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한 삶 - 그들은 어떻게 일과 생활, 집까지 정리했나?
이시카와 리에 지음, 김윤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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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홀가분한 삶을 원할 것이다. 자발적인 의지로 번잡스럽고 어지럽게 살고 싶은 이는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모진 세파에 부대끼며, 인생의 질곡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좀더 나은 노후를 위해,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우리들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해야 하고, 누군가를 넘어서야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진 것이 많아지고, 좀더 큰 집에 살게 되길 희망한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현재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결국은 이런 논리인 것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청춘이 누릴 수 있는, 혹은 당연히 누러야 하는 행복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백번 양보해서 젊어서 내 모든 것을 던져 노력한 덕분에 어느덧 나이가 들어 경제적인 풍요를 얻었다고 치자. 사회적인 명성까지 더해진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딱 그맘때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탄력으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이만하면 됐다 하고 한숨 돌리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일본의 프리랜서 작가인 이시카와 리에가 쓴 <홀가분한 삶>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눈돌릴 여유없이 살다 이제 앞이 아닌 옆자리도 보고, 뒤도 한번 돌아보게 된 사람들이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환경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삶들을 소개하고 있다.

 

1장 홀가분한 삶에 관한 이야기에는 60대에 고향으로 돌아간 요시모토 유미, 40대에 인생을 리셋한 야마자키 요코, 정년을 포기하고 40대에 자신들의 가게를 차린 오쿠보 기이치로와 미쓰코 부부, 50대에 집을 리모델링한 야마나카 도미코, 50대에 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된 에다모토 나호미, 70대에 아들네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 나이토 미에코씨가 겪은 삶의 변화가 담겨져 있다.

 

누구의 삶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생에 정답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여러가지 다양한 해답만이 존재할 테니까. 지은이 이시키와 리에는 나이 들면서 점점 좋아지는 것 중 하나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라고 얘기한다.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그녀의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녀는 홀가분한 삶의 실천을 위해 세가지를 충고한다. 기쁘게 소유하라. 기분 좋게 줄여라. 죽음을 생각하라가 바로 그것이다. 기분 좋게 줄여라는 것은 어찌 보면 요즘 유행한다는 미니멀 라이프의 방식과 유사하다. 하지만, 무작정 버리고 줄여나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소중한 것을 위해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미니멀리스트의 길일 것이고, 그 길을 통해 홀가분한 삶에도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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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 물건을 버린 후 찾아온 12가지 놀라운 인생의 변화
사사키 후미오 지음, 김윤경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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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올해 읽었던 책 중에 최고다. 문장이 아름다워서라거나, 뭔가 거창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지금껏 고민해 왔던 것들, 그리고 바꾸어 나가고 싶던 것들이 이 책속에 있어서다. 문제에 대한 원인 규명도 나와 있고, 그 해법도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으니 이쯤되면 최고의 책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일본에서 편집자이자 중도 미니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사사키 후미오가 쓴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는 책 표지부터 지은이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가구와 치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빈 방을 환한 햇빛이 가득 채우고 있다. 넓은 여백은 맥북 에어 하나와 안경, 지갑, 그리고 정갈하게 세탁된 이부자리가 딱 필요한 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흡사 갓 이사 와서 아무 것도 없는 자취생의 방이라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수많은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확실히 그렇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사진들을 통해 이 책의 지은이 사사키 후미오가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삶을 공고히 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내 이야기인 것 같아 참 좋았다. 사사키 후미오는 마치 나의 판박이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과거의 추억 또는 언제일 지 모를 미래의 단 1%의 효용성 때문에, 혹은 너무 비싼 값을 치뤘다는 후회 때문에 집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것들. 작은 무엇이라도 간직해야만 하는 묘한 강박증으로 인해 공간은 협소해지고 우리의 삶도 덩달아 피폐해진다.

 

누구나 태어날 때 아무 것도 손에 쥐고 오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처음에는 미니멀리스트였다는 것을 전제로 이 책은 시작된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물건은 왜 점점 늘어만 가는 것일까. 물건을 늘리는 이유를 알면 물건을 줄일 수도 있다고 지은이는 진단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물건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이유는 익숙함과 싫증 때문이다. 갖고 싶어 하던 물건을 손에 넣었지만 금방 익숙해지고 싫증이 나게 되고, 곧 다른 자극을 제공하는 새로운 물건이 갖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물건에의 소유욕은 결국 내면의 가치를 물건을 통해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착각이 그 바탕에 있다고 사사키 후미오는 지적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문제는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알리는 방법에 있다. 사람의 가치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쉽게 눈으로 드러나는 외모와 같이 겉으로 보이는 가치도 있지만 그 한계가 뚜렷하다는 약점이 있다. 배려심, 지적 능력, 창조성, 인내심 등과 같은 내면의 가치는 한계도 없을 뿐더라 그 가치를 가꿔 나가는 보람이 있지만, 남에게 알리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면을 물건으로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물건이 곧 '나' 자신이라는 착각에 빠져 물건 자체의 쓰임새 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알리려는 목적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됨으로써 물건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 너무 많아진 물건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고, 결국은 물건의 가치가 자신과 동등해지고 심지어는 물건이 주인이 되어 버리는 파국을 접하게 될 수도 있음을 이 책에서는 경계하고 있다.

