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하는 삶 - 도로시 데이, 평화와 애덕의 83년
로버트 콜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낮은산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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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모든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선합니다. 폭군의 통치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고 표현하는 신학자(몰트만)도 있습니다. 어떠한 표현이든 하나님의 선한 다스림은 모든 영역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을 때 가장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샬롬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평화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없더라도, 부강한 나라는 여전히 약한 나라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속박합니다. 진정한 샬롬은 모든 관계의 화목을 전제로 합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친밀하게 어우러집니다.


결국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샬롬이 뒤따르게 됩니다. 복음을 믿는 공동체는 화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메시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평화, 화해, 정의, 환대의 삶을 사는 것이 곳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된 삶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한 명이 도로시 데이(Dorothy Day)입니다.


도로시 데이의 삶을 직간접적 목격하여 기록한 이 책 『환대하는 삶』의 저자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그는 도로시 데이와의 만남을 서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통해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자만심과 오만, 특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자는 도로시 데이와의 영적 교감과 대화를 통해 그녀의 삶을 회고합니다. 도로시 데이의 젊은 시절은 자유 자체였습니다. 매우 급진적이었던 그녀는 어떤 면에서 방탕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이후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던지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급진주의 신문 '가톨릭 일꾼'을 펴냈습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대접하는 사람과 대접받는 사람의 구분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환대의 집'을 엽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나눔을 실천하여, 작은 부분부터 평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녀는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고자 했습니다. 평화를 빼앗긴 자들에게는 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아픔과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몸을 통해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드러내는 삶에서 극복하고 던져버려야 하는 것은 바로 '무관심'입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무심함인 것이죠. 자신만을 위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배려나 공감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도로시 데이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세상 가운데서 낮아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들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들과 부대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하며, 위로하며, 기꺼이 자신을 던졌습니다.


참으로 헌신적이었지만, 매우 진실한 사람이었던 도로시 데이. 그리하여 논쟁거리도 많지만, 우리는 그녀의 삶을 통해 베풀고 나누며, 샬롬을 위해 자신을 던진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진 사람과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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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에게 이상주의란 스스로 실체를 드러내는 덕인 동시에 호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주의는 우리 이웃 속에 보이는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로만 한다면 전혀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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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난 사람들 -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벤 위더링턴 3세 지음, 김은총 옮김 / 감은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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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이후에 삶이 변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만남이 인격적이라면 그 변화의 폭은 더욱 큽니다. 상대방이 힘이나 명예, 권력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그 사람이 진심으로 바라봐 주었기 때문입니다.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함께해 주고, 위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한 만남으로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서 한줄기 빛을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정말 막막하여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진심으로 대하는 한 존재는 새로운 힘을 줍니다.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던져줍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그러할진대, 예수님과의 만남은 어떠할까요? 하지만 성경에서의 이야기는 멀게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시대와 문화와 다르기에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은 그동안 읽고 들었던 것들로 인한 선입견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게 당시의 상황과 배경까지 풀어서 설명해 주는 벤 위더링턴 3세(Ben Witherington III)는 이 책 『예수를 만난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내면과 여러 상황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이야기를 각색하여 소설처럼 적어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배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보다 더 쉽게 그때 당시의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성경의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나게 되며,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다시 한번 만납니다.



우리는 저자를 통해 본문에 새롭게 다가갑니다. 그동안 수없이 봐온 텍스트였지만 그 안에 생동감이 더해집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실존적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전인격적인 어려움에 처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은 육체적인 고통 이상이었습니다.



