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솔직한 글을 담백하고 세련되게 쓰는 작가들에게 꽂혔습니다.

이슬아 작가나 홍승은 작가님같은 분들요. 세련되다는 말을 멋대로 정의내리자면 과장되지 않고 담백한, 감정이 독자보다 앞서지 않는 그런 글이라고 말해두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들의 글이 그리 솔직한 글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슬아 작가가 쓴 아래의 문장들을 보고나서요.


'우리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글을 써왔습니다. 시간 안에 다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야기도 어떻게든 다듬어서 완성하곤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쓰지 않는 이야기 또한 있었습니다. 각별한 경험을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을 때 보존되는 자유와 행복을 선생님도 아실 겁니다.' 


요즘 문학동네에 이슬아작가와 남궁인작가가 편지형식으로 주고받는 에세이가 연재되고 있거든요. 거기에서 저 문장을 발견하고는 언젠가 제 글을 읽은 누군가가 '자전적인 소설이구나'라고 평을 시작했던 경험이 자연스레 떠올랐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허섭스레기같은 글을 보여줬을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그 글을 읽은 사람은 자전적이란 말을 꺼냈습니다. 그 글에 담긴 경험이 제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에서 온 글이었겠죠. 하지만 그건 제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화자가 겪는 슬픔이 제가 겪은 것과 아주 다르지는 않았을 뿐이었죠. 저는 오히려 제 경험을 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었습니다. 겪었던 경험이라면 어떻게든 비틀고 변형해서 아무도 못 알아차리도록 만들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게 쉽게 기록되어서도 안 되고 쉽게 읽혀서도 안 되는 각별한 경험이니까요.


내 경험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건 내 머릿속뿐입니다. 일기에도 솔직한 감정은 남겨두지 않죠. 누군가 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로 솔직한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년엔가 읽었던 아니에르노의 글은 그런 점에서 눈에 띄는 글이었어요. 하지만 그 글조차 아주 솔직한 글은 아닐 거라는 확신도 듭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니 글을 쓰는 일은 꽤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끔 어떤 글들은, 심지어 제 글조차도, 어떻게 보여질까를 의식한 문장들로 빼곡하거든요. 조만간 아니에르노의 글을 또 읽어볼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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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2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02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05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1-05-04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며가며 그 서신들을 보았어요. 혹시 출판되면 읽어보고 싶기도 했더랬답니다. 이슬아씨의 글의 경우 솔직하다기보다는 용감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봄밤 2021-05-05 10:44   좋아요 1 | URL
용감하신 건지 아닌지 저로선 좀 헷갈리더라고요. 오히려 겁이 많아서 그렇게 쓸 수 있는 것 아닐까란 생각도 들고요. 분명한 건, 저는 족히 두 세권은 더 읽고 싶은 글이라고 느꼈다는 점이네요. 왜 이슬아 작가에게 환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지 알 것 같았어요ㅎㅎ

공쟝쟝 2021-05-05 12:35   좋아요 1 | URL
저두 환호하며 수필집을 읽은 독자이지만,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sns를 찾아보면서 제가 관음증은 아닐까?도 생각하게 만든 책은 처음이었어여.. 이후에는 그래서 찾아 읽기가 꺼려졌고, 이슬아작가를 너무 응원하지만 소진되지 않길 바랬어요. 차라리 잘 감추고 있다는 뉘앙스의 인용하신 저 문장은 반갑기도 하네요 ^^ 안심이 되서 저두 몇권 더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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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에 구입한 후 이제야 완독을 했다.

어떤 때는 몰아서 읽는 것이 버거워 내려놓기도 했고 어떤 때는 지루해서 책을 손에 쥔 채 잠이 들었고 그러다 아침에 옆에 구겨진 채 놓여있는 책을 보면 이 글을 쓴 사람이 하늘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에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은 시인이 되고 그보다 못한 사람은 소설가가 되고

그보다 글을 못 쓰는 사람은 평론가가 된다고 누가 그랬었다.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 썼는데 왜 시는 팔리지 않아, 라는 물음이 입안에서 맴돌았고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새로운 형식의 시들과 삼행시가 떠올라서

'시가 정말로 소설보다 나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들이 모조리 잘못되었다는 것을 허수경 시인같은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다.


그러니 시와 소설과 평론이라는 형식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일인지, 무슨 글을 썼느냐보다는 누가 썼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소설인데도 시같이, 시를 소설같이 평론같이, 혹은 기사같이 어느 유행가 가사같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날아다니며 글을 쓴다. 존 버거의 글은 마치 사진같고 존 윌리엄스의 소설은 마치 시 같고 때로는 그 글 전체가 그저 한 인간 같다. 


허수경 시인의 시는 내게 소중한 한 친구의 선물로 처음 접했었다. 어둡고 캄캄하지만 크리스탈 잔이 빛나던 그 공간에서 친구는 술잔 옆에 리본으로 감싸진 그 책을 내게 건넸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라니.

나는 그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웃음이 터졌다. 

꼭 내 마음을 대변하는 제목이잖아.

차가운 심장 때문에 제대로 표현 못하고 늘 엉거주춤한 위치를 택해 서 있던 나를 위한 책이잖아.

하지만 차가운 심장을 가진 내게 그 책은 어려웠다.

얼마안가 그녀의 유고집이라는 이 책을 발견했고 나로선 그 시집을 이해하고 싶어 이 책을 택했다. 그러니 운명적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거 아닌가, 그 친구를 만난 그 시간과 그래서 만나게 된 시집과 그리고 이 책까지. 


