이 아닌 듯 보일때도 있다.

어떤 종류의 의학이든지 간에 환자가 있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고,

안타깝게도 의료사업이라는 것 또한, 의료이기 이전에 경영 이윤을 발생시켜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어깨를 빌려주는 것은, 일단 내가 스스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경영이윤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똑같이 경영이윤을 내야 하는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누가 더 도덕적이고,

누가 더 소박하며 욕심이 작고는, 중요하지 않다.

누워서 뱉은 침은 제 얼굴로 떨어진다.

 

암튼 의학을 비롯한 의료사업이 됐든, 종교가 됐든 심신이 안 아프고 괴롭지 않으면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갖고 갑론을박하기보다는,

여러종류의 의학나 종교, 신 따위는'아웃 오브 안중'일 수 있도록,

옆에서 자존감을 불어넣어주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아를 찾아 갈 수 있도록 부추기는 것이 어쩜 제대로 된 도움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지금 이 순간 마음이 시키는대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 살고 볼 일이다.

 

위의 것은 강신주의 '다상담 3권'의 사인, 아래는 '감정수업'의 사인.

사인본을 갖게 되어 영광이지만,

사인본의 글씨를 가만 들여다보면서 든 생각은 글씨는 참 못쓴다는 것이다.

글씨마저 잘 썼으면 어쩔뻔 했어, 완전 폭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텐데...

천만다행이다.

'때문에'와 '불구하고'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최면'이다라는 말이 다시 한번 적용되는 순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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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12-30 11:32   좋아요 0 | URL
으으으 오늘도 역시나.. 님 서재에 왔다가 빈 손으로 그냥 가기는 너무 어렵단 말입니다. 흑흑
그나마 다행은 강신주의 다상담 1권을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보았다는 사실!! 흐흣

양철나무꾼님 해피 뉴 이어^^~~~

양철나무꾼 2014-01-08 16:13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헤피 해피 뉴이어~~~^^
다상담 3권은 읽을만 해요.
아쉬운대로 팟캐스트로 들어도 좋고요.
잘 지내시죠?^__________^

숲노래 2013-12-30 17:57   좋아요 0 | URL
내가 공부할 몫을 누군가 줄여 주는 일이
그렇게까지 고마울 일이 없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도움이 될 일은 없지만,
어차피 우리 삶을 스스로 제대로 느끼자면
스스로 하나하나 겪어야 해요.

냄비를 태워 본 적이 없다면
탄맛이 무언지 제대로 알 길이 없을 테고,
김치를 손수 담근 적이 없다면
고춧가루가 눈에 들어갈 적에 얼마나 쓰린지 알 길이 없어요.

설거지조차 도와주지 않으면서
남녀평등 이론만 신나게 외친다 한들,
설거지가 무엇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숱한 집안일과 밥하기를 하나도
참답게 깨닫지 못하겠지요.

몸소 겪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아요.
이것저것 걸러서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양철나무꾼 2014-01-08 16:18   좋아요 0 | URL
전 결혼할때까지 청소, 설거지는 고사하고 속옷조차 안 빨아봤어요.
할머니랑 고모들 밑에서 자랐는데,
늘상 하시는 말씀이 제가 부잣집 맏며느리 상이어서,
시집가서 사람두고 살면 손하나 까딱 안해도 된다, 가 그 이유였습니다.

전 제가 좋아서 부잣집은 아니고 맏며느리가 됐을 뿐이고,
남편은 같은 반찬이 두번 상에 올라도 안 먹는 귀한 입이더라는~--;

암튼 그래도 둘이 죽고못살아 결혼해서 지지고볶고 살다보니,
그런대로 살게 되더군요, ㅋ~.



북극곰 2013-12-31 10:17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미 많이 지어놓으셨으니. ^^
새해 인사 꼭 하고 싶어서, 짧은 댓글만 남깁니다.

양철나무꾼 2014-01-08 16:20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은 반달곰은 아니시니, 동면 모드는 아니실거고~.
아무래도 경황없고 바쁘기만 했던 1학년 학부모로서의 한해가 이렇게 지나가셨네요?
어때세요?
저는 돌이켜보니 왕 대견하고 대왕 뿌듯했었는데...ㅋ~.
 

