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2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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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받았다. 이 소설집의 본편에는 10편이, 가제본에는 표제작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를 비롯하여 감염”, “리발관(離拔館)의 괴이”, “내 친구 좀비4편만 실려 있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은 <><고통에 대하여>만 읽어보았는데 이번 소설들은 호러의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불친절한 면이 없지 않다. 독자가 유추해보아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작가의 의도가 있었겠지 싶다.


예컨대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에서 등장인물들은 이름 없이 첫 번째 남자, 두 번째 남자, 이런 식으로 서술되는데 마지막에 등장한 첫 번째 남자의 정체에 어리둥절해 할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나오지 않았거니와 갑자기 살인자가 되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첫 번째 남자 역시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 다 읽은 후 소설의 맨 앞으로 돌아가 보면 이런 문구가 있다.


나는 집에 있다. 그와 함께 있다. 기다리고 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또한 당신의 원혼과 함께.



첫 번째 남자의 정체를 가늠해 볼 힌트를 미리 던져준 것인데 간과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또한 당신의 원혼과 함께


는 소설 중간에 여러 번 반복된다. “Memento mori”가 떠올랐다.


두 번째 소설 감염은 인간 행위의 양면성에 대해 말한다. 不快는 종이 한 장 차이, 아니 한 가지 안에서 피어나는 이파리 같다는 생각을 들었다. 자신이 양분을 많이 준 쪽 잎이 더 많이 피어날 것이다.

 

마음이 원하지 않는데 있는 힘껏 몸을 움직여 내가 느끼지 않는 고통을 타인에게 가한다는 그 부자연스러운 행위는 기이한,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더없이 혐오스러운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위는 주인공이 우연찮게 휘말린 사건에서 예상치 못한 감각을 깨달으며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다. 그가 내몰린 상황은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을 떠올리게 했다. 그 실험의 결과에 대한 시시비비는 차치하고, 공통적으로 인간 본성에 숨어져 있는 폭력성이 발현, 심화되는 모습에 제3자인 독자도 양가감정이 인다.


저런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장면은 읽고 싶지 않다는 거부반응과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주인공의 행위를 계속 보고 싶다는 심정이 동시에 들면서 놀라게 된다. 자신은 과연 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단호하게 뿌리칠 수 있었을까?


마지막에 주인공이 일상으로 돌아가며 소설이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폭력(가학성)의 맛을 본 주인공은 옛날의 그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 폭력 충동이 가라앉길 바라지만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주인공도 독자도 잘 알고 있다.


내 존재 아래에서 타인의 존재가 무너지던 그 쾌감이 온몸으로 그리워서, 나는 잠들지 못한다. 주먹을 쥔 채, 이대로 끝없이 누워 있는 것이다.


不快가 동시에 이는 감정이듯. 역시 한 몸이며 가학적 쾌감이 성적 욕망에 맞닿아 있음을 이 소설은 말한다. 매질을 해달라던 남자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그는 잊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폭력으로 추하게 변해가는 남자를 보며 성적 욕망을 느꼈다. 그러한 비윤리적 상황에서 이는 죄책감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의 쾌감은 중독적이었다.


이 소설의 상황은 지극히 극단적이다. 폭력에 무감해지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제목을 감염이라 붙인 이유를 알 것 같다. 폭력성은 서서히 감염되어가는 질병이라고자신의 내면을 두  부릅뜨고 지켜보지 않으면 감염된다는 것을!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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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혼은 멈추지 않고 - 한 달에 한 권 시와 그림책
이화정 지음 / 책구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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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혼은 멈추지 않고>라는 책의 제목만 듣는다면 어떤 내용일지 쉬이 가늠하기 어렵다. 잠언집 같기도, 죽음을 소재로 한 에세이 또는 소설 같기도 한 이 책의 부제는 한 달에 한 권 시와 그림책이다. 아하, 그제야 감이 온다. 시와 그림책을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로구나! 저자의 소개를 보니 이화정씨는 혼자 읽다가 같이 읽은 경험을 책으로 썼고, 그 후 독서 모임의 결과물을 책으로 내고 있다. <우리의 영혼은 멈추지 않고>는 부제대로 시집을 읽고 모여서 낭송하고, 연관되는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글을 쓴 모임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모임의 운영자로 매달 시집과 그림책을 선정하고 구성원들과 함께 할 계획안을 짰다. 그것을 모두 공개했는데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독서 모임이나 시 읽기에 도움을 받고 싶어 골랐다면 탁월한 선택이다아직 이 책의 존재를 모르고 있지만 꼭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한다. 독서 모임을 시작하려는데 막막한 사람들, 독서 모임인데 매번 수다로 마무리되어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싶은 운영자, 시와 가까이 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인공호흡이 될 것이다.