지난 번에 자습할 것을 안 가지고 왔다는 아이에게 교무실로 가서 내 책 중 읽고 싶은 것을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이 책을 골라왔다. 많은 책 중 무엇을 골랐을까 궁금해서 아이가 교실 문을 열자마자 아이의 손을 봤는데 보라색으로 칠해진 이 책이 들려 있었다.

그때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직 어린 10대가 가기 전에 쓰는 글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할까 싶었는데 역시나 몇 분 후 아이는 책을 덮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교무실에서 이 책을 골랐던 그 순간,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이라는 제목이 아이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이미 돌아가신 분의 글이 찰나의 순간 어떤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힘은 이미 죽은 힘임에도 불구하고 강하구나, 갸냘프게도 강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쉬운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글을 썼던 지난 날을 반성한다. 역시 나는 쉽게 읽히지 않는 글이 좋다. 스르륵 읽히지만 눈동자가 지나가는 길에 어떤 궤적을 만들어내는, 그래서 다시 그 궤적을 바라보게 만드는 글이 좋다.


어제는 이 책의 끝을 읽고,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늘었다는 것이 조금 슬펐다.

- 쉽게 이해가 되는 시,그러면서도 미학적 긴장이 떨어지지 않는 시, 진짜 운율이 살아 있는 시, 낭송될 수 있는시. 김소월의 시가 아직도 나를 울릴 때, 그때 내가 가야 하는 시의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서정주, 백석의 시. 서정시의 본령으로 들어가는 시. 만일 내가 「딸기」라는 시를 쓴다면 사람들은 딸기를 볼 때마다 그 시가 떠오르는, 그런 것. - P24

- 어제는 혼자서 술을 많이 마셨고 많이 울었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배려랍시고 하는 것이 너무나 서운했나보다.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곳을 누군가가 사정없이 들어왔다고 생각한 시간은 술을 마시게도 하고 울게도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이 서울이라는 곳에서 잠시 만나고 다시 혼자가 되고 그리고 뒤척이다가 잠이 드는 거, 참 쓸쓸하다. 그러나 이 십일월의 아침에 감을 만난다. 감이 걸린 늦가을 하늘은 맑고 청랑하다. 뭘 해도 시달리지 않고 마음 편하게 하고 싶다. 이렇게 설레고 떨리는 것이 싫다. - P87

2012년 5월 8일
-오월의 빛 속에서 소포를 부치고 돌아와 파울 첼란이 번역한 『만델스탐』을 읽는다. 이 전세기의 시인은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수용소에서 죽은 시인, 살해당한 시인, 무엇을 보자고 세계는 시인을 그렇게 죽였는지 모르겠다. 이 세기에도 어디에선가 시인들은 살해당하고 있을 것이다. 오월 봄볕을 쬐며 막 돋아나오는 깻잎의 싹을 오래 들여다보며 이제 오지 않을 사람의 그림자가 저편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다. - P160

-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가장 긴밀하고도 민감한 곳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너는 이 세기의 운명에서 놓여날 수 있니? 너는 팔려야만 존재한다. 팔리지 않으면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발터 벤야민이 점성가라고 생각하는데 무섭다. 나는 예술가로서 팔리지 않는다. 즉, 그러니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청중이 무섭고 낯설다. 이런 생각을 할 때쯤이면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은 한 여인이 생각난다. 그러나 그것조차 한 진실일 뿐. - P170

- 이생은 이렇게도 끝날 것이다. 태양 밑에서 쉬지 않고 녹아가는 아이스바처럼 숨을 거둔다, 라는 것은 마지막 한 숨을 맹렬하게 쉰다는 걸 뜻할 것이다. - P199

2014년 3월 23일
- 어제의 산책. 숲과 함께한 산책. 느끼고 본 것이 쓸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설 때가 많다. - P208

- 하루종일 기다린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종일 기다린다.
감기 없는 세상을
독재자 없는 세상을
몸 없는 세상을
약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
나른한 신경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
저녁이 오는 것을
밤이 오는 것을
밤에 창밖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라일락 곁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그들은 포옹을 기다리고 있거나
입맞춤을 기다리고 있거나
정말 기다리는 게 무언지 알게 될 때까지
약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 P211

- 저녁에 가야 할 곳을 생각하다가 잠시 어두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길녘에서 지나가는 새들이 방향을 바꾸면 울음보다 더 진한 노을이 숲을 가로질러 서녘에 문득 머물다 갑자기 가버리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응급차의 소리가 울릴 때마다 노을은 잠자리의 날개처럼 떨었다. 더 이상 이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없던 새들은 없는 어미를 노래했다. 아주 어려운 세계였다. 내가 증오하는 것들을 새들은 증오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면의 내 밤을 향하여 누군가가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들려주는 노래 같았다. 없어진 노래, 마음속으로는 있었으나 이 길을 따라 걸을 때 아무도 없었던 노래. 나는 이때 내 존재가 생긴 것 같아 서러웠으나 그런들 어떠랴. 어미 흉내를 내며 자살하던 새들도 그랬을 것 같다. - P215

- 어제는 프랑스어 수업을 받으러 간 날, 마틸데라는 나의 맞은편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이에게 우연히 말을 걸 일이 생겼다. 그녀는 최근에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수술이었냐고. 그녀는 말했다, 자궁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다고. 6주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고 했다. - P225

- 우리 모두는 실패할 것이라는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에 시달리든 시달리지 않든 우리는 실패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패하는, 실패하는 존재다. 죽음은 모든 실패의 어머니이다. 몸의 실패.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패의 근원이다. - P227

달리면서 그녀는 앞서 달리는 아들에게 천천히 달리라는 잔소리를 하다가 옆에서 가는 개를 보다가 또 뒤를 돌아보며 작은 차가 안전한지 아닌지 확인했다. 혼자 달리는 사람은 없다. 특히 어머니는 혼자 달릴 수 없다. - P227

