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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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무엇보다도 외교관을 그만둔 것은 잘한 것 같다. 어설픈 식견으로는 조국에 기여하기 보다는 손실을 끼칠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동집을 하고 있다니 일본인들이 문물을 받아들이 듯 단순히 일본맛을 그대로 내지 말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우동을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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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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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서문을 읽어보니 저가가 강한 문제의식을 표명하고 있어서 나름의 깊이 있는 뭔가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책의 주요 내용은 일본은 에도시대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고 이러한 발전은 일본이 빠르게 서구제국구의 국가를 따라잡는 기반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별로 새롭지 않다. 일본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주장을 이미 읽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폴 발리의 "일본문화사"에 따르면 에도 시대 이전에도 이미 일본은 아주 오래전부터 풍부한 문명을 발달시켜 온 것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책 제목으로 달고 있는 것처럼 우리 고교 교과서는 이런 일본의 발전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일본의 참모습을 일부러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교과서가 모든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다. 사실 우리 교과서는 미국의 교과서에 비해서 분량이 1/3도 안된다. 교과서 지식이 필요한 지식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틀렸을 뿐이다. 우리 사회가 고등학교 졸업 때의 점수로 사람들 평가하고 대우하다 보니 고등학교 교과서 지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교과서는 기초일 뿐이고 인생을 통해서 꾸준히 지식을 보충해야 한다는 상식이 회복되어야 할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을 저술한 목적으로 "일본 근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한국 근대화의 뿌리를 찾는 과정으로의 의미가 있다"라고 쓰고 있다. 아마도 한국사회의 경제발전의 뿌리를 일본식민지 시대에서 찾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주장의 잘못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중국에서 일본의 역할이란 분탕질 말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중국인은 과학기술 논문 발표에서도 이미 유럽 출신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대화란 나무가 아닌데, 뿌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어디에 있을까? 동아시아 각국은 서구로부터 자극을 받고,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럽의 각국이 서로 경쟁하며 발전을 이루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처음으로 그러한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이 일본이 밟은 길을 따라가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찾고자 하는 뿌리라는 것은 없다. 굳이 일본이 우리에게 기여한 것이 있다면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일본 주재 외교관으로 일하다가 한국에 일본문화를 소개하는 데 보다 적절한 수단을 찾기 위해 그만 두고서 우동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외교관을 그만둔 것은 잘한 것 같다. 어설픈 식견으로는 조국에 기여하기 보다는 손실을 끼칠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동집을 하고 있다니 단순히 일본맛을 그대로 내지 말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우동을 만들기 바란다. 해외 문물을 주체적으로 소화해야 진짜 일본인의 정신을 실현하는 셈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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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강지은 지음, 이혜인 옮김 / 푸른역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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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을 읽고나서 조선의 유학을 조금씩 읽게 되었다. 도대체 조선의 유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학문을 했었나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학자라면 당연히 주희가 쓴 책을 단순히 반복하여 읽고 요약하며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청나라의 확립, 일본의 성장, 서구의 진출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하에서 조선 유학자들도 나름의 고민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기대도 있었다. 


또 다른 우연으로 강지은의 책을 읽게 되었다. 책에 관한 소개에서 “조선 유학사는 형성 과정에서도, 근대적 학문으로서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면서도 국경을 초월해 있었다”라는 언급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줄 것으로 기대를 품게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책은 애초에 품었던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 저자가 언급한 “조선 유학사”를 “조선 유학”으로 오해했던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책은 조선의 유학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먼저 저자 강지은의 문제의식을 살펴보자.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조선 유학사를 잘못 읽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유학은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고준담론 주자학이 주류였으나 17세기 이후에는 실학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는 식으로 요약된다. 실학은 박세당, 유형원으로 시작하여 박지원의 북학파, 정약용의 실용파로 이어지는 계보이다. 실학의 맹아는 주자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격물치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강지은은 이러한 유학사는 일본 식민주의 사관에 대한 안티테제이지 결코 조선 유학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강지은이 생각하는 조선의 유학사는 무엇인가? 강지은에 따르면 조선 유학자의 사명은 주자학적 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주희가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남겨 둔 경서의 의미를 확정하고 정리하는 책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송시열과 그의 문하는 북적인 청이 중화의 영토를 지배하게 된 사태에 직면하여 조선이 중화의 계승자로서 중화의 도리를 체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강력히 주장한 그룹이다. 동시에 이들은 주자학에 대한 정밀한 연구에도 누구보다 힘을 쏟았다. … 그런데 이 <집주>를 주희의 서간문 등과 대조해 보면 서로 다른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주희의 생애 후반 <집주>의 체계가 성립되기 전에 주희의 사서 해석은 크게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성립 후에도 거듭해서 큰 폭으로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 조선 유학자들은 이러한 차이점이나 모순들을 적극적으로 연구하여 무엇이 주희의 정론인지 확정하고자 하였다. 주희의 ‘만년 정론’을 확정한다는 이 주제는 학술계의 가장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 주희가 최후에 저술한 글이야말로 그가 마지막으로 확정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와 같은 단순한 방법을 쓰지 않고, 주희 학설의 성립과정을 추적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해 내고자 하였다. 

