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위의 삶 -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실에서 마주한 죽음과 희망의 간극
라훌 잔디얼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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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학 드라마를 즐겨보고 의사가 쓴 책도 찾아 읽는 편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환자를 대하는 저런 따뜻한 의사들이 분명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낭만닥터 김사부”는 실감나는 수술 장면에 매료되어 보았다. 이국종 교수나 김승섭 교수, 남궁인씨의 책들도 읽어왔다.

책 <칼날 위의 삶>은 제목부터 긴장되었다. 20여 년간 1만 5천 명 이상의 환자를 만나고 4천 건 이상의 수술을 진행해온 의사가 쓴 책이라는 소개를 보니 꼭 읽어보고 싶었고 기대했다. <골든 아워>의 긴박감과 “낭만닥터 김사부”의 피 튀기는 수술 장면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머리말의 첫 문단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문단에서 저자 ‘라훌 잔디얼’은 전혀 다른 책이 나왔다고 했다.

외과 의사는 환자보다는 그 환자가 받을 수술에 관심이 더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수술을 한 적이 없다. 내게 수술은 인체 해부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관한 탐구였다. 나는 수술이라는 기술의 덕을 많이 보았다. 수술은 나와 환자를 발가벗기고, 둘의 사활을 칼날 위에 올려놓는다. 수술은 외로운 상황이 될 수 있고, 쉬운 답은 거의 없다.

(……)

내가 환자와 함께했던 여정은 인간의 나약함, 용기,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상급자 코스였다. 그리고 그 고통을 치료하려고 내 자신의 고통을 전면에 내세워야 했다. 그동안 내가 환자와 함께 겪었던 윤리 문제와 갈등에 대처한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이 어떤 환자를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수술했다는 자랑이 아닐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수술 현장의 모습을 구경하려고 했던 나를 반성했다. 책은 10개의 장으로 나뉘었으며 각 챕터의 주 제목 아래에 부제가 붙어있다.




저자가 했던 뇌수술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실패 사례도 다룬다. 장마다 각기 다른 환자의 질환과 수술, 결과 뿐 아니라 당시 저자 자신의 상황과 심리 상태로 연결했다. 각각의 케이스가 너무 절박하고 극적이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기 어렵고 드라마에서도 접하기 힘든 사례들이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자신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과 실패담을 드러냈고, 심리학 용어와 자연스레 연결해주어 독자도 자신에게 대입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뇌 관련 질병명 뿐 아니라 저자가 수술하는 장면에서 뇌의 세부 명칭과 혈관의 이름을 언급할 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소화가 잘 안되기 때문에 소화 관련기의 위치와 하는 일, 관련 질병에 대해 공부를 하는 중이다. 몇 년 전에는 친정엄마가 급성 신부전으로 큰 일을 겪을 뻔 했던 적이 있어서 신장까지. 그동안 뇌과학 책들을 읽어왔는데도 이 책을 읽다보니 뇌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수술하는 장면을 실감나게 서술했지만 나는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기분이었다. 뇌가 하는 일과 수술 순서가 나오지만 여러 혈관의 이름을 언급할 땐 대체 그것이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모르니 답답했다. 그래서 뇌 해부도와 각 혈관의 위치를 검색해서 이미지를 보며 읽었더니 수술 장면이 어슴프레하게나마 그려졌다. 독자마다 감동포인트가 다르겠지만 나는 뇌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저자의 글솜씨에도 감탄했다. 의학 관련 지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현장감이 잘 전달되었고,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저자는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물론 매끄럽게 번역한 역자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각 장마다 다루어진 환자의 사례는 그 어떤 소설보다 몰입하게 만들었다. 순간적 판단 미스로 하반신이 마비된 12살 소녀, 6개월 후 아들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마지막 수술을 요청한 어머니, 레지던트 수련의 시절 수술실에서 교수의 집도가 잘못되었다고 했다가 신경외과의를 못하게 될 거라고 협박당한 일, 감금증후군 환자의 영혼을 놓아주었던 사례까지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저자는 어릴 때 주위로부터 받았던 냉대와 과소평가가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입증하며 살아야 했다. 적을 갖는 것이 추진력의 원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이끌어주는 자양분이 아니라 결점이며 삶에 장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이를 망친 그저 그런 외과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완벽해지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수술을 중독적으로 맡아 했다. 다행이 그는 아버지 덕분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수술 과정에 집중하면서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자는 암 전문 외과의사로 일하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오히려 환자가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고 용기를 준다고 답한다. 그는 암환자들이 위협을 안고 살아간다고 꼭 무기력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했다. 암환자들은 그에게 인생 대부분의 경험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저자가 옆집에 살던 이웃 형에게 당했던 괴롭힘은 자신을 협박한 교수와의 사건을 이겨낼 힘이 되었다.