 

이를 우려한 지은이는 친절하게도 인생이 가벼워지는 비움의 기술 55가지와 더 버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15가지 방법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들이다.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라. 잃는 게 아니라 얻는 것이다. 버릴 수 없는 게 아니라 버리기 싫을 뿐. 영원히 오지 않을 '언젠가'를 버려라 등등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해법들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준다 한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삶을 통해 얼마나 삶이 행복해 질 수 있느냐 하는 것들을 설득시키려 한들,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현실에서 구체화 시킬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제는 작은 것부터 버려 보려 한다. 소중한 것을 위해 줄이는 사람, 미니멀리스트가 나도 되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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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집 - 갖고 싶은 나만의 공간, 책으로 꾸미는 집
데이미언 톰슨 지음, 정주연 옮김 / 오브제(다산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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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이런 일도 생긴다. 데이미언 톰슨이 지은 <책과 집>은 책과 함께인 집의 모습은 어떨까 하는 궁금함을 채워 보려 샀던 책이다. 그런데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생각지도 않던 인테리어 책을 읽게 된 셈이다. 책 인테리어 라는 용어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집의 구석구석을 인테리어 함에 있어서 책의 효용을 제대로 드러낸다.

 

책이라기 보단 잡지를 읽는 느낌이 강했다. 사진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에 대한 설명이 뒷따르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기는 아주 편하다. 이백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데 불과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사진 하나하나, 글귀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며 읽는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집의 일부분인 거실, 서재, 부엌, 침실, 현관, 계단과 복도 등이 책과 잘 어울어진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책을 집의 인테리어 소재로 잘 활용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읽었던 책, 혹은 읽기 위한 책으로 집을 채우고 싶은 나의 욕심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책은 결코 아니다.

 

언제가 될 지 모를 집짓기가 끝나면 나 역시도 그 속을 책으로 채울 심산이다. <책과 집>에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거실이나 서재, 작업실은 물론, 부엌과 침실 등 활용 가능한 공간이 있다면 그 어디든 책이 놓여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나에게 좋은 영감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저 머릿 속에만 맴돌던 상상들이 이 책의 실례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데 큰 만족감을 느꼈다. 나의 부족한 감각과 상상력으로 생긴 큰 틈새를 매꿔주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테리어의 소재로 전락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없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이다. 누군가에겐 책이란 것이 가장 훌륭한 장식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책만큼 집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것은 없다라고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이 씌어진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뭐 어떤가. 책이 인테리어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한들, 그렇게라도 사람들과 책이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꿈꾸는 책으로 가득한 집이란 것 또한 다른 사람들의 허영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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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책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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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은 말 그대로 여행자를 위한 재미난 책이다. 하지만 50여년 간 세계를 여행하고 40여년 간 여행에 관한 글을 써 온 여행 문학의 대가이자 소설가인 그의 명성에 어울리는 여행기를 기대했다면 한참 잘못 짚은 셈이다. 책을 처음 폈을 때 이게 뭔가 싶어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이 책의 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여행자의 책>에는 여행자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들이 담겨져 있다. 제1장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제27장 '당신만의 여행을 위하여'에 이르기까지 무척이나 광범위하다. 때로는 여행자의 가방 속까지 들추어 보듯 꼼꼼하게 살펴 보기도 하고, 때로는 몽환적인 여행자의 시선처럼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잘 쓰여진 여행기 한편을 읽어볼 요량으로 이 책을 구입했던 나로선 당혹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폴 서루 자신의, 혹은 저명한 여행 작가의 주옥같은 글들을 여기저기서 따 와 전체의 구성을 이뤘다. 그것 또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이나 많은 작가의 글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 맥락에 필요한 적재적소의 필요조건들을 직감적으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이 책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구분되어 진 스물 일곱 가지 항목이 제각각 독립성을 갖추고 있기에 따로 떼내어서 읽는 방법도 괜찮은 선택일 수 있겠다. 통독을 하든, 정독을 하든 독자의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글들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며, 공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테니까.