조선 유학자들이 주자학 학설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쉬웠다. 정작 어려운 점은 어떤 새로운 주장이 주자학 학설의 완성으로 나아가는지 아니면 주자학을 왜곡하는 사문난적인지를 구분하는 방법론이다. 흥미롭게도 조선 유학자들이 이를 구분하는 방법론은 학문의 내용이 아니라 학문하는 태도에 있었다. 

문언의 득실을 따지기 전에 그 마음가짐이 이미 좋지 않으므로 더욱 애석합니다. … 윤휴는 주자를 모욕하고 자기 학설이 옳다고 하였으나, 조익은 마음에 의심을 품고 지자에게 질정을 구한 것일 뿐이다. 두 사람은 흑과 백처럼 확연히 다르다. … 주자학의 권위를 무시하는 불손한 태도는 비난을 받았지만, 주희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일 자체가 곧바로 배척을 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양 3국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학문을 하지는 않았다. 원나라 명나라의 유학자들은 정주의 논저를 본래의 형태로 섭렵하기 보다는 간략본이나 선집을 통해서 요점만을 취했다. 막부시대 일본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공맹을 직접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사이는 자신의 공부를 돌이켜 보며 다음과 언급한다. 

16-17세 즈음에 주희의 주석본으로 <사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27세에 <태극론>을, 28-29세경에는 <성선론>을 저술하고 … 그 온축된 뜻을 깊이 터득하여 송나라 유학자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나 자신은 생각하였다. … 최종적으로 모든 주각을 제거하고 직접 <논어>와 <맹자> 두 책을 체득하는 일을 열심히 추구하기로 하였다. 짧은 시간에도 사색을 계속하고 차분히 체험하여 완전히 정착할 곳을 얻었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이전에 지은 의론들은 모두 공맹에 상반되고 오히려 불교나 노장 사상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 유학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특이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던 이유는 조선에서 주자학이 관학이었기 때문이다. 주자학은 과거시험의 표준답안이었고 국가의례의 근거였다. 어린 시절부터 읽어야 하는 경서였고, 관료가 되어서도 정치적 문제를 논의하는 근거였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 권력자는 사무라이였고, 주자학은 단순히 장식품에 불과했다. 일본과 중국은 조선과는 달리 관료로서가 아니라 소외된 소수의 학자가 골방에서 전개하는 학문이었기에 자유롭게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고 조선 유학이 독창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강조한다. 

강지은은 책을 마무리하며 조선 유학자들을 변명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술이부작, 즉 ‘이미 있는 것을 서술할 뿐 새로운 설을 창작해 내지 않는다’라고 한 공자의 말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저술을 했습니다. … 누군가의 새로운 해석이 기존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독창성을 지닌다고 해서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은, 20세기 진입 전후에 들어온 서양적 학술 관점을 과도하게 적용한 것이거나, 조선시대 유학사를 주자학 맹종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유학사를 부정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자는 실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실증을 강조하며 식민지 시대에 제기된 문제의식과 연구는 사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가 역사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예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이론은 결국 이야기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흥미로워야 한다. 특히 역사는 그러해야 한다. 

실증에 근거한 이야기를 대중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서 더이상 흥미로워하지 않을 때에 학문을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할까? 실학연구는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줄 무언가를 찾으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작업이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역사 연구자는 과거를 왜곡해서는 안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대중의 흥미에 부응한 지적인 태만이다. 그러나 지적인 태만을 피하기 위해서 별로 흥미를 끌지 못하는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무능이다. 이러한 무능에 대한 비판은 조선 유학자와 조선 유학자를 연구하는 현재의 학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능을 실증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기만일 뿐이다. 