또 환자들이 감사인사를 보내면 의아하단다. 그들의 가장 치열하고 가장 개인적인 순간에 개입할 수 있도록 관대하게 허락해준 환자들에게, 그들의 시련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해준 환자들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환자들의 인생을 지켜보는 관객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여정에 감동을 받고 교훈을 얻었다.

p.207

뇌는 마음의 승객인 동시에 운전사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만, 결정을 내린 그 마음이 정처 없이 표류하다 다시 돌아와 뇌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 뇌는 우리 몸에서 기계적인 일을 처리하지만 그보다 한 수 위의 일도 가능한 유일한 기관이다. 한쪽만 묶이고 다른 쪽은 자유로운 연과 같다. 뇌는 신경생물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 원리를 넘어 자유롭게 떠다니며 춤을 춘다. 인간은 생각하는 육신이다.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다.

p.211

자신이 살면서 추구하는 보상이 무엇인지 한번 의식해보고 무슨 동기로 그런 보상을 열망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혹시 파괴적인 동기는 아닌가? 우리 뇌는 보상을 좇아갈 태세가 되어 있다. 그게 우리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추진력이다. 이런 동력이 없으면 우리 삶에 주도권이나 방향이 없어진다. 바람이 잔 바다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갈망도 관리할 필요가 있다. 갈망을 의식하고 잘 관찰해서, 궁극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내적으로 갈망을 이끌 통제력을 잃으면, 우리는 중독이라는 병에 걸린다.


p.263

자신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창조자로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최종으로 답할 발언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유서로 인생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가장 중요시하는 대의에 자신을 기증하면서 사후 이 질문에 답한다. 제인은 자신의 뇌종양을 연구에 기증했다. 제인은 암에게 정복당했지만 그 서사는 계속되고 그의 세포는 번식해서 과학적 발견과 미래 의학을 이끈다. 제인은 유산을 남긴 것이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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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이 라이트
케이시 / 플랜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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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 작가는 소설 <네 번의 노크>로 처음 만났고 인상깊었다. 이번에 신간 에세이 <아이 라이트>가 나와서 서평단에 당첨되었고, 이북으로 제공받아 읽었다. 제목이 아이 라이트? 무슨 뜻일까? 요리조리 짐작해봤지만 내 짧은 추리력보다는 빨리 페이지를 넘기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제목의 의미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었다. “i Lite”에 대한 설명을 확인하니 작가의 스타일에 한발짝 다가선 기분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마음을 활짝 열고 읽는 편이다. 작가가 구축해놓은 가상의 세계로 기꺼이 빠져들고 싶어서다. 특히 미스터리 소설일 경우, 밀도 높게 얽어놓은 서사의 빈틈을 찾고 싶어 집중하게 된다. 작가의 데뷔작 <네 번의 노크>는 끝까지 쫀쫀함을 유지했고 반전에 허를 찔렸으며 종내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작가의 에세이는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소설가들이 쓴 에세이에 자신을 전부 드러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그러할 것이라 믿고 읽게 된다.

