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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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흡연하지 않습니다. 그저팔 뿐이지요. 우리는 그 권리를 젊은이, 가난한 사람, 흑인 그리고 멍청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둡니다."-31쪽


  담배회사 알 제이 레이놀드의 광고모델로 활동하던 데이비츠 괴릴츠가 흡연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대해서 사장이 한 답변이다. 담배를 피는 당신은 알 제이 레이놀드 사장이 말한 부류 중에서 어느 부류에 해당되는가? 젊은이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흑인인가? 그것도 아니면 멍청한 사람인가? 당신에게 담배를 팔면서도 담배회사 사장은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라는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담배를 팔기 위해서 담배회사들이 펼치는 사악한 저주가 묻어있는 판촉행위를 소개한다. 저소득층 여성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푸드 스탬프에 한갑당 25센트 할인 쿠폰을 제공한다. 그녀들에게 자신은 돈을 절약하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담배 판촉을 늘리려는 속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치로 나타났다. 최저 소득 위에 있는 여성보다 저소득층 여성이 1.72배 높은 흡연율을 기록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하루 하루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사회적 약자들에게 발암물질을 팔기 위해서 최소한의 양심마져 던져버린다. 

  그들의 사악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담배의 유해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지만,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 '연기 없는 세상'이라는 슬로건을 들으면 당신은 무엇이 상상되는가? 금연 운동 슬로건이 아니다. 연기나는 연초담배 연기 없는 전자담배를 피우자는 슬로건이다. 2017년 필립 모리스는 '연기 없는 세상' 재단을 만들고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자한다. 담배회사가 막대한 자금력으로 과학자들을 어떻게 섭외하는지 날카롭게 비판하던 데렉 야크를 재단 이사장에 앉혔다. 전자 담배가 연초담배보다 덜 해롭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자담배는 연초담배보다 덜 해롭다는 주장을 하며 전자담배 판매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지식을 생산하며 대중을 멍청한 사람으로 남겨두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질서를 내면화합니다. 그 사회의 권력을 가진 이들이 아름답다고 뛰어나다고 규정하는 것들을 그 사회 전체의 표준이 되곤합니다."-174쪽

  

  사회적 약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있다. 오히려 지식권력자들이 생산한 질서를 내면화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가 아닌데도 이토 히로부미를 탁월한 인재라 칭찬하는 친일적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하는 정치인이 있는 것도,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 사는 노동자들이 진보 정당을 빨갱이라고 욕하며 보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스스로의 지식을 생산할 지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돈에 혈안이 되어 지식권력을 장악한 그들에게 우리들은 어떻게 저항해야할까? 담배는 해롭다는 진리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그들을 멍청하다고 말해야할까? 담배회사에 유리한 근거를 들이대며 담배를 끊는 것이 스트레스를 증가시켜 오히려 몸에 해롭다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해야만 할까? 이에 대한 이해를 김승섭 교수가 흑사병이 유행할 당시의 어리석은 유럽인의 행태를 설명하는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잘못된 광신도들은 조롱하기란 쉬운 일이다. (중략) 그러나 이들은 비난하기에 앞서 이 고행단들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공포를 기억해야만 한다."-220쪽

  

  거대한 재앙 앞에 나약한 도시민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비난은 쉽지만 대처는 힘들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야하는 가난한 노동자에게 가장 값싼 휴식을 제공하는 것은 한까치의 담배일 수 있다. 사회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담배회사의 사악한 판촉을 막을 수 없다. 

  그럼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김승섭 교수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누군가는 사회적 약자에게 측은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한 지식,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지식을 생산해야한다. 그러한 지식을 생산해야만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동력이 만들어진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자신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구 조사를 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리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 김승섭 교수의 연구와 조사, 글쓰기가 단번에 우리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물방울이 모여서 큰강을 이루듯이, 김승섭 교수가 생산한 지식이 우리 사회를 바로보는 안경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땅의 많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함께 노력하여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 것이다. 물론, 지식권력을 가진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힘든 그 싸움이 외롭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는 깨어있는 동료 시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ps. 김승섭 교수의 의견을 대부분 존중한다. 그러나 다음의 글에는 동의할 수 없다. 


