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중전의 말대로 그 계집은 아직 어리지요. 채 피어나지도 않은 꽃봉오리니."
권보경이 그 말에 희망을 품고 있는데,
"그래서 꺾어야 하는 것입니다."
권인교가 손가락 사이에 낀 꽃의 꽃대를 툭 꺾어버렸다.
‘피어나기도 전인데 지금도 전하를 이리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만개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중전은 저한테 하나 더 배워야겠습니다.
절망으로 얼룩진 권보경의 얼굴을 보며, 권인교는 꽃대 부러진 꽃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밟고 비볐다.
"꽃 꺾기는 가장 화려하게 피기 전에 하는 거랍니다." - P150

"기생이 왜 기생인지 너는 모른다."
아무리 타일러도, 기어이 깨지기 전까지 자신이 뭘 잘못한줄도 모르는 철부지. 그래도 그것이 제 손에 들어온 이상 어찌어찌 살아갈 구실은 마련해줘야 한다. 그것이 예운관에서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킨 궁기이자 위에 올라선 진향의 책임이고의무였다.
"네 말대로 기생은 거의 모든 것을 가졌다. 천한 출신이면서도 비단 옷을 입고, 양반의 아녀자들도 할 수 없는 보석을 끼고, 선비와 대담(對談)을 나눌 만큼 학식이 풍부하고, 풍류를지."
여인의 몸으로 그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기생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직 어린 것들 중 착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
가장 곱고 화려한 자신들이 가지지 못할 것은 없다고.
"그 많은 것이 왜 기생에게 허락되었겠느냐?"
참으로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기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꽃이기 때문이다."
비단 옷과 장신구를 아무리 걸쳐도 존경받지 못한다. 학식을 아무리 쌓은들 과거시험을 칠 수 없다. 풍류를 읊은들 실제로는 그처럼 살지 못한다. 같은 맥락으로 사내를 흘려도 그사내를 가질 수 없다. 재물을 모은다고 하여도 비단옷이나 장신구를 살 뿐이다.
모든 것이 주어진 것 같으나, 그것을 쥘 수 없는 것이 기생이다. 그렇기에 그 많은 것을 가질 있도록 허락된 것이다. - P185

당신도, 나도 서로의 가슴에 씨앗을 심었구나. 
우리는 서로의 꽃을 피웠구나………. - P271

"그대 기명이 가란이라지?"
"예."
"아름다운 난이라. 분명 청렴하고 재색을 갖춘 그대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짐은 좀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을 하사할 것이니."
이훈은 입가의 장난기를 물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재주 기(伎)‘에 ‘꽃 화(花)‘를 써 기화(伎), 그대는 이미 재주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으며, 생각이 깊고 그 심성꽃다우니 이보다 어울리는 이름이 어디에 있을까!"
기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란은 소름이 쭈뼛 돋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짐이 내리는 그대 이름이니라." - P138

"나는, 아니………."
시선을 다시 하늘에서 사내들에게 내렸다.
"짐은."
묵직하고 무거운 기세가 그들의 어깨뿐 아니라, 산 전체를내리눌렀다.
"이 나라의 하늘이요 어버이니."
이훈은 느꼈다. 비로소 눈앞에 가리고 있던 답답함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는 스스로를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벗은 것이다. 몇 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그는……….
"전하!"
윤재민의 외침을 들은 사내들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들을 보며 이훈은 한조각 웃음을 걸쳤다.
"조선의 왕이니라!"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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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귀 어두운 년, 말 그대로다. 내가 서는 것을 보고 저년은서는 법을 배웠다. 내가 걷는 것을 보고 걷는 것을 배웠다. 내가 뛰라고 하자, 스스로 뛰는 법을 찾았다."
밥할매는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가란에게 흉내 내라면서 그 앞에 시범을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란은,
그것을 귀신같이 해내었다.

"네 눈이 옹이구멍이라고. 그 새파랗게 어린 채홍준사도알아본 재목을 네가 못 알아봤다는 것이야."
이보다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듯 밥할매는 목소리를 키웠다.
"이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네년보다, 그 낯짝 반반하고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사내놈의 안목이 더 높다고!" - P68

"이제 우리 같이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만약 이었다가도재를 뒤집어써서 재가 된다면, 반대로………"
모두가 가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뗄 수 없었다. 재를잔뜩 뒤집어썼는데도, 어찌 저리 백지 위의 먹물처럼 튀는지알 수가 없다.
저리 지저분한 행색을 하고도 어찌 못 알아볼 수 있었을까?
"재가 꽃이 될 수는 없는 겁니까?" - P111

약속이다.
옥패를 꼭 갖고 오겠다 했으니 가란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 않겠는가. 가란은 경합에 열심히 임하고, 밥할매는 부질없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고 있다. 서로 애를 쓰고 있다. 그래야 공평하다. - P140