강지은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 경우에도 17세기 유학자들이 심, 성, 이, 기를 둘러싼 토론은 여전히 ‘허위’로서 자리매김되었을까? 20세기 초반이라는 긴박한 시대에 중요했던 ‘독창’과 ‘실천’이라는 가치가 17세기 조선 유학자들이 경서를 해석할 때도 중요했을까? 즉 ‘독창’이나 ‘실천’을 17세기 유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 것일까? 

아마도 저자는 독자가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기대한 듯하다. 하지만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17세기 유학자들이 논의한 심, 성, 이, 기가 심오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보편적인 인권으로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구가 세계사를 주도하고 있지만 중세의 기독교 철학은 철학사에서 각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저자가 식민지 시대의 반동을 과도하게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학문의 발전은 방법론의 발견과 일치한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분하는 판단기준이 방법론이다. 저자가 파악하는 조선 유학의 본류는 오늘날 인터넷 댓글 논쟁과 유사하다. 처음에는 내용을 논의하다가도 결국은 “싸가지가 없다”는 식으로 태도를 따진다. 이런 수준의 학문은 솔직히 학문이 아니다. 그런 것을 당시의 학문이라고 말한다면 조선시대에 학문이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솔직하다. 고등학교 교과서를 열심히 읽는다고 학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조선유학자와 오늘날 고등학생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조선의 성리학에 조금 관심을 가진 것은 오늘날 우리 일상과는 전혀 관계조차 없어진 그들이지만 나름 논쟁하며 뭔가를 추구하지 않았을까라는 막연한 의문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시간낭비를 멈추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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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책 어젠다 2022 - 자유, 평등 그리고 공정
김낙회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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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집 아들이 부모에게 매월 용돈 100만원을 받으면 정부는 이에 더해 50만원을 지급해 준다. 그런데 가난한 집 아들이 힘들여 알바를 하여 매월 100만원을 벌면 정부는 소득이 있다며 땡전 한푼 주지 않는다. 이것이 저자들이 말하는 평등과 공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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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책 어젠다 2022 - 자유, 평등 그리고 공정
김낙회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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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모두 전직 기획재정부 고위관료 출신이다. 흔히들 정부관료는 아카데미에서 연구하는 교수들과는 달리 현실감각과 이론을 겸비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정치인에 비해서 이념지향에 있어 중립적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표지에 "경제정책 전문가 5인"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저자들의 자부심은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반영하는 듯하다. 


책을 집필하는 저자들의 목표는 분명하다. "이제 1년 후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 부디 현명한 경제정책으로 우리 경제가 다시 힘차게 도약하고 국민들도 미래에 대해 더 많은 희망을 품게 되기를 바란다. 여기에 이 책이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라고 적고 있다. 저자들은 대선주자에게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팔리고 다음 정권에서 중용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태도는 사실 바람직하다. 국민들에게 제시할 분명한 아이디어 없이 신문에 뻔한 칼럼을 쓴 평판으로 대선주자의 캠프에 얼정거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책은 현재 우리 사회의 가치로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공정"를 인식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경제정책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책방안의 핵심은 의미 있는 사회안전망으로 "부의 소득세 (negative income tax)"와 제도 개혁을 위해 "기준국가"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평등과 포용적 경제를 위한 정책으로 제시하는 NIT는 19세 이상 전국민 개인에게 최저소득으로 월 50만원, 18세 이하에게는 월 30만원을 보장하는 것이다. 대신에 1,200만원까지는 소득세율이 50%이고, 그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현행과 유사한 15-45%를 부과한다. 그리고 부양가족에 대한 지원 명분으로 시행하고 있는 다양한 인적공제를 폐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급되고 있는 기초연금, 생계급여, 주거급여, 아동보육 등을 중단한다.

