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
고은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 속날개에 적힌 고은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고 은

高 銀

 

시인생활 58년.

시집 여럿.

 

 

이런 간결한 문장에 마침표가 필요할까 싶은데, 온점(.)이 마침표로 들어가 앉았다.

당신의 프로필을 단 두줄로 정리해 놓을 수 있다니 참 멋지다.

단 두줄이지만 중량감은 엄청나다.

 

아무리 떨어내고 비워버리고 극도로 응축시킨다 한들 내 삶은 아직 두줄로는 어림도 없지만,

또 알겠는가, 그리다보면 닮아 있을지.

 

내 조상

 

한낱 입자도 파동일진대

나의 명사는

동사의 쓰레기

나는 그리운 동사에게 가야 한다

 

나는 파동

 

나의 자동사는

먼 타동사의 쓰레기

나는 그리운 그리운

선사(先史) 타동사로 가야 한다

 

오늘밤 미래가 미래뿐이라면 그것을 거부한다

나는 입자이자 파동

 

이시를 읽다가 언젠가 고은 시인이하셨던 말씀이 기억났다.

 

 

시 한편을 가지고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시 자체로 운명을 개척하기도 한다.

시는 나의 내부에서도 오지만, 우주의 저끝에서 달려오기도 한다.

시를 쓰기위해서 깨는게 아니라, 시심 자체가 잠을 깨우게도 한다.

당신의 시들은 때론 정치적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는 범 우주적인 시들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만약 시가 우주 저끝에서부터 나에게로 달려오는 상황이란게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진다.

 

고은 시인의 시를 이러쿵 저러쿵 할 깜냥은 아니기 때문에 귀하게 아껴 읽었고,

읽다가 뒷표지에서 문득 김사인을 만나다니 반가웠다.

한생을 치르는 필사의 형식으로서 시는 과연 그럴 만한 것인가.

이제 어디에 기대지 않는다. 무엇을 목표하지도 않는다. 작위도 무위도 여의고, 쥘 것도 놓을 것도 그친 자리에서 그는 다만 '시간도 공간도 없이 단도직입'(「소원」)의 꿈을 추어갈 따름.

 

아무렴, 시집 뒷쪽에 자리한 '시인의 말'을 옮겨보는 것으로 느낌을 대신하여야 겠다.

 

이것은 『무제시편』이후

내 마음의 소요(騷搖) 가운데에서 생겨났다.

 

지난날로 충분하다는 감회는 어이없다.

이백여년 전의 사나이가 시시한 듯이

노래한 적이 있다.

발로 글을 쓴다고.

그래서인가 나도 가끔은 들판, 가끔은 종이 위를 돌아다니고는 했다.

내 손도 이제 허랑한 구름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시에서 떼어놓지 못한 나와

시에서 떠난 지 오래여서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어쩌다가 만나는 날에

이 세상의 (無事奔走)를 놓을 것이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다. 그토록 숨찰 것도 없지 않은가.

 

시인의 나이에 이르면 괴발개발 발로 시를 써도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나 보다.

 

아무려면 시인은 온우주를 아우르는, 파동이면서 입자인 그런 공감각적인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10-27 15:40   좋아요 1 | URL
고은 시인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발표가 다가오는 시기만 되면 고생을 많이 합니다. ^^;;

양철나무꾼 2016-10-27 15:44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노벨문학상 발표시기만 되면 고은 시인 자택앞에서 취재진이 장사진을 이뤘었다죠.
지금은 좀 덜 하다고 하지만서도~--;

정작 시인은 그런 것에서 자유로우신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6-10-27 15:50   좋아요 1 | URL
고은 시인의 어느 인터뷰를 봤는데 신신 당부를 하더군요. 제발 노벨상 으로 자신을 엮지말아 주십사 부탁하던 말씀이 더 올라요..그만한 연륜의 시인이 뭐가 더 아쉬워서 미련가지겠습니까..그정도의 시심의 발로라면 다 내려놨을텐데 말이죠..

2016-10-28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10-28 03:55   좋아요 1 | URL
#문단_내_성폭력에 고은 시인도 예외 없이.... 요즘 참 뉴스보기 겁납니다. 가치 전도의 연속.
여러 루트를 통해 많은 한국 문단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작품과 시인, 예술가, 비평가 비롯 예술인들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려고 노력해 왔었죠. 이젠 임계점을 넘은 거 같아요. 나라 곳곳이 쓰레기 하치장 같은. 해외 작가도 우리가 세세히 모를 뿐이지 수두룩.
이 글에 이런 댓글 달아서 죄송ㅜㅜ.

양철나무꾼 2016-10-28 11:17   좋아요 1 | URL
`#문단_내_성폭력에 고은 시인도 예외 없이`<==저 이 말뜻 해석 못 했어요~--;

그리고 님, 지난번에도 `먼댓글 썼는데요. 혼내기 없기요`라고 하시더니, 요번에도 `이런 댓글 달아서 죄송`이라고 하시는데...
너무 조심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제가 agalma님을 잡아먹기야 하겠습니까?
저 쉬운 녀자랍니다, 편하게 막 대해주세요, ㅋㅋㅋ~.

AgalmA 2016-10-29 02:21   좋아요 1 | URL
트위터에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로 관련 글들이 계속 쏟아지는데, 고은 시인도 거기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양철나무꾼님 글에 제 글이 딴지를 거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마음이 좀 불편해서 표현이 그리 된 것;
친하다고 막 하는 거 싫어요ㅎ; 거리감이 좀 느껴질 수 있지만 아끼는 사람이라면 표현 속에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농담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ㅎ;;

양철나무꾼 2016-10-29 09:44   좋아요 3 | URL
어~, 혹시나 했는데 그렇군요.
저랑 아주 친한 풀판사 사장님이 서정주 시인, 법정스님, 고은시인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라서 전혀 연결 시켜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님의 얘길 들으니 맥락은 이해되는데,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젠 님이 `이런 댓글 달아서 죄송`하신 의미가 이해가 가는 군요.

님, 제가 편하게 막 대하라고 한 것은...
제가 님한테 그러라고 한들 막 그러하시지 않을 인물 됨됨을 알고 있다는 전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님이 어떤 댓글을 단다고 하여, 막 딴지를 거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으니까,
어떤 댓글이든 먼 댓글로든 님의 뜻을 펼쳐도 좋다는 말씀이기도 하구요.

님의 글이 딴지를 거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지만,
그렇다 생각하셔서 마음이 좀 불편하시다 한들,
그렇다고 거리감을 가지고 대한다 한들...
이때의 거리는 실제적인 거리도 아니고 심정적인 것일 뿐인데,
님의 불편한 마음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입장을 바꾸어,
그렇다면 저는 매번 님의 공들인 진지한 페이퍼에 감히 범접할 수 없어,
가벼운 댓글이나 남기곤 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님이 저를 가볍게 생각하시진 않으실것 아닙니까?

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님의 아끼는 사람으로 남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아 눈물흘리고 넘어졌을때,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눈물 닦아줄 수 있는 쉬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