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렉터라는 사람이 있다.

토마스 해리슨이 만들어낸 소설 속의 살인마이다.

살인마는 살인마이고 악인은 악인인데 묘한 것이,

마음 속 한켠에선 나도 모르게 동정하는 마음도 조금 있다는 거다.

소설의 흥행에 힘입어 영화로도 나왔었는데,

난 시각적 영상이 주는 충격에는 약하여 몇날 며칠 날밤을 새는 불상사가 생기는 고로 못 봤었고,

책은 끝까지 다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뜨문뜨문 하지만 두번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암튼, 감옥에 갇혔던 그는 신분을 위조해 탈출에 성공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차치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가 어렸을때부터 엄청 똑똑하고 머리가 좋았다든지, 예술적 소양이 뛰어나다든지 따위가 아니라,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때 제일 힘들어 한것이,

예술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책을 마음껏 읽지 못하는 '억압받는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감옥에 갇혀서도 매너리즘에 물들고,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는 것이고,

그 사실이 내겐 굉장한 충격이었다.

 

매번 다른 제목, 다른 주제의 책을 읽는데도,

메너리즘과 타성에 빠져 책에서 내가 보고싶은 것들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어쩌지 못하는 중에, 기태완 님을 만났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게 되는 꽃과 나무들에게 관심을 갖고 집어서,

씨실과 날실을 엮듯 종횡으로 넘나든다는게 말로는 쉽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지 싶다.

그것도 수십년을 한결같이 마음을 모두어서니까 말이다.

평상시 나는 우리나라의 옛고전을 읽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는데,

기태완 님은 대학시절 '강희안'의 '양화소록'과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읽고 감동하여,

꽃과 나무를 따라 방방곡곡으로 찾아다니고 한게 벌써 수십년 째란다.

표지에 혹해서 시작하게 되는 책이 있다.

진달래 꽃잎 빛깔과 연두 이파리 빛깔을 닮은 표지를 보자마자 반해서,

속 내용은 어떻든지 상관없다는 심사로 달려들었다.

물론 나름의 단점과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꽃과 나무를 중심으로,

고서들을 참고서 삼아 엮다보니 글이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태완 님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또 이렇게 온갖 고서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을까 생각하면,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지 싶다.

처음 '서향화'로 시작하는데, 요즘 말하는 '천리향'이란다.

'서향화'가 '초사'에 실린 '노갑'인지 의문스럽다고 퉁친다.

여러 고서를 살펴본 후에 서향화가 꽃 문화권으로 들어온 것이 송나라 때인것 같다고 하면서,

왕십붕의 '서향화'라는 시를 제시한다.

ㆍㆍㆍㆍㆍㆍ참으로 한가할 때의 좋은 벗이다. 이른바 쉽게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맹랑한 말이다. 아! 대개 사물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만약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빈 산중에서 스스로 피고 스스로 지더라도 끝내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가? 어찌 원망하지 않겠는가? 강의한, 『양화소록』중에서

강희안과 서향화는 참 친한 사이였나 봅니다. 누구나 서향화 같은 벗을 사귀면 행복할 것입니다.(17쪽)

 

그런데, 한가지 의아한 것이,

21쪽의 '김창업은 서향화의 속명이 정향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정향은 서향화와 다른 나무지만 그 꽃과 향기는 비슷합니다. 자정향紫丁香은 라일락을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와 관련하여서이다.

 

언젠가 읽었던 토마스 해리스의 한니발 시리즈(아마 한니발 라이징이었던 것 같다.)에 보면,

거기에 정향이라는게 나오는데, 그때 라일락으로 알아 먹었었다.

그런데, 정황 상 한니발 라이징이라는 책에 사용된 정향은 clove가 아닐까 싶다.

암튼 어디에선 물푸레나무, 어디에선 수수꽃다리 라고 하는데,

도대체 뭐가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또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오얏 이씨입니다."이다.

그렇다면 우리 남편도 자두 나무 아래 노자의 후손이 되는 건가? ㅋㅋㅋ~.

 

여러가지 잘못 알고 있는 이름이 있었고,

파초가 '바나나 나무'란 사실도 고수들이 볼때는 당연하겠지만,

내겐 놀라운 새로움이었다.

 

정향나무라고 해서 한니발 렉터가 떠올랐고,

한니발 렉터 하니까 떠오른 것이,

희대의 살인마, 범죄자, 흉악범이라는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 아니라,

1권 마지막에서 스탈링이랑 송로 버섯과 프랑스 최고급 와인의 만찬을 즐기던 완전 품위있는 모습이었다.

또 한가지 그는 악인이지만, 선량하게 사는 시민, 착한 사람들은 절대 해치지 않았었다.