   "OECD 국가 중 다른 인종에게 가장 적대적인 한국인들이 한국사회의 인종차별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가해 행위가 문제로 인지되지 않을 만큼 한국사회에 인종차별이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177쪽


  우리사회는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일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유튜브 'Q언니'에서 세계를 두르두르 다녀본 Q언니는 유럽 거리에서 백인남성에게 얼굴에 침을 맞았다. 그때 그녀는 무서워서 반항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묻지마 폭행을 당하며 "고홈 옐로우 멍키" 소리를 들어야하는 우리들이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을까? 영국의 경우 유색인종이 거주지에서 경찰에 범죄 신고를 해도 그들은 출동조차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보다 더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있는가? 겉으로는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척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종차별의 본모습을 숨기고 있는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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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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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회사는 죽음을 판다
우리는 흡연하지 않습니다. 그저 팔 뿐이지요. 우리는 그 권리를 젊은이, 가난한 사람, 흑인 그리고 멍청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둡니다.(Wedon‘t smoke the sh--, we just sell it.... We reserve that ‘right‘ for theyoung, the poor, the black and the stupid.)‘ - P31

(스에덴 기자 아손의 기록,1905.1.1)
8시였다. 5분 후에는 기차가 출발할 예정이었다. 플랫폼은 이 대사건을 구경하러 나온 코레아인들로 온통 흰색 일색이었다. 그들 대부분은처음 역에 나온 것이고, 따라서 기관차도 처음 보는 것이다. 기관차의역학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바가 없는 그들이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 - P72

날지 몰라 대단히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 마술차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기 위해 접근할 때는 무리를 지어 행동했다. 여차하면 도망칠 자세를취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밀고 당기고 하였다. 그들 중 가장 용기 있는사나이가 큰 바퀴 중 하나에 손가락을 대자, 주위 사람들은 감탄사를연발하면서 그 용기 있는 사나이를 우러러보았다.
그러나 기관사가 장난삼아 환기통으로 연기를 뿜어내자 도망가느라고 대소동이 일어났다. 나는 객실 창가에서 이 소동을 지켜보았다. 참흥미진진했다. 가장 웃음이 나오는 것은 키가 난쟁이처럼 조그마한 일본인 역원들이 얼마나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코레아인들을 다루는가를 지켜보는 일이었다. 기관차가 마침내 기적을 울리고 천천히달리기 시작하자 주위의 일본 사람들은 우렁차게 ‘반자이‘(만세)를 외친 반면, 이 열차를 타고 갈 예정이었으나 플랫폼에서 지체된 코레아사람들은 기차를 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또 한 차례의 회초리 세례를 받아 결과적으로 기차와 더 떨어질 뿐이었다. 장면장면이 우스꽝스러움을 더해갔다. 부산역의 이 북새통에서 내가 마지막 본 장면은, 그 무리들 중에서 제일 왜소한 일본인이 키 크고 떡 벌어진한 코레아 사람의 멱살을 거머쥐고 흔들면서 발로 차고 때리다가내동댕이치자, 곤두박질을 당한 그 큰 덩치의 코레아 사람이 땅에 누워 몰매 맞은 어린애처럼 징징 우는 모습이었다.
-아손그렙스트,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 P73

대동아공영권에는 일본인 외에 지나·인도지나 · 적도제도·호주·남태평양에 걸쳐 수백 종 혹은 그 이상의 다수 인종이 존재하며, 각 인종에는 각각의 장점이 있다. 이들 인종은 서로 관련하여 일환環을 이루어그 특장特長으로서 타 인종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그럼으로써 공존공영의 결실을 거두어야한다. - P77

우리는 "제도가 사람을 모욕할 때" 그것을 모욕이라고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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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배기성 지음 / 왕의서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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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에서 배기성의 동영상이 추천 되었지만 나는 클릭하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학자들의 역사 강좌만 듣고 싶었다. 그런데, 팟캐스트 '매불쑈'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다. 피맷힌 목소리에 울분을 쏟아내는 그의 강의를 들으며 그에게 빠져들었다. 

  '역사 독립군'!! 그에게 보내는 찬사는 그치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매불쑈'에 나오지 않자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왜? 갑자기 출연을 하지 않는 것일까? 다시 돌아온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파리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책을 쓰다가 쓰러진 것이다. 이 사회를 위해서, 건전한 역사 의식을 시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그는 더 살아야한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책을 읽어줄 것과, 자신의 팟캐스트를 구독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래, 그의 책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결심했다.

  그의 책은 '매불쇼'를 열심히 들은 독자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 좀 길이가 길다 싶으면 2부로 나누어서 서술했다. 독자에 대한 배려인듯 싶다. 