그동안 나도 여러 독서 모임에 참여해보았으나 시와 그림책을 같이 읽은 적은 없었다. 일 년 동안 매달 두 권씩 같이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서평단에 신청했다. 운영자이자 저자인 이화정씨가 올린 매달의 계획안을 보고 놀랐다. 회원들이 준비해야 할 사항들을 꼼꼼하게 안내하여 허투루 참여할 수 없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 이렇게 세심한 준비와 적극적인 참가자들이 있었기에 성공적인 모임이 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책으로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마음에 든 것이 있다. 월별 계획안을 공개했지만 모임 진행 내용을 중계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 달에 다룬 시와 그림책으로 저자가 한 편의 에세이를 썼다. 저자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나 회원의 사연, 그 달에 다룬 시인에 대해, 두 책 외에 연관되는 다른 책들 소개까지 알차디 알찬 글이다. 11월과 12월에 가서 또 놀라고 말았다. 11월에는 저자가 회원에게 쓴 편지를, 12월에는 회원들의 글을 실었다. 회원들을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진심어린 편지를 읽다 보니 대단하다는 말밖에... 12월에 실린 회원들의 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시를 만나 자신을 만났고 사랑하게 되었으니 계속 시와 함께 살겠다는 의지였다.


이 책을 서평단 자격으로 받아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좋은 책이라고 하는 게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읽는 내내 나도 저 모임에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시를 읽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 '저들처럼 글도 잘 쓸 수 있게 될까?' 하는 기대감으로 계획안대로 따라한다 해서 결과가 같을 순 없다. 사람이 다르고 그렇기에 진행도 달라질 터이고 누구나 다 글을 잘 쓰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먼저 길을 걸어간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나만의 길을 낼 날이 올 것이다.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그 길에 함께 할 시집과 그림책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책 한 권을 샀는데 24+α 라니!


당장에 참여할 수 있는 모임이 없다면 혼자 시작해 보자. 두둑해진 마음으로 기쁘게 책을 읽고 필사하고 글을 써보면 된다. 한 줄부터 시작해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문장으로 풀어내 보는 거다. 도반이 있으면 좋겠지만 혼자라도 괜찮다. 책 속 선배들과 시와 그림책이 있으니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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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 코끼리와 코요테 인생그림책 28
나현정 지음 / 길벗어린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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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비밀>을 길벗어린이로부터 지원받아 읽고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체리나무 아래,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늙은 코끼리 한마리가 우두커니 서있고 코요테가 다가옵니다. 죽음의 냄새를 쫓아온 코요테를 코끼리는 반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사는 코요테에겐 잘못이 없지요.






이렇게 삶이 끝난다는 게 너무나 허무한 코끼리, 그런 코끼리에게 코요테는 세상에 끝이란 없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서부턴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즉 이 그림책 <비밀>은 액자구조입니다. 코요테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요?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 똥>이 연상되는 코요테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은 생명 순환의 비밀을 배우게 됩니다. 이 책은 죽음이 소재이지만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림의 톤이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코요테의 표정도 사납지 않거든요.

그래서 유아가 보더라도 무겁거나 슬프지 않아요. 텍스트를 읽어주는 주양육자가 굳이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책속의 텍스트만으로 충분하고 그림은 더욱 친절하거든요. 최후를 맞이하는 코끼리의 표정이 평화롭기 그지없기 때문에 죽음을 끝이 아닌 새로운 탄생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노년, 가까운 이의 죽음때문에 슬퍼하는 어른에게도 따뜻한 위안이 될 그림책입니다.