- 내일은 사월이다. 그게 뭔가. 나는 모레를 기다린다. 내일이 아닌 모레를. - P235

이렇게 스스로 선택한 고립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독한 외로움이 낳는 무기력. 어떤 글도 어디에도 다다르지 않으리라 싶은 무기력. - P236

그렇다고 죽음이 딱히 실감나는 것도 아니다. 살기 위한 긴 싸움을 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또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도 시를 생각하고 쓰는 일이겠지만 그마저도 앞으로 두 달간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집어치워버릴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경험해보는 시간이 시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시 쓰는 인간들의 근원적인 불편이 아닌가? 시 쓰는 인간뿐인가. 예술을 하는 인간들의 근원적인 불안. 바로 예술은 예술 내의 필연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우연으로 생겨난다는 것. 수공예가 아닌 예술가가 진정 드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 P296

간절한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시간을 공감하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곤 한다. 사람의 시간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린 수국 한 그루를 마당에 심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기 새들이 종일 지저귀던, 늙은 전나무에 있는 새집을 바라보던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절한 어느 순간이 가지는 사랑을 향한 강렬한 힘. 그것이 시를 쓰는 시간일 것이다. 시를 쓰는 순간 그 자체가 가진 힘이 시인을 시인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 P299

- 젊은 시절에 읽었던 몇몇의 시 말고는 자신을 움직인 시가 없다는 글을 읽으며 짜증이 났다. 그건 타인들이 쓴 시 탓이 아니라 자신 탓은 아닌가. 젊은 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자신 탓. - P304

- 바다에는 쓰레기들만이. 북극의 얼음벽들은 무너져내리고 아픈 이에게 내일은 덜 아플 거라고 말하는 이 순간은 무엇인가. 예쁘게 차려입고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을 맞이하러 가는 저녁때처럼 모든 게 다 살아 있던 순간이 자꾸 멀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깨진 맥주병이 뒹굴고 유릿조각에 종소리가 찔리고 있다. - P305

시인으로서 내 존재는 고아이다. 누군가가 나를 태어나게 했고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홀로 남겨진 고아. 고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기댈 전통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전통이라는 것에 기대면 스스로를 베끼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위기감 때문이다. (중략) 또한 전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자이다. - P353

수많은 우연의 순간에서 시는 나온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알 수 없기에 한시라도 시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균열의 순간에 균열을 경험하지 못한다. 순간을 재구성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비슷한 순간을 시 언어로 만들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비슷하지 그 순간이 아니다. 균열을 감지할 때 온전히 경험을 해야 한다. - P358

이 세계를 그리고 인간을 가난과 부, 권력자와 약자로 이분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인간의 결핍에 관심이 있다. 결핍이 빚어내는 내면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 어쩌면 시쓰기의 시작일 것이다. - P360

내 세대는 아직도 자신을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또 어떤 의미에서 내 세대는 ‘적’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적’의 얼굴을 닮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내 세대는 유감스럽게도 ‘개인’을 발견하고 인식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당한 억압을 통하여 내면을 해방하는 것에 실패한 세대인 것이다.(‘내 세대’라고 적었지만 이건 나만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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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작가와의 대화 - 노벨문학상 작가 23인과의 인터뷰
사비 아옌 지음, 킴 만레사 사진 / 바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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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위대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가, 삶으로 말해야 하는가?

2. 글이 정 말 로 모든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가?

3.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번역투가 심하고, 심지어 따옴표조차 엉망으로 들어있는, 제대로 탈고가 되지 않은 책이지만

여러가지 물음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


인터뷰를 한 모든 노벨문학작가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다 옳은 것도 아니기에

비판과 수용을 겸하며 읽을 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가장 공감된 두 페이지,


p.99

시인은 종교를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중 가장 떠받쳐지는 환영에 불과하다.”라고 정의한다. “나는 전위적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나는 대답보다 질문이 마음에 듭니다. 나의 신성은 ‘나는 모른다’입니다.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사후세계를 알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다는 것을. 알려지지 않은 일들은 삶을 매력적인 것으로 바꾼다는 것을.”



p.187

일터에서도 자기만의 의식을 가진, 정신적으로 독립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나는 주도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개인을 옹호합니다. 자기 주변의 생각과 굳이 일치시키지 않는 존재 말입니다. 





가장 씁쓸한 한 페이지


p.401

전직 대통령 데 클레르크는 지금쯤 멋진 별장에서 낚시하고 있을 겁니다. 남아공 국민은 보복하지 않습니다. 자국민에게 그런 짓을 자행하고도 자기 나라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여느 국민처럼 남아공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귀찮게 굴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기 힘든 우리나라 흑인들의 관용입니다.





가슴에 새겨야 할 한 페이지


p.277

“단순한 카테고리로 나누는 세상 분류에 치우치지 않은 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반면, 누군가가 말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보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에게 딱지를 붙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그것들은 현관 옷걸이에 외투처럼 걸려 있었죠. 독재의 일면은 그런 시골의 삶과 비슷합니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자유를 박탈하는 것, 자신의 의지대로 배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 계획된 것들만 허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독재입니다. - P39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매우 가난한 사람도, 절망 한가운데 있는 사람도 아름다워지길 원합니다. 브라질 빈민가 허름한 집에서 잘 다려진 흰 셔츠를 입고 행복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소년을 보았어요.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름다움은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 P41

독일인들은 난민들이 타고 오는 기차가 도착할 역으로 음식, 옷, 아동용 장난감 등을 들고 나가 애정으로 그들을 받아 주었어요.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동독인들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P45

