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들의 몰락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4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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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에선가 일본의 안보법안과 관련, '평화주의를 버리고 항시 전쟁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다.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한번도 평화주의를 수호한적이 없지 않나, 항상 전쟁을 도발한 호전적인 나라가 아니었나 싶다.

 

항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뿐,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띠지에 '20세기 3부작, 그 웅장한 시작'이라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고,

제목도 '거인들의 몰락'이라고 해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재밌는걸 보면,

역시 켄폴릿은 거장이다.

 

내가 켄폴릿을 좋아하는 것은 내용이 재밌기만 해서는 아니다.

관점이나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가고,

다방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이 좀 많아서 좀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라는걸 알게 되면 그 웅장함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책은 웨일스 탄광촌에 사는 빌리가 열세살이 되자 아버지처럼 탄광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어느날 안전사고를 겪게 되고,

그 사고 수습의 선봉에 서게 된다.

1권의 비교적 앞부분에 빌리가 많은 사람 앞에서 처음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척 감동적이다.

탄광에서 안전 사고를 직접 겪고, 그 사고 수습의 선봉에 섰던 빌리에게는, 

아버지가 예배에서 호흡보조장치와 양방향 환기장치에 대한 법률을 어긴 탄광 경영진의 부정을 용서할 수 있도록 넓은 아량을 달라고 기도하는걸 보고, 그저 치유를 구하기만 하는 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듣기 좋은 말과 성경 구절을 들먹이며 마치 설교라도 하는 양 기도를 올리지만,

그는 늘 진심에서 우러난 단순한 기도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며 예배가 끝날 무렵 마음속에서 말과 문장을 구체화 (118쪽)하여 사람들에게 전하는 식으로 기도하게 된다.

이게 계기가 되어, 빌리는 아버지와 언쟁을 벌이게 되나 보다.

 "더 굳센 신앙심을 달라고 기도하는 편이 좋았을 거다. 그럼 머리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믿게 되니까."(122쪽)

머리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믿게 되는 굳센 신앙심이란,

맹목적이란 말과 바꾸어 쓸 수 있겠고,

절대적인 위안과도 바꾸어 쓸 수 있겠으나,

열세살난 아들에게 강요하기엔 좀 가혹하지 않나 싶다.

"사람에게는 감정이란 게 있어요, 아버지." 거침없는 말투였다. "아버지는 항상 그걸 깜박 잊으시죠."

아버지는 할말을 잃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그만해!"

에설은 빌리를 보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옜지만 빌리는 놀라고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에설은 용기를 얻었다. 코를 훌쩍이고 눈가를 손등으로 훔친 다음 말했다. "아버지와 노조, 안전 수칙, 성경 말씀 모두 중요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사람들 감정까지 없앨 순 없어요. 저도 언젠가 사회주의 덕분에 노동자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필요해요."(124쪽)

빌리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빌리의 누나 에설의 성격을 한번에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다.

 

굳센 신앙심, 맹목적, 절대적인 위안은 동의어로,

이건 책이나 글을 읽으면서 때때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책이나 글을 읽다보면 어려운 말로 적어놔 폼나기는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 먹을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삶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미사여구를 쓰거나 책 속의 구절을 인용했을 경우,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폼나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말로 풀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늘어지게 마련이다.

어느 경우 더 쉽게 이해될 수 있고, 그리하여 더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단정짓지는 어렵다.

그러니까, 머리와 마음의 관계 또한 그렇게 유연하게 접근하고 이해되어야 하겠다.

빌리는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여자들이 탄광에서 남편을 잃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남편도 없는데 집까지 없는 신세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회사가 이럴 수 있어요, 아버지?" 누추한 잿빛 거리를 따라 탄광 쪽으로 향하며 빌리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래도 된다고 용인할 때만. 노동자는 지배계급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힘이 있어. 지배계급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기대고 있지.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집을 짓고 옷을 만드는 건 우리야. 우리가 없으면 그들은 죽어버릴걸. 우리의 용인 없이 지배계급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항상 그걸 명심해라."ㆍㆍㆍㆍㆍㆍ"하지만 그래서 폭발이 일어나거나 광부들이 죽은 건 아니지." "폭발이 일어나고 광부들이 죽은 게 위반사항 때문이라고 입증하지 못했을 뿐이죠."(176~177쪽)

또 한군데, 빌리의 아버지가 도덕 교과서적으로 사는 것 같아 안타까웠던 부분이다.

노동자가 지배계급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서 힘이 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책을 읽다보면 경과와 결과가 나오지만 스포일러가 될까봐 생략하겠다.

 

"한 달 전 자살 기도를 했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정말이니까. 스스로가 너무 하찮게 느껴지면서 내가 죽는다 한들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죠. 그때 당신이 현관에 나타났어요. 당신은 정말 다정하고 정중하고 사려 깊었죠. 내게 사는 게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어요. 당신은 나를 소중히 여겨주었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캐롤라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키스했을 때 당신은 행복해했어요.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니, 나도 아주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 생각 덕분에 계속 살아갈 힘을 얻었어요.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렸어요, 거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빌어요."

거스는 거의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 나한테는 뭐가 남죠?"

"추억이죠. 남은 추억을 소중히 간직해줬으면 해요. 나도 그럴 테니."(221~222쪽)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어쩜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면으로는,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확인'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나를 가치있게 생각하고, 나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리하여 내가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면,

사람은, 특히 여자는 그 추억만을 간직하면서도 남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아직 1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내가 이렇게 리뷰를 쓰는 까닭은 켄폴릿을 믿기 때문이라는 게 하나이고,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제목이 암시하는 '거인들의 몰락'에 우리나라의 요즘 현실이 겹쳐져서 앞날을 예견하겠어서...씁쓸해서라고 해야겠다.

(거인들도 고모양 고꼴로 몰락하니, 예비를 하라고 까진 못하겠다~--;)

 

평상시 책을 만드느라고 베어넘겨진 나무를 생각해서 별점에 과한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엄지손가락이 두개뿐인게 못내 아쉬워서,

엄지발가락까지 꼬물거리게 만든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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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9-21 17:40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보는 이름의 작가인데 양철나무꾼님 리뷰를 읽다보니 마구마구 관심이 생기네요~~
제 기도도 듣기에만 그럴듯하건 아닌지 반성도 하게 되구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5-10-05 16:23   좋아요 0 | URL
켄폴릿은 저도 우연히 알게 된 작가인데, 정말 좋아요.
누구든지 붙잡고 막 추천하고 싶어진달까요~^^

cyrus 2015-09-23 03:35   좋아요 0 | URL
소설 속 배경이 웨일스라고 하기에 아버지의 모습이 영국탄광노동조합원의 성격과 비슷한 것 같아요. 탄광노동조합이 마거릿 대처 정권에 맞서서 파업투쟁을 벌인 적이 있을 정도로 과거에 노동에 대한 자부심이 컸었어요.

양철나무꾼 2015-10-05 16:2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 책 속에선 제 1차 세계대전이 주무대인데,
언제 어디서인지,를 막론하고 앞장서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쩔 수 없이 뒤따르는 무리도 있게 마련인가 봐요.

근데, 이 책 속 아버지는 너무 반듯하고 고지식해서 좀 불편해요~^^

2015-09-26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5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5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