소설에서의 문체와 에세이의 그것이 일치할 수 없음에도 나는, 나도 모르게 이번 에세이를 읽으며 <네 번의 노크>의 느낌을 찾으려했다. 초반부가 지나자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제야 작가의 일상과 생각을 천천히 따라 걷게 되었다. 나는 에세이를 읽을 때 소설만큼 몰입이 안 되고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기 쉽지 않았다. 에세이는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그러다 내 생각과 비슷한 지점을 만나면 괜히 반갑고, 좋은 문장을 찾으면 월척의 손맛, 아니 눈맛을 느낄 때도 있다.

작가는 천천히 걷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서점에서, 길에서, 무심코 스쳐지나는 것들을 천천히, 유심히 살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편린들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하기도 하는구나, 나는 어땠던가?’하며 내 생각과 비교해보았다.

초연결 시대일수록 상처는 더 예리해진 것만 같다. 검으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 같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비난을 초과해 죽음 가까이 내몰다 벼랑에 닿은 사람을 다 같이 힘껏 민다. 끝내 바닥에 떨어진 사람을 보고 약속이나 한 듯 일시 음 소거 후 뒤돌아 잊는다. 그리고 스스로 면죄부를 준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 꼭지에 쓰인 위 대목을 읽으며 최근 한 축구선수를 향한 과한 비난을 떠올렸다. 몇 년 전 조국사태 때도 그랬지만 대중은 미디어에서 쏟아낸 정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울분을 쏟아낸다. 팩트체크 해볼 의사는 없어 보인다. 그저 누군가를 두드리는 맛에 심취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또 다른 먹잇감이 던져지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위 내용처럼 짓밟은 대상을 확인하면 돌아서서 잊어버리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을 만 했다고... 여럿이 모여 남을 뒷담화하는 게 수다의 맛이라는데 요즘은 만날 필요도 없다. SNS 상에서 떠드는 건 시간, 장소 구애없이 혼자서도 가능하다. SNS가 배설통이 되어버렸다.

아, 이번 에세이를 읽다 작가에 대해 알게 된 게 있다. <네 번의 노크>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여자라서 그랬을까? 필명 때문이었을까? 난 작가가 여성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런데 아내, 할아버지가 되겠다는 말이 나와 놀랐다. 참으로 저 보고 싶은 대로만 봤다. 그러고보니 케이시 에플렉, 남잔데...

나이들어서도 아이들에게 성공담 보다 실패담을 생생히 들려줄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무엇보다 성공담은 좀 재수 없다. 자기 자랑은 영 듣기 거북한 측면이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남의 망한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 난 실패담을 웃으며 얘기할 때 인생의 참맛을 느낀다.

나도 망한 이야기를 재미지게 들려줄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하고 실패도 해봐야 할텐데 맨날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으니 가능할까... 나이 들어도 도전하라는 책은 읽으면서 실제로는 하지 못하고 있다. 과감하게 도전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아, 나도 저렇게 해보려고 했는데!’ 라며 시도하지 못한 이유들을 떠올리다 후회하는 수순을 밟는다.

생각만 하고 시작하지 못한 것 중 하나는 첼로다. 어릴 땐 피아노를 쳤고, 20여년 전엔 색소폰을 배운 적이 있는데 현악기를 켠다면 첼로의 활을 잡고 싶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본 후 더 마음이 동했었다. 영화 초반부, 주인공 스필만이 은신하고 있던 집에서 첼로를 켜는 여성의 옆모습을 훔쳐본다. 음악이 삶의 전부인 피아니스트가 첼로 소리에 이끌려 열려진 문틈 사이로 다가간다. 첼로 소리를 듣고 있던 그 모습은 독일 장교 앞에서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하던 장면만큼이나 내겐 절절하게 다가왔다. 나도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를 연주하고 싶다. 무식자 귀에 그 곡이 연주하기 제일 쉬울 것 같은 건 너무 많이 들어서겠지?