 

요즘은 우스개 소리로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맹난자의 ''주역에게 길을 묻다'에서는 한날 한시에 태어나더라도 각기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살다보면 쌍둥이다 싶을 정도로 취향이나 사소한 습관, 심지어 영혼의 찝찌름한 냄새까지 똑같은 이를 만나게 될때가 있다.

우연히 일어날 경우의 수가 늘어나면 필연이 되고,

그걸 우린 절대적인 운명이니,

"사랑이 동시에 시작되긴 어렵겠죠?"

따위의 미사여구로 얘기한다.

 

 

 

 

  

 

 

 

 

 

 

사람들은 날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성격으로 알고 있지만, 본래의 성격이 아니고 만들어진 성격이다.

일찌기 할머니랑 고모들 손에서 큰것도 그렇고,

난 그걸 일종의 부모로부터의 배신이라고 생각했었고,

그걸 시작으로 나름 참 많은 배신을 당했었고,

그리하여 아무도 안 믿었고,

어느 누구를 향하여서도 마음 한켠을 내어주는 일 따윈 없었다.

누군가를 내 안에 들이지 않는다는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나 또한 그 안에 머무를 수 없음에 다름 아니었다.

 

때문에,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불을 피우면 따뜻해진다는 말은 시집에나 등장하는 멋들어진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사랑을 하면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보인다는 말 또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핑크빛의 따뜻한 정도와 가슴을 간질이는 분홍분홍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나랑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같은 감성을 지닌 사람을 만나게 되자 두려워졌다.

세상이 어쩌면 불이 피워도 더 이상 따뜻해지지 않을까봐,

사랑 따윈 할 수 없고 그리하여 핑크빛 대신 온통 잿빛 우울함으로 무장을 하고 다녀야 하는게 아닐까 두려워졌다.

동진이는 지독하게 감성적인 녀석이었다.

뭐라고 따뜻한 말이라도 건네야 하는데 나는 그런 걸 못한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크게 취했다.(2권 44~45쪽)

보통 감성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얘기하지만,

지독하게 감성적이어서, 나처럼 머리를 옵션으로 들고다니냐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감성'만으로 똘똘 뭉쳐 있을 수는 없다.

이성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것이다.

통계도 마찬가지이다.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 변수를 어떻게 잡느냐, 조건을 어떻게 걸어주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자리에 사람을 대입시켜도 마찬가지다.

어떤 관계에 있어서는 소주 한병을 말없이 같이 마시는게 따뜻한 말로 위로를 건네는 그것과 다름 아니다.

 

또 어떤 관계에 있어서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말없이 그저 지켜보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대상이 마녀여도 상관이 없다.

지켜보는 그를 혹자들은 스토커라고 할 수도 있다.

삶이란, 예로부터 기준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이를테면 나로 비롯함이냐, 나로 말미암음이냐에 따라, 결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주역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우리는 흔히 역易을 '변화'로 얘기한다.

욕심과 본심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인간의 그것도 '변화'가 될 수 있다.

변화가 멈추는 어느 순간,

귀가 트이는 순간,

물리가 트여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그 순간, 을

성불했다고 하기도 하고,

득도했다고 하고,

또는 도통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역은 64괘로 끝이 아니고, 다시 건위천으로 돌아가니 다시 시작이다.

영원한 도돌이.

이 얘기는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된다는' 프랙탈'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인간의 윤회도 어찌보면 이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런의미에서 '맹난자'의 '주역에게 길을 묻다'는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다.

동서양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주역'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을 되짚어내고 있는데,

내가 주역을 해독할 깜냥은 되지 않는 고로, 이 책의 해석에 대해서 할 말은 없고,

다만 주역 해설서라는 인문학 서적으로 봤을때 뿐만 아니라, 여행기나 수필집이라고 하는 문학 서적으로 봤을때도 완성도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 공자의 아버지 61세에, 어머니 17세 였다는 말로 가볍고 재밌게 시작한다.

요즘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세기의 로맨스라고 해도 기가 찰 나이 차이를 자세한 설명없이 훑고 지나간다.