시인은 종교를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중 가장 떠받쳐지는 환영에 불과하다."라고 정의한다. "나는 전위적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나는 대답보다 질문이 마음에 듭니다. 나의 신성은 ‘나는 모른다’입니다.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사후세계를 알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다는 것을. 알려지지 않은 일들은 삶을 매력적인 것으로 바꾼다는 것을."
- P99

실제로 작가는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때까지 수채화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지구상 가장 값진 문학상 발표 날 그의 아파트 경비원은 작가를 찾아온 기자들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아닙니다. 여기는 그런 작가가 살지 않아요. 당신들이 찾는 그는 화가라고요." - P129

시인은 도피를 연출하는 자이며 역설적으로 그의 언어는 도피자의 언어입니다.
- P135

"나는 히틀러 청년대에서 군 복무를 했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자원 입대했습니다. 해군이 되고 싶었지만 무시무시한 나치 엘리트 부대인 친위대에 배속되었습니다. 나는 총 한 방 쏘지 않았어요. 작전에는 딱 두 번 나갔는데 거기서 부상을 입고 미군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치 친위대로 가는 것은 놀랄 일도 의아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미안하게 생각할 일도 아닌데 결과는 치욕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나는 총통을 믿었고 독일의 승리를 믿었습니다. 12살 때부터 착각에 빠진 채 그들에게 현혹된 채 나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 시대의 독일 젊은이들은 그런 우리를 부러워했습니다. 내가 나치의 범죄를 깨달은 것은 전쟁이 끝난 후였습니다. 내게는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진실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상을 참작해줄 사람도 없고 내가 젊은 날 저지른 멍청한 짓이었다고 변명해도 나에 대한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 P165

그 책의 주제는 날조된 기억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를 어떻게 속일까요? 사건 순서를 뒤바꾸고 원래 없던 의미를 부여하고 툭하면 미화하고 품위있게 만들어 내가 했던 것을 구체적인 것들로, 객관적인 것들로 한정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습니다. 나는 내 생각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P169

우리는 말합니다. 민주주의의 적은 극우와 극좌, 이슬람주의자들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로붙터 자유의 내용물을 비워내고 있는 것은 거대 기업과 은행, 입법권을 쥐고 흔드는 정치 권력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쫓아내는 기업들은 그들의 주식이 오르는 동안 우리에게 익숙해진 파렴치한 타락행위를 일삼는 것도 부족해 어떻게 법을 지키냐고 말합니다. 정치가들은 그들의 편법을 묵인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의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 P172

우리는 반드시 이야기해야 합니다. 치명적인 트라우마까지 그 모든 것을. 나는 지금까지 할 수도 알 수도 없었지만 그렇게 된 데 매우 만족합니다. - P172

일터에서도 자기만의 의식을 가진, 정신적으로 독립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나는 주도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개인을 옹호합니다. 자기 주변의 생각과 굳이 일치시키지 않는 존재 말입니다. - P187

거의 모든 논쟁거리는 내가 솔직히 순진하게 답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터키 타블로이드는 그 중 일부를 오려 제멋대로 과장, 왜곡해 슬쩍 흘립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처럼 나를 증명해야 합니다. 나는 내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은 할수 없지 않나요? ‘무서워서 침대 밑으로 숨어야겠어요.’ 어쨌든 나의 기본적인 본능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방구석에 쳐박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 P218

"어릴 때 내가 본, 신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하녀나 요리사들뿐이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을 연관시켰습니다. 신이 전능하다면 나를 용서할 거라고, 그런 이유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 P218

복음서는 원래 그리스로 간 이주민 즉 팔레스타인이 아닌 그리스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쓴 것으로 거기에는 그들의 상황에 적합한 관습이나 관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내 피를 마시라’라고 말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피를 마시는 것은 이슬람교도들이 그렇듯 잘못된 것입니다. 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그리스도에게 뭍는 장면에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동전을 잘 들여다보라고 하자 베드로는 ‘카이사르의 얼굴이 나와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유대인의 동전에는 아무 얼굴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전에 인간의 얼굴을 재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 P237

여행에 대한 ‘네이폴 방식’은 이전에 존재하는 모든 유형의 이론을 창고에 처박아버리는 것이다. "내가 여행할 지역에 대한 단순한 정보 서적조차 읽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 깃든 어떤 인상을 비워낸 나라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물론 그것들을 읽습니다. 엄청나게 읽습니다. 이 과정이 끝나야 비로소 그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특정한 생각을 갖고 여행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나온 결론들은 고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 P272

일부 위대한 영어권 작가들에 대해서도 호평이 나오지 않는다. 그에게 제인 오스틴은 ‘단지 그 시대의 특정 양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매력을 줄 뿐’이고 헨리 제임스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작가로 모험을 감행한 적도 진지했던 적도 없으며 마차 상석에 앉아 ‘젠틀맨’같은 폼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헤밍웨이도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전쟁 중 파리에 있었지만 독자에게 준 것은 그가 무슨 칵테일을 마셨는가 뿐입니다."
- P275

"단순한 카테고리로 나누는 세상 분류에 치우치지 않은 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반면, 누군가가 말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보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에게 딱지를 붙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 P277

지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말한다. "이게 내 나라입니다. 오직 이것만."
- P278

그들을 죽이기 전 간수들은 그들을 무척 상냥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옷걸이에 입었던 옷을 어떻게 거는지, 몸은 어떻게 씻는지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치 그 곳에서 계속 살아갈 사람들을 대하듯. 아이들은 공놀이를 했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이 질식해 죽어갈 곳은 풀과 작은 숲과 화단 사이에 있었습니다. - P287

