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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한 용기 CLF 총서 2
게리 하우겐 지음, 이지혜 옮김 / IVP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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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의 절반, 즉 30억명 가량이 굶주리고 있으며, 가난한 나라의 어린 소녀들이 돈 때문에 사실상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거나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그 순간의 분노로만 그칠뿐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상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개인주의적 사고 방식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둔감해져 있는 모습 때문에, 또는 불의에 대해 맞서고자 하지만 너무나도 막연하고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매몰차게 '정의'를 외면한다.

이런식으로 외면당하는 '정의'와 관련하여, 우리 자신에게 정의를 위한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오늘 살펴볼 책 '정의를 위한 용기'는 국제정의선교회(IJM)의 대표인 '게리 하우겐'의 저서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이 사회정의라는 측면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서의 '복음'은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측면에도 깊숙히 관여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은 우리들의 영적인 무지함을 비춰줄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한 악이 가득한 검은 세상을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영혼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들고서 세상에 만연한 악의 문제에 대해서도 맞서 싸워야만 한다.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7)'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순종해야 한다. 또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태복음 28:19)'라는 복음증거의 사명과 마찬가지로 '정의'의 문제가 중요시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의 결론부에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기를 촉구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정의'라는 요소가 과연 빠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과연 우리가 '불의함'에 대해 눈감고 살아가기를 원하실까?

'위험한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토록 가슴 아프게 자신의 약함을 느끼는 것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손내밀고 계시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넘어 정의를 위한 용기있는 발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그분께서 다 책임져주실 것이다.

p.s) 9장 전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를 위한 용기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행동은 줄이고 묵상과 기도는 늘려라 2) 성경의 약속을 믿고 위험을 감수하라 3)영성 형성과 개혁을 평생 게을리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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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변화될 수 있다
팀 체스터 지음, 안정임 옮김 / IVP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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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에 삶에 대한 아쉬움과 답답함 한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는 작심삼일에 그치는 경우가 많긴 해도 '변화'를 시도하곤 한다. 이럴 때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전략은 바로 다짐하기와 규칙지키기이다. 이는 우리가 해야할 일 또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규정짓고 이를 실천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은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면 가장 중요한 요소 한 가지가 빠졌기 때문이다. 뒤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동기'에 관한 것 이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변화를 위해 앞서 말한 전략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꽤나 유용한 방법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변화를 이루어 내기에는 어렵다는 점이 한계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수련회 이후 등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후에 삶과 신앙의 '변화'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에 지속적인 변화가 잘 안 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바로 이 전략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전략의 다른 이름을 밝히자면 바로 '율법주의'이다.   
 
오늘 살펴볼 책 '나도 변화될 수 있다'에서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변화'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소개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위한 바람직한 방법을 제시해준다. 오늘 이 책을 쓴 저자는 팀 체스터인데, 영국IVP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차세대 작가이자 교회 운동가라고 한다. 특별히 영국IVP 대표인 브라이언 윌슨이 존스토트 다음으로 강력추천하는 저자라고 하는데, 이 책과 더불어 앞으로 나올 그의 저서들에 기대를 가져보아도 좋을 것 같다.
 
자, 본격적으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변화와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왜 변화해야 하는가? (동기)',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방법)'에 관해서 말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은 변화하고자 하는 이에게 몹시 중요하다. 왜냐면 동기와 방법에 대한 고민없이 진정한 변화를 얻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동기'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방법론에 대해선 전문가인 우리가 간과한 요소가 바로 이것이며, 이로 인해 실제 변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한 것'이 동기에 관한 가장 큰 문제이다. 이 점은 동기의 문제가 '마음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이 '죄'로 더러워져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가득 차있다는 점을 자각해야만 한다.
 
저자는 "사람의 얼굴이 물에 비치듯이, 사람의 마음도 사람을 드러내보인다"라는 잠언 27장 19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동의 근원지는 마음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면서 마음을 변화시킬 때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마음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오직 '믿음과 회개'뿐이라고 말한다.
 