"너도 많이 기가 죽었구나. 애기기생이었을 때는 세상 남자다 호령할 듯 굴었던 네가 고작 어린 사내에게 어깨를 움츠리다니."
499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반응이지.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먼 것을 바라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더 겁을 먹고 쉬이 움직일 수가 없지."
단양은 작은 상에 약사발을 올려놓고 그것을 매월에게 넘겼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겁쟁이가 되고, 그래서 현명해진단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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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태연한 척 해봤자 너희는 이 시나리오‘에 말려든 일개 ‘하자‘일 뿐이다. 주인공이 죽은 세계에서 자신이 어떻게될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 P97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도 무서울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자주 그렇다. 멸살법을 모두 읽었다 해도 나 역시 평범한 회사원이던 사람이니까. 내색은 안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물론 고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일이기때문이다. 어떤 세계든 마찬가지다. 미노 소프트를 다니던 김독자에게도 멸살법의 세계를 살아가게 된 김독자에게도죽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찾아오리라.
중요한 것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제대로 살아가는 기분이 듭니다." - P216

"만약 작가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예?"
"독자 씨가 이 상황을 만든 작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장보도 보검‘ 같은 내용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글쎄요. 저는 이름 그대로 ‘독자‘라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요."
"전 결국 독자 씨도 똑같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뻔한 클리셰를 쓰고, 독자에게 뻔한 만족을 주는 일에 익숙해질 겁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누가 뭐랍니까? 꼭 작가처럼 말하시네요. 제 말은 클리셰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표절 소리는 안 듣게 쓰라는
"표절이요?"
"네, 표절."
붉으락푸르락하는 한수염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참 재밌다.
"글쎄요. 어차피 다들 비슷한 이야기에 디테일만 조금씩 다그걸 표절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독자 씨도른 건데.
작가 입장이 되면 결국 똑같이
"아뇨. 저라면 다르게 쓸 겁니다."
한수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르게 쓴다고요? 어떻게요?"
"예를 들면, 이렇게요." - P288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당신의 새로운 설화가 생성됩니다.][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탄생했습니다.][성흔의 가능성을 입수했습니다.]내게 다음 회차는 없다.
나는 이 세계에서 이야기의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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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란 사실이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완) - P11

- 독자님, 오늘 오후 7시부터 유료 들어갑니다.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건승을 빕니다.
[첨부 파일 1건] - P28

만약 지금과는 다른 삶이라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내 삶의 장르가 달랐더라면.
"김독·····…."
내 삶의 장르가 ‘리얼리즘‘이 아니라 ‘판타지‘였다면, 나는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모른다.
아마 영영 알 수 없으리라. 다만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괜찮습니다, 유상아 씨."
"네?"
"그앱 알려주셔도 소용없을 거예요." [지금 내 삶의 장르는 명백히 ‘리얼리즘‘이라는 사실.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 장르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라는 사실이었다.
"독자의 삶…………."
유상아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정말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진심으로내가 걱정된 거겠지. 아무래도 인사팀이고・・・・・・ 내 실적이 어떤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독자 씨는 정말 좋은 말씀을 하시네요."
"네?"
"그럼 저에게는 상아의 삶이 있는 거군요."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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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들은 동전 한 닢 달라고 애원하는 법이 없었고, 아이들은 몇 시냐고 묻지 않았으며, 스크루지의 인생을 통틀어 남자든 여자든 이런저런 장소로 가는 길을 알려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맹인의 개조차 스크루지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스크루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면 제 주인을 문간이나 안뜰로 끌어당기고는 꼬리를 흔들었다. 마치
"앞 못 보는 주인님, 사악한 눈을 갖느니 차라리 눈이 없는 편이 나아요!"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크루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인생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인간적인 동정심 따위는 저 멀리 물리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 P14

"진심이고말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니! 대체 무슨 권리로 즐거워하는게냐? 즐거워할 이유라도 있어? 찢어지게 가난한 주제에"
그러자 조카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삼촌은 무슨 권리로 우울해하시는 거예요? 우울해할이유가 있으세요?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자시잖아요."
스크루지는 당장 그럴싸하게 대답할 말이 없어 다시금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허튼소리!"라고 덧붙였다.
"언짢아하지 마세요, 삼촌!"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바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사는데 말이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라니! 빌어먹을 크리스마스라면 모를까! 크리스마스란 게 돈도 없는데 청구서 대금을 지불하는 때가 아니냐? 나이나 한살 더 먹지, 한 시간 전에 없던 돈이 생기기라도 한다더냐? 장부를 결산하려고 보면 일년 열두 달, 적자가 아닌 항목이 없지!"
스크루지는 발끈하며 말을 이었다.
"내 맘 같아서는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주절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바보천치들은 저 먹을 푸딩이랑 같이 푹푹 삶고 심장에 호랑가시나무 가지를 냅다 꽂아서 파묻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도 싸지!" - P16

"인간의 아이들이다. 제 아비를 떠나 나에게 매달리며 애원하고 있다.
남자아이의 이름은 ‘무지‘이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빈곤‘이다. 이 둘을조심하고 이들과 비슷한 것들을 모두 조심하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남자아이를 조심하라. 이마에 쓰인 ‘파멸‘이라는 글자가 내 눈에는 보인다. 이 글자가 지워지지 않는다면, 주의하라! 이것을 거부하라!"
유령은 도시를 향해 팔을 뻗으며 외쳤다.
"너희에게 이렇게 경고해 주는 이들을 욕하고 싶으면 마음껏 욕하라!
당파적인 목적을 위해 무지를 용인하라! 그리하면 곤경에 더더욱 빠져들리라! 그리고 종말이 다가오리라!" - P118

"미래의 유령님! 저는 지금껏 만난 어떤 유령보다도 당신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도움을 주러 오셨다는 걸 알기에, 그리고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유령님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말씀이든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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