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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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들은 이야기의 전개방식이나 줄거리가 기발해서 흥미로운 반면,

어떤 소설들은 어떻게 펼쳐질지 알겠는데 담긴 내용이나 철학이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후자다.

내용이야 피아노 콩쿨에 대한 것이고,

그런 콩쿨이 3차의 예선을 거쳐, 본선에 이르기까지의 일정을 그린 것이니 다소 밋밋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다소 밋밋한 일정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을 받는다.

 

이런 소설이 재밌기 위한 장치인,

콩쿨에서 흔히 나타나는 질투와 모함도 없고,

그렇다고 연주자들 사이에 특별한 러브라인이 형성되어 분홍분홍한 것도 없지만 말이다.

 

책을 사들이고 푹 빠져 읽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책만이 주는 묘한 설레임이 있다.

실은 언제부턴가 책을 사들여도 흥분되지 않아고,

재밌는 책을 읽어도 흥미롭지 않았었다.

그냥 잠자고 밥먹고 숨 쉬는 것 마냥,

책 읽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을, 마땅히 할만한 다른 일을 찾지 못하여 책을 읽는 나날이었다.

 

이 책도 처음엔 그럴줄 알았다.

하나의 콩쿨을 쭈욱 따라가는 단순한 구성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세를 고쳐앉았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웠고,

20여장을 남겨두고 퇴근을 할 수가 없어서 두꺼운 책을 들고 퇴근했다.

 

아, 좋은데,

너무 좋으니까 뭐라고 좋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책을 향하여선 늘 할 말이 많았던 나였기에,

나로서도 이런 내가 낯설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알라디너가 한명 있는데,

(옛날 닉네임이 이 책과 더 잘 어울리지만, 바뀐 닉네임도 나쁘진 않다.)

그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암튼,

여러명의 콩쿨 참가자가 등장하지만,

주요 등장인물은 네명 정도로 압축할 수가 있을텐데,

네 명의 등장인물들이 제각각의 사연으로 캐릭터를 구축하고,

그래서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이 소설은 피아노 콩쿨이니까 음악을 빗대어 얘기하고 있지만,

그 음악의 자리에 문학이나 글쓰기, 책읽기, 인간 삶이나 관계를 넣어도,

얘기는 성립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카시의 소리는, 달랐다. 똑같은 피아노인데 방금 전 연주자와는 전혀 달랐다.

명쾌하고, 온화하고, 촉촉하다. 생동감이 넘치는 표정이 있다.

역시 음악은 곧 인간성을 나타낸다. 이 소리에는 내가 아는 아카시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카시라는 사람의 커다란 포용력이 소리에, 울림에 깃들어 있다. 무대 위 아카시 주변으로 광활한 풍경이 보였다.(164쪽)

그러니 음악만이 인간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악으로, 어떤 사람은 그림으로, 또 어떤 사람은 글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드러낸다.

 

언젠가 '문제적 남자'던가?

그런 텔레비전 프로를 보게 됐는데,

천재 소년, 소녀가 나왔었다.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풀이를 설명할 일이 있었는데,

머리가 너무 핑핑 돌아가니까,

말도 같이 빨리 하는데,

하도 빨라 더듬더듬 뭐라고 하는데,

말이 머리를 못 따라간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ㅋ~.

 

소년이 피아노를 연주한다기보다 피아노가 소년을 연주로 이끄는 것 같았다. 그가 피아노를 부르면 피아노가 기꺼기 그에게 화답하는듯한.(220쪽)

이 부분은 문장의 호응 관계가 좀 이상하다.

피아노가 소년을 연주로 이끄는 것이라면,

피아노가 부르면 소년이 기꺼이 화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소년이 피아노를 부르면 피아노가 화답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앞의 문장과는 호응이 안 맞는다~--;

 

어린 가자마 진의 목소리를 빌어 이런 깨달음을 표현한 게 좀 불만이었다.

 진은 그런 타입을 잘 알고 있었다. 농가나 원예가,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 특히 식물을 상대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강한 인내심이다. 자연계를 상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노력해도 어찌 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은 반면, 매일 손을 움직여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다. 기약없는 일에 끝없이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들은 일종의 체념을 익히고, 자기만의 독특한 운명론을 갖게 된다.(373쪽)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원리를 깨닫기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닐까.

