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장래희망이 번역가였다.

장래희망이라고 말을 하기엔 내 직업을 갖고 어느 정도 나이가 먹은 이후이고,

감히 번역가라고 갖추어 직업의 형태로 말하기 민망한 건,

나의 그것이 좀 치기어린 이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을 읽다가 보면,

(난 책을 좀 꼼꼼이 공부하듯 읽는 경향이 있는데,)

내용이 이어지지도 않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툴툴거릴 바에야 '내가 직접 번역을 해봐?'하고 기웃거렸지만,

번역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님을 깨닫고,

일찌감치 그 꿈을 접었다.

(나이가 '일찌감치'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먹고 얼마 안있어 꿈을 접었다는 얘기다, ㅋ~.)

 

암튼 번역가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실력이나 능력과는 별개로 번역가는 구도자와는 맞먹는 수련과 정신세계가 필요한게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정영목 님의 올곧은 성실성에 대한 얘기는 여기저기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성실성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구도자의 경지를 느끼게 되었다.

 

정영목 님의 작품을 처음접한건 (내가 인식하기론) 주제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가 처음이었다.

그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띄어쓰기도 문장부호도 없는 글들의 나열에 완전 당황하게 된다.

나는 우리말로 쓰여진 글을 읽는 것을 가지고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호흡을 조절하기 버거워했던걸 보면,

역자 정영목 님도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원래 포루투갈어였으니, 영어로 번역된걸 다시 번역햇을테니 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끼는 작품은 '책도둑'이다.

 

이제 정영목 님이 번역한 작품은 망설이지 않고 그냥 읽게 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번역가나 번역 참고서에 나왔던 얘기랑 겹쳐지는 부분도 있지만 전혀 다른 얘기도 있다.

조근조근 그의 말들을 따라가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앞부분의 김혜리 기자와의 이런 인터뷰가 실렸는데, 그의 번역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저는 기본적으로 번역가란 이방의 언어와 문화에 반한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요.

상상하셨던 번역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제 아랫세대를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나 제 윗세대가 외국문화에 대한 매혹을 번역가가 된 동기로 꼽는다면 전 거짓말이라고 의심할 것 같아요. 저희 세대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게 과연 정당하냐고 의문을 제기한 세대거든요. 영문과더러 제국주의학과라는 농담도 오가는 상황에서는 서구문화에 대한 매혹이 있다 해도 뒤틀려서 표현됐겠죠.(18쪽)

 

번역을 논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외국어도 잘 알아야 하지만 모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던데요.

소설은 번역의 결과 자체가 소설로서 읽혀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모국어 실력이 중요하다는 것이 맞는 말인데, 문제는 그 능력이 어디서 오냐는 거죠. 예를 들어 글솜씨가 있으면 되느냐, 문장 구조가 정확하고 비문만 없으면 되느냐. 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우리말을 구사하는 법은 국어 실력뿐 아니라 번역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거든요. 번역은 저자의 스타일을 향해 가려고 애쓰는 것이기에 문제는 내가 우리말을 잘 쓰느냐보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겼냐입니다.(23쪽)

 

여러가지 내용들이 다 좋아서 일일이 옮겨 적기는 힘들고 일독을 권한다.

다만 언어를 잘 한다는 것은 일정한 선을 넘으면 인간의 문제라고 하는 부분,

그리고 자동 번역기가 나왔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고 하는 부분은, 같이 새겨둘만 하다.

 

선생님은 유학도 간 적이 없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시지도 않는데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 온갖 투자와 노력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면 비결을 궁금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언어에는 끈적한 속성이 있고 해당 사회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나 영어든 한국어든 어떤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일정한 선을 넘으면 모두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말귀를 잘 알아듣는게 핵심이라고 본다면 영어를 잘하는 것과 한국어를 잘하는 것이 같은 의미일 수있죠.ㆍㆍㆍㆍㆍㆍ

 

자동번역기계가 등장했을 때는 감회가 어떠셨나요?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개입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가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35~36쪽)

 

이 인터뷰 부분 이후 딱딱하고 지루한 부분들을 꾸역꾸역 일독하였다.

뒷부분을 꾸역꾸역 읽을수록 그의 무미건조한 일상이 엿보이는듯 했고,

끝내 알수없는 감동으로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좀 딱딱하고 지루했지만,

나도 모르게 정영목 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차올랐고 그런 의미에서 별 다섯을 꽉꽉 채워도 부족함이 없겠다.

배우고 닮고싶다는 마음은 언감생심, 우러를 수는 있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나이와 함께 체력이 쇠하고 집중의 지속이 짧아졌다는 정영목 님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저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책이 점점 더 필요해진다'고 한다.

천하의 정영목 님도 그러한데,

나의 게으름은 어쩜 당연한 것인가 싶어 위로가 된다.

앞으로 얼마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꺼이 읽는 나날이길 바래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6-19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8-06-20 09:45   좋아요 3 | URL
저는 글은 무조건 알아먹기 쉽게 써야한다는 주의였는데,
번역가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네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어렵게 썼거나 작가의 문체가 그러할때는 작가를 그대로 번역해주는게 맞다는게 정영목 님 입장이셨습니다.
번역가라는게 엉덩이가 무겁고 꾸준해야 하는 직업이더라구요.
전 엉덩이 무겁고 꾸준한 걸로는 자신 있는데,
기본적인 실력이 많이 못 미치더라구요~--;

번역청까지는 아니더라도,
번역가들이 꾸준히만 하면 먹고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그런 거 말고, 처우개선이 시급하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