믿음과 회개는 우리가 변화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믿음과 회개라고 하니 다 알고 있는 뻔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두 열쇠를 지금까지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한 올바르게 사용한적이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점검되어야 한다. 저자는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세상과 사탄의 거짓말을 믿는가? 라며 우리에게 강력한 질문을 던진다.
 
인정하긴 싫겠지만, 때떄로 우리는 죄의 거짓말에 쉽게 넘어간다. 저자는 그 거짓말의 예를 잘 들어준다. '하나님이 없으면 더 잘 살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억압적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자유롭다. 하나님보다 죄가 더 좋은 것을 준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사단의 거짓말임을 명심하자.
 
죄에 쉽게 무너지는 우리들이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희망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겐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해줌과 동시에 그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설명해준다. 그 진리란 다음과 같다. 첫 째,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따라서 우리가 나서서 전부 해결할 필요가 없다. 둘 째,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셋 째, 하나님은 선하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넷 째,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입증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 자체만으로 큰 은혜가 있다.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그분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다보면 변화하려는 의지와 힘이 생겨난다. 놀라운 일이다. 마음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변화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 즉, 우리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고칠점을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서 눈을 떼서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변화의 시작점에 겨우 서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잘못된 방향을 향해 질주하던 걸음을 멈추고 이제서야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 자신을 되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변화는 평생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며,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단기간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선 평생을 걸쳐 노력해야만 할 것이고 또한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과정들을 겪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 변화를 위한 시간이 그만큼 더 많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많다고 변화하기를 주저하거나 미루어도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님을 명심하자.
 
글이 상당히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유익한 내용을 다 소개하지 못해서 상당히 아쉬움이 든다. 특히 변화하려는 동기가 올바른 동기인가 하는 문제와 실질적 변화를 위한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이 모든 아쉬움은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오늘 소개한 팀 체스터의 '나도 변화될 수 있다'를 읽으면 깔끔히 해결될 것이다.
 
다른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일 수도 있고, 책을 읽을만한 시간적 및 마음적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민하지 마시고 이 책을 집어 들었으면 좋겠다. 좋은 책일 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좀더 그럴사한 이유를 들자면 이 책은 주석을 포함해서 229페이지로 만만하며(?), 가격도 착하고(?), 그리고 하루에 한 챕터씩 페이지 수로는 10장에서 많아야 20장 정도만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부디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자로 변화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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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 하나님이 쓰신 인생과 소명 읽기
댄 알렌더 지음, 김성녀 옮김 / IVP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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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이다. 몇 가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선적도, 그로 인해 삶이 180도 바뀐 적도 있다. 또한 기쁨의 이야기,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같은 이야기, 그리고 철없던 시절에 저질렀던 어리석은 이야기들도 있다. 그것이 내 이야기이며, 바로 내 인생의 이야기이다.

책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쫓아가는 책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일깨워 준다. 그나저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과거의 이야기와 우리 자신의 진짜 이름이다.

첫 번째. 우리가 써내려온 과거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플롯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플롯들에는 비극과 파탄, 구속, 샬롬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런 플롯들을 이해할 때야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플롯을 바꿀 수 있는 첫걸음을 떼게 된다. 변화시킬 수 없는 과거의 플롯들을 인정하고 그대로 둔 채, 새로운 플롯을 써내려감으로써 우리 자신의 인생 각본을 새롭게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가지 더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읽어감으로써 그 주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 주제란 바로 소명이며 그 소명에는 우리의 갈망과 함께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시는 의미가 함께 공존한다. 이러한 소명은 섬길 대상, 섬기는 장소, 직면할 문제, 해결 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두 번째.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사람의 이름에는 의미가 있었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살거나 이름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며 살아갈 미래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름 속에는 일련한 기대치가 담겨져 있을뿐만 아니라 그 사람만의 고유한 소명과 성품이 반영되도록 했다.