 

폴 서루. 그가 부럽기도 했고 그런 삶이 두렵기도 했다. 간혹 여행자로서의 삶을 꿈꿔 본 적이 있다. 좋아하는 여행을 하며, 글과 사진으로 여행기를 남겨 밥벌이를 하는 삶이란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하지만, <여행자의 책>에 소개되어 있는 수많은 여행 작가들의 삶을 보다 내밀히 관찰해 보고 나니 그것이 그리 썩 만족스러운 것도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장에 소개되어 있는 '당신만의 여행을 위하여'가 가장 마음에 든다. 폴 서루는 당신만의 여행을 위한 열가지 충고를 남겨 놓았다. 집을 떠나라. 혼자 가라. 가볍게 여행하라. 지도를 가져가라. 육로로 가라. 국경을 걸어서 넘어라. 일기를 써라. 지금 있는 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소설을 읽어라. 굳이 휴대전화를 가져가야 한다면 되도록 사용하지 마라. 친구를 사귀어라. 당신이라면 몇 가지나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책을 읽고 나서 한 가지 아쉬운 기분이 든다. 나름 볼거리 많고 먹거리도 풍부하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이 그의 책에서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행자의 책> 속에서 한국은 17장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편에 아주 짧게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보신탕의 주재료는 늘 개고기이다."로 시작과 끝을 맺고 있는데, 폴 서루 자신이 개고기의 식용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중국과 일본의 여행기나 여행 작가들이 군데군데 소개되어 있는 것에 비하면 한국은 소외되어 있다. 물론, 근대까지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자 은둔자의 나라 이미지가 강했던 탓도 있겠지만, 우리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책임이 더 크다 하겠다. 바야흐로 여행의 시대다. 뛰어난 여행 작가의 글이 숨겨진 보석 같은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그날이 빨리 왔음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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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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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돌이켜 보면 수없이 많은 치욕의 기억이 존재할테지만 나는 양란의 시대인 선조와 인조 재위 때를 포맷하고 싶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지금의 우리 형편을 보고 '헬조선'이라 비하하지만, 전쟁터보다 더한 지옥은 아마 현실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국된 후 200년이 흐른 1592년, 조선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섬나라 오랑캐라 얕보았던 일본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며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물렸다. 일본의 도발 징후가 뚜렸하게 감지되었음에도 조선 조정은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아니,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 보자면 그들은 엄연히 눈앞에 닥쳐오고 있는 고단한 미래에 애써 눈감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통한의 역사를 겪은 조선에게 하늘은 더욱 가혹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참혹한 전란을 미래의 교훈으로 반면교사로 삼고자 했지만 현실 정치는 그의 뜻을 따라가지 못했다. 무능했던 군주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권좌에 올랐지만 머지 않아 큰 격변이 또 한번 휘몰아 친다.

 

최근 들어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왜곡된 군주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도 그를 것이 연산군과 더불어 반정으로 쫓겨남으로 인해 조종의 시호를 받지 못한 군주였으므로 정사에서 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던 탓이다. 쫓겨난 군주 였기에 그는 반정세력에 의해 어리석은 군주로 역사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광해군 시대에 있어 여러 국정의 난맥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국제 정세를 보는 밝은 눈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임진왜란 이후 명은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만주의 여진족이 발호하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근거리 중립 외교를 펼침으로써 국가의 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조선으로선 안타까운 정변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은 기울어져가는 중원의 명 왕조에 사대를 강화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신흥강호 후금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교조주의와 어설픈 소중화 사상의 사대주의에 빠져 파국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역사에서 재확인하면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명기 교수의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바로 그 아픔의 역사를 재인식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는 "병자호란은 과거아 아닌 현재다.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 시대의 비망록"이라고 새삼 이 시대에 병자호란을 다시 꺼내 이야기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수백년 전 우리 조상이 그랬듯 주변 정세를 제대로 살피고 준비하고자 하는 뜻이다. 떠오르는 거대 중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또다시 피곤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제국'이 쇠퇴하고 '새로운 제국'이 떠오르는 전환기마다 한반도는 늘 위기를 맞았고, 지혜롭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미국과 중국의 거대한 세력이 주도하는 G2시대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모두 지당한 지적이다. 임진왜란이 그랬듯 병자호란 역시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절한 패배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불과 수십년 전에 그토록 처참한 전란을 경험하고서도 과오를 고쳐나가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비하한다 해도 도무지 변명할 수 없는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로서, 김훈의 <남한산성>을 통해 병자호란을 겪었던 수백년 전 조상들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현재의 우리 삶이 아무리 팍팍하다 한들 그때 그 사람들의 삶에 비할 수 있을까. 어려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늙으막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겪어야 했던 억세게 운 나쁜 사람들 앞에서 감히 '헬조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참극을 다시 겪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다시금 곱씹어 봐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그저 듣기 좋은 구호로 끝나서는 안된다. 역사는 현재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고, 반복되는 측면도 있다. 병자호란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일 수 있다는 한명기 교수의 지적에 뒷머리가 서늘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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