케르테스는 <운명은 없다>에서 아우슈비츠에서는 행복하기도 했다고 말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중략) "우리는 어떤 소설의 단어 하나에만 연연하면 안 됩니다. 성당 벽돌 하나가 아니라 성당 전체를 경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책에서 독자들은 여러 극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행복’이라는 단어에 서서히 다가갑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그 단어를 만나면 폭발하는데 이것은 고통을 세세히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살다보면 더 이상 위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데 그 때가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그럴 때 나오는 모든 긍정적 자극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오히려 거대한 평온함과 안도감이 들게 만듭니다. - P290

이런 종류의 국제적 사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의견을 내고자 한다면 그것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경험이죠.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무책임한 의견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특히 진실이 왜곡되고 정치적, 사상적, 경제적 다양한 이유들로 정보가 조작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 P337

프랑스는 나라 규모에 비해 유독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많은데 정말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 P351

훗날 차우차우는 창문 밖으로 투신자살했어요. - P364

내 경우, 가족과의 유대감은 전혀 없었고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 큰 혼란인 동시에 밑거름이 되었죠. 나를 괴롭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설적으로 그것들은 나와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들이 아니니까요.
- P365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피아니스트들은 ‘Que reste-t-il de nos amours’를 연주하고 소설 전체가 우리 삶에서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 많은 경우, 우리 삶에서 매우 짧은 한순간만 남겨진다는 데 집착했어요. 몇 장 안 되는 사진과 다이어리, 사라지는 증인들, 그리고 남겨진 증인들도 명확하지 않은 기억에 의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 말이죠.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께 마련이죠.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려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뭔가가 있어야 해요. (중략) 거리, 사람들, 그리고 그것들에 신비를 덧입히죠. 우리의 눈에 평범해 보이는 것들에도 분명히 신비로운 부분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누군가 그것을 자세히 바라본다면 그 신비로운 면을 분명히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 P366

전직 대통령 데 클레르크는 지금쯤 멋진 별장에서 낚시하고 있을 겁니다. 남아공 국민은 보복하지 않습니다. 자국민에게 그런 짓을 자행하고도 자기 나라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여느 국민처럼 남아공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귀찮게 굴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기 힘든 우리나라 흑인들의 관용입니다.

- P401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수용소로 데려갔지만 그때마다 나는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것이 바로 내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고통이고 내가 결고 떼어낼 수 없는 고통입니다." - P166

어떤 사람들은 이제 작가는 더 이상 독일인의 도덕적 잣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데 만족합니다. 그 동안 언론은 고맙게도 나를 ‘민족의 양심’이라고 칭송해 주었습니다. 하인리히 뵐에게 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해 그동안 내가 했던 유일한 것은 내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로 나의 권리를 행사해왔다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때와 똑같은 언론은 잔혹한 주먹을 가하며 내게 주었던 칭호를 거두어 갔습니다. 기쁜 일입니다." - P166

지난날 나치 전력이 있는 정치인, 법관, 군인들에게 가했던 나의 비판에 대해 나는 그들이 나치 권력 조직 속에서 요직을 차지했던 성인 정치가들이고 그들 중 어떤 자들은 나치 이전의 민주공화국을 배반했고 어떤 자들은 나치 선전국 고위관리였으며 어떤 자들은 인종차별 정책의 선동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나 같은 애송이와 똑같다는 말입니까?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을 때 나는 겨우 6살이었습니다. 그런 내게 키신저 같은 늙은 나치를 비난할 것을 강요하겠다는 건가요? 왜, 무슨 이유로? 오늘날 역사가인 요하임 페스트(최근 사망)의 자서전이 다수 출간되고 있는데 그 책에서 그들은 모두 안티 파시스트를 표명하지만 그것들은 순전히 지어낸 것입니다. 잘 보세요. 우편배달원이었던 내 사촌 프란츠는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군사 법정은 내 사촌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내 사촌에게는 아내와 내 나이 또래의 자식들이 4명이나 있었습니다. 나도 그들을 비난하면서 그들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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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대신 욕망 - 욕망은 왜 평등해야 하는가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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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를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희망 대신 욕 망 / 김원영 p.72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지팡이만큼이나

책과 그 책에 맞는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사리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책 추천이라고는 쓰지만,

그 책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순전히 그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이 책은 모두가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고,

강력하게 추천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무엇이 우리를 쿨하게 만드가


물론 이때 유의할 점은 상대가 그 말을 '삐삐가 없다'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삐삐가 있다는 긍정의 "네"도 아니고 삐삐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무지의 "네?"도 아닌, 그 중간쯤의 "네?"를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p.69


형성부전증이라는 생소한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작가는 자다가 일어나면 뼈가 부러져 있었다고 했다. 그는 덤덤하게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엎고 달려야했고, 그의 아버지는 일을 접어둔 채 서울에 있는 병원을 향해 도로를 질주했다. 골형성부전증이라는 질병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나는 장애를 가진 몇 명의 아이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장애가 김원영 변호사가 덤덤히 말한다고 해서 덤덤히 말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는 '쿨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책의 사이사이에 쿨한 척하려 애썼던 흔적들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나있다. 고통에 대해 덤덤히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단순히 시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그를 쿨하게 만들었을까? 그러니까 무엇이 장애인들을 쿨하게 만들었을까?