‘천천히 걸으면 어디든 미술관’ 책 제목으로 잡아도 좋을 법한 이 꼭지에서 그려지는 장면장면의 색감은 세피아였다. 줄이 죽죽 그어진 옛날 영화 필름 같기도 했다. 작가의 산책길을 따라 나서기도 하고, 어떤 책의 귀퉁이를 접었는지 작가의 손에서 뺏아보기도 하고, 커피를 한잔씩 두고 마주앉은 카페에서 그의 낙서를 흘깃흘깃 훔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은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도구가 있는데도 즐거움을 창작하지 않는 건 직무 유기다. 읽었다면 이제 쓸 차레다. 재채기처럼 참을 수 없는 창작의 욕구를 뱉어내야 한다. 재채기를 억지로 삼키려고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얼굴을 보게 된다. 어차피 할 기침이라면 해버리는 게 속 시원하다.

압! 나 지금 가장 못생긴 얼굴로 살아가고 있...

작가는 라이트한 버전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면서 이 책을 마쳤다. 이 ‘라이트’는 빛도 된다. 에필로그에서는 소문자 I의 의미와 모양을 가지고 요모조모 뜯어본다. 줄 위의 공이라는 생각은 참말이지 기발하다. 그것을 Looking for lost love로 연결한 것 역시! 이게 뭔 소린가? 싶은 사람은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에필로그 전체를 옮길 수 없고, 에필로그만 읽는 것 보다는 책 전체를 읽어야 더 잘 공감하게 될 것이므로.

**위 리뷰는 이북으로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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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간호사, 현직 보건교사의 가꿈노트 - 간호 새싹들을 위한 오색빛깔 진로 개발 지침서
정진주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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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간호사 현직 보건 교사의 가꿈노트>는 간호사로 시작해 보건교사가 된 정진주씨가 낸 책이다. 그는 간호사나 보건교사가 되고 싶은 간호새싹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이 책에 오롯이 털어놓았다. 진로를 이쪽으로 정한 학생들에게 더없이 알찬 정보들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강추한다. 나처럼 진로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학교 다닐 때 (예전엔)양호실에서 만난 양호선생님이 하는 일이란 지극히 간단해보였고, 병원에서 만나는 간호사들의 일도 눈에 보이는 것뿐이지 속속들이 알기란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보니 사명감 없이 하기 어려운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들의 악습 태움을 접했을 땐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사람이 몸 부대끼며 일하는 곳에서야 어슷비슷하게 벌어지는 일들이었음에도 자극적으로 다룬 미디어의 시각에 휩쓸린 것 같다.


저자 왕진주씨는 학창시절 꿈이 간호사는 아니었으나 인서울 영어영문학과와 가천길대학 간호과 두 군데에 합격했을 때 간호과를 선택했다.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할 수 있고 간호과에서 배우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아 선택한 것이 보건교사의 길로 이어졌다. 간호과는 학과 공부가 거의 고등학교 때 수준과 같을 정도로 빡빡하며 임상실습부터 실제 간호사가 된 이후로도 긴장의 연속이다. 나에게는 간호사 세계를 간접 경험하는 흥미진진함이 있었다. 나는 책으로 타인의 인생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책은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실제 한 사람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서 인상깊게 읽었다.


이 책은 간호과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는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톡톡히 함은 물론 저자의 진솔한 경험들로 미리 겪어보는 임상실습이라 하겠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조카는 간호사가 꿈이다. 내가 먼저 읽어보고 조카에게 선물했다. 이 책을 읽은 조카는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말했다. 막연한 꿈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서평단용으로 받은 책이라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주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런데 내가 서평단으로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책이 눈에 띌 리 없었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조카는 저자가 대학에서 공부한 방법들을 지금 바로 자신의 공부에 적용해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간호학생으로 실습을 나갈 때 저자의 충고를 보고 미리 준비해두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보건교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자신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학교 보건선생님하고 친해져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이 책으로 조카는 진로를 명확히 그려나가는 데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책 한 권이 어떤 이의 꿈을 이루는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얼마나 값진 일인가!