육체적인 회복 불능의 상태는 정서적인 냉대, 종교적 낙인, 사회적인 소외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마다의 서사 가운데 더 이상의 희망을 보이지 않는 듯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말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가장 절박한 순간입니다.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총체적 어려움 가운데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 참된 기대를 주지 못합니다. 전 존재를 아우르는 치유가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만남이 필요합니다. 진정 우리를 깊이 아시며, 우리를 진심으로 아껴주시는 분과의 만남은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의 인물이 되어 봅니다. 약하고 부족하고, 죄인이라 여겨지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가 처한 고통과 비슷합니다. 우리 또한 너무도 아팠습니다. 참된 평안을 주시며, 자유를 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우리 또한 참된 해방을 경험합니다. 이제야 우리는 온전한 변화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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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신학 -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의 근거와 의미에 대한 연구 몰트만 선집 1
위르겐 몰트만 지음, 이신건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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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나 현실을 바라볼 때 좌절하게 됩니다. 언제 세상이 옳은 방향, 좋은 방향으로 변화될지에 대한 기대까지 사라지게 만듭니다. 여전히 세상은 잔혹하고, 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각자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사소한 실수는 크게 부각시키며,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합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회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됩니다. 사회적 제도로 인한 계층 구조는 아니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의 위치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가진 자는 현대 사회에서 더 많은 힘을 얻고, 그 힘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힘없는 자는 더 이상의 희망조차 잃어버립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존재합니까?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합니까? 오히려 세상에서 교회가 지탄받는 모습에 가슴이 답답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야 할지 난감합니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세계적 석학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그는 현대 사회의 문제 앞에 잠잠하지 않습니다.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지만, 성경과 신학을 통해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는 『희망의 신학』을 통해 '희망'이 사라진 것만 같은 세상에 큰 경종을 울립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핵심에 두기를 원합니다. 자칫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종말론을 중심으로 가져오기를 원합니다. 이 책을 자신의 조직신학 시리즈 중에서 제일 처음 집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희망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이유를 몰트만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하나는 오만과 절망이요, 더 강력한 것은 현재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파스칼, 괴테, 헤겔, 니체, 파르메니데스, 키르케고르, 에브너에 이르기까지 헬라적인 현재 개념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엘(EL)이 아니라 야웨(JHWH)라고 강조합니다. 즉, 현재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전망을 제공해 주시는 새로움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극적으로 안셀름의 유명한 명제인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을 변용하여 '인식을 추구하는 희망'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선포와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교회는 종말론적 성격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미래의 문제"를 기본 문제로 삼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에 대한 관점에 기초하여, 몰트만은 1장에서 현대신학자들이 취한 종말론의 무역사성을 비판합니다. 


몰트만이 말하는 종말론은 역사적 종말론입니다. 역사적으로 종말론을 이해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예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현실을 해명하려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해석이 아닌 역사의 변혁을 원합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를 향한 기다림과 희망의 이론입니다. 


몰트만은 “희망에 관한 이론으로서의 종말론”의 근거를 예수의 부활과 현현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제 몰트만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을 “약속의 하나님”으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약속으로 이해함으로써 그의 종말론적 사고를 심화시킵니다.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과 함께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도 “역사”의 차원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은 개인의 영혼은 물론 세계사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판넨베르크처럼 보편사로서의 역사 해석에 관심을 두기보다,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를 향한 역사의 변화에 관심을 가집니다.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차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몰트만은 역사에 의해 종말론이 폐기되거나 종말론에 의해 역사가 폐기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종말을 기다리는 희망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세워집니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있어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 열립니다.


몰트만은 마지막으로 이러한 희망의 신학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할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현대사회가 그리스도 공동체에 기대하는 역할이 있지만, 그러한 역할에 잠식당하거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교회가 새로운 탈출을 감행해야 하며,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바빌론 포로 생활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목적은 자신만을 위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한 자의 통치로 살아가며,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과 공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자의 다가오는 통치로부터 살아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한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소원대로 세계를 위해 봉사하며, 세계 안에서 활동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합니다. 진정한 공의와 평화, 자유와 존엄성은 종말론적인 기대 지평 안에서 일어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야 합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세세하게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개인화되어 있고 내세 지향적인 모습으로 현실에서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세계의 교회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또한 종말론적 기대 가운데서 우리의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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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위한 교회‘는 무분별한 연대성과 막연한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대로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것과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소원은 그리스도의 파송과 사도직 속에 드러난다. 온 인류에 대한 교회의 개입(介入)은 선교 속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파송은 사회가 교회에게 허락하는 사회적 역할의 기대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오고 있는 공의와 오고 있는 평화, 오고 있는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의 종말론적인 기대 지평 안에서 일어난다. 교회가 인류를 섬기는 목적은 이 세계가 지금의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보존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계가 변하여 자신에게 약속된 바로 그것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위한 교회‘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회‘와 세계의 갱신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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