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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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난 나름대로의 결여와 결핍을 가지고 있고, 그건 때때로 탐욕과 허영으로 표출된다.

 

소싯적 지방 대학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한 시간 강의를 하고 나면,

내 안에서 나를 이루는 것들이 빠져나가고 쭉정이만 남은 듯 허허로워져서,

아무 책이나 펼쳐들고 들이파는 것으로 충족시키려 하였다.

('백조의 비애'<==페이퍼 링크)

강의를 한 학기만에 접은 걸 보면 명약관화하지만, 난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깜냥이 아니었던 셈이다.

 

왠지 '스토아 학파'를 연상시키는 것이 학구적인 냄새가 폴폴 풍기는 이 책 '스토너'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라는 팟 캐스트 방송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읽는 내내 소싯적의 내가 떠올라 아프게 읽었으면서도, 감정 이입을 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작가가 주인공 스토너를 애정한 나머지, 너무 깊게 개입하고 관여 했기 때문이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회자되는건, 이동진의 '빨간 책방'의 성은이지 싶기도 하다.

 

학문에 대한 열정을 두드러지게 하고 싶어서 였겠지만,

스토너의 지난한 삶을 일부분 부모에게, 많은 부분 아내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게 객관적이라기보단 스토너의 개인적인 입장처럼 비춰졌고, 때문에 읽는 내내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관계란 상호적인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한참 전이라고 해도,

아내가 예민하다 못해 히스테릭하게 된 것은 일정 부분 스토너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긴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자기 합리화 시키는 경향이 있고,

나도 그런 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야박하게 툴툴거린다.

 

암튼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겹쳐져서 썩 맘에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워할 수는 없었던 것은,

고지식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인물은 아니었고,

말을 아끼고 표현에 인색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여전히 안락의자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짧게 미소를 지은 뒤 이디스의 작업대로 가서 등받이가 곧은 의자를 가져와 그레이스의 의자 앞에 놓았다.

위를 향해 치켜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338쪽)

 

두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스토너는 그레이스가 직접 말했던처럼 절망을 거의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해가 갈수록 술을 조금씩 더 마셔서 공허해진 자신의 삶에 맞서 스스로를 무감각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살아갈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적어도 그런 생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351쪽)

 

암튼 나의 결여와 결핍을 책을 통하여 보상 받으려 했었다.

그게 과해 탐욕과 허영으로 표풀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

 

친구들이 유머러스한 사람이나 쿨한 사람, 내지는 나쁜 남자 따위가 좋다고 할때,

난 배울 게 있는 사람,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는 사람이 좋았었다.

 

그 '배울 것'이란걸 학문에 있어서의 지식이나 진리 정도로 축소시켜 생각했었고,

체화하여 자기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할 경우 어설프다고 여기기는 커녕,

책을 꾸준히 많이 읽기만 한다면, 부족한 부분을 쉽게 찾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융통성 없음을 학문이나 진리를 향해 올곧음이라고 착각하고 매력적이라며 껌벅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제...나이를 한살 한살 먹으면서 느끼는 것은,

책을 많이 읽어 간접 경험을 했을지라도,

체화하여 삶에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어설프게 쌓아올린 사상누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의 지식도, 진리도, 책 속에 있는 것은 맞지만,

읽고 적용시키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체화하고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그저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살아있는 생물이어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튈지 알 수 없다.

책 속에 답이 있다고 하여, 책 속에 있는 그대로 전개되고 되풀이 되지는 않는다.

 

스토너는 그런 깨달음의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252쪽)

 

마음만 먹으면 몸에서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묘하게 친숙한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하는 묘하게 친숙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254쪽)

 

생소하게 다가왔던 부분도 있는데,

그해 여름에 두 사람이 배운, 이른바 '기존 관념'의 기이한 점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체험이 먼저 찾아왔으므로, 이 새로운 발견이 오로지 두 사람만의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이처럼 '기존 관념'이 기이하게 달라진 사례들을 모아 보물처럼 간직해두기 시작했다. (280쪽)

라고 하는 부분이었다.

나 또한,

하나를 얻기 위해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만 여겼었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하고 보완시켜 주는 것으로 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이 부분을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찾아온 체험'이라며 근사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되었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주는 게 되었건 간에,

따로 떼어내고 분리할 수 있을때 성립되는 얘기이지,

몸과 마음처럼,

아니 몸과 마음과 정신처럼 경계를 나눌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에선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이다.

 

스토너의 경우,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처 슬론 교수와의 만남 또한 그렇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아처 슬론 교수를 닮고 싶어 한다.

아니, 은연 중에 닮아 간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고 생각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학창시절 아처 슬론 교수의 질문을 죽음의 순간까지 기억하는 것도 그렇다.

이 부분의 '기대'는 '갈구'정도로 바꿔주는게 어떨까 싶다.

비슷한 의미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저 바라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바라고 행동으로 옮기고 꾸준히 구했으니 말이다.

 

읽으면서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려는걸 참았는데, 결국 끝부분에 가서 폭풍오열하고 말았다.

그의 삶이 불행했을까, 행복했을까?

자신이 갈구하고 원하던 대로 살았으니, 그만 하면 된게 아닐까?

누구나 조금쯤은 외롭고 때때론 쓸쓸한 삶을 살게 마련이니 말이다.

 

또한 난 스토너의 이런 삶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겐 관조적으로 읽히기도 하나 보다.

 

지극히 지루하고 고루한 그래서 심심하기도 한 이 책이 이렇게 아름답게 읽힐 수도 있는 것은,

그의 여정이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두움 속에서 진리라는 한 줄기 빛이기도 하고 별이기도 한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이어서가 아닐까?

 

"학자에게 평생 구축하고자 했던 것을 파괴하라고 해서는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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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8-05 15:44   좋아요 1 | URL
양찰나무꾼님 오늘도 너무 더워요.
더위조심하시고, 시원한 금요일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6-08-06 11:06   좋아요 2 | URL
오늘도 엄청 더울 것 같아요.
더울려면 화끈하게 더웠으면 좋겠어요.
그게 여름의 매력이니까 말예요, ㅋ~.
(말은 이렇게 하지만, 벌써 삐질삐질 땀 흘리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