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언어사전
이정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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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을 하자면 이 책을 받아보고 놀랐다.

이게 사철 방식의 편집이라는데 난 파본인줄 알았다.

뭐, 여기 저기 물어 이게 요즘 유행하는 편집 방식이라는 건 알았는데,

그걸 알고 난 이후에도 나처럼 책에 물성을 부여하고 책신을 모시는 사람의 입장에선 대략난감이다.

실은 언제부턴가 문학동네 시집을 살때 표지는 파스텥 색상인 것이 예쁜데 몇 장 펼쳐서 넘기다보면 낱낱이 뜯어져서 힘들었었는데,

이 책도 그럴까봐 불안한 거라.

이런 방식의 편집이 책을 활짝 펼쳐놓고 필기를 하거나 무언가를 적어넣을때는 좋은 방식이라는데,

참고서도 수험서도 아닌,

(사전이란 이름을 달긴 했지만) 시집 한구퉁이에 뭘 적어넣는단 말인가~--;

 

제목은 '동심언어사전'이지만 이 책은 언어가 가진, 언어가 내포한 의미에 집중하기보다는,

언어를 사용하는 마음을 노래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짧아서 여운을 주는 것들이 더 좋았다.

내용이 길어지고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서술하려는 것들은 좀 지루했다.

보통 시집의 두께였고 그 정도 분량이었다면 황홀하다며 설레발 쳤을 시들이 수두룩한데,

사전 형태로 묶어 양이 방대해지다보니 지루해 하품이 난다.

 

그렇다고 시집이 별로였다는 애기는 아니다.

여러번의 퇴고를 거쳐 시들을 응축시키고 추려냈다면 더 좋았을텐데 싶다는 얘기다.

시인의 저력을 알고 충분히 더 좋은 시들이 나와줄 수 있음을 아는데,

좀 널브러진 느낌이라서 아쉽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시 몇 편을 옮겨본다.

 

굴뚝연기

 

굴뚝연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의

차가운 등짝을

덥히고 왔기 때문이지

 

돌부리

 

땅속에 박혀 사는 새가 있지.

부리만 조금 내밀어

빗물과 눈송이를 받아먹지.

구둣발에 차일 때 많지.

괭이나 쟁기에 으깨지기도 하지.

울대가 없어서 삽날이 대신 울어주지.

발로 찬 사람이 울어주지.

눈을 감고 돌부리를 쓰다듬으면

내 어깨의 새부리뼈가 활개를 치지.

어깻죽지가 나른하지.

 

되새김질

 

내 것을 토해내야만

되새김질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일단 가득 채워야 한다.

먼저 저 바깥을 들여앉히고

속앓이부터 해야 한다.

지는 해가 긴 혀로 솔숲을 곱씹듯.

밤바다가 끝없이 트림을 하며

물방울별 하나하나를 새김질하듯.

너만을 생각할 때처럼.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혀의 춤사위만 미끄러질 때까지.

 

백합조개

 

깜짝이야.

개펄에서 아침 먹더가 혀를 깨물었어.

바삐 놀러 나가다가

문틈에 옷자락이나 손가락이 끼듯.

 

서두르지 마.

바다가 몽땅 밥그릇이듯

세상이 모두 놀이터니까.

모래 한 알도 친구니까.

바다놀이 나갈까.

 

붕어빵

 

붕어를 살려보려고

호호, 인공호흡을 했다.

끝내 살아나지 않아서

눈 딱 감고 해부를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났다.

죽은 이유가 밝혀졌다.

달콤한 팥만 편식한데다

과식했기 때문이었다.

호호, 내가 대신

소화시켜줬다.

 

산더미

 

맑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어야

 

하늘을 우러르고

바람을 만져보지.

 

밤과 낮이 있고

새싹과 낙엽 태우는 향이 있지.

 

사노라면, 일거리가

밤바다 눈보라처럼 몰려올 거야.

 

일머리를 깨치면

꽝꽝나무 이파리처럼 작고 눈부신 축복이지.

 

내 일이 산더미라야

내일이 반갑지.

 

손잡이

 

풀과

모든 열매는

자신이 손잡이가 되는 게 싫다.

 

내 귀를 비틀어

내 꿈을 내동대기친다면

그 누가 좋아할까.

 

그런데, 누가 나를 열고

깊은 방으로 들어간다면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면

그 누가 마다할까.

 

이 외에도 아침뜸, 앉은뱅이저울, 앞길,오색딱따구리,잔가시, 징소리, 짝사랑, 칠성무당벌레 등 좋은 시가 여럿이다.

 

여러 편의 시를 옮겨적으려니 좀 힘들지만,

되내며 옮겨 적는 한 호흡 한 호흡 행복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시인의 시가 좋은 것은,

알아먹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들로 쓰여졌고,

그리하여 읽고 있노라면 어딘가 모를 곳이 따뜻해지는 것이, 적당한 온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내 안에 온기를 품고 바라보는 세상은 시리거나 눈물 겨워도 견딜만하니까 말이다.

 

동시라고 하긴 힘들겠고,

맑고 순한 마음으로 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폭폭할때,

그래서 적당히 따뜻한 온기가 필요한 시린 날에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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