저자 왕진주씨와 출판사 미다스 북스에 감사드린다. 간호사나 보건교사를 꿈꾸는 학생들이 모두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p.130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을 보면 힘들어서 어떻게 버티냐, 그냥 참고 일하는 거겠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일하는 사람도 잇을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내가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5년을 임상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와 가족들을 만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좋아서였다. 거창하게 간호한다는 생각보다는 병원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게 돕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특별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게 간호사란 직업의 매력 포인트다.


p.183


중고등학교에서 예비 간호학생을 키우는 건 보건교사다. 최근들어 간호학과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는 걸 실감한다. 고교학점제가 이슈화되면서 보건 교과나 간호화 관련된 과목을 이수하는 학생들의 수요가 훨씬 더 커졌다. 이런 과목들을 수업하는 사람이 바로 보건교사이다. 간호학과 입학 시 보건 교과를 이수하면 가산점을 주거나 보건 동아리 활동을 의미있게 봐주면 학교에서 보건교사의 입지도 좀 높아지고 직업적인 위상도 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 235

수업이 없고 학교에서 보잘것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해도, 있는 그 자리에서 꾸준히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배우고 도전하고 경험하다 보면 그게 다 내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라고 말이다.


p. 268


폴리토르(politor)는 라틴어로 닦는 사람, 가꾸는 사람을 뜻한다. 내가 만들어 낸 호모 폴리토르는 한 마디로 꿈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역할과 능력을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다재다능한 인간을 의미한다. 나처럼 배우고 성장하는 걸 즐기는 사람,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학생들, 취업 준비생, 직장인, 퇴직자 모두 꿈을 가꾸는 사람들이다. 나는 나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며 꿈을 가꾸며 사는 사람들의 조력자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또 그들과 호모 폴리토르의 삶을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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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키
요헨 구치.막심 레오 지음, 전은경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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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수고양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프랭키! 프랭크 시나트라에서 왔다. 프랭키가 수컷 인간의 자살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수고양이와 수컷 인간은 서로를 보며 깜짝 놀란다. 남자의 이름은 리하르트 골드! 그의 자살은 미수에 그쳤고 고양이 프랭키는 기절한다. 프랭키가 죽은 줄 알고 골드는 신고를 하기에 이르고 수의사인 안나가 확인을 하러 오면서 소설 <프랭키>가 시작된다.


누구나 자기가 키우는 동물과 대화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나도 우리 고양이가 냥냥거릴 때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너무나 알고 싶지만 알 도리가 없어 내 맘대로 해석한다. 우리 집에 있는 세 마리 고양이 중 한 마리만 수다스럽고 두 마리는 말을, 아니다! 거의 소릴 내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눈빛은 교환하기 때문에 눈으로 말하는 것 같긴 하다. 그 눈맞춤의 의미 역시 내가 짐작할 땨름이다. 삼냥이들과 대화를 하진 못해도 한 공간에 있다는 충만감만으로도 그들은 존재의 이유가 분명하다.


인간어를 할 줄 아는 고양이 프랭키에 대한 소개를 보고 나는 집사로서 마땅히 서평단에 신청해야했다. 출판사가 삼냥이 집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어 프랭키를 만날 수 있었다. 보통 동물이 주인공인 영화나 소설에서 동물이 구사하는 언어, 즉 인간과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인간의 뇌피셜에 가깝다. 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직접 구사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은 본디 구라쟁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공감력과 상상력은 동물들이 등장하는 창작물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다.


프랭키와 골드의 충격적 첫 만남 이후 둘의 동거가 시작된다. 프랭키의 입장에서 쓰인 이 소설은 일인칭 고양이 시점이라 하겠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극히 단순한 묘생을 살아가는 프랭키의 눈으로 본 중년수컷 골드는 복잡하고 답답하다. 이 소설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고양이와 중년남의 좌충우돌 동거 이야기라면 흔히 만날 수 있는 동물 시점의 소설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소설답게 프랭키는 수다스럽고 인간과 고양이의 대화는 철학적이다. 마지막에는 예상을 벗어나는 반전이 있다. 실망할 독자들도 있겠으나 나는 신선했다. 결말 부분을 자세히 다루면 스포일러가 되므로 여기서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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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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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서경식 선생님과의 인연(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순전히 내 입장에서만!)을 언급하고 싶다. 선생님의 글을 처음 만난 지면은 한겨레 신문 고정 칼럼 ‘디아스포라의 눈’이었다. 나는 200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고 선생님 가족사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정주민으로 평생 살아온 내가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고백컨대 그의 시선을 따라가기엔 당시 내 독해력과 배경지식이 너무나 일천했다.

