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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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집 역시 좋다.

그런데 읽다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깊은 상념에 젖게 된다.

오래된 기억이나 감정을 소환시킬 요량이라면 이 산문집만한 것이 없다.

이름은 산문집이지만, 시와 산문, 어머님의 스케치북 그림까지 있는 것이 종합선물세트 같다.

다른 사람의 시에 해설을 덧대고,

다른 시집으로 묶였던 자신의 시들을 불러온다.

한번 읽었던 시들을 다시 읽는 것이고, 한번 봤던 산문을 다시 보는 것인데도...눈물을 찔끔거린다.

펑펑 울지 않고 찔끔거리는 것은 울다보면 어김없이 낄낄거리는 대목을 만나기 때문이다.

맘 놓고 퍼질러 앉아 '엉엉~'거릴 틈을 주지 않는다.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어머니의 입을 통해서 나왔을 해학이라고 하는 거, 골계미라고 하는 것들이, 적재적소에 버무려져 있다.

 

좋기는 하지만 한번에 내처 읽으라고 권하진 못하겠다.

정수만을 뽑아놔서 그런 것이겠지만,

밀려오는 감정의 후폭풍이 거세다.

찬찬히 아무렇게나 펼쳐서 한꼭지씩 아껴 읽어야 되겠다.

 

제목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를 짐작하게 하는 그의 창작론도 겸손하기만 하다.

나는 감히 말한다. 시는 창작이 아니라 줍는 것이라고. 마트에는 물건이 있지만 재래시장엔 사람이 있다고. 대형 슈퍼에는 충동구매와 끼워팔기가 있지만 오일장에는 어우러짐과 덤이 있다고.(55쪽)

 

한편 한편 골라낸 시 뿐만 하니라 시평 또한 아름다웠는데,

이윤학 님의 '유리컵 속으로 가라앉는 양파'의 시평인 '모든 상처'는 처연해서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박상률 님의 '택배 상자 속의 어머니'는 처음 만나는 시였는데, 돌아가신지 햇수로 9년째인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본인의 시 '의자'에 단 덧글의 '자석 브라자'가 정겨웠다.

'엄니 아버지'라는 제목의 글에 등장하는 구절도 좋았다.

지금 당장의 말이 아니라, 먼 훗날에 대련을 다는 품새 때문이다. 어떤 말은 넉달이나 지나서 깨우치고, 어떤 말은 30년 지닌 뒤에 무릎을 친다. 상대의 가슴에 상처를 처박는 말이 아니다. 어깨를  툭 치고는 먼 깨달음의 언덕길, 그 길가의 찔레나무 덤불 속에 꽃봉오리를 걸어놓는 넉넉한 말씀 때문이다.(205쪽)

 

언젠가 한번쯤 봤던 시나 산문이 많았는데,

이렇게 묶어 놓으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5부 글짓기 대표선수의 글들 중 내가 그러께 맛을 들린 한창훈 님이 등장해 반가웠고,

내가 예전부터 눈독들였던, 나만 알고싶었던 시인 유용주 님이 등장해서 좋았다.

'개그장이', '반장이니까', '취미는 효도, 특기는 불효' 같은 글들이 새롭고 재미있었다.

 

당연히 가장 좋았던 건 6부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어머니 스케치북을 본다' 꼭지이다.

그림이 하나같이 예쁘고 꾸밈이 없다.

미술 장학금으로 대학을 갈뻔했던 시인의 그림솜씨는 아무래도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것 같다.

좋다.

이래 저래 책에서 위로받는 요즘이었는데,

요즘 여러가지 의미에서 의로가 될 책들만 찾았는데,

이 책은 또 다른 의미로 위로가 된다.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라고 이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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