  배기성의 책을 다 읽고 그의 책을 내려 놓았다. 책을 읽는 동안 '매불쇼'에서 열강하던 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매불쇼'를 떠올리며 그의 강의에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가볍지만, 그가 말한 역사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친일파가 승리하고, 독재자가 찬양받는 현실 속에서 역사 독립군 배기성의 책은 가볍지만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의 책이 가볍게 느껴지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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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2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2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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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가 자신의 전공으로 돌아왔다. '장자'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다시 대중앞에 섰다. '강신주의 장자수업 1,2'는 그가 탐구한 장자에 대한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10여년전, 나는 강신주가 쓴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라는 책을 읽었다. '강신주의 장자수업'을 읽으며 10여년 전의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와 달라진 강신주의 생각을 떠올렸다. 강신주! 그는 어떤 성숙한 모습으로 장자를 다시 초대했을까?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라는 부제가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20여년전,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을 쓸 때는 세상과 맞서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강신주가, 이제는 쇠약해져서 세상으로부터 밀쳐진 이들을 위한 찬가를 부르고 있다. 피튀기는 경쟁 사회에서 탈출하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강신주가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것은 유목민의 삶이다. 정착민 vs 유목민의 삶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장자를 유목민적 사유를 가진 책으로 소개한다. 정착민을 대표하는 사상가 공자, 유목민의 대표 사상가 장자의 대립구도 속에서 강신주는 장자의 글을 빌어서 공자를 비판한다. 지배자의 논리를 대변하는 공자를 비판하며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삶을 찬양한다. 아마도, 경쟁에서 승리하라 강요하는 현대사회에서 밀쳐진 현대인들에게 강신주는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떠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라는 책에서 강신주가 말했던 강조점이 달랐다. '수영이야기' 즉, 46번째 주제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라는 글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서는 차이를 뛰어 넘어 소통과 자유의 연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소재였다. 

 

  "섯부르게 나의 '성심'으로 나의 '아비투스'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하기보다는 나의 생각을 판단중지하고 망의 단계에 접어들어야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유영의 단계에 접어들어야한다. 거친 물결에 자신의 몸을 맞기듯이, 행글라이드에 몸을 싣고 세찬바람에 자신의 몸을 맡기듯이 우리는 차이에 자신을 싣고 포월해야한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 자유로운 연대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야한다."-'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서평에서...


  그러나, '강신주의 장자수업'에서 '수영 이야기'는 '소통과 자유의 연대'를 말하는 소재로 쓰이기 보다는 유목민적 삶의 태도와 정착민적 삶의 태도를 극명히 대비시키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장자'의 같은 우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강신주가 현대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달라졌다. 이제는 자유인으로 유목민처럼 떠나라고 말한다. 강신주는 우리가 자유인이 되길 권한다. 

  '에태타'는 대단한 추남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 그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추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외모마져도 자신을 상품성을 돋보이는 도구로 사용한다. 수많은 성형외과 수술이 이어지고, 어떻게든 예쁘고 젊게 보이고 싶어한다. 세계 언론이 50대 여성이 20대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며 한국의 한여성이 받은 성형수술을 심도 있게 소개한 기사가 있다. 그러나, 그 성형수술의 주인공인 K 여사를 자유인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신주에게는 그녀보다 에태타가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다.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며 많은 값으로 팔려나가길 바라는 우리에게 강신주는 자유로운 에태타가 되라 말하고 있다. 피튀기며 밀쳐지지 않으려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지 말고, 자유로운 그곳으로 떠나라 말한다. 


  "없음은 아직 마주하지 않은 다자들의 있음으로, 삶은 마주침이 지속되는 다자들의 있음으로, 그리고 죽음은 마주침이 와해된 다자들의 있음으로 긍정했던 것입니다." -76쪽


  강신주는 '장자'의 입을 빌어 죽음까지 포월하라 말한다. 자유롭게 떠나라! 심지어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이 삶을 긍정하며, 죽음도 긍정하는 평온한 자유를 만끽하라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있고 없음을 고뇌하기 보다는 내가 없음에도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예찬하자. 이 세상을 마음껏 여행한 유목민이 미련없이 떠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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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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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는 브렉시트가 단행되었고, 미국은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세계가 혼돈의 회오리 속에 빨려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현실이 변해야한다. 그러나 불길을 피해 살기 위해서 찾아든 곳은 물이있는 비좁은 화장실이었다. 탈출구를 찾아 헤메지만 좁은 터널을 달리듯이 탈출구는 멀기만할뿐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이라는 만능키를 가지기 위해서 옆을 볼 수 없는 경주마처럼 달리는 우리에게 그것이 착각임을 자각하게한다. 'The Tyranny of Merit', 능력의 폭정이라는 원제목처럼 능력이라는 만능키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능력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탈출구는 존재할까?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탈출구는 혹시 폐쇄된 화장실이아닐까?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행해지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이유를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진단한다.


  "수십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행된데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41쪽


 그렇다. 미국사회에서 좌측에서는 버니센더스 열풍이 불었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분노의 물결이 미국을 휩쓸며 신자유주의의 성지인 미국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물결이 도도하게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우측에서는 트럼프가 노동자의 언어를 사용하며 기존 미디어의 문법을 벗어난 선거를 했다. 인종차별, 여성혐오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좌측의 변화 물결은 민주당 당내 경선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힐러리와 트럼프와의 대결에서 기성 미디어들은 힐러리의 당선을 외쳤지만, 현실은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다. 변화를 수용한 공화당은 승리했고, 혁명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 민주당은 패배했다. 