음악적으로 이끌어가는 선도자적 캐릭터라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아무런 시련도 없이 탄탄대로를 걷는건가 싶어서 완전 부러웠고 소심하게 딴지를 걸어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듯,

가자미 진처럼 '순수하고 이질적인 천재'는 말하자면 '알기 쉬운' 천재다. 하지만 마사루는 똑같은 천재지만 그렇지 않다. 지난 며칠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 마사루는 무척 균형 잡힌 인격자였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보통' 사람의 감각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꼭 음악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분명 뛰어난 인물이 되겠구나 싶은 전방위적인 깊이가 있다.(632쪽)

 천재를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

 

콩쿨이 끝나면 소설도 끝이 난다.

좀 밍숭맹숭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소설을, 아니 책을,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읽은게 되게 오래간만인 것 같다.

이 가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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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9-21 15:10   좋아요 0 | URL
요즘 헤르만헤세 전작읽기 중인데요.
이 포스팅의 제목을 보니 <싯다르타>를 읽고난 후의 느낌을 대변하는 문장이라 반가웠습니다.

<꿀벌과천둥> 꼭 기억할께요^^

양철나무꾼 2017-09-21 15:49   좋아요 1 | URL
‘싯다르타‘를 전 고딩땐가 권장도서로 읽었었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쩌자고 그렇게 꾸역꾸역 읽은 것인지, 원~--;
지금쯤은 님처럼 헤르만헤세 전작 읽기에 도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꿀벌과 천둥‘ 웬만하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ㅅ!^^

서니데이 2017-09-21 17:24   좋아요 1 | URL
온다리쿠는 미스터리도 잘 쓰겠지만, 오디션, 콩쿠르 같은 소재가 등장하는 글도 잘 쓰는 것 같아요.
양철나무꾼님,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7-09-22 10:23   좋아요 1 | URL
제가 일본 소설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서 온다 리쿠를 몇 권 읽었어도 기억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예상 외로 좋았어요.
님도 함 읽어보세요.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부는 것이 책 읽기 딱 좋아요~^^

icaru 2017-09-21 21:24   좋아요 0 | URL
좋은데, 너무 좋으니까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는 그 마음,, 너무나 잘 알겠습니다! 하하!!

양철나무꾼 2017-09-22 10:26   좋아요 0 | URL
왜 그런 경우 있잖아요.
감동이 머릿속에 물 밀듯 밀려오는데,
모든 말이 중언부언 쓸데없는 느낌.
icaru님이 잘 알았다고 동조해 주셔서 더 좋아요~^^
헤헤~^_____^

세실 2017-09-21 22:18   좋아요 1 | URL
이 가을 지인이라~~~
저두 기꺼이 추천 받을게요.
그렇게 재미있다는 말이지요^^

양철나무꾼 2017-09-22 10:28   좋아요 0 | URL
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AgalmA 2017-09-21 23:29   좋아요 1 | URL
까달스러운(칭찬의 의미ㅎ) 양철나무꾼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안 읽을 수가.... 음악 얘기라 관심은 갔는데 너무 뻔할 거 같아서...그런데도 좋다고 하시니...흐음.

양철나무꾼 2017-09-22 10:32   좋아요 0 | URL
줄거리는 뻔해요, 근데 내용이나 그 속에 담긴 철학은 안 뻔해요~^^
제가 좋아하는 소설 목록에 ‘신들의 봉우리‘랑 ‘심장 박동을 듣는 기술‘ 따위가 있거든요.
그것들 다음으로 좋았습니다.
‘신들의 봉우리‘보다 웃질로 치는 소설은 ‘유령이 쓴 책‘ 정도?
암튼 저의 완소 목록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게다가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AgalmA님 같으신 경우엔 공감할 부분이 많으실듯~^^

비연 2017-09-22 08:43   좋아요 2 | URL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 싶어요. 양철나무꾼님의 리뷰까지 읽으니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는..
아 책 그만 사야 하는데 말이죠... 으으으으으.

clavis 2017-09-22 08:46   좋아요 0 | URL
아...저두요ㅠ

양철나무꾼 2017-09-22 10:34   좋아요 1 | URL
비연님, 그간 비연 님의 리뷰 목록으로 미루어 충분히 좋아하실 만해요~^^

Clavis님, 님의 음악 코드를 제가 몇번 엿봤는데 말이죠~,
폭풍공감 할 수 있으실듯~^^
강력 추천 합니다~^^

2017-09-22 16: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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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5 1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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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5 1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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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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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5: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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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7: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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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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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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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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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7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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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8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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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2 17: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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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8 19: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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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1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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