처음 만난 책은 2012년경 <나의 서양음악 순례>였는데 한겨레 칼럼보다는 읽기 쉬웠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많기도 했거니와 당시 음악 감상실을 다니면서 접했던 유수의 유럽 음악 축제 영상을 텍스트로 읽으니 활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세우게 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서양음악 순례길을 따르며 나는 어느 순간 꿈을 꾸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 현장에서 표를 구하려고 서성이고, 사이먼 래틀의 지휘가 끝난 후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내 모습을. 허나 여태 오스트리아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몇 년 후 선생님의 형님이신 서승 교수님과 함께 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한겨레 신문에서 주관한 오키나와 답사 기행을 서승 교수님이 인솔하셨고 나는 3박4일 간 교수님 바로 옆에서 배울 기회를 가졌다. 여행 후엔 <옥중 19년>을 읽었다. ‘디아스포라의 눈’을 통해 단편적으로 만났던 가족사의 조각들을 어느 정도 맞추어 보게 되면서 그 가족들, 재일 조선인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박정희의 파렴치한 정권통치술을 다시금 확인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삼형제가 건강하게 활동하고 계신 것에 감사했다.

그 때 나는 읽기만 했지 쓰지 않았기 때문에 빈한한 기억에만 의존해 두 분 선생님과 만났던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내가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2018년부터였고 그 해 5월 숭례문학당에서 직접 뵙게 되었다. <시의 힘> 작가와의 만남 행사였다.


 

급작스런 별세 소식 후 당시의 후기를 내 블로그에서 찾아 읽어보았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그런지 내용이 그다지 풍성하지 않았다. 독서토론 참가자들이 서평을 써서 제출했고 그것을 선생님께 전달했으며 선생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진 후 참가자들끼리 독서토론을 했다. 다시 읽어보니 저자를 만난 상기된 반가움만 느껴지고 내용은 간단했다. 제출한 <시의 힘> 서평은 찾지 못했다. 얼마나 엉성했을지...

그 후 5년이 지나도록 선생님의 글을 접하지 못했다. 한겨레 신문은 절독했으며 중독자처럼 서평단 도서를 신청해 읽고 써내기 급급했고, 재작년부턴 일을 하게 되면서 더 정신없이 살았다. 선생님의 글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내 안에 있었던 걸까? 매체를 통해 서경식, 서승이라는 이름을 접할 때마다 죄책감이 일었다. 2022년에 <서경식 다시 읽기>의 출간 소식을 보고 바로 샀다. 물론 다 읽진 못한 채 책장에 꽂혀 있다가 작년 연말 비보를 듣고 꺼냈다. 이 책에 실린 각기 다른 이들의 기억 속 선생님의 모습과 글 세계를 읽노라니 기획자는 추모 아닌 추모 같은 책을 미리 만들었구나 싶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의 서평을 쓰려고 시작했는데 서두가 너무 길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정식으로 추모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연예인과 비슷해서 독자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며 글을 통해 만날 뿐이다. 팬이라면 전작을 통독할 것이고 행사에 적극 참여하며 팬심을 표현할 테다. 나는 서경식 선생님의 팬이라고 말 할 순 없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전작은 아니라도 몇 권은 읽어왔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어떤 사안이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그것은 분명 경계인이라 불리는 선생님의 자리 때문일 것이며 내가 한 번도 위치해보지 못한 곳에서 세상을 볼 기회를 준다. 우리나라 매체나 작가들이 잘 다루지 않는 사안들도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 만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혜안과 통찰 가득한 글을 읽으며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듯 뿌듯함을 맛보았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런 글을 만날 수가 없다니 안타깝고 슬프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이 선생님께서 남긴 마지막 책이 되었다. 이 책의 맺음말 날짜가 2023년 12월 17일이다. 마지막 글을 송고하고 다음날 세상을 등지셨다. 그의 유작을 서평단 자격으로 받아 읽게 되어 송구한 마음이나 이렇게 서평을 쓰는 것으로 위안 삼는다. 직접 구매했다면 신경 써서 글을 쓰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지난 5년여간 내가 글을 써온 패턴을 보면 내돈내산 책은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선생님의 글과 같은 글을 만날 수 있을까. 아무리 재일 조선인이라 해도 절대 같은 삶을 산 사람은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읽고 경험하고 사유한 것이 곰삭고 곰삭아 활자화된 그것과 견줄만한 것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선생님의 글을 만날 수 없게 되어 안타깝지만 기 출간된 책들을 찬찬히 곱씹으며 읽어보아야겠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의 역자 최재혁씨는 여는 글에서 선생님이 우려한 바를 이렇게 옮겼다.