그러면서, 구렁이 담을 넘듯 타임머신을 타고 공간과 시간 이동을 하여,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도 공자를 존경하여 자기집 서재에 공자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조석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다소 황당한 얘기를 의뭉스럽게 펼쳐 놓는다.

유럽의 한 쪽 끝에서 동아시아의 한쪽 끝에 있는 나라의 공자를 존경한 이유로,

신비함이나 기적을 말한 바 없이 인간을 교화한 공자의 인간성에 감격하여서, 라고 하며 공자의 초상화 앞에 이런 시를 적어놨었다고 한다.

"공자는 유익한 도리만을 해설한다. 그는 사람들을 미혹함 없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젖힌다. 공자는 성인으로 도를 말했지, 결코 예언자로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믿었다."(38쪽)

 

 

그러면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에서 노자의 도덕경으로 또 슬쩍 넘어간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개념이 등장하는데,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예지는 인간의 분별지에 의한 작위이기 때문에,

도에서 가장 멀어진 상태를 예禮로 보았다.(45쪽)

 

 

역학은 귀신에게 사람의 운명을 묻는 점술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밝히고 자신을 성찰하는 학문의 하나'라는 것과,

한날 한시에 태어나더라도 각기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조상이 어떤 분이며 조상의 영혼과 DNA, 그리고 그분의 정신과 가정교육이 후손의 운명에 절대적인 운명을 미친다는 것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이쪽의 책을 보면서 제일 불만인 내용이 이제부터 등장하는 운명을 감정할때는 '환ㆍ혼ㆍ동ㆍ각(環魂動覺)을 참조해야 한다는 부분이 있다.

환(環)이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우리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 

혼(魂)은 자신의 운명은 반드시 조상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동(動)은 사람의 운명은 태어난 시대에 따른다는 것이며,

각(覺)이란 인간의 깨달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조상을 섬기는 유교적 국가여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자신의 운명이, 내가 어떻게 선택할 수 없는 조상에게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운명일 따름이지, 자식에게 되물림되지 않는다고 했던것 같은데,

또 그렇게되면 부모나 스승 등, 웃어른과 조상을 섬기고 연연하는 걸 뭘로 설명을 해야 할까 싶기도 하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자신이 벌을 받되, 자식에게 되물림 되지는 말아야 한다.

한날 한시에 태어나더라도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조상의 영향, 다시 말해 유전적인 요인으로 볼게 아니라,

배움이라는 정신적 교감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넘나듦이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어렵기는 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이 필요하리라.

 

나의 이런 마음을 눈치 챘는지,본문의 내용은 못미쳤지만

 저자는 챕터의 큰 제목은 '지극한 성실은 신명과 통한다'라고 뽑아냈다.

 

만화 '마녀'에서는 처음에 남자주인공의 캐릭터를 '도박사'로 하려다가 나중에 '통계사(데이터 마이너)'로 바꿨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박사와 통계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도박사는 확률 따위는 상관없이 일확천금을 꿈꾼다는 것이고,

통계사는 확률에 의지하여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 변수를 어떻게 잡느냐, 조건을 어떻게 걸어주느냐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를 에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난 전생을 믿지도, 윤회를 믿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운명이라는 것이 내가 조상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떠한 삶을 살아가느냐, 가 신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을 하면...

앞으로 성실하게 살고는 싶어질 것 같다.

 

암튼, 다음 세상을 또 살게 될지 어떨지...는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는 거고,

오늘 하루를 나름 재미나고 신 나게 살고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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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12-24 16:39   좋아요 0 | URL
마녀가 단행본 4권이나 되는 분량이군요.
저는 웹툰으로 봐서 분량이 많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마녀와 주역이라니!
역시 양철님의 내공은 대단하네요!
감탄 또 감탄합니다!

양철나무꾼 2013-12-30 09:27   좋아요 0 | URL
마녀가 네권이나 되더군요, 히힛~^^
전 칭구가 하도 좋다고 설레발을 쳐서 봤는데,
그냥 그랬다는~--;
아무래도 마녀 따위를 믿지 않는, 메마른 감성 때문이겠지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