한 아이의 어머니는 내게 아이의 이야기를 하다가 북받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수화기를 든 채 오열했다. 이 책에서는 쿨하게 행동해야만 했던 장애인의 이야기를 주로 하지만, 나는 그보다 그 뒤에서 함께 쿨한 척 행동하고 있을 장애인의 부모님들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열하던 그 목소리와 죄송하다는 말 뒤에 다시 쿨한 척 이야기를 하는 그 어머님의 목소리에서 벌어진 상처의 깊이를 느꼈기에 나 또한 쿨한 척 함께 연기하며 괜찮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감히 했더랬다. '우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건넸어야 했을까? 울어도 된다는 말은 눈물샘에 쌓인 그녀의 눈물을 빼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얼마가지 않아 채워지리란 건 뻔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내게 자신의 슬픔을 들켰다는 것을 더 힘들어할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아이와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쉽게 공감하거나 위로하지 말기


한국인과 예맨에서 온 난민은 때로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 있지만, 여성으로서 성폭력과 성차별에 맞설 때 한국인과 예맨 출신 여성은 하나가 된다. (중략) 우리의 가치관, 각자의 차이에 따른 주장은 자주 충돌하지만, 우리가 차이를 직시하고 그에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에 솔직하게 맞서는 과정은 새로운 연대로 이어진다.

p.9


이 희망적일 수 있다면 그건 오로지 연대와 공감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 남은 희망은 많지 않다. 우리는 쉽게 분노하고 다른 이의 기쁨에 질투를 느끼며 작은 일에 상처받고 그보다 더 큰 상처를 타인에게 주곤 한다. 그런 우리가 연대할 수 있다면 그건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가 되는 순간들 때문일 것이다. 나와 너는 다른 사람이지만 우리는 수만 가지의 공통성 중 한 가지 공통성으로 묶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공통성 안에는 우리가 약자가 됐던 경험 또한 포함된다. 그런 경험들이야말로 나와 너가 서로를 응원하게 만들어주는 대목이다. 그건 장애인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공감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며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나는 좌절했다.

p.33


하고 싶었던 나는 때때로 내 슬픔을 가리기 위해 더 쿨한 척 하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불행한 아이였는데, 친구들은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다. 쿨한 척, 괜찮은 척, 하나도 힘들지 않은 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내 연기가 무너졌던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힘드냐'라는 단 한 마디의 말과 함께 내 어깨를 툭 쳤을 때였다. 김원영 변호사처럼, 나 또한 그 순간 무너져 내렸다. 물론 그때의 '힘드냐'라는 말과 이 대목에서 나오는 할아버지의 '좌절하지 말아라' 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말로 인해 내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고, 울었고,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할아버지가 건네는 '좌절하지 말라'는 말은 상대에게 동정표를 건넴으로써 동정을 받는 자가 평가받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건 위로가 아닌 폭력에 가까운 일이며, 몸이 아닌 마음을 구타한다는 점에서 더 죄질이 크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건네고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선한 의도일 뿐이었는데 상대가 피해의식을 가졌을 뿐이라고 억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 또한 상대방이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도 또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 책에도 인용되어 있는,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칫솔 한 개를 베푸는 마음도 그 내심을 들추어보면 실상 여러가지의 동기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겪어서 압니다. (중략) 이러한 동기에서 나오는 도움은 자선이라는 극히 선량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조금도 선량한 것이 못됩니다. (중략) 뿐만 아니라 동정은 동정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하는 자의 시점에서 자신을 조감케 함으로써 탈기와 위축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그것은 공감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값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생략)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중략)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감은 애초에 어려운 것이다. 슬픈 사람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여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본다고 하여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짓는 표정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내가 말하는 한 마디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도로 전달될지, 내가 건네는 물건이 그 사람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를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감이고 위로다. 슬픔을 보면서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내는 것이 오히려 그를 위하는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고민을 듣고 "와, 정말 공감합니다"이라고 한다면 난 그 혹은 그녀가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할 것이다. "내 재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흔적 없이 사라질 재물이 받은 사람의 마음과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변치 않는 보석이 된다"라고 말하는 혜민스님에게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언을 하고 위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삶의 서사가 있다.


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슬픔의 프레임을 씌워놓고는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그렇다. 만약 그 장애가 골형성부전증이라면 자기보다 운동신경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비교적' 그런 것이지 그리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아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그가 운동신경뿐만 아니라 모든 능력에서 자기보다 못하리라고 판단한다. 그건 행복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무조건 자신보다 불행하리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 서로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서사를 쓰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각자의 추억과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장애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각 개인들을 판단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아주 무지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나 또한 그의 일면만 보고 상종도 못할 사람이라며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별에 대해, 다양한 나이와 다양한 직업에 대해 카테고리로 묶어 판단하는 동안에 그의 삶이 끝나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은 보통 A라는 역할에 맞는 B라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든지 자신만의 창조적인 방법으로 A를 해낼 수 있다.

p.56


사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언어 장애를 가진 어눌한 아이의 말을 듣고 그 아이가 천사같은 마음을 가졌으리란 프레임을 씌웠고, 어려운 것을 시킬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난 삶이 끝나기 전에 알아차린 셈이다) 하지만 때때로 기대치 않은, 아니,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창의성을 볼 때도 많았고 그건 사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 아이가 가진 '장애'는 그 아이를 구성하는 하나의 특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가진 많은 속성과 서사가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장애를 무시할 수 있는 조건을 주변인이 함께 고민한다면, 그러한 능력이 더 잘 드러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야기다.


'다음 주'를 기다리는 동안 세탁기를 돌리고, 현금을 인출하고, 커피를 종이컵에 쏟아 부은 다음 그 포장지를 반으로 접어 컵 안을 휘젓고 있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던' 공간에서, '도저히 상종하기 싫다던' 장애인 친구를 마음속으로 좋아하면서.

p.58


봉사를 '받아주마'


애인 시설에서 하는 다양한 봉사활동. 이제는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 스펙을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가는 활동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봉사활동과 그 의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린 김원영'이 봉사활동을 오는 대학생들에 대해 서술한 부분 때문이다.