저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NIT 제도 도입에 따라 지급되는 금액은 172.7조원이다. 그러나 공제제도의 폐지로 39.4조원, 근로소득공제 폐지로 36.2조원이 절감되어 순수하게 재원은 97.1조원이 필요하다. 나머지 필요재원을 위해서 NIT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정부지출을 과감하게 줄이거나 폐지하고, 부가가치세를 현행 10%에서 15%로 높이고, 문재인 정부 들어선 이후 높은 증가율을 보였던 지출을 되돌려 127조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련된 127조원은 NIT에 소요되는 97.1조원에 비해 오히려 30조원이 많으므로 정부부채를 상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감한 정책제안이다. 그렇지만 NIT라는 멋진 이름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추가적인 세금이라고 해보았자 역진성이 높은 부가가치세라는 점에서 저소득층이 현재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을 다시 포장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현재 이전지출 지급대상이 아닌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어 저소득층이 수혜받는 몫은 줄어들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저자들은 현재 수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중산층의 자녀와 자산을 많이 보유한 노인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정작 필요한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원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NIT의 핵심 문제는 저자들이 우리 사회의 가치로 제시하는 "평등과 공정"에 합당한가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부자집 아들이 부모에게 매월 용돈 100만원을 받으면 정부는 이에 더해 50만원을 지급해 준다. 그런데 가난한 집 아들이 힘들여 알바를 하여 매월 100만원을 벌면 정부는 소득이 있다면 땡전 한푼 주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는 최저임금 시간당 1만원을 책정하는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벌이고 있는데, 정작 NIT가 도입될 경우 알바를 하여 100만원을 벌면 세금으로 50만원을 내야한다. 과연 이러한 정부 보조금과 세금을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고, 우리 국민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자들이 이러한 역진성을 모르고 있을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들은 다양한 세율 적용을 검토하면서 NIT의 장점을 강조하고 있고 특히 기본소득제도와도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들은 정부에 있으면서 세제에 관한 논의를 오랫동안 담당한 덕분인지 구체적인 사항까지 검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구 기준 대신에 개인을 기준으로 해야하며, 소득에서 예금 등 자산소득을 빼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전 세제 논의에서 보수 언론이 부각했던 부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여기에서도 돋보인다.

다음으로 규제개혁 실행방안으로 "기준국가제 도입"이다. 현재 보수 언론에서 우리 사회는 규제 때문에 기업하기 힘든 국가라고 말해지고 있다. 규제란 대부분 국민의 일부에게는 이익을 다른 일부에게는 손실을 초래하므로 도입과 폐지 모두 어렵다. 또한 논의 과정에서 제도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방법으로 타국의 사례를 살펴보기도 한다. 저자들은 타국의 사례를 단순 참고하지 말고 아애 "기준 국가"를 선정하여 이들 국가의 제도를 가능한 통째로 수입하자는 것이다. 타국으로 저자들은 미국과 스웨덴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개혁 방안이 국회에서 논의되는 과정에서 국민의 갈등만 양산하고 무산되었던 사항이 한둘이 아니다. 이념이 양극화 되어 있어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상대편의 언론과 정파들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들의 실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저자들은 규제란 각국의 역사, 문화, 이념적 배경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규제개혁으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시급한 반면에 입법을 통한 정당한 절차를 밟기에는 정치권의 무능과 포풀리즘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타국의 제도를 수입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모든 제도는 맥락이 있게 마련이다. 스웨덴의 노동법은 국민 일반의 높은 소득수준, 잘 정비된 사회보장제도, 국민들의 높은 도덕성과 연대의식에 기초한다. 강제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약자들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면 법으로 규제할 필요가 없다. 반복되는 산업재해로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데도 높은 수익을 위해 현장의 안전장치 도입을 꺼리는 현실을 무시하고 선직국의 법규를 베끼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들은 미국은 규제가 적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러한지는 궁금하다. 집의 정문의 페이트 색깔, 정원의 나무 관리까지 서로 간섭하고, 바닷가에서 조개 하나 줍는 것도 규제하고 있다. 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어 먹을 수 있는 불판을 설치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의 규제에 관한 견해에서 진짜 문제는 규제 베끼기가 아니다.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은 불안전하다고 해서 피흘려 성취해 온 민주주의를 버려야 하는가이다. 저자들은 초법적인 "규제개혁위원회"를 운영하자고 제안한다. 관리 대상으로 국회의 입법 전체를 다루고, 사법부 대신에 기업과 개인 등 비규제자가 이의를 제기할 경우 심사 시정조치를 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에게는 "국회는 '표'의 계산 없이 생산적으로 결정하기 어려우며, 사법부는 더디고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구조"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신문에서 책에 관한 소개를 읽고서 기대가 높았다. 이유는 정부관료가 썼기 때문은 아니었다. 종전에 정부관료가 쓴 책을 읽고서 실망한 적이 몇번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가 높았던 이유는 저자가 5명이기 때문에 서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성숙하고 이념적 편향은 줄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이디어는 난폭하고 보수 이데올로기는 확고하다. 아마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논의하고 술마셨기 때문에 진정한 토론은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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