  많은 언론에서 트럼프의 승리를 어리석은 썬밸트의 레드넥(백인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보도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백인 노동자들은 트럼프에 열광하는 것일까? 버클리 캘리포니아 국립대학 사회학과 교수 엘리 러셀 혹실드는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우수은 이야기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들도 이방이었다. 인디언이라 불리는 미국의 토착민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갖혀서 레디메이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고 자신의 땅에 내쫓겨서 폐인처럼 살도록 한자가 누구였던가? 지금, 수많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서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리고 백인 노동자를 '자기 땅의 이방인'으로 내몰고 있다. 

  백인 노동자들은 어쩌다가 자기 땅의 이방인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의 폭정 때문이라 주장한다.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진학하기 위해서 엘리트 가정은 지옥같은 교육을 시킨다. 우리와 다른점이 있다면, 미국은 엘리트층이 입시지옥을 겪는다면, 우리는 거의 모든 가정이 입시지옥을 겪고 있다는 차이만이 존재한다. 

  기부금입학, 운동 특기생 전형, 동문 특혜 등등의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엘리트들은 자녀들의 명문대 입학을 이룬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게 엘리트 사회의 부를 세습한다. 엘리트 카르텔은 너무도 견고했다. 2008년 대선 유세에서 버락 오바마는 경영자나 기술관료의 언어에서 벗어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써브프라임 금융위기 속에서 그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엘리트들의 제안을 수용했다. 월가에서는 정부로부터 받은 구제금으로 금융엘리트들에게 보너스를 주어 공분을 사기도했다. 

  어떤이는 말한다. 엘리트들이기 때문에 현대와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그러나, 엘리트들에게 가장 현명한 결정은 사회적 약자에게 이로운 결정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적 부와 명예를 세습할 수 있는 결정이다. 그러한 예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하게 보이지 않는가! 

  능력에 따라 지위와 부를 분배해야한다는 소위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의 주장에 대해서 100% 공감할 수는 없다. 

  첫째, 모든 재능은 평등한 가치를 가지는가? 노력에 비례해서 같은 대우를 받아야하는가?  마이클 샌델은 모든 재능은 같은 가치를 가지며, 노력에 비례해서 같은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버린 사람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 52쪽


  재능 중에서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재능이 있고, 필요치 않은 재능이 있다. 물론, 농구 재능처럼 고대 사회에서는 별로 필요치 않은 재능이었으나, 현대에는 유용한 재능이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모든 재능에 사회가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으로 사회에서 요구하지 않는 재능에게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재능과 같은 대우를 해준다는 것은 무리한 이상일 뿐이다.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은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을 자신의 여가 생활에 사용하면서 만족하면 될뿐이다. 

  노력을 했다고 해서 그에 비례해서 대우를 해줘야할까?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라는 말을 많이한다. 열심히 책상 위에 앉아서 서류를 만지작 거리지만, 실제로 만들어내는 보고서는 형편없는 사람과 단시간내에 탁월한 보고서를 완성하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보이는 사람중에서 누가 좋은 대우를 받아야할까? 노력은 아름답지만 댓가는 노력에 비래하지 않는다. 

 둘째, 대학 합격자를 제비뽑기로 뽑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인가? 마이클 샌델은 명문대 학위가 사회적 경제적 지위 상승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들어서 대학 합격자를 제비뽑기로 뽑자고 제안한다. 대학에 입학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1차로 선정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제비를 뽑자는 제안이다. 그렇게 된다면 대학 학격자는 오만에서 벗어나 겸손해질 것이며, 불합격한자는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운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그럴까?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영혼까지 끌어 모아 스펙을 채우고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경험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을까? "능력주의적 오만"에 바람을 뺄 수 있을까? 한국의 현실에 적용시킨다면 장수생들을 배출하는 최악의 입시제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학 간판이 사회적 성공을 보장해주는 한국 사회에서 제비 뽑기에서 탈락한 학생은 자신이 운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다음해에 다시 도전할 것이 분명하다. 사법고시에 인생을 바치다가 끝내는 폐인이 되는 사례처럼, 명문대 입시 폐인이 늘어만 갈 것이다. 대학 입시 횟수 제한을 둔다면 이 또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사회적 분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서울대를 포함한 모든 국립대를 통폐합하여 하나의 대학으로 만드는 방법이 가장 현실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 그는 철학자일뿐 행정가는 아니다. 그의 제안은 능력주의의 폭정에서 벗어날 방안을 찾아보라는 화두를 던졌다는것에 의미를 두어야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저출산의 위기에 봉착했다. 국가 소멸의 위기로 치닫는 이유중에는 자신이 겪었던 입시지옥, 취업지옥을 자녀들에게 대물림 시키고 싶지 않아서라는 입장도 있다. 능력주의의 폭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소멸의 위기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극우의 물결이 불어닥치는 위기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그 위험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 물결을 헤처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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