도시인들이 여름 한때 시골 마을에 찾아와 풍경을 즐기며 순박하고 한적한 삶에 향수를 느끼지만 그 마을에 정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 그곳은 '풍경'으로 남아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p.65


종종 봉사자들의 마음에 훈훈함을 담아주기 위해 우리 같은 '봉사를 받는 사람들'이 의무를 지기도 한다. 나는 이날도 내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따라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찾아내 학습 도움을 받았다.

p.71


봉사를 받는다는 것은,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그 도움의 의무를 지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상상했다. 봉사자의 뿌듯함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에게 질문할 거리를 억지로 찾아내는 한 소년의 얼굴을. 그는 또한,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전시되었던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장애인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얼굴들과 그들에게 장학금을 건네주며 뿌듯해하는 얼굴들 또한 머릿 속에 그려졌다. 그가 책에서 말하고 있듯 봉사에 '의도'가 있다면 그건 진정한 봉사가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봉사 또한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봉사자가 되기를 위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작은 행동과 말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신영복 선생님의 글처럼 동정은 공감과 구분되는 값싼 마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복잡하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 자기만을 바라보는 외로운 존재가 있다는 것처럼 어깨가 무거운 일이 있을까. 한 사람의 세계를 온전히 책임지기에 현대인은 너무나 바쁘고 약하다.

p.83


이 책의 어떤 부분들은, 아니, 굉장히 많은 부분들은 사실 장애인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와닿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 여겨졌던 경험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도 해야하는 워킹맘의 마음이 그럴 것이고,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가난한 아이의 마음이 그럴 것이고, 취업하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왜 우리는 어깨가 무거워야 하며, 누군가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어야 하는 세상에 이른 것일까?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아주 많은 곳에서 상당수의 장애인들이 집 안에만 있거나 수용시설에 갇혀 생활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자립형 사립고를 몇 개 만들어야 하는지를 놓고 '100분 토론'을 한다.

p.47


스가 말한 '무지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골형성부전증을 가진 채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TV에서는 자율형 사립고에 대한 찬반 논쟁이 한참이다. 우리는 종종 장애인의 부모들이 너무 많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니, 피해의식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실제로 너무 많은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해서 교육하는 것은 장애아를 편안하고 전문화된 체계 속에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데 있다.

p.97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저소득층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꿈의 크기 자체가 매우 작기 때문에 공부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p.281


합교육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한다.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이젠 흔한 문구,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어라" 라는 말을 장애인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편안한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잠깐 편하다는 이유로 낮은 천장에 갇혀 지내게 만든다면 그 아이는 천장이 열려도 그만큼의 높이밖에 뛰지 못할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경험해야 하고 많은 것들을 움직여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욕망할 자격이 있다.


망 대신 욕망. 이 책에 대해 얼마나 많이 떠들어야할지 모르겠다.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너무 많은 생각들이 교차해 정리되지 않는다. 책을 통틀어 나는 수많은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남자를 봤다. 그는 장애인이고 싶지 않지만 장애인인 자신을 사랑하며, 장애인과 놀고 싶지 않지만 그들을 좋아하게 되고, 다른 장애인과 다르다며 선을 긋지만 그 또한 장애인인 사내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 또한 내 정체성을 찾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진 속성들은 나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하나의 속성만으로 나를 설명할 순 없다. 그게 우리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며 이건 비단 장애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장애인의 욕망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거부한다. 우리 모두는 욕망할 자격이 있으며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그는 희망 대신 욕망이라고 외쳤지만, 아마 그건 장애인에게 있어 '욕망'에 대한 자유가 특히나 보장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책 전반의 내용은 욕망보다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로 읽혔다. 더 많은 글을 쓰고 싶지만 끝나지 않을 글일 것 같아 여기에서 줄이고, 그의 책에서 좋았던 구절들을 나를 위해 기록해둔다.



나의 자부심과 나의 꿈 앞에서 또다시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추락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장애와 아무런 관련 없이 살 수 없을까.

p.144


내 자의식의 분열은 우리 세계가 두 극단으로 분리되면 될수록 더 커진다. 장애인들이 수용시설에 갇혀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거나 모욕의 대상이 되거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면 나는 그 부당함에 분노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들과 다른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늘 애써왔다.

p.220


나는 지금까지도 가난한 가족의 구성원, 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질환을 앓는 몸을 가진 장애인, 가장 무력한 세대라 인식되는 2010년의 20대 그 어느 것에도 진심으로 속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나는 그 삼각형의 중심에서 이리저리 진동하면서 내가 혹시나 다치지는 않을까, 내 자아를 드러내고 상처받지는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다.

p.304


행준이는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고, 뇌손상이 발달장애를 가져왔기에 '하류층'에 속했다.

그 좁은 세계에서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고 서열을 정하면서 한 가닥 남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p.55


이 세계는 자신의 영역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인 존재들에게는 그 앞에 선을 그어 '분리'의 뜻을 확실히 한다. 그곳에 바로 비정상의 세계가 구축된다. 정상과 비정상은 이처럼 분명하게 다른 두 세계로 분리된다. 이렇게 갈라진 세계는 자체적으로 그 체계를 반복 재생산하면서 완전히 다른 인간들의 삶을 만들어낸다.

p.188


실제로 과거 장애인은 하늘이 준 불운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중략)

그러나 장애인 인권 운동은 이러한 '불운'을 사회적 불운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p.255


국가가 산업화 시대에 모든 것을 바쳐 경제성장을 이룬 부모 세대의 노후는 책임지지 않으면서, 그 자녀들에게는 "젊은이여, 모험을 감행하라"라고 권한다면 이는 무책임하고 부당하다. 우리의 가난한 부모에게는 우리밖에 없다. 우리는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험을 감행할 수 없는 것이다.

p.298


바로 이러한 명령, 장애인들의 집회 현장에서 눈물 흘리는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내부에서는 "울지 마, 울면 진짜 장애인 같아"라고 하던 명령.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내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순간 "고백하지 마, 고백하면 찌질한 장애인 같아"라고 말하던 명령. 20대로서 함께 무엇인가를 과감히 시도하려는 순간에도 "하지 마, 어차피 넌 장애인이니 네 삶에나 신경 써. 나서는 건 더 추해"라고 하던 그 명령. 이 사회로부터 혹은 내 내부로부터 자라난 이 오래된 명령 앞에 나는 언제나 굴복하곤 했다.

