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에 대한 한나 아렌트 자신의 견해는 그만큼 선명한 형태로 정식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사유‘가 일상생활 속에서 나의 습관적인 행위를 일단 중단시키고 안쪽에 틀어박히게 한 뒤, ‘나는 무엇인가?’라는 자기반성적 물음에서 비롯하여 ‘세계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같은 일련의 추상적인 물음에 천착시키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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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사람들 사이의 가치관의 다원성은 주어진 사실이라기보다는 공적 영역의 행위가 낳은 성과다. 사람들이 사적인 생활에 틀어박히거나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집단으로서 한 덩어리가 되어 경제적 목표만 쫓는다면 ‘다원성=복수성‘은 상실될 것이다 ‘다원성=복수성‘을 확보하려면 시민들이 토론을 통해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 즉 ‘공동선‘이 무엇인지 설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공동선‘이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특정한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실체화하여 사람들의 견해를 얽매고 만다면 공동선은 도리어 괴물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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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한나 아렌트는 도리어 ‘인간성‘에 과잉 기대를 품는 휴머니즘 계열의 사상을 일단 해체하고 나서, 최소한의 목표로서 전체주의와 통할 염려가 있는 ‘사고의 균질화‘만이라도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신중한 정치철학자가 아니었을까 한다.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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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한, 한나 아렌트가 고대의 폴리스에서 서구적인 ‘인간성‘의 원형을 찾아내려 한 이유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훌륭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관심은 오히려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만인에게 보편적 인권을 부여하고 민주주의의 범위를 확대해 온 서구의 시민사회가 대중사회적인 상황에 빠져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전체주의를 배태한 원인을 ‘인간성‘이라는 이념의 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탐구하는 것이었다.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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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렌트는 끝까지 하이데거를...


스승인 하이데거가 독일어로 사고하는 자의 ‘진리‘에 얽매어 있던 것에 반해, 한나 아렌트는 특정한 언어공동체에 한정되지 않는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복수성‘을 탐구하려고 했다. ‘복수성‘을 낳고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행위‘에 주목함으로써 전체주의적 폐쇄성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한 점이 한나 아렌트의 언어관이 지닌 특징일 것이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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