‘독자 여러분이 왕복할 세 단위의 시간대’(131쪽) 때문이다. 그건 최근(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 2016년, 두 형의 석방과 지원 활동을 위해 미국의 인권단체와 국무부를 방문했떤 1980년대 중‧후반, 그리고 이 책에 담긴 글을 쓰던 2019년~2020년이라는 시점이다. 여기에 역자는 7장과 맺음말 사이에 가로놓인 3년 남짓한 시간을 더했다. 그 사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전쟁과 유혈사태, 민주주의 후퇴 등)이 선생에게 타격이 컸을 거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선생님의 글이 어려웠으나 <나의 서양음악 순례> 이후론 쉽게 느껴졌고 두 형제분을 직접 뵙고 나니 더욱 쉽게 읽혔다. 또 다른 이유라면 지난 5년간 무턱대고 책을 많이 읽어오기도 했거니와 서평을 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쓰려면 더욱 자세히 읽어야하기 때문이다. 서경식이라는 인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가 유작인 이 책을 읽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역자가 언급한대로 여행한 시간대의 차이가 크고 저자의 가족사 관련 배경지식도 필요하기에 위와 같은 염려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는, ‘선생은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재일조선인과 자신의 글을 카나리아에 빗댔다. 홍콩이, 벨라루스가, 미얀마가, 우크라이나가 시간이 지날수록 진부해지듯 그의 글과 마음까지 내 속에서 그렇게 진부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카나리아의 비명을 흘려들은 건 아니었을까. 마음이 저려온다.’고 썼다.

이 책으로 서경식을 처음 만난 독자라면 책 속에서 저자가 제공하는 가족사의 정보를 주의 깊게 읽으면 좋겠다. 미국에서 저자가 접한 클래식 음악과 미술작품이나 화가에 대한 내용은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미국 내 활동과 디트로이트 벽화 작업은 프리다 칼로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라면 관심있게 읽을 만하다. 혹시라도 서경식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디아스포라의 눈>이나 서승 교수의 <옥중 19년>을 추천한다. 예술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예술과 인문학을 횡단하는 <나의 서양음악 순례>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권한다.

나는 이번 책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부분을 인상깊게 읽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거의 읽지 못한 채 반납한 게 몇 번, 장바구니에 담아만 두고 결제하지 못한 지 몇 년이 흘러,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경계의 음악>을 구매해서 책장에 꽂아둔 게 작년이다. 그런데 <나의 미국 인문 기행>에서 사이드를 선생님의 설명으로 읽으니 반갑기 그지없었고 이제는 사이드의 책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그의 책을 탐독할 때가 온 듯하다.

6장 아메리카Ⅰ‘에드워드 사이드’에는 컬럼비아 대학 로 메모리얼 도서관 앞에서 사이드가 장 주네의 연설을 보며 느꼈던 바를 술회하는 문장이 오른쪽(193쪽)에 있고, 왼쪽(192쪽)에는 그 도서관 앞에 선 선생님의 사진이 있다. 2003년 선생님은 사이드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무산되었고 그 해 9월 사이드의 사망으로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 아쉬움이 이 페이지에서 느껴졌다.


