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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월동 반달집 동거기 - 제10회 브런치북 특별상 수상작
정송이 지음 / 정은문고 / 2023년 6월
평점 :
연애 6년? 7년?(연애 기간조차 헷갈릴 정도로 남편과 함께한 시간이 길다.) 이후 결혼했다. 결혼 생활 중 생활 습관의 차이로 사소하지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때마다 모든 연인들은 동거를 거치고 결혼을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지라 이 책이 반가웠다.
[갈월동 반달집 동거기 / 정송이 / 정은문고]
광고 카피라이터로 살고 있는 저자의 갈월동 반달집 동거기.
저자분을 만나면 직업 잘 전환하셨다는 말을 하고 싶다. 비유를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카피라이터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겠구나 싶다. 나라면 '흔쾌한 수락'에서 끝났을 표현을 '괘씸하네 할 만큼 흔쾌한 수락'으로 표현한다. 표현력(비유) 덕분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결혼은 부담스럽지만 연인과 함께할 터전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 저자뿐은 아닐 거라며, 귀 기울여 줄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고. 네 그게 접니다.
동거기를 다 읽어 본 내 입장에서 언뜻 떠오르는 결혼과 동거의 큰 차이는 동거는 온전히 성인인 두 사람이 가족을 이뤄가는 과정에 중점이 있다면 결혼은 아쉽게도 두 사람뿐만 아니라 그 두 사람이 속해있던 집단도 가족으로 묶이는 과정이 지분이 좀 된다는 것.
저자는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긴 하지만. 결혼은 그 정도로 끝날 수가 없다.
161쪽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알몸, 그 아래 민 낯, 더욱더 아래 밑바닥, 밑바닥에 고인 구린 웅덩이까지 보게 되는 게 동거다. " 결혼은 이 모든 과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거라고 보태겠다.
책을 읽고 생각이 정리됐다.
동거는 결혼 전에 꼭 해야 하는 과정이냐? ㅋㅋㅋ 절대 아니라는 거. 걍 하고 싶으면 하시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길. 동거는 동거대로. 결혼은 결혼대로. 각자 존중하며 존재하는 걸로. 동거는 결혼을 위한 단계가 아니다. 그리고 이 책 동거 관심 없어도 읽어보시길 추천. 꿀잼이다.
★ 마냥 즉흥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치밀한 계획 아래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 (p.7)
★ 언제 글이 제일 잘 써지냐면, 글 쓰라고 시킨 사람 없고 그 글로 입을 손해 없을 때다. (p.26)
★ 마음이 동했을 때 머리로 거는 제동은 아무 소용 없음을 처참하게 체감했다. (p.28)
★ "경력이 빠그라졌으니 이직이 아니라 빠직" (p.28)
★ 한 번 의문을 품고 보니 그저 관성으로 굳어진 생각일 뿐이었다. (p.36)
★ 개인적인 불행 하나가 있다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살 맞대고 살면서 행복한 삶을 경영해가는 좋은 샘플을 못 보고 자랐다는 점이다. (p.37)
★ 대사 한 문장도 외우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르는 연기자가 된 듯 우물쭈물 쭈뼛댔다. (p.49)
★ 평범하지 않은 것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의문 다발은 그것이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욱더 위협적이다. (p.62)
★ 낡으려면 충분히 낡고도 남았을 것들 사이에서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를 젊다는 말 아니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p.68)
★ "몸이 늙는 것보다 마음이 늙는 게 문제"라며 일 안 하고 놀기만 하면 마음이 늙고 쳐져서 안 된다는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듣고 있는 몸만 젊은 젊은이 둘은 그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p.71)
★ "적게 먹어야 오래 살아. 그리고 여럿이서 먹을 때 욕심 내봤자야. 남 더 주고 미움 덜 받는 게 나아." (p.72)
★ 물질적인 부족함을 시간과 노동력으로 때우는 일, 가난의 동사형이 있다면 사전 풀이가 딱 저렇지 싶다. (p.93)
★ 아, 살면서 이런 복 하나는 내게 오는구나. 얼떨떨한 기분으로 행복을 할짝할짝 핥아먹었다. (p.114)
★ 결혼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관습적으로 결혼을 떠올릴 이유는 뭘까. (p.117)
★ 생각이라고 에둘러 말한, 실상은 후회인 것들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고 목 기관을 통해 소리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온 힘을 다했다. (p.137)
★ 내가 찾아가지 않으니 생각이 제 발로 찾아와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p.142)
★ 있을 때 잘하지 못했다면 지금 있는 것에 잘하라. 잘하기에 늦었다면 아직 늦지 않은 것에 잘하라. (p.150)
★ '동거하는 사람 = 성적으로 오픈된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만연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혼전 성관계를 쉬쉬하는 사회 분위기도 있거니와 마음 놓고 관계 맺을 장소도 부족한 탓에 둘만 있을 공간에 가면 '섹스를 해야 한다'라는 강박을 학습한 한국 커플의 슬픈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현상 아닐까. (p.154)
★ 사랑하는 연인이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끝은 알몸이 아니다. 다른 이와 같이 살다 보면 내 살갗 아래, 까도 까도 새롭게 발견되는 수백 겹 내면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상대방이 보면 깜짝 놀라 도망가지 않을까 싶은 모습들, 때론 악취가 나고 꼴사나우며 지질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p.155)
★ 적나라한 모습은 하수구 밑바닥에서, 변기 뒤 구석에서, 안방 모서리에서 발견되곤 한다. 그러니 동거의 낯 뜨거운 본질은 침실보다는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음침한 어떤 구석에 존재한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p.155)
★ 지난 세월 동안 제대로 여물지 못한 부족한 생활력이 밑천을 드러내는 순간 흠을 보는 사람은 항상 더 깔끔한 쪽이다. (p.156)
★ 알몸, 그 아래 민 낯, 더욱더 아래 밑바닥, 밑바닥에 고인 구린 웅덩이까지 보게 되는 게 동거다. (p.161)
★ 조금이라도 밉 보이는 행동을 하면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잣대는 휘두르기 좋은 몽둥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p.163)
★ 따듯하고 노란 남의 집 조명 빛깔은 고개를 돌려 피하면 그만이었지만, 적극적으로 코를 찾아 파고드는 밥 짓는 냄새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p.168)
★ 용도와 상관없이 사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은 특별하다. (p.178)
★ 매일 쓰는 것들은 제일 좋은 걸로
좋은 건 나중에 사겠다는 생각 버리기 -일룸 (p.183)
★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 주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복이다. 복! (p.184)
★ 맥시멀리스트란 결국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아닐까? (p.187)
★ 매우 미안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더 나빴다. 자기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다는 저 표정! (p.193)
★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 해석본이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다. (p.198)
★ 매일 봐도 또 새롭게 좋아지는 구석이 있다. 그렇게 매일 봐도 늘 새로운 것 중 하나는 출근 전에 오래도록 바라보다 나오는 잠든 설쌤의 얼굴이다. 동그라미 안에 가느다란 선 몇 개로 이루어진 그 얼굴 안에 온 세상의 평화가 다 담겨있다. 오늘 하루를 살며 꼭 지켜내야 하는 대상이 있다면 바로 그 평화로운 표정이겠구나 한다. (p.212)
★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사람과 끊임없이 돈을 쓸어 모으려는 사람의 합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서울. (p.227)
★ 특별한 날이 평범한 일상이 되고 뜻밖의 결과가 당연한 결론으로 여겨지는, 시간이 주는 선물이자 형벌인 익숙함이 찾아오고 말았다.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