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정의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떠오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는 포세이돈의 아들로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해 쇠침대에 눕힌 후 침대보다 크면 머리나 다리를 자르고 작으면 사지를 늘여서 죽인 괴물이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많은 이들에게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혹은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인물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괴물이 떠올랐던 이유는 뭘까? 노리코 역시 어떤 점에서는 프로크루스테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걸까?

 

물론 그녀는 프로크루스테스와는 다르다. 그녀는 정의라는 이름하에 올바른 행동을 한다. 그런데 독자는, 아니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녀의 말과 행동이 부담스럽고, 때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어려웠다. 아니,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분노하다니 누군가는 제정신이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분노하게 된 건 노리코에게서는 정(正)은 찾아볼 수 있지만 의(義)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법으로만 따지자면 노리코의 행동과 말은 모든 바르다(正). 법적으로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 토를 달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무조건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절대적 잣대를 들이대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옳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삼심제를 선택한 우리나라의 법체계를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법이란 그 법을 해석하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단 한 번의 재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 정황과 증거를 토대로 재심에서, 어떤 경우에는 대법원 판결에서 원심이 뒤집히기도 한다.

 

또한 법이란 결코 사람 위에 군림하는 절대 가치가 아니다. 법은 그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훈훈한 법관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리코에게서는 결코 의(義)를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담배를 핀 학생들을 선처한 선생님과 그 뜻을 알아준 경찰관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노리코가 판단한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들에게는 법이라는 틀을 넘어서 학생들의 미래를 생각해 더 옳은 길로 선도해야 할 더 큰 의무와 책임이 있다. 단순히 벌을 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에 말이다.

 

가즈키, 유미코, 리호, 레이카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렇다. 법보다 더 깊은 친구라는 인간 관계를 쉽게 던져버린 노리코의 행동을 ‘절대 정의’라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한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보게 될 뿐이다.

 

정의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행동에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경우는 이처럼 허다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여전히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주저 없이 단죄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건, 작가의 이야기를 토대로 보자면, 결국 인간의 본성이다. 평상시에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노리코와 리츠코처럼. 그래서, 그래서, 더욱 무섭다. 이런 인간의 본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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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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