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서툰 목수만이 연장을 탓한다고 술꾼들은 안주를 개의치 않아 깡술도 불사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권여선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ㆍㆍㆍㆍㆍㆍ술꾼의 미각도 안주 아닌 음식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시킨다. 그래서 말인데 옛날 허름한 술집 문이나 벽에 붙어 있던 '안주 일체'라는 손글씨는 이 땅의 주정뱅이들에게 그 얼마나 간결한 진리의 메뉴였던가.(10쪽)

 

어떤 사람들은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하다고 하는데,

맛있는 걸 먹을때를 받고, 읽는 책이 재밌을때를 얹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글이 완전 맛깔스러운 지라 이런 게 글을 읽는 맛이지 싶어 '헤헤~' 거렸다.

적당한 어조와 운율, 마침한 곳에 걸린 쉼표나 마침표 따위의 문장 부호, 의성어와 의태어를 넘나들며 언어를 구사하는데,

합이 잘 맞는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기분이었다.

조화가 잘 맞는 오케스트라의 향연을 듣는 기분이었다.

입이나 귀만이 아닌, 눈을 콩해서도 오감이 열리는 경험을 한달까.

 

권여선 님은 안동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서울 사람이고 아버지는 부산 사람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의 손맛에 길들여졌을테고,

그래서 서울 토박이인데다가 편식도 심한 내가 이물감 없이 하나 같이 입맛 다시며 읽을 수 있었다.

시작은 만두였다.

왕짱구 분식의 주인 부부는 역할을 나누어, 아저씨는 만두를 빚고 아주머니는 만두를 쩠다. 아저씨는 밀가루 반죽을 가래떡처럼 길게 만들어 칼로 적당하게 토막을 내놓았다. 그리고 한 토막의 반죽을 작은 밀대로 슬쩍 밀어 동그랗고 얇게 만든 다음 숟가락으로 만두소를 떠넣고 어물쩍 주름을 잡아 만두를 빚었는데 그 시간이 이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슬쩍 쓱 어물쩍, 그러면 끝이었다. 불필요한 손놀림은 전혀 없었다. (32쪽)

 

양배추쌈에 고추장물이 뭐라고 이런 구절은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달착지근한 양배추쌈 위에 푸릇푸릇하게 매운 고추장물과 밥을 얹어 한 쌈 싸 먹으면 깜짝 놀랄 만큼 맵다가 이내 머릿속이 시원하고 개운해진다. 된장이 줄 수 없는 깨끗한 짠맛과 땡초의 번쩍 깨는 매운맛이 별안간 내 존재를 순수하게 텅 비운다. 심심한 열무김치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낯설고 허무한 생각마저 든다.(110쪽)

 

난 권여선 님의 글들을 읽으며 같은 생각들을 하였으니 쌤쌤이다, ㅋ~.

 

밥 한 숟가락에 자르지 않은 긴 시래기 한 줄기를 둘둘 얹어 먹기도 한다. 바삭한 가을 햇빛과 씁쓸한 땅의 맛을 은은하게 간직한 시래기 나물의 독특한 맛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123쪽)

이 구절에선 '씁쓸한 땅의 맛'이란 구절이 좋았다.

'바삭한 가을 햇빛'이라는 하늘의 기운과,

씁쓸한 땅의 맛과,

그걸 밥 한 숟가락에 둘둘 얹어먹는 권여선 님과,

뭐랄까, 천지인 물아일체를 경험하신다고 해야 할까.

그걸 엿보는 나도 자연스레 천상의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생선 비늘을 비닐이라고 발음하시는 생선가게 남자에게선 이런 헤프닝을 떠올린다.

어느 날 귀엽게 생기고 패션에 민감한 어린 게이머가 진회색 니트로 된 비니를 쓰고 나왔다. 젊은 해설자가 "아, 저 선수, 오늘은 비니를 쓰고 나왔네요."라고 말하자 나이 든 해설자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비닐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요?"

"네?"

"암만 봐도 비니루 같지는 않다고요."

그 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화면에 입을 가리고 끅끅 숨넘어가게 웃는 젊은 해설자와, 영문을 몰라 인상을 찌푸린 나이 든 해설자의 모습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166쪽)

 

아, 좋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하였다.

사는 게 폭폭하여 목이 막히거나 메일때,

고인 침을 눌러 삼키듯 눈물도 그렇게 눌러삼키면 그만이라고 알고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좀 빨리 끝나버리는 건가 아쉬운 감이 있지만,

길면 또 물릴 것도 같다.

아직은 못 읽은 님의 작품들이 남아 있으니, '안녕, 주정뱅이'부터 시작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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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8-06-18 11:55   좋아요 1 | URL
소주 석잔이면 만취하는 저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애기인데,
또 남자들 중에, 개중에는 술이 들어가면 밥이고 안주고 입에 안대는 사람들도 있죠.

술을 드시더라도 안주도 같이,
배 고프면 밥을 드신 후에 술은 천천히 드시길 강권합니다~ㅅ!^^

잠자냥 2018-06-18 11:52   좋아요 1 | URL
예문만 읽어도 침이 고이네요. 하하하하.

양철나무꾼 2018-06-18 11:57   좋아요 0 | URL
권여선 님 글 처음 읽었는데, 맛깔 나네요.
글이 맛있을 뿐더러 정갈해요~^^

지금행복하자 2018-06-18 14:11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맛갈나는 표현에 침이 스르르~

양철나무꾼 2018-06-18 18:10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맛있는 책의 말견이었어요~!^^

겨울호랑이 2018-06-18 17:57   좋아요 1 | URL
비니루, 공구리 등등 표현은 멋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구수한 맛이 느껴지네요^^:)

양철나무꾼 2018-06-18 18:12   좋아요 1 | URL
이게 입말을 옮기는 과정이어서 멋은 없지만,
구수한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ㅎ,ㅎ.

moonnight 2018-06-18 18:27   좋아요 1 | URL
저도 방금 행복하게 다 읽었어요. 배고프네요^^;

양철나무꾼 2018-06-18 18:30   좋아요 0 | URL
정말 맛있는 책 아닌가요?^^

오늘은 야구를 하지 않아서 좀 우울할라 그랬는데,
축구가 기다리고 있네요.
축구를 보면서 먹을 주전부리를 궁리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