코요테의 마지막 문장이 이 책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코끼리야, 너구나! 이렇게 작고 예쁜 꽃으로 피어나다니, 삶은 참 신비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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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 - 잃어버린 감수성을 찾아 떠나는 열아홉 번의 문학 여행
이선재 지음 / 다산초당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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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여행으로의 초대장, <다시 문학을 사랑한다면>10년째 일타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국어 강사 이선재씨의 첫 번째 책이다. 공시생에게는 유명인이라 저자의 책에 선뜻 손이 가겠지만, 그 외의 독자들이라면 저자의 명성을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공시생이 아닌 누구라도 이 가을, 문학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에 이 책은 맞춤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소설과 시는 만만하게 선택할 장르이고 제목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책이 많지만 정작 그 작품을 읽어보았냐고 물어보면 그렇지 않은 이가 더 많을 것이다. 여러 문학 작품을 섭렵할 정도로 책 중독인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작품들을 다 아는 사람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대개 학창 시절 필독서로 만나 재미없게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저자를 알건 모르건, 문학 작품을 많이 읽었든 아니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제목만 알고 있는 책을 정독해 볼 기회를 준다. 또한 소개하는 문학 작품에 저자 자신의 일화, 특히 초창기 강사 시절 어려웠던 경험들을 녹아내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공감할 내용이 많다. 평소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문학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나를 짓누르던 고통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한 독자라면 이 책으로 도움을 받길 바란다.


목차는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을 때,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문득 외로움이 찾아올 때, 풀리지 않는 질문 앞에 섰을 때로 나누어 각각의 상황에서 읽어보면 좋을 작품들을 엄선했다. 일타 국어 강사의 추천이니 믿고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습관처럼 문학을 찾았다. 문학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문학이 온전히 자신 안에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쓰며 행복했듯 독자들도 문학을 통해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고 마지막 말을 마쳤다.


학창 시절 읽었던 작품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을 때 예전 감흥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어릴 때와는 전혀 다른 감동에 놀라기도 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전문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면 큰 수확이다. 그런 작품을 찾아 읽고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다면 더없이 만족스런 문학여행이 될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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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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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작가는 1995년에 <영원한 이방인>으로 미국의 주요 문학상 6개를 수상했다. 이어 낸 소설들도 여러 상들을 받으며 미국 문단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스탠퍼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타국에서의 일년>은 그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로 이번에 RHK 출판사에서 가제본 서평단에 뽑혀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간 소설에서 선보인 주인공들과는 달리 스무살 청년 틸러 바드먼이다. 그는 남부 던바라는 도시에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그의 심연에는 채워지지 않는 큰 구멍이 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의 가출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나 엄마의 부재는 그에게 큰 결핍을 심어주었다. 아버지 클라크는 틸러를 부족함 없이 키웠으나 아들과 그리 돈독한 관계는 아니다. 시시껄렁한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을 정도이긴 하나 틸러가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문자로 알릴 정도다.


틸러는 캐디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만난 퐁 로우라는 중국인을 따라 아시아 여러 곳을 다니게 되는데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지극히 무모한 결정이다. 그러나 틸러에게 한국인의 피가 12.5% 섞여있다는 설정이 퐁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것을 어색하지 않도록 해준다. 또한 틸러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퐁에게 매력을 느끼고 중국인의 가치관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퐁은 자신의 사업에 틸러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아시아행을 제안했고 틸러는 퐁과 함께 일 년여의 시간동안 그와 함께 하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틸러는 일 년 간 타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밸이라는 연상의 여인과 그의 아들 빅터 주니어를 만나 그들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밸과 만나는 장면으로 소설이 시작되나 밸과 지내는 시간과 아시아에서 보낸 시간들이 틸러의 일인칭 시점으로 교차 서술된다. 스무살 청년이 일 년 간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라 성장소설로 볼 수 있다. 아들이 있는 연상의 여성과 동거를 하는 것도 그 나이대의 사람이 하기 힘든 경험이다. 작가는 이런 일반적이지 않은 경험을 스무살 청년이 하게 함으로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장소설로 읽었다면 틸러가 한 경험들이 분명 그에게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으리라고 해석할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아래 문장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핀으로 꽂힌 귀뚜라미였다. 당연히 비즈는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최소한 의식적으로는 말이다. 나는 반박했다. “늘 노력은 했지.” 내 노력으로 뭐가 달라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든 해외에서든 모든 일이 잦아든 지금은 내가 좀 괜찮아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과거의 자동 구동 모드로 전환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 디폴트 상태의 소년, 그 디폴트 상태의 영혼이 되지 않을 것이다. 피도, 사랑도 묽어진 녀석. 자기의 머릿속에서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녀석.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저 선언, 스스로 이제는 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자평은 성장이라는 단어에 부합한다. 그리하여 소설의 가장 끝에 온 문장, ‘그런데도 계속 나아간다. 눈을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준비된 채로.’는 어른으로서의 삶의 자세가 명확히 드러난다.