사이드는 팔례스타인계 아랍인이자 기독교인, 미합중국 국민이었고 문화 연구 분야에서 전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경계의 음악>을 간단하게 소개하며 언급한 아래 내용에 나는 크게 공감했다. ​

좋은 음악을 듣고 마음이 움직일 때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그 감명이 어디서 왔는지 파고들고 싶어진다. 하지만 좋은 대화 상대를 만나기란 좋은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무척 어렵다. 사이드 스스로가 이야기했듯 음악이라는 예술이 “가장 말이 없으며” “가장 닫힌” “가장 논하기 힘든 분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대화의 상대는 풍부한 감성과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해야할 뿐 아니라 음악 이론에도 정통하여 음악을 문학이나 정치 같은 다른 분야와 관련하여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드야말로 그런 인물이었다.

p.199

음악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클래식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는 싶지만 그런 사람(좋은 대화 상대)가 주위에 거의 없기에 클래식 책을 찾아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알고 싶고, 음악 감상실에 가서 선생님의 추천을 길라잡이 삼고 싶다. 그러나 내 수준으론 음악을 문학이나 정치 같은 다른 분야와 관련하여 해독할 능력이 없기에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대화를 나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이젠 사이드의 음악 관련 책에 도전해보고 싶다. <경계의 음악> 속의 글렌 굴드의 평론으로 시작해야겠다.

사이드와 다니엘 바렌보임의 대담집 <평행과 역설>에서, 제2 빈 악파가 난민의 음악이라고 정의한 부분이 209쪽에 인용되어 있다. 선생님은 크게 동감하며 ‘절반의 타자’로서 서양음악과 접하고 바로 그 위치에서 새로운 보편성을 향해 도달하고자 한다면서 그 지점이 사이드와 자신의 공통점이라고 밝혔다. 선생님은 사이드의 좋은 독자는 아니었으나 1990년대에도 사이드를 읽지 않았다면 정신적으로 방황했을 테고 혼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즐겨 읽었다는 <펜과 칼>은 아르메니아 난민 출신 ‘데이비드 버사미언’이 사이드를 다섯 차례 인터뷰한 책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엔 문제에 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고 한다.

이 책에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에 관여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팔레스타인 투쟁이 이런 여러 운동 가운데 핵심이었던 까닭은 그 투쟁이 정의에 관해 되묻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겠다는 의지의 문제였습니다.

이를 한 편의 시와 같다고 하면서 선생님은, “사람은 승리를 약속받았기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넘쳐나는 불의가 승리하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 되묻고, 허위가 뒤덮고 있기에 진실을 위해 싸운다. 단적으로 말해 사이드는 우리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자에게 있어 도덕의 거처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고 썼다.

이어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을 소개하면서 디아스포라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았다. 사이드가 자신의 성과 이름에서 느낀 위화감을 선생님은 너무나 잘 이해했다. 사이드가 미합중국 국민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선택했다면 편하게 살았겠지만 ‘팔레스타인인’의 일원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선택했으나, 자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이드는 고독했다. 미국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으며 두 곳 모두에서 이방인이었다. 선생님은, 사이드와 마찬가지로 어떤 공동체에서도 동조자를 얻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바 그들은 저마다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정표나 등대와 같았던 사이드의 부재를 ‘거대한 상실’이라고 썼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서경식이라는 부재 역시 ‘거대한 상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6,7장 전체를 사이드에 할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20여년 전 사이드와 선생님이 만났더라면 디아스포라에 관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얼마나 날카롭고 진지한 대담이 이루어졌을까. 그 때 성사되지 못한 만남에 대한 아쉬움과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온 선생님이 많은 부분 자신과 유사한 사이드에 대해 미국 인문 기행 안에 길게 다룬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서경식의 삶을 이번 책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나에게 행운이다. 이제 모두 세상에 없지만 그들이 남긴 저작으로 만날 수 있으니 또 얼마나 다행인가. 둘의 책으로 병렬 독서할 계획을 설레는 마음으로 세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영면을 빌며 이 글을 선생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책을 제공해준 반비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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