지금의 이름은 좋은 뜻이나 발음하기에 좋은 것들로 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이름은 앞서 말했듯 그 존재의 소명과 성품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이다. 성경인물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주신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이름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언젠가 허락하실 것인데,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야 할 것이기도 하다. 

자, 이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또는 나아가고 싶은 이야기를 구상해볼 때이다. 우리의 인생은 커다란 이야기이다.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충분히 되새기며 읽어왔다면,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할 때가 온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인생의 동저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해야만 한다. 또한 새로운 이야기, 거기에는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이는 앞서 말한 소명을 말하는 것이며, 무엇을 하든 이것-소명이라는 인생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당신 혼자서 하지 않기를 바란다. 공동체와 함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또한 공동체와 함께 나눔으로서 당신의 이야기를 배가 시키길 바란다. 한편 이 과정에서 당신에게 기도와 금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감사와 경외심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기도와 때론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금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인생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과연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나 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여전히 던지고 있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척이나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곰곰히 과거를 떠올려 보고, 책의 여백에 적어보고, 그리고 미래를 꿈꾸며 어떤 곳에서 누구를 위해 섬길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무척이나 유익할 것이다. 인생에 대해,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책을 강력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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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긴 터널 우울증
쉴라 윌쉬 지음, 박혜경 옮김 / 황금부엉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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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라운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우울증에 대한 대처법을 알려준다.

일단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깨어주며, 약물치료 등의 실제적인 치료와 함께

신앙적인 방법이 필요함을 이야기 해준다.

(오로지 신앙적인 방법만으로 우울증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일단 이 책은  우울증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 읽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와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전쟁터에서

지쳐버린 마음을 지닌 이들이 봐도 굉장이 좋을 듯 싶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아픔을 이해받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이럴 때에 우리는 절망하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함께 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통, 수치심, 사랑을 향한 우리의 갈망, 믿음과 육신의 치유 등에 대한 내용이 1부에서 전개되며

은혜, 믿음으로 걷기 등에 대한 영적 전쟁에 관하여 2부에서 다룬다.

마지막 3부는 공동체 이다.

 

이 책은 여성의 우울증에 대해 현실적이며 신앙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울하지 않더라도 이 책을 통해 배워야할 부분들

놀라운 통찰들이 참 많이 읽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한번더 읽어야 겠다.

 

* 우리의 불안함 → 내려놓음 → 그분을 믿음

 

내 문제를 두고 하나님과 대화(질문)하기

 

요셉이야기 -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해서 만사가 우리 원하는 데로 되지 않는다.

 → 노예로 팔린 요셉 / 감옥에 갖힌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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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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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지식인으로서 살아온 문학가이자 전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씨의 작품입니다. 이 책은 '우리는 왜 신앙을 가져야 하는가 고민하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겨가길 원하는 구도자들을 위한 입문서'로 쓰여졌습니다. 그의 생(生)가운데 수많은 세월동안 자기자신과 지성만을 의지해온 그가 돌연 신앙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독자의 궁금증에 대한 이어령씨의 대답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기독교-엄밀히 말해 개신교가 적합하겠지만 일반적으로 개신교를 기독교로 말하는 경향이 있기에 저는 계속해서 기독교라는 표현을 쓰고자 합니다-의 세례를 받은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아직도 지성과 영성 사이의 어느 문지방 위에 있는 것만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말이지요. 또한 그는 영성이란 지성을 초월하는 것이라 이야기 하면서, 지성을 발판으로 하여 영성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어떠한 계기로 지성인이자 무신론자였던 저자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일까요. 책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자각하기 쉽지 않은데요.?
- 그렇습니다.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이 땅에는 빛뿐 아니라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영어어 '플런지(Plung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팍 던져 넣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입니다. - p.157

알다시피, 기독교는 사막의 체험에서 비롯된 종교입니다. 사막의 삶에서 갈증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혀가 돌처럼 굳어지는 격렬한 갈증을 겪어본 분은 없을 겁니다. 사막이기 때문에 갈증의 그 고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 물이 귀한 황무지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갈증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호수가 있고, 냇물이 있고, 냉장고 안의 페트병에 물이 넘치는 세상에서, 안 믿는 자에게 갈증을 이야기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갈증없이 이루어지는 기독교나 교회는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 p. 234 