 

어느 누구는 예술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책을 마음껏 읽지 못하는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가 하면,

어느 누구는 대학시절 '강희안'의 '양화소록'과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읽고 감동하여,

꽃과 나무를 따라 방방곡곡으로 찾아다니고 한게 벌써 수십년째란다.

 

그런가하면,

나는 귀와 눈과 다소 착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들이 볼때 촌스럽고 실력이 형편없더라도,

내 주변의 삶을 반영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예술이 좋다.

예술이라 이름 붙이기 민망하면 그냥 그런대로여도 좋다.

 

산다는 것은 삶의 반영이고 날것일게다.

그리하여 날것일수록 치열하고 생생하듯,

다소 투박하더라도 때로 진심을 반영한다면,

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하고 싶은 얘기는 그러니까,

매너리즘과 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또한 그렇게 지나가기를 바싹 숨죽이고 엎드려 기다려야 하는 때도 있다는 거다.

언젠가는 비가 그치고 날이 갤거니까 말이다.

 

 

 

 

 

 

 

 

 

 

 꽃, 마주치다 (2014년 세종도서 선정)
기태완 지음 / 푸른지식 / 2013년 11월

 

 

 

 바흐 : 골든베르그 변주곡 [LP]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글렌 굴드 (Gle / CBS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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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28 23:12   좋아요 0 | URL
악인에 대한 동정 얘기가 나와서 문득...스탠리 큐브릭 <시계태엽오렌지>가 스쳐갔어요. 예술을 무한히 사랑하지만 악행을 일삼던 알렉스는 감옥에서 비인간적인 계도 실험에 이용되죠.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베토벤을 들으면 구토를 일으키게 되는.... 알렉스에 대한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악행의 칼날을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습니다....

양철나무꾼 2015-07-29 09:01   좋아요 1 | URL
베르나르 베르베르 타나토노트에 보면 사형수들이 임계체험 실험에 이용되잖아요.
그곳이 너무 좋아서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설정, ㅋ~.
아침부터 왜 이렇게 꿀꿀한 애기가 생각나는 것인지...
제 이 짬뽕공 같은 상상력 좀 누가 말려줘요, 플리즈~~~~!!!!

2015-07-29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5-07-29 09:05   좋아요 0 | URL
저는 식물을 좋아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흔히 사람들이 동물은 살아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식물은 소홀히 하는게 싫었달까요.
길들인 것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저의 고약한 강박에 근거하여 말이죠.
근데, 이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좋은 기억을 간작하면 되는거라구요.
그러고 바라보니, 길거리 풀들도 다시 보이지 뭐예요, 히힛~^^
님도 뽀송뽀송한 하루요~^^

세실 2015-07-30 09:45   좋아요 0 | URL
`감옥에 갇혀있을때 제일 힘들어 한것이 예술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책을 마음껏 읽지 못하는 억압받는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호흡을 가다듬어 봅니다. 동지애 내지는 동정심이 생기는 대목입니다.
저도 두 가지를 하지 못하면 가장 힘들듯요^^ 특히 책! ㅎㅎ



양철나무꾼 2015-07-30 22:06   좋아요 0 | URL
실은여, 저는 감옥에는 아니어도 제 자신을 집에 며칠쯤 가둬주었음 할때가 있거든요, ㅋ~.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지내고 싶을 때가 있어서 말예요.
근데 다른 건 다 못해도 괜찮은데, 책은 못보면 좀 힘들것 같더라고요.
알라딘 서재 못들어오는 것 하고요, ㅋ~.

한수철 2015-07-30 20:57   좋아요 1 | URL
저는 요새 무기력증? 한 두 달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증상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고요. 핑계일까요?^^

...어떻게 해야 활달해질 수 있나요? 의욕 하며...

Juni 2015-07-30 21:14   좋아요 0 | URL
20년째 술을 매일 마시고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억압받습니다!! 그냥 결심하세요 ~~ ^^ 그래야 되지않을까요 !! 오늘이 그날입니다 ㅋ

양철나무꾼 2015-07-30 22:17   좋아요 0 | URL
전 그랬어요.
다 잘할려고 하니까 죽겠더라구요.
저도 잘 못 하는게 있는 평균이하의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니까 홀가분하고 편했어요.
무기력증이 한두달이요?
여기 20년을 마신 쭌천사님도 계시다잖아요.
너무 판에 박힌 말 같지만,
바닥을 쳐봐야,
혹독하게 깨지고 넘어져봐야 일어날 수 있을거예요.

그리고 세상, 활달해야만 살 수 있다고 누가 그래요?
활달하지 않아도 주제파악만 제대로되면 사는데 아무지장 없던데요?

쭌천사님, 반갑습니다.
오늘도 그럼, 음주 댓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