틸러가 아버지 클라크와는 결이 다른 어른 남자 롤모델을 퐁에게서 찾으려했다면 밸과의 관계는 엄마의 부재를 메우고 싶어했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그녀와 관계하는 모습들은 이중적이다. 밸 모자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밸의 안전한 우산 아래에 있고 싶은 두 마음이 공존한다. 그러나 틸러가 정말 밸을 보호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 틸러는 밸에게 빌붙어 사는 형국인데 밸이 엄마처럼 자신을 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면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밸 모자와의 동거가 틸러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성인 남성으로 성장했다고까지 할 수는 없으나 역시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그의 심적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역으로 작용하는 연금술이라도 된 것처럼 사라진다. 그 모든 생명의 황금이 흩어져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렇더라도 나는 이 세상에 맞게 나 자신을 만들고 싶다. 이 세상이야말로 나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세상이다.’


세상을 겉도는 치기어린 청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잘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로 읽힌다. 이름처럼 그는 이제 인생의 키(tiller)를 스스로 핸들링하는 어른이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단순화하면 특이한 경험을 한 어떤 청년의 이야기정도가 될 것이다. 이 소개에 흥미가 일었다가 분량을 확인하고 뜨악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700쪽에 육박하는 길이에 시도할 엄두가 안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긴 글 읽기에 부담감이 없는 사람, 이름만 들어본 이창래 작가의 스타일을 직접 만나고 싶은 사람, 소설 속에서 좋은 문장을 찾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추천한다.


나는 작가의 데뷔작 <영원한 이방인>을 읽었고, 이 책은 두 번째로 만났다. 주인공부터 분위기까지 느낌이 아주 달랐다. 이번 소설을 읽으며 나는, 작가가 틸러의 경험 속에 켜켜이 숨겨둔 문장들을 발견해 길어 올리는 재미를 만끽했다. 그 문장은 틸러가 처한 상황에만 해당하는 한정적인 표현처럼 보이나 그것을 들어내 단독으로 읽어보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에 놀랐다. 특수성을 내포한 보편적 문장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둔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것을 찾아내는 재미를 느껴 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 소설을 추천한다.


@ 내가 고른 문장들


나는 우리가 각자의 연옥을 짓는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뿌리를 내렸다는 기분이 들면 무엇도 나의 뿌리를 뽑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나를 사랑하더라도, 상황의 힘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것.


모든 커플은 아무리 가깝든, 아무리 오래 함께했든, 진짜 중요한 개념은 말하지 않은 채로,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를 놔둔 채로 살아간다.


쪼개는 행위 자체가 벌어진 틈을 다시 여무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을 절대 혼자 두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 걸까?


어느 장소를 떠올리면 반드시 그곳의 향기를 함께 떠올린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버틸 수 있어. 우리는 견뎌내고 계속해서 움직이지.


이 세상은 위대한 학교다. 이 세상은 너의 말 없는 스승이다.


우리는 그저 빗속의 눈물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치료제라 생각하는 질병이야.


우리 인생에 대한 사랑이 너무 소중해서 깨어 있는 매 순간 애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삶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말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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