(중략)

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는, 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기 위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멋지고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뜨겁기 위해 무대 위에 섰을 뿐이다.

(중략)

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멋질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매력적일 수 있는 어떤 메시지를 위해 이 글을 쓴다.


나는 무성적인 존재여야 했다. 그것이 나를 상처로부터, 내 몸의 진실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다.

p.242


무엇을 욕망하는 것이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이들은 그 욕망을 과감히 억누르고 가치 있는 행위를 할 때 자유로워지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하는 것 자체가 자연적 질서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욕망을 과감히 표출하는 것이 곧 세상에서 자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된다.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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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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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너무나 실망했다. 추천사가 하등 쓸모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김초엽 작가의 ˝교차와 확장의 순간들을 경험할 것이다.˝라는 말에 꽂혀버린 탓이다. 초반에는 책을 읽으면서 ‘아, 역시 김초엽 작가가 깊이가 없는 글을 쓴다는 지인들의 평은 사실이었어. 그래, 내가 잘못 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책을 추천하다니.‘ 라는 오만한 생각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교차와 확장의 순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일단, 처음에 실망한 건 김상욱 교수님의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그저 생각의 흐름을 적어둔 것 같은 글들 때문이었다.
‘아, 역시 세상은 공평해. 과학자가 글까지 잘 쓸 수는 없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은 글을 그대로 출판한 건가? 너무 정리가 되지 않은 글인데. 사람들이 과학을 싫어하는 건 글 잘 쓰는 과학자가 없어서 과학책이 재미없기 때문이야. 분명해.‘
‘우리나라엔 빌 브라이슨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없는 걸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 때문에 책에 더 집중하지 못했다. (사실 저 생각 중 몇 개는 현재도 유효한 생각이긴 하지만..)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이 왔다. 이 책의 컨셉 자체가 주제에 대해 생각나는 것들을 자유롭게 적는 거란 걸. 너무 쉽게 쓰였으리라는 의심, 퇴고를 별로 안 한 것 같다는 의심이 있기는 하지만, 책의 뒤쪽으로 갈수록 그들이 같은 주제를 가지고 서로의 영역 안에서 혹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글을 쓴 과정, 그 안에 담긴 생각의 차이가 흥미로웠다.

쉽게 말해, ‘!‘를 보고 문과생은 감탄을, 이과생은 팩토리얼의 개념을 떠올리듯이
그들은 이야기, 소통, 유머, 편지, 시, 결, 자연스러움, 죽음, 감각, 보다, 가치, 두 문명, 언어, 꿈, 이름, 평균, 점, 구, 스케일, 검정, 소리, 재료, 도구, 인공지능, 상전이, 복잡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떠든다.
하나의 단어에 담긴 서로 다른 생각들의 차이가, 그리고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음에도 같은 것을 떠올리는 순간들이 흥미로웠는데 아마도 그 부분이 교차와 확장의 순간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들은 그 주제들을 그저 번갈아가며 정했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그 주제를 정하지 않은 사람의 글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누가 정했는지 알 정도로 티가 나게 차이가 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건 그런 채택 방식의 단점일 뿐이고,
대신 그 채택 방식이 지니는 장점 또한 많았으니 단점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밀도있는 문장을 위해 읽겠다고 한다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는 두 인간이 예술을 어떤 각도로 바라보는지가 궁금하다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은 19,000원이다.

난 항상 책을 읽을 때 책의 가격을 보곤 하는데, 그러면 보통 이 두 가지 행위 중에 하나를 하게 된다.
(1) 책을 한참 읽다가 중간쯤 가서 책을 뒤집는다
(2) 책을 조금 읽다가 뒤집어 본 후 책을 책상에 탁, 하고 내려놓는다.

예상가능한 답안이겠지만, (1)이 좋은 책을 만났을 때 (2)가 별로인 책을 만났을 때다.
(1)의 경우엔 몇 시간 정도의 기쁨을 느낀다. 책에 돈을 지불했음에도 돈을 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돈이 주는 기쁨이다. (2)의 경우엔 며칠 혹은 몇 주를 괴로워한다. 쿨하게 그만 읽고 싶지만 끝까지 읽어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또렷하게 깔(?)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읽으려 노력해본다. 시간과 돈, 좋은 책을 읽을 기회까지 모두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사람에게 읽지 말라는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읽는다. 이 책의 경우엔 처음에 (2)였으나 이상하게 읽다보니 재밌어졌고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가격표를 봤다. 변했을 리 없는 그 숫자들을 보며 그래도 이건 아닌데, 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덜 억울해지긴 했다. 책의 재질이 좋고 아마 책의 구성을 위해 쓰인 페이지들도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건 좀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책의 구성 중 하나가 하나의 글에서 소위 ‘명문‘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큰 글씨로 한 페이지에 가득 채워넣는 구성인데 그런 구성을 취하는 책 치고 내 기준 별점 5개짜리 책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건 진짜 팩트.
하지만 그래도 추천할만한 낭만과 지식이 있는 책이었다.

좋았던 장면들을 사진으로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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