 위의 내용을 통해 보면 자기절망과 갈증(영혼의 목마름)이 저자로 하여금 영성의 문지방을 밟도록 한듯 보입니다. 딸 민아의 실명위기 및 손자의 죽음.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겠지요. 인간의 유한함을 깨달은 그는 그저 조용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수 밖엔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안타까움과 애틋함, 또한 어쩌면 절망과 원망이 섞였을지 모르는 그의 기도는 인간으로써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종교적이거나 남을 의식하는 기도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기도였을테니 말이지요.

하지만 앞서 말한 자기절망과 영혼의 목마름만으로는 저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 설명으로는 부족해보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인 '사랑'이 빠졌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간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바꿔놓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사랑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바꿔놓습니다. 저자에게 있어서도 가족들 간의 사랑은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딸 민아 씨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저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지는 몰라도 저자를 영성의 문지방 위로 온전히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물론 계기를 제공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아씨의 사랑만으로 충분했다면 이미 저자는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었어야 할테니깐요!) 이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온전한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 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그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자신이 꾸며낸 말이지요. (중략)

사람들은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합니다. 나는 타자와 늘 하나가 되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고 끌어안습니다. 그럴수록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틈새를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요. 애타는 절망이 또다시 남에게 다가서려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부르고 정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움이라고도 부릅니다. 보이고 잡히는데도 아주 얇은 앵프라맹스가 그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찢을 수도 녹일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외로움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20대부터 돈이나 가난, 또는 권력, 전쟁에서 비롯된 소유의 결핍보다도 생명의 결핍, 존재의 결여에 대한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 글을 썼던것이지요. - p156부터

  앵프라맹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얇은 막. 비록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음에도 외롭운 까닭은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외로움'이라고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존재론적 외로움이 우리내 삶과 영혼에 스며들때 말입니다. 저자처럼 글을 써야할까요. 글을 쓰는 것처럼 어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은 참 좋은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근본 원인인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존재론적 외로움이 진정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에 대해 자신이 찾아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마를 짚는 손. 인간은 절대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찢거나 넘어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틈을 없앨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월의 힘이요 영성의 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사랑으로는 넘을 수 없던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없앨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결국 저자가 영성의 문지방 위로 온전히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대답에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존재론적 외로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않을까 고민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들의 힘으로 영성의 문턱위에 도달 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한계가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아무리 커뮤니케이션 기법이 발전하고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일지라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많은 갈등가 오해가 발생하는 것처럼요. 분명 '우리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그분-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당신은 영혼의 목마름을 경험해본적이 있습니까? 혹은 존재론적 외로움에 몸부림쳐 본적이 있나요? 아무리 노력해도 타개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절망해본적 있습니까? 이러한 경험들은 직접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상상해보고 가늠해볼 수 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누군가로부터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는 많은 말을 들었다해도 그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물론 '의문을 갖는 것' 자체는 바람직합니다. 이미 영적인 경험을 해본 사람들도 의문을 가져볼만 합니다. 왜냐면 의문과 회의는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지성이 없는 믿음은 그저 맹신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곰곰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신학'이란 학문이 존재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때문 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영성에 이르고 싶다면 너무 의문과 지식만을 앞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성에 이르는 그 길에는 저자의 말처럼 자기절망, 영혼의 목마름, 그리고 사랑이 있고 또한 이 모든 것 위에 '그분-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니깐요.  결론적으로 '믿음'이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영성을 갖는다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따져보고 검증하지 않고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결코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깐 말이지요.

 많은 이야기들을 거쳐 이제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성과 영성사이의 어디쯤 와계신가요? 아직도 갈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계신가요? 여기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이제 이 책과 함께 그 길을 찾아 떠나보지 않으실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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