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 -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가 남긴 1년간의 일기
에릭 호퍼 지음, 정지호 옮김 / 동녘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평생을 길 위에서 일하며, 사색한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가 56~57세 나이에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일을 하며 쓴 일기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부두 노동자로 일을 하면서도 책 읽기, 사색하기, 글쓰기를 했다니 대단하다. 쉽지 않은 노동이었을 것이다. 그는 중간에 쉴 때 사색을 하며 가지고 다니는 메모 북에 노트를 하고, 집에서 정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 종일 쉴 때도 있고, 사색을 안 할 때도 있고, 글도 안 쓰는 날도 있었다. 그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보다는 그저 내가 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에 묵묵하게 하루를 살아갔다. 그가 혼자서 직장과 집에 틀어박혀 지낸 것은 아니다. 교외도 나가고, 공원에서 아이와 놀고, 꽃도 사서 집안을 치장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책 읽기, 사색하기, 글쓰기에 자유로웠다. 


우리는 일하느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고,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은퇴를 하거나 장기간의 휴가를 보낼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쎄다. 뭔가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은퇴하고 나서 시간이 많다고 좋은 것만은 아닐 거 같다. 꼭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실제 존재하는 나를 느끼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일은 필요하다. 책 읽기, 사색하기, 글쓰기는 돈이 많이 안 든다. 하지만, 3주 휴가 기간에 글을 못 쓰다가 다시 부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글쓰기를 재개한 에릭 호퍼처럼 일은 필요하다. 책 읽기, 사색하기, 글쓰기뿐만 아니라 은퇴 후 일찾기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방에서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최고의 서재를 꾸미고, 세상의 좋은 음악을 다 감상하는 등, 생을 즐기면서 살면 안 된다는 세속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행복감을 느끼는 데 글쓰기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단순한 이유로 글을 써야 한다. 내 이름이 활자화되기를 특별히 바라지도 않고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 나는 그저 꾸준히 생각하고 쓸 뿐, 그 결과 생기는 부산물은 제 스스로 알아서 가도록 내버려둔다.' (p.192)

에릭 호퍼는 역사, 인문, 인간, 자연, 정치, 사회 등 폭넓은 분야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사색을 한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글 쓰는 것을 구상한다. 대중은 포털 사이트를 통해 온갖 뉴스, 가십거리에 노출되어 있지만, 시간 때우기 용도로 읽고, 집어치워 버린다. 나름대로의 해석과 고민은 없다. 아는 만큼 사색도 할 수 있고, 고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생활 속에서도 찰나에 스쳐가는 무수한 생각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어느 것 하나 기록할 생각을 안 한다. 감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순간의 감정은 말로 간직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문장으로 표현해놓을 때만 기억할 수 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는 것은 쉽게 기억한다. 그러나, 치욕스럽거나 칭찬받았을 때 느낀 감정, 희망을 품거나 절망했을 때 느낀 감정은 기억하지 못한다.' (p.165)

에릭 호퍼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실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안다고, 어떻게 미래를 해독할 수 있겠는가? 다양한 조건에서 과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참고할 뿐이다. 

'역사가 가치 있는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해독하는 데 도움을 줘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사회 환경에 따라 어떤 영향을 받으며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그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역사를 보면 다양한 조건에서 인간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다.' (p.55)

에릭 호퍼가 인간의 창의성을 논한 부분은 스티브 존스의 <원더 랜드>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의 창의성은 놀기 좋아하고 사치스러운 것에 집착하는 성향에 그 뿌리를 둔다. 중요한 점은 아이들이나 예술가들에게는 생필품보다 사치품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 사치품을 만들기 위해 애쓸 때 인간은 보다 과감해지고 더욱 독창적으로 변한다. 인간이 발명한 실용적인 도구는 통찰력과 기술을 응용한 것들인데, 이들은 대개 비실용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p.103)

이나가키 에미코의 <퇴사하겠습니다>에서 회사 사회가 아닌 인간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에릭 호퍼의 다음 내용은 지독하게 현실적인 분석이라 생각한다. 이런 인간의 본성으로 지금까지 회사 사회가 더욱 굳건해졌을 것이다. 

'사람은 꼭 필요한 생필품보다는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열심히 일한다. 앞을 정확하게 내다볼 줄 알고 쉽게 현혹되지 않으며 자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일단 욕구가 충족되면 더는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치품을 위해 공들이지 않는 사회는 끝내 생필품 부족 사태에 직면한다.(중략) 활기찬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장난감에 마음을 쏟고, 생필품보다는 사치품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곳이다.' (p.171)

에릭 호퍼가 가난한 나라를 걱정하는 아래 내용을 보면, 왜 한국이 이승만, 박정희 시절에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자에게 지배당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가난한 나라에서 자유를 허용할 수 있을까? 기술적, 사회적, 정치적 기교를 많이 축적하지 않은 신생 국가는 자유가 가져오는 피로와 긴장을 감당하는 일이 무리가 아닐까? 내가 볼 때 한 나라가 국민에게 자유를 허용하려면 우선 부를 충분히 쌓아야 한다. 또 제멋대로인 정당과 자유를 외치는 개인 사이의 끊임없는 주도권 싸움에게 버틸 수 있으려면 충분한 활력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한 사회가 자유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기능을 원활하게 꾸려갈 수 있는 기술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p.197)

안드로이드 일기장 앱 하나를 다운로드해서 설치했다.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잊어먹기 때문에 항상 챙기는 휴대폰에서 그때마다 메모를 해두기 위해서이다. 사실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습관처럼 책 읽고, 사색하고, 글 쓰는 것을 지속할 수 있으냐가 중요하다. 에릭 호퍼의 인생처럼..


2017.10.09 Ex Libris H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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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7-10-0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제가 전투마법사님에게 졌네요. 명백한1패. 직장생활중에 이렇게 많은 리뷰를 써내시다니 대단합니다. 전투마법사님의 앞으로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네요 ^^

아타락시아 2017-10-09 12:57   좋아요 0 | URL
이번 연휴에는 시간이 많이 있